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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베이비 - 제2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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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이 시작되는 앞부분은 아주 강렬하다. 책을 소개하는 다른 매체나 글에서도 이 부분만큼은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을 만큼. 책을 다 읽고 나면, 전체 주제와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

아빠는 나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렸다.

돈을 얼마나 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갚지 않은 건 확실하다. 열 살이 넘어서도 난 전당포에 있었으니까. 보육원이 아니라 전당포에 아이를 맡긴 아빠나 덜컥 아이를 맡은 전당포나 흠, 긴말은 하지 않겠다. 하면 할수록 상상을 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길. 버림받은 아이의 이야기라고 우울하게 시작하진 않는다는 것. (...)

전당포에 시계를 맡기면 값이 떨어지기 전에 팔고, 금을 맡기면 값이 오르길 기다린다. 그럼 아이를 맡겼을 땐?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 전당포 주인이 할머니, 그 딸과 아들이 엄마와 삼촌이 된다. "애들은 억만큼 주고도 못 사는 어른들의 희망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할머니가 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12)

책의 제목, 그리고 이 서론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듯이 주인공 '나'(하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도박을 허용하는 동네의 카지노를 배경으로 태어난 아이다. 아이는 버려져 전당포에 맡겨졌고 전당포를 꾸려나가는 할머니와 그의 자식들이 아이의 가족이 된다. 책에서는 '지음'이라는 지명으로 이름이 설정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곳이 사북의 강원랜드라는 걸 안다.

2.

10년 전쯤, 일하던 회사에서 출장 차 사북에 갔던 적이 있다. 같이 갔던 일행 중 한 명은 어느 곳을 가리키며 저기서 누가 자살을 했단다, 아침만 되면 좀비의 눈빛을 한 사람들이 슬금슬금 나타난다며 혀를 내둘렀다. 내가 맡은 일은 카지노에서 벌어들인 수입 일부를 그 지역 아이들을 위한 문화산업에 환원하는 기업과 협력해 힉교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병주고 약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돌던 초겨울이라 그랬겠지만 도시 전체가 잿빛으로 보였다. 그곳에도 해맑은 아이들이 있었고 기업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초등학교 시설은 꽤 세련되었다고 느꼈다. 많지는 않지만 웃으며 학교 문을 나서던 아이들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만난 하늘이는 그 아이들과도 겹쳐보였다.



하늘이를 키우는 할머니는 월드컵 전당포를 꾸려나가고 있고, 하늘이는 '그림자 아이'라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도서관에서 공공근로자로 일하는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출근한다. 삼촌은 성실히 일하던 배달차 주인이었지만, 도박으로 3시간 만에 500만원을 잃은 뒤 반쯤 정신이 나가 '지음이 흔들린다, 랜드가 무너진다!'를 외치고 다닌다.

소설은 10살짜리 하늘이의 시선으로 지음에 세워진 카지노를 발판삼아 삶을 꾸려나가는 주변인물들의 모습을 비춘다. 도박할 자금을 마련하려 물건을 처음 전당포에 맡기기 시작한 사람이 재차 돈을 따고 다시 잃고 새로운 물건을 맡기다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는 이자와 빚 때문에 좀비가 되어가는 모습, 전당포를 꾸려나가면서도 빚을 져서 자살을 하고마는 사장, 도박에 열중하느리 아이를 임신한지도 모르고 심지어 아이를 낳은 뒤에도 애를 내팽개쳐두고 번갈아가며 카지노를 하러 갔던 무책임한 부부 등 이곳은 한탕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와 중독과 쾌락의 공간이다.

하늘이의 할머니는 시세의 흐름을 잘 좇아간 덕분에 부를 어느 정도 축적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지음의 산 역사와 비극을 한평생 목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70년대에 탄광이 부흥할 땐 근처에 올림픽 다방을, 2000년대에 카지노가 들어설 땐 월드컵 전당포를 열어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전당포를 꾸려나가는 인물들을 악하게만 그리지는 않는다. 너무나 빠르게 바뀌고 흥망성쇠를 반복해가는 지음이라는 도시에서 이들이 살아남으려는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 할머니는 그러하기에 전혀 돈이 되지 않는 하늘이를 거두어 손자로 키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속에 악인은 없다. 그저 싱크홀처럼 사람과 돈을 빨아들이는 도박장이 있고, 그 주변에 모여사는 여러 군상들의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다.

3.

