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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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처분이나 치료대상으로 보는 심신미약이라는 것의 최소 기준.

자유의지, 원인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행위

 

 

p.292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거든요. ... 쉽게 말하자면, 술에 취하면 비슷한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은 것을 뻔히 알면서 술을 먹고 만취하여 결국 사고를 친 경우에는 심신미약 감경을 할 수 없다는 얘기죠. 형법 제10조 3항이 그렇게 정하고 있어요. 나중에 저지른 짓은 정상적인 판단 능력하에서 한 것이라 보기 어렵더라도, 자신을 그런 상태로 만든 원인 행위 자체는 자유의지로 행한 것이니 책임지라는 거죠.

p. 305
나쁘고 추한 사람은 없다. 나쁘고 추한 상황이 있을 뿐.
‘자유의지’
범죄와 형벌의 본질에 관한 구파(고전학파)와 신파(근대학파) 형법이론의 대립.
구파는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 존재로 보는 계몽주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가장 순수한 형태가 칸트의 입장이다. 도덕적으로 행동할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선택한 자, 다시 말하면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에 위반한 자이기 때문에 형사책임을 지우는 것이고(도의적 책임론),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그 비도덕적 선택에 대한 응보(응보형주의)다. 칸트는 일벌백계라는 공리주의적 목적조차 반대한다. 인간은 언제나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지 타인이나 사회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구파의 관점에 의하면 스스로 도덕적인 선택을 할 판단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형사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그래서 형법은 ‘14세 되지 아니한 자’와 ‘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를 처벌하지 않는다.

술에 만취하여 일시적이나마 판단 능력, 의사결정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상태에 놓인 경우 처벌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할 수밖에 없다. 다만 취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를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 후 결국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원인에 있어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조각에라도 ‘자유의지’가 있어야 책임을 지운다. 자유에는 정말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발달로 사회 문제가 심화되고 범죄가 증가하자 신파 형법 이론이 등장했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인간을 보다 실증적으로 바라보려는 입장이다. 인간의 자유 의사는 환상에 불과하고(결정론), 범죄는 행위자의 소질과 환경에 따라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므로 범죄자에게 도덕적 비난을 가하는 것은 난센스에 불과하다고 본다. 범죄자의 사회적 위험성 때문에 형사책임을 지우는 것이고(사회적 책임론) 형벌은 범죄로부터 사회를 방위하기 위한 수단이다(목적형주의).

따라서 정신질환자나 형사미성년자 같은 책임무능력자라 하더라도 사회적 위험성이 있다면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보안처분을 해야 하고, 실제 저지른 범죄가 아직 무겁지 않더라도 장래 큰 범죄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다면 중형에 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파의 입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보완하고 있지만 어느 나라든 기본적으로 구파의 입장이 지금까지도 형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뇌 속에서 ‘자유의지’가 차지할 공간을 자꾸만 협소하게 만들어가고, 유전자 염기서열, 뇌내 화학물질의 분비, 진화심리학적 적응 등을 대신 그 자리에 채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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