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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쇠 금/성 김 
전국 23,000명의 응모자들 중 1,366명(5.9%)이 '金'을 올해의 한자로 선정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이유중 하나로 꼽았다. 이와 함께 시드니올림픽에서 일본선수들이 딴 금메달, 금융파탄, 새로운 500엔짜리 동전과 2000엔짜리 지폐의 등장 등을 선정이유로 들었다. 2000년의 500엔 주화 변경은 구 오백엔 주화가 거의 1/10 가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오백원 주화와 모양이 비슷해 자판기에 악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위에서 5위는 亂(란), 新(신), 噴(분), 災(재)이 뽑혔다.  

 

사실 남북 정상회담은 김영삼 전대통령 재임시절인 1994년에 거의 성사단계 직전까지 갔으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기연기 되었다. 아무래도 아들보다야 아비가 먼저고 그 무게나 인물로 볼 때도 김일성과 김정일은 분명 차이가 있는데 그건 YS의 복이고 어쨌든 전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주인공 자리는 DJ가 차지했다. 이면에 어떤 거래가 있었던 간에 어쨌든 두 정상의 만남 자체는 대단히 상징적이고 중대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뿐만아니라 일본에게도 말이다.   

 

화산 분화로 '분', '재' 등이 수위에 오른 것 같다. 3월 31일 홋카이도의 우수산이 분화했다. 지금도 화구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며 당시의 지각변동으로 융기된 도로와 붕괴된 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7월 8일에는 미야케지마(삼택도) 화산이 17년만에 분화하였다. 그 후 분화가 멈추지 않아 9월에는 섬주민 3800명을 섬 밖으로 대피시켰다. 2005년 1월에야 대피령이 공식해제되어 절반 정도가 귀도했다고 한다.  

 

2000년에 일본인으로서는 9번째로 시라카와 히데키 교수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우리도 2000년에 노벨상 하나 건졌다. 평화상이긴 하지만. 어쨌든 화학보다야 세계평화가 훨 중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시라카와 교수는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을 만든 장본인으로 연구의 획기적 발견은 촉매의 농도를 잘못 맞춘 실수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연구자로서는 드물게 매일 6시에 퇴근하고 주말은 거의 가족과 함께 보냈으며 아내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고 한다. 선인장 애호가로 집에 100여그루 이상의 선인장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우리 엄마도 선인장을 무척 좋아 하셨는데 아버지는 볼품없는 선인장을 키운다고 불평하셨다. 가끔 화분을 옮기다가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왠지 선인장을 키우는 사람의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고 메마를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던 듯하다.) 미국의 앨런 히거, 앨런 맥더미드와 3인 공동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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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끝 말
20,430명의 응모자 중 1,077명(5.3%)이 올해의 한자로 ‘말(末)’을 선택했다. 선정 사유로는 도카이무라(동해촌) 핵사고, 무차별 살인사건, 경찰 오직 사건, 잇따른 신칸센 안전사고 등 세기말 적 현상을 상징하는 사건이 빈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2위는 亂(란) 3위는 核(핵) 4위는 崩(붕)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시에 나오는 “1999년 7월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고 앙골무아 대왕이 부활하리니...어쩌고 저쩌고” 하는 구절을 지구와 혜성과의 충돌을 예언한 것으로 여겨 1999년에 이 세상이 절단나고야 말 것이라고 혹세무민하는 참언들이 횡횡하기도 했다. 1999년이 별일 없이 지나자 다시 2012년 종말론이 고개를 들었다. 이 신종 종말론은 마야달력으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마야 달력은 기원전 3114년에 시작해 기원후 2012년에 끝난다는 것이다. 모든 세대에 걸쳐 종말론은 항상 존재해 왔다. 우리가 사용하는 십진법상 9는 꽉 찬 숫자이고 그 다음은 무라고 할 수 있는 0이니 9가 세 개나 겹치는 1999에 종말론 이야기가 안 나오면 섭섭한 것이다. 복날에는 개고기나 닭고기를 먹어줘야 섭섭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복날 개나 닭을 먹지 않는 다고 여름 못넘기고 돌연 돌아가시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왠지 먹어줘야 할 것 같다는 말이다.  