"지음이 흔들린다, 랜드가 무너진다!"라는 삼촌의 외침은 카지노가 지어질 무렵 이를 반대하던 데모단의 벽보 문구이기도 했고, 하늘이의 꿈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소설 말미에 이르면 이것은 현실이 된다. 화려한 부의 상징이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장면을 겹쳐그리듯, 랜드는 무너져내리는데 하늘은 거기서 살아남고 하늘이의 생사를 알지못해 괴로워했던 할머니는 그 뒤로 몸져누워 쇠약해지다가 세상을 떠난다. "어른들의 희망이자 미래"라는 할머니의 말을 이어받듯 자본주의의 괴물같던 랜드가 무너지고 전당포도 문을 닫지만 하늘이는 할머니의 유언을 이어받아 학교 교육도 받을 수 있게 되고 다시 가족들의 품에서 잘 자라날 수 있게 된다는 결론은 어쨌거나 해피엔딩.


하지만 환상에 가깝다는 점에서, 한 토대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뒤에나 가능하다는 점에서 슬픈 해피엔딩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선 자조와 패배감, 비애의 정서가 가득했는데 최근에는 어떤 식으로는 희망과 해피엔딩으로 발을 내딛어보려는 시도들이 보이는 건 아닌가 싶다. 전세계적인 전염병이 덮치면서 사실 비극은 더 심화되었을지언정, 해피엔딩과 희망을 꿈꾸고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생을 위해 발을 내딛겠냐는 마지막 몸부림 같기도 하다.


소설의 첫 장면이 담고 있던 강렬함이 마지막까지 이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아쉽다. 소설 속 화자는 10살 아이인데 여러 상황들을 너무나 자세히, 어른처럼 알고 장황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의아한 부분들도, 긴장감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농촌, 탄광촌, 카지노 랜드를 거치며 빠르게 변해간 한 지역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소설화한 시도는 반길만 하다. 비극적인 시간들을 많이 겪어야했던 이곳을 비극적이지만은 않게, 유머러스하고 씩씩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간 점은 이 소설의 미덕이며 소설 속 화자 하늘이의 캐릭터를 통해 잘 구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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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 시대의 강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고민들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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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무살 이후로 꽤나 오랫동안 진로를 두고 방황하며 갈팡질팡했다. (사실 지금도 그 고민은 끝나지 않았지만) 공무원 시험이나 현실적인 취업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준비하던 것들을 싹 뒤집어엎는 일들이 계속됐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겐 남들에게 내세울 이력도 없었고, 그렇다고 하고 싶었던 일을 진득하니 파서 실력을 쌓은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왜 나는 현실적으로 세상에 잘 뿌리내리고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쭉 밀고 나가며 버티지도 못하는가. 오랫동안 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스스로가 괴로워 상담까지 받아가며 고민했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동안의 나는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 버틸 힘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하는 세상의 목소리를 인정하며 살아가기엔 자아가 너무 강했고, 그 목소리에 팽팽하게 대결하며 살기엔 너무 나약했던 건 아닌지.



2.

  정지우 작가의 글이라면, 일단은 시선을 집중하고 그의 잔잔히 흐르는 사유를 따라가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잠깐 대학원 신문사에서 일할 때, 그는 칼럼을 고정적으로 써주는 성실한 작가이기도 했는데 그의 글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을 정도로 따뜻한 만족감을 전해주었으니까. 그렇다고 그의 책을 열심히 챙겨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번 책만큼은 반가운 마음으로 펴서 읽었다.



  전작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의 연장선에서 읽을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과잉되게 의식해서 '좋아요'라는 수치로 환원되는 관심에 목을 매거나 소비를 과시하고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패턴에 매몰되어 중심을 잃어버리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 여기서는 유튜브로 이어진다.

유튜브는 조회수가 직접적으로 수익과 연결되기 때문에 자극적인 콘텐츠에 몰두할 유혹이 더 큰데, 한국의 유명 유튜버들이 유독 적군과 아군을 가르고 누군가를 '저격'하는 콘텐츠를 많이 생산하는 건 조금만 둘러봐도 쉽게 깨닫게 된다. 저자는 최근 들어 한국의 디지털 문해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단순히 독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한국 온라인 세계에 폭넓게 퍼진 이분법적 대립 구조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나와 의견이 같은 아군, 나와 의견이 다른 적군을 가르고 저격에 저격, 반론에 반론이 꼬리를 물며 서로를 헐뜯고 거기에 동조하는 댓글들이 달린다. 이러한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한국 사회의 각종 집단 갈등, 혐오, 차별"을 심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적군/아군으로 쉽게 나누는 프레임은 타인을 단순하고 폭력적으로 규정하게 되고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


