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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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한 걸음이라도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될 테니까. 1922년 여름, 러시아 모스크바. 혁명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사회주의가 남았고, 끊이지 않는 전쟁과 기근, 독재 정권과 그 반발은 계속돼 어지러운 러시아와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한 젊은 백작이 등장한다. 귀족이라는 계급은 옛 시대의 폐해를 보여주는 존재라며 모두 다 총살되던 그 시절,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인인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는 목숨은 부지한다. 젊은 시절에 정치적 갈증이 담긴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를 쓴 덕분에. 하지만 남은 생을 모스크바 호텔에서 보내는 ‘종신 연금형’에 처해진 이 젊은 백작이 가만히 호텔에서 생활하며 얌전히 죽을 날만을 고대한다 생각했더라면, 그건 너무나도 큰 오산이다. 그는 오히려 신사로서의 품격 있는 모습을 잃지 않으며 호텔에서 활약하기 시작했으니까.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백작은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궁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가르침 덕분일까? 로스토프 백작은 모든 재산과 명예와 칭호와 영광스런 나날들을 잃고, 평생 메트로폴 호텔을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호텔 안 레스토랑에서 만난 소녀 니나의 친구로 이곳저곳을 누비기도 하고, 공주로서의 품격과 신사로서의 품격을 가르치기도, 끊임없이 궁금증을 가지고 직접 도전하는 정신을 본받기도 한다. 왕년의 유명 여배우 안나의 비밀스러운 연인으로서 활약하기도 하고,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된 공산당 간부의 교사로서 일하기도, 옛 꼬마친구의 딸을 보살피며 아빠의 역할도 훌륭하게 해 내는 로스토프. 그는 성공적으로 메트로폴 호텔의 삶 속에 적응한다. 모든 시기는 나름대로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혼란의 시대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잃었고 빼앗겼지만 나름의 행복과 신사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호텔 속 삶에 적응한 백작은 서른 초반부터 시작된 호텔에서의 삶을 예순 넘어갈 무렵 종결하기로 결심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딸은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떨치며 파리에 가 있었고, 그녀의 망명을 계획하던 중에 있었던 백작.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지배인에 의해 그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발각되자, 그는 그 역시도 호텔을 떠나야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목숨을 건 여정,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여정이겠지만, 길을 잃었으나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종종 운명이 길잡이를 제공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역경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았던 1920년대의 러시아 모스크바. 장장 30년이라는 세월동안 한 호텔 안에서 살아야 하지만 결국 자신의 환경을 완벽하게 지배한, 신사로서의 품격 있는 모습만을 보여준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서 700쪽 넘는 <모스크바의 신사>을 순식간에 읽었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호텔 안에서 구현해 낸, 로스토프 백작처럼 매너와 교양과 품위를 가지고 있는 진정한 ‘신사’는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렇게 매력적인 등장인물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와인과 음식, 프랑스 파리와 예의범절 등 다양한 분야에 박학다식한 로스토프 백작을 통해 자칫 어렵다고 느낄 수 있는 러시아 문학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사회주의 체제를 겪으며 백작과 그의 주변 사람들의 고민과 이야기를 통해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탐구정신이 투철한 그들 중 하나가 되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로스토프 백작에게서 배운 삶의 태도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평등을 부르짖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그들은 백작의 행복을 앗아가진 못했다. 환경을 지배할 줄 알고 행복해지는 법을 아는 로스토프 백작. 그와 같은 신사는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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