 

Y2K 예방을 위해 각국이 수천억을 지출하는 등 세기말에 대한 불안과 공포도 있었지만 밀레니엄 새천년에 거는 기대와 희망도 무슨 찐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유럽연합의 단일통화인 유로가 화려하게 출범했으며 미국의 다우존스지수는 103년만에 처음으로 10000을 돌파했다. 반면 나토의 보스코 공습으로 1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터기강진, 중남미 홍수로 수만명이 죽기도 했다. 어쩌면 1999는 숫자적 의미밖에 없었다.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백 수천번의 한해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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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o 2018-01-2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중 가장 유명한게 1999년 7월 예언인데 다들 당시 지구 멸망이 없으니 틀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7월 당시 인류사회에서 가장 큰 사건은 지구 멸망이 아닌 파룬궁 탄압이었죠. 그의 예언을 분석하면 1억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의 공포스러운 탄압으로 보는게 가장 정확합니다.

“1999년 7월,
앙골모아(Angolmois) 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
그때를 전후로 해서 마르스(Mars)가 천하를 통치하는데
사람들이 행복한 생활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앙골모아‘는 위대한 왕이라는 뜻인데 불교에서 말하는 위대한 왕은 ‘전륜성왕‘을 의미합니다.(파룬궁의 파룬(法輪)은 ‘법륜‘이며 ‘전륜‘은 ‘법륜을 돌리다‘라는 뜻입니다)

‘마르스‘는 중국 공산당이 추종하는 ‘마르크스‘를 의미합니다. ‘공포의 대왕‘은 공산당을 조종하는 세력으로 실제로 100가지 고문, 장기적출, 인체의 신비전 등 공포적인 방법으로 파룬궁 수련자를 탄압합니다.

‘사람들이 행복한 생활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서‘ 마르크스는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공산주의를 만들지만 거기서 탄생된 공산당은 사실 인류의 행복이 아닌 독재와 살인 등 공포의 산물이었죠.

따라서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7월 예언은 빗나간 게 아니라 너무 정확히 맞춘 겁니다. 그는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고 했지 전혀 지구가 멸망한다고 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그의 말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것이지요.
 

 

1998년   
독 독
1998년 7월 와카야마시의 여름 축제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은 주민 67명이 독성이 강한 비소중독 증상을 보였으며, 이 가운데 어린이를 포함해 4명이 숨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 체포된 47살의 주부 하야시 마스미는 살인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는데 11년이 지난 2009년 4월에야 일본 최고재판소는 사형을 선고했다.  

 

판결에서 최고재판소는 카레라이스에서 검출된 비소와 성분 특성이 같은 비소가 피고인의 자택에서 발견되었고 피고만이 카레를 만드는 냄비에 비소를 투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며, 뚜껑을 열었다 닫는 등의 수상한 움직임이 목격된 점 등을 종합하면 하야시 피고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피해자와 유족이 바라는 동기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하야시 피고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하야시 마스마는 변호인을 통해 공개한 메시지에서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의 범죄학자인 브라이언 마리너가 쓴《독살의 기록》을 보면 비소는 금속계 독극물로 계관석이라는 광석 표면에 자연발생한다고 한다. 역사가 오래되어 8세기에 중동의 연금술사가 이 광석에서 비소산화물 채취방법을 발견했고 이후 비소는 살인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독극물이 되었다. 독극물로 비소가 가장 많이 사용된 이유는 구하기가 쉬울 뿐 아니라 하얗고 냄새가 없는데다 맛도 거의 없어(달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밀가루나 설탕 또는 음료에 섞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비소는 유리공예나 염색 벽지용 인쇄잉크 제조에도 널리 사용되었는데 나폴레옹의 시체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된 것은 그 이전 황제가 유배된 세인트 헬레나 섬의 숙소의 초록벽지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벽지에 포함된 비소는 알신 가스로 서서히 방출되어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던 황제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전에 신문을 보니 스위스 어떤 연구팀은 나폴레옹이 사망전까지 20년간 입었던 바지 열두 벌을 비교해 체중 변화를 추정하고 이를 남성 위암 환자 270명의 체중 변화와 비교한 결과 두 수치가 정확히 일치한다며 독살설을 일축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나폴레옹의 사인은 아직까지 논란중이지만 청나라 황제 광서제의 사인은 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2008년 11월 2일자 홍콩 문회보의 보도에 따르면 청나라 말기 비운의 황제 광서제가 비소에 의한 독살로 숨졌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한다. 광서제는 1875년 4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지만 이모인 서태후가 오랜기간 수렴청정으로 실권을 장악하여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 1898년 강유위 등의 개혁파와 무술변법을 단행했으나 원세개 등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서태후에 의해 10여년간 유폐되었다가 1908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바로 다음날 서태후도 74세를 일기로 숨졌다.  