  요즘 지나치게 유행하는 MBTI에 대한 저자의 조심스러운 비판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제가 MBTI가 P이다보니 계획적이지 못해서 과제를 늦게 낼 예정이에요'라는 환원론적이고 결과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부터 특정 MBTI를 지정해서 채용을 하거나 혹은 배제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보다보면 유독 한국인들은 타인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규정하는 틀을 좋아하구나 싶어 씁쓸해지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건 섬세한 관찰을 동반한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사랑하겠다는 것은 그 존재를 쉽게 규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류하기보다는 존재의 작은 디테일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고 애쓰고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에 가까울 것이다."(25)


  오히려 누군가를 굳이 깊게 이해하고 싶지 않을 때, 혹은 그런 노력이 귀찮을 때 쉽게 어떤 틀에 넣어서 '아, 그 사람은 이런 성향이니 이런 행동을 하는 수밖에 없어'하고 결론을 내려버리고 내 관찰과 사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고 한다. 타인을 쉽게 규정하지 않고 섬세하게 이해하고 접근하려는 저자의 시선과 노력은 그간 오랫동안 인문학을 공부해온 데에 기반할 것이고,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깊이 있는 통찰력과 따뜻한 온도는 그런 데서 오는 듯하다.



3.

  타인을 쉽게 비난하고 규정해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상대를 비난하는 논리로 '그건 너의 선택이니 그걸 책임지는 것도 너의 몫이야'라는 잔인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비판도 뼈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선택지 자체가 이미 정해져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선택은 자유롭지 않고 강요된 선택이 더 많다. 저자는 이렇게 선택이란 "완전히 자발적인 경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으므로 "타인의 선택을 나와 무관한 거라 생각하고 비난하기보다는 타인의 선택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고 공감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주장한다.


  몇 살에는 결혼을 해야하고, 몇 살에는 어느 정도 돈을 모아야 하고, 집은 어느 정도로 마련해야 하고, 소비는 이 정도는 되어야한다는 기준이 온갖 SNS와 재력을 갖춘 연예인들이 등장하는 매체를 통해 전시된다. 그걸 보는 동안 개인들은 한없이 위축되고 이 사회는 끊임없이 기준에 미달되어 있고 뒤처져있다고 엉덩이를 떠밀며 이들을 재촉한다. 나는 어느 순간 그 강도가 더 세지고 가혹해져가는 것 같아 갑갑함을 느끼면서도 거기에 저항해야할 힘이나 나만의 논리 같은 걸 내 안에 견고하게 갖추고 있지는 못해 더욱 괴로울 때가 있었다. 정지우 작가는 그걸 갖춘 단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던 건, 이번에 아예 변호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알게된 후였다.


  인문학을 오래 공부해왔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정말 사회에 맞서 싸울 실질적인 논리나 힘을 갖추지 못해서 어딘가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 결혼 후 책임져야 할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다 안정적으로 지켜주고 싶다는 간절함, 이런 것들이 그를 인문학과는 정반대의 접근을 취하고 있는 법의 세계에 발을 담그게 했다. 정지우 작가가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고 변호사가 되었다니... 사실 좀 충격적이었지만, 이 땅에 더 비짝 몸을 붙인 채 세상과 싸울 무기를 고민하고 갖추게 된 뒤 쓴 글이라 그런지 더 직접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내용이 많았다. 그는 여전히 SNS로 오가는 피상적인 관계 대신 책읽기와 글쓰기로 연결된 모임들을 이어나가고 직접적으로 사람들과 부딪치며 세상과 맞서 싸우는 힘을 계속 안에서 길러가며 전투를 벌여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에게는 타인들에게 덜 민감한, 나 스스로 자족하는 자리가 얼마나 있는가. 또 그런 공간이 내 안에서 어디쯤 있는가를 확인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저 내가 나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호숫가 오두막같은 자리 하나가 내면에 지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279)


  나의 내면에는 그런 자리가 얼마나 확보되어 있을까. 중년을 바라보게 된 지금에 와서야 그런 오두막 같은 자리를 내 안에 어떻게든 만들어놓지 않으면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회의 목소리에 휩쓸려나가버리고 말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자리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대가 왔다고. 저자는 그런 고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사람이면서 세상의 목소리에 맞서 싸울 힘을 실질적이고도 치열하게 만들어나가고 다른 이들에게 퍼뜨려나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글이 그런 의미에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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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길의 왼쪽 - 황선미 산문집
황선미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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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을 쓴 바로 그 황선미 작가의 산문집이다.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질 만큼 인기를 끌었지만, 나는 8년 전쯤 책만 읽어봤다. 하지만 결론부에 가서 받았던 충격 만큼은 잊혀지질 않는다.

아동 소설인데 이렇게 처절한 비극으로 끝맺어도 될까? 뭐 이런 의아함이었는데,

그것도 편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운 끝맺음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비극적인 세계인식을 하는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황선미 작가를 섭외할 일이 있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어딘가 차분하고 냉랭해보이는 목소리를 지닌 작가는 단호하고 정중하게 내 청을 거절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한참 인기를 끌 때라 바쁠 거라 생각은 했기 때문에 크게 기대도 안했지만 너무나 여지를 주지 않는 거절이었다. 하지만 이후 만나게 된 황선미 작가에게 글을 배웠다던 분들은 그분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정도로 다들 스승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이 보여서 원래 그렇게 차분하고 단정한 분이구나, 싶었다.

어쨌거나, 좀더 인간적인 날것 그대로가 나타난 작가의 모습이 궁금해져서 책을 집어들었다.

1부는 지금의 작가를 만든 상처나 어린 시절의 결핍, 가족 이야기들이 나오고 2부는 일상, 3부는 여행에세이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1부가 좋았다.

작가 본인도 쓰고 있지만, 이렇게나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데다가 다정하고 지지적인 남편과

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우울하고 쓸쓸하단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많이 쓰냐고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의 성향이나 근본적으로 지닌 고독감이나 외로움은 개인차가 있는 것이어서 그런 식으로 밖

에서 재단을 하고 싶지 않은데도 나 역시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톡홀름 대학 강연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미 첫 책으로 강연을 두 차례 했으니 새로 번역된 작품으로 행사를 하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당연한 제안인데 문제는 내가 원작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 왜 이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책이 번역돼 있으니 서점에서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책을 공수받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서점에 들러 내 책을 찾아보았다. 소설 코너. 두툼한 틈에 <푸른 개 장발>이 꽂혀 있었다. 책을 빼내자 직원이 웃으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설명을 한다. 나는 내 사진이 실려 있는 부분을 펴서 보여주며 이게 나라고 말해주었다. 그가 놀라서 또 뭐라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하더니 서명을 해달란다. 내 이름을 한글로 커다랗게 남겨주었다.

(194~195쪽)

이런 장면은 어째 부러움이 꽤나 크게 몰려왔다. 외국의 서점에 가서 "이게 나요!"하고 책날개의

표지 사진을 보여주는 인증이 가능하다니!! 역시 세계적인 작가이긴 하다.

***

앞서 언급했듯, 1부를 읽다 보면 작가가 어린 시절 어머니와 가난으로부터 겪은 상처나 결핍이 꽤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을 서릿한 언어로 담담하게 표현해내는 걸 보면, 역시나 글

잘 쓰는 작가가 맞구나 싶고.

남의 둥지에 뻐꾸기가 새끼를 낳고나면, 그 새끼들이 자라서 원래 주인의 새끼들을 둥지밖으로

밀어버리는데 그것에 대한 맹렬한 분노를 표현한 걸 보면 조금 의아스럽기도 하고, 어머니에 대

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새끼를 핥는 짐승 어미처럼 눈을 혀로 핥아 가난했던 어린

시절 자신의 눈병을 낫게해 준 어머니의 일화를 떠올리는 부분은 정말 '동물적'으로 '감각적'이란

생각도 든다.

참담하고 슬프다.

우리의 눈은 어떤 등에 가려져 있나. 진실에 접근해갈수록 얼마나 더 배신을 당해야할까.내 둥지에서 내 새끼가 떨어져 죽는 이 현실에 뼈가 아프다. 부끄럽고 분노가 치민다. 얼룩덜룩한 뻐꾸기의 그 깃털과 부리가 찢어져라 벌려대는 그 붉은 입에 구토가 인다. 나를 어지럽히는 뻐꾸기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다.

(29쪽)

 

엄마는 그날 왜 그랬을까.

그날 처음으로 엄마를 뜨겁게 , 동물적으로 기억하게 됐다.