 

문회보에 따르면 광서제의 사인과 관련하여 ‘서태후가 자신이 광서제가 권력을 잡는 것을 원치않아 사람을 보내 광서제를 독살했다’. 고도 하고 또 어떤이는 ‘무술년 변법 때 위안스카이가 광서제를 배반했는데 서태후 사후에 광서제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환관을 시켜 독살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광서제는 신체가 허약하여 병사했다’고 하는 등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0년대에 중국 국가문물국이 도굴된 채 방치된 유물들을 정리하다가 광서제의 관과 유해를 찾아냈고 이후 모발과 유해에 대하여 5년간에 걸친 고도의 과학실험과 과학적 계산의 결과 광서제가 체내에 흡수한 비소의 총량은 치사량에 이르렀음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직전 황제 고종의 죽음에도 비소 독살설이 파다하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전의가 홍차에 비소를 넣어 고종에게 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서제와 같이 명쾌한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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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넘어질  도
13,000여명으로부터 응모를 받은 결과 응모자의 10%가 올해의 한자로 ‘도(倒)’를 꼽았다. 그 이유는 물론 기업과 금융기관의 잇단 도산이다. 경기불황에 금융불안까지 겹쳐 야마이치-산요증권, 홋카이도 다쿠쇼쿠은행 등의 대형금융기관과 건설-운수-부동산 관련업체가 줄줄이 쓰러졌다. 중학생에 의한 연쇄살인 사건 등 일본사회가 정신적으로 도산했다는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해당되는 한자다. 재벌불패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어졌다. 1월에 도산한 한보그룹을 포함 기아, 한라, 삼미, 진로, 해태, 뉴코아 등 30대 재벌기업중 6개 그룹이 도산했다. 한보 부도로 시작된 경제 대란이 전례 없는 기업 부도와 금융 위기 끝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신청, 즉 사실상의 국가 부도로 이어지고 말았다. 종합 주가지수는 3백선까지 떨어졌고 환율은 달러당 2천 원대를 돌파하기까지 했다. 아시아의 용이 지렁이로 변했다.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비슷한 의미의 한자 파(破)가 2위에 올랐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넘어지고 쓰러지고 깨어진 한해였다.   

 

1997년은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이타미 주조가 자살한 해이다. 이타미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아내의 오빠이며(처남이란 말이다. ), 오에의 오랜 친구이자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빌딩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오에는 이를 소재로 소설《체인지링》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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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밥  식  

오사카 교외 사카이 지역의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집단 식중독 사태'가 발생했다. 식중독의 원인은 병원성 대장균인 O-157균으로 주로 장출혈 설사, 복통 등 식중독 증상을 일으킨다.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무려 9,500여 명의 초등학생이 식중독을 일으키고 10여명이 숨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학교급식은 완전 탈바꿈되어 급식의 질이 수업의 질을 넘어선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일본 학교급식에는 두가지 원칙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냉동식품 불가이고 다른 하나는 당일 조리의 원칙이다. 