다래끼 때문에 여러날 고생하던 중이었다. 병원도 약도 쉽지 않았던 가난한 집이라 결국 종기가 눈을 덮어버렸는데 새벽녘 잠결에 엄마의 행위를 경험하고 말았다. 엄마의 뜨겁고 거친 혓바닥이 내 눈을 핥았던 것이다. 개가 새끼를 핥아주듯 곪고 짓무른 상처를 구석구석. 혀끝이 농으로 붙어버린 눈꺼풀을 녹이고 파고들어 욱신거리는 상처를 건드리는 바람에 나의 온 신경이 깨어나 뻣뻣하게 마비되고 소름이 돋았다.

"밤새 입속에는 독이 고여서 곪은 걸 잡을 수 있어."

엄마의 지독한 입 냄새. 뜨거운 체온. 꼭 짐승의 혓바닥처럼 거칠던 감촉. 물도 못 마셔 바삭하게 들리던 숨소리. 어둡고 긴 동굴처럼 느껴지던 목구멍의 공명. 그 모든 게 동시에 나를 뒤덮었다. 나는 두려웠고 동시에 온전하게 무방비의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을 맞았다.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지독한 사람이었고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입을 연 적이 없다. 나을 때가 돼서 나았는지 다래끼의 독을 엄마 입 속의 더 지독한 독이 잡았는지 알 수 없으나 내 눈은 멀쩡하게 1.5 시력을 한동안 유지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관계는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새끼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가 되어갈수록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

(32~33쪽)

 

이 장면 하나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사실 뒷부분은 읽으면서도 크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청소년, 아동 소설들이 지닌 말랑하고 옅은 분위기,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는 '성인 화자가 아이인

척'하는 어색한 목소리 때문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물론 잘 쓴 몇몇 소설들은 그렇지 않다)

황선미 작가는 애초에 그런 '척' 같은 건 하지도 않는 듯하다.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 자체를

하지 않으니까.이렇게 동물적인 감각으로 접근하는 어린 시절의 세계가 오히려 더 직접적으로 닿

 아있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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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
강경석 외 지음, 이기훈 기획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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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3월 1일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꽤나 떠들썩하게 행사가 준비되었다. 학계에서도, 정부에서도.

이 책은 제목부터가 무척 흥미로웠다. 100년이라는 한 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과연 3.1운동의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데, 구체적으로 '촛불'을 소환함으로써 보다 절실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2016년 겨울부터 2017년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장을 찾았고 촛불을 들어 탄핵을 외첬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외침이 그렇게 절실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네 마음대로 국가를 좌지우지하지 말라는 말이다"라는 악이 받친 분노가 한 국가의 대통령을 향해 터져나왔고,결국 그는 탄핵당했으며, 촛불시위는 '촛불혁명'이 되었다.



책의 앞부분에 실린 좌담이 가장 흥미롭다.

주목해야 할 몇 가지 문제의식은 이렇다.


1) 3.1 운동 100주년이 떠들썩하지만, 일시적이고 관제적인 '의례'이자 '캘린더 행사'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2)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에 왜 여성은 없는가? 동시에 3.1 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여성들 가운데 왜 어린 소녀로 일찍 죽은

 유관순이 그 대표로 표상되어야 하는가?

3) 3.1 운동을 3.1혁명으로 부르자는 논의와 관련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정부로 현정부가 그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4)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은 3.1운동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3.1운동의 정신은 이후 어떻게 기억되고 이어져왔을까?



이와 관련하여 한국사학, 역사학, 사회학, 문학, 신학 전공자들의 글이 실렸다. 다양한 전공만큼 다양한 관점들을 엿볼 수 있는 지점도 흥미롭지만, 앞부분 세 편의 글을 제외하면 책의 기획의도와는 조금 거리가 멀게, 에두르다가 끝난 느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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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종의 장례행사를 재현하는 것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 이기훈에 의하면, 3.1절은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을 앞두고 거행되었는데 말하자면 황제의 장례식에 '만세'라는 일종의 축하 행사를 한 것이다. 이미 그 시기쯤에는 "군주에 대한 절대적 충성의 관념"이 많이 희석되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새로운 국가 구성원리로서의 공화주의가 싹트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히려 1인의 국가통치를 상징하는 고종의 장례행사를 재현하는 것은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정신을 역행하는 행사라는 비판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2) 장영은은 최은희라는 인물을 통해 "혁명 과정에서 여성들의 참여와 희생은 환영받지만, 혁명 이후 여성들의 사회적 입지는 다소 협소해지는 과정이 역사에서 순환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3.1운동에는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참여했으나 유관순이 대표적인 표상이 된 것에는 이화 출신들의 오랜 노력의 영향이 크다. 유관순의 공적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에 참여했지만 역사 속에서 이름은 지워진 많은 여성들의 이름을 복원해보자는 것이 그녀의 의도이다. 그 역할을 열심히 해낸 것이 최은희이다. 그녀는 3.1운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역사를 쓰는 것에 생애를 건다. 그녀들의 역사적, 정치적 지분을 찾기 위한 전략적 의도로서 3.1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올해에도 고아성 주연으로 유관순을 조명하는 영화가 개봉되었지만, 분명히 복원되어야 할 여성들의 이름은 많을 것이다.



 3) 3.1운동이 독립을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결과물로서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는 성과가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에는 세계사적인 정세도 영향을 미쳤는데, 금방 종료되었고 임시정부도 분열과 약화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로부터 현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나가는 '전유'의 전략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있었다. 지난 정권 때의 건국절 논란과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 형성된 대항적인 논리이겠지만,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현 정부의 주장 또한 정치적인 지점이 있다. 학계에서 가장 염려하는 것은 이렇게 임시정부로부터 단선적으로 정통성을 강조하는 역사인식의 경우, 함께 고려해야 할 수많은 다른 요인들이 너무 쉽게 간과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4) 지난 2016년과 2017년에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이 "나는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같은 마음이다"라는 생각으로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1919년의 역사적 기억은 너무나 먼 것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마지막에서'3.1운동은 박제가 되어버린 것'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린 오제연의 주장은 너무 회의적인 것 같다. 3.1운동의 기억이 만들어지고 전유되어 온 양상에 대한 연구가 48년에만 집중되어 온 것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4.19혁명에서부터 6월 항쟁까지 그 기나긴 '기억의 경합과 투쟁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무척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후에 나온 결론이 너무 김이 빠지긴 했다.

시대적 간극이 있어 직접적인 기억은 아닐지라도, '내가 대표다'라는 인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동학농민운동-3.1운동-4.19혁명-5.18 광주혁명-6월 민주항쟁-촛불혁명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그 혁명의 정동(요즘 유행하는 말로)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촛불혁명에 와서는 하나의 깃발 아래 사람들이 일괄적으로 모이는 게 아니라, 다양한 입장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여러 깃발을 들고 모인 축제에 가까웠다는 점을 기억해보면 계속해서 '다양한 개인들의 존중'이라는 민주의식은 성장해나가는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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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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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들에게 말씀하옵소서.

-이승우, 『모르는 사람들』, 문학동네, 2017.

이승우의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 』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는 '부재하는 아버지'와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아들'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혈연의 부자관계이기도 하고, 대리적 부자관계이기도 하며,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신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존재적 근원을 질문하는 과정이든(「모르는 사람 」,「복숭아 향기 」), 환대의 윤리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개인이든(「찰스 」,「신의 말을 듣다 」) 공통적으로 '아버지'를 경유해 답을 찾고자 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아들들은 끊임없이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그의 존재 근원을 찾기 위해, 그리고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기기 위해.

아버지의 목소리를 복기하는 과정

 구어적 상황을 생각해보자. 말하는 자가 있고, 그의 목소리는 공기 중으로 전파되어 듣는 자의 귀로 들어간다. 말하는 자가 발화한 메시지는 목소리 안에 담겨 듣는 자에게 들어가 수용된다. 저자는 이렇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화용적 상황에만 주목하지 않고, 말하는 자가 목소리를 내어 발화할 때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떤 점에서는 누구보다 잘 듣고 가장 잘 듣는 사람이다. (...)

말한 사람 자신은, 말해진 것이 불완전하고 서툶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완전하고 정확하게 듣는다. 그가 듣는 것이 말해진 말이 아니라 말해지기 전의 말이기 때문이다(12)

 말하는 사람은 늘상 자기의 말을 가장 정확하게 듣고 동시에 인지하고 있을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말은 거짓으로 발화될 수도 있고, 발화된 순간에야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으니까.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야 말로 자기가 한 말을 잘 듣고 정확히 안다는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말'이라는 권위가 실려있기 때문이다.