O-157은 1982년 미국에서 햄버거에 의한 식중독 사건으로 처음 학계에 보고되었다. 안과의사 출신인 로빈쿡은 이 사건을 소재로 의학 추리소설 《독, O-157》을 쓰기도 했다. 이 소설은 전형적 미국 음식인 햄버거에 들어가는 쇠고기를 O-157균의 감염 매개체로 설정하고, 균에 감염된 한 아이의 죽음을 중심으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있는 쇠고기 업계와 이윤추구에만 급급한 병원의 비합리적 경영 현실을 파헤치면서, O-157균이 어쩌면 인간의 방만과 부주의로 생겨난 재앙일지 모른다는 경고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고 <알라딘>에 소개되어 있다. 한국인은 유난히 O-157균이나 이질균에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당시 O-157균이 전국적으로 퍼졌을 때에도 제일교포가 감염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김치, 마늘, 고추 등 매운 음식에 든 항균성분이 살균작용을 한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가설이다.  

3월에는 영국에서 소의 광우병이 인간에게 전염된 것으로 보이는 사례가 전해지며 시작된 광우병 파동은 영국산 쇠고기의 최대수입지역인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유럽연합(EU)은 영국산 쇠고기 수입금지조치를 취한 뒤 영국에 대해 소의 대량도살을 요구, 영국과 외교마찰을 빚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은 7월부터 조어도(釣魚島·일본명 센카쿠열도) 영유권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일본 우익단체가 현지에 새 등대를 설치함으로써 불붙은 이 분쟁은 대만, 홍콩, 마카오도 가세했다.  

페루의 좌익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MRTA)소속 무장 게릴라들이 12월17일 리마주재 일본대사관에 난입, 이원영 한국대사 등 각국 외교관과 페루 정치인 기업가 등 400여명을 억류하고 인질극을 벌였다. 게릴라들은 후지모리 대통령의 좌익게릴라에 대한 강경책에 항의, 투옥된 조직원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인질극은 126일을 끌어오다가 1997년 4월 22일 페루 특수부대원들의 기습작전으로 인질범 14명은 모두 사살되고 남아있던 인질 72명은 1명을 제외하고 모두 구출됐다. 일부 인질들의 증언에 따르면 상황이 그렇게 살벌하지는 않았을 뿐만아니라, 인질범들의 교육수준이 상당해서 법률과 요리 등 다양한 주제로 자주 토론을 벌이기도 했으며 인질범들이 인질의 교양에 점차 동화되더니 가족과의 편지교환, 미식의식 등도 허용했다고 한다. 여기서 인질이 인질범의 상태에 동화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대칭되는 용어로 ‘리마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거사를 도모함에 있어서는 역시 인정(人情)을 허용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물론 인질극이 성공해서도 안되겠고, 인질극이 성공한 사례도 극히 드물지만 어쨌든 자신의 신념하에(그 신념이라는 것이 올바르고 올바르지 못하고를 떠나서 말이다) 목숨을 걸고 거사를 감행한 인질범의 입장에서 보자면 리마 인질극이 실패한 이유는 바로 리마증후군 때문일 것이다. 인질들에 동화된 인질범들이 인질들의 여러 요구를 들어주게 되고 인질의 요청으로 들어온 보온병 등에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사관 내부사정을 훤히 파악한 진압군이 방심하고 해이해진 인질범들을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덕분에 인질극 진압을 진두지휘했던 페루 대통령 후지모리는 ‘강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3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후지모리 역시 숱한 부정을 저지르면서 장기집권을 도모하다가 결국 실각했다. 집권 10년만이었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2000년 일본으로 도주하여 일본에서 5년간 도피생활을 하다가 2005년에 페루를 들어가기 위해 칠레 입국을 시도하다가 칠레 경찰에 체포되었다. 2009년에 페루 특별재판부는 인권침해 등의 혐의로 그에게 2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인생사 새옹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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