 

소설 「모르는 사람 」의 화자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었던 아버지의 소식을 11년 만에 듣는다. 건설 회사의 후계자 자리를 마다하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사로 살다가 말라리아로 죽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게 된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사라지자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두기 위해 억지 논리를 동원한다. 아버지는 유명한 여배우와 눈이 맞아 외국에 가는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재'를 '아버지의 파렴치한 행각으로 인한 죽음'으로 단순화해버린다. 아들인 화자 역시 땅끝선교회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아버지의 모습과 기록과 사진들이 낯설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나아가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는 지점은 그 사후적인 메시지 전달을 통해서이다.

 틈나는 대로 서재에 조용히 혼자 틀어박혀 있던 아버지. 어느 날, 서재에서 나온 아버지의 모습이 하얗고 키도 커 보였으며 후광 같은 게 보였음을 화자는 회상한다. 이 장면은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이 신의 임재 때문에 새하얗게 광채를 내고 있던 것을 회상하는 성경 기자(記者)의 서술을 떠올리게 한다. 서재라는 공간 안에서 그의 아버지는 세상에 대한 혐오를 상기하고, 선교사로 떠나려는 사명을 되새긴다. 마치 성소와도 같은 공간이다. 신약에서도 예수가 죽은 뒤에야 그의 생애와 언행에 대한 기록이 이루어지고, 후대의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재구성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예수 생전에 함께 했던 제자들조차도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가 죽은 후였다. 가까이 했던 상대가 부재하게 되자 다시금 그의 생전의 목소리를 복기해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겪은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이 시간적으로는 뒤늦은 것일지라도 부재의 결핍과 안타까움을 메우려는 노력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바둑 대국이 끝나고 한 수 한 수 복기하다 보면 대국중에는 보지 못했던 수를 보게 되고 상대방이 둔 수에 감춰진 의도를 읽게 되는 것과 같다. 항상 뒤늦게 깨닫는다, 세상사란 게 바둑판과 같다, 하고 주름진 얼굴의 외삼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56-57)

「복숭아 향기 」에서도 아버지가 이미 죽고 없는 화자가 등장한다. 우연히 M시로 발령이 나게 된 그는 아버지가 그곳의 신문사에서 일 했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묻는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아들의 기억의 진실여부를 어머니는 직접적으로 확인해주지 않는다.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진실을 "세월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발굴"(51)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외삼촌이다. 화자가 외삼촌을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기억하듯, 그의 외삼촌은 대리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외삼촌의 목소리를 통해 서사적으로 재구성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비극에 가깝다. 정신증을 앓던 M시의 재벌 후계자와 M신문사의 똑똑한 여기자의 정략적 결혼. 이 비극을 선택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어머니였다. 자신은 "누군가의 남편이 될 수 없는 사람"(66)이니까 이 혼사를 무조건 거절하고 떠나라고 상에 엎드려 우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복숭아 향기에 홀린"것처럼 마음이 움직였다는 그녀. 아버지의 정신증은 점차 심해져 내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 주인공을 낳을 때까지 과수원에서 지낸다. 유일하게 시댁에 요구해서 물려받은 복숭아 과수원에 아버지의 묘를 만들고 그곳에서 3년 간 머물렀다. 외삼촌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부모의 과거 이야기가 끝나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에게 들려온다.

 부모에 대해 자신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사실들이 '거짓'이 아니기를 화자는 애타게 바랐다. 부모는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고, 그것이 부정되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두려움을 느꼈으므로 그는 외삼촌의 진술을 들으며, 진실에 직면하려 애쓴다. 화자는 나름의 '진실'에 도달하고, 실제로 결말부에서는 "여기에서 살아라. 그동안 여태 내가 과수원을 돌봐왔다."(67)라는, 부재한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다.


​목소리에 대답하거나 거부하는 일, 환대의 윤리

​ 잘 알려져 있듯이, 레비나스는 호소에 대한 응답(response)과 책임(responsbility)을 주장했다. 과부, 가난한 자, 이방인 등의 약자는 거부할 수 없는 '타자의 얼굴'로 나타나고 그에 대해 외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는 환대의 윤리와 마주한다.

 「찰스 」에서 찰스는 교수인 김철수가 말레이시아의 학회에 갔다가 여행 가이드로 만난 현지인이다. 한국어가 유창하고, 농담처럼 "제 한국 이름도 김철수에요"라고 말하던 그에게 김철수는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국에서 재회한 찰스는 김철수가 그에게서 들은 것과는 달리 이주노동자였고, 불법체류자였다. 찰스는 철수와의 신분을 이용해 그의 연구실 공간을 몰래 사용하고, 출판사에 교수인 철수의 이름을 팔아 번역일을 몰래 구하려고도 한다.

 궁금한 것이 모두 물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음은, 때때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감당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물음들은 그런 자신감 내지 책임감 없이 물어질 수 없다(144)

 철수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돌아올 말들과 그것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이 두려워서 묻지 않기로 한다. 한국에 와서 다시 만난 찰스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사는 곳이 어딘지'를 물으면 돌아올 대답, '집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책임지기 싫어 그는 더 묻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연구실에서 하룻밤을 머물 수 있도록 잠시 빌려줌으로써 최소한의 예의를 베풀 뿐이다. 출입국관리소에서 찰스의 신분을 보장해줄 수 있는지 묻는 전화가 걸려오자 철수는 갑자기 무엇인가가 자신의 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는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 찰스가 애타게 자신을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는 출입국관리소 직원의 말을 들었을 때, 철수는 찰스의 호소에 응답(response)할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터. 철수는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그 호소에 응답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이와는 반대편의 결말로 향하는 것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와 「신의 말을 듣다 」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로 도망치듯 이사를 간 화자. 그녀의 집에 매일같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남자가 나타나고 겁에 질린 그녀가 경찰에 신고를 하자마자 곧바로 잡힌다. 남자는 건물 벽에 몸을 붙이고 온몸을 하늘로 뻗어 와이파이를 빌려 쓰려고 하던 외국인 노동자였다. 가족들과 연락을 하고 자기 나라의 사이트를 접속하기 위해 필요한 무선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그곳을 계속 서성이게 된 것. "처지가 딱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선의를 베풀라는 암시를 꽤 노골적으로 하"(174)는 경찰관의 언행을 화자는 극도로 불편해한다.

 무선인터넷에 암호를 걸고, 정기적으로 경찰관의 순찰도 부탁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살던 그녀의 집 앞에 남자는 다시 나타난다. 그는 과일 같은 것들을 한 봉지씩 싸들고 와서, 한국말을 잘하는 친구까지 동원해가며 애원한다. 가족들과 꼭 연락해야하니 무선인터넷을 제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여기서 부탁을 하는 이 남자, 꽤 뻔뻔하게 말한다. "사모님, '선물'해주세요"라고.

 교회에서 '가진 것은 다 받은 것이고, 받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주어야 하는 것이요, 선물'이라는 목사의 설교를 들었고, 따라서 선물을 해달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여자는 당황스러워한다. 궂은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여자의 집 앞에서 기다리며 용서를 빌고 애걸하던 남자에게 여자는 결국은 문을 열어주고야 만다. 그녀는 남자의 호소에 응답하고 문을 열어보임으로써 환대의 윤리에 설득된 것처럼 보이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은 남아있다. 자신을 오랫동안 '피해자'의 위치에 둠으로써 "빚진 것이 없으므로 책임질 것이 없고", "기본적으로 요구를 받는 자가 아니라, 요구하는 자 요구할 권리를 가진자"(184)로 스스로를 여겼던 그녀가 외국인 노동자의 출현으로 인해 그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혹은 그렇게 해야한다는) 소설 속 화자(혹은 작가의)인식은 동의하기 어렵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오랫동안 시달려 외부에 대한 공포로 움츠리게 된 여성보다 '외국인 노동자'가 더 약자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을까. 게다가 소설 속에서 그 윤리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기독교 교회의 설교이다.

 

 「신의 말을 듣다 」역시 신의 목소리가 친구의 목소리로 옮겨오며, 그것을 체화한 이가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변화의 자리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일종의 당위이자 책무성으로 제시되는 '환대의 윤리'를 소설 안에서 그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시도인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신'의 목소리에 응답하고, 그에 따라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게 된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늘 의문스럽다.

 아버지를 경유해 존재의 근원을 찾고 윤리적 구원에 도달해가는 과정에서 여성인물들이 지속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두고 싶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모르는 사람들 」), 그를 위해 참고 인내한다(「복숭아 향기 」). 남편으로부터 오랫동안 끔찍한 폭력을 당해온 여성 개인의 서사 또한 '누구도 순수한 피해자일 수 없다'는 보편성의 논리와 '가난한 외국인 남성 노동자' 앞에서 쉽게 탈각되어 버린다. (「넘어가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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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위원회 2018년 문학나눔 붘어1기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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