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일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겠느냐
아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 (P.15 )
새벽에
누굴까 이 새벽 우산을 쓰고 바삐 가는 사람은
누굴까 이 새벽 울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이 새벽 시외버스에 홀로 터미널에 도
착하는 사람은
누굴까 이 새벽 편지를 쓰는 사람은
누굴까 이 새벽 잠 못 드는 사람은
누굴까 이 새벽 수의를 깁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이 새벽 긴 여행에 오르고 있는 사람은 (P.25 )
국상國喪
불쌍한 나의 아가야
운명의 그날 2014년 4월 15일
배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 다녀오겠다며 인사하고
떠났던 네가
다음 날 아침
배가 기울어지자
선실에 있으라는 어른의 말에 선실에서 쓰러지지 않
으려 구석에서 버티다
구명동의를 입으라는 어른의 말에 구명동의를 허둥
지둥 찾아 입고
또 선실에 그대로 있으라는 어른의 말에
더욱 더 기울어지는 선실에서 그래도 침착하게 견디
던 네가
마침내 배가 거꾸로 뒤집어지고 거센 바닷물이 덮칠 때
얼마나 놀랐니
무서웠니
기가 막혔니
그날 이후 엄마 아빠의 삶도 끝났다
그 절박한 마지막 순간
네가 보내온 '사랑한다'는 외마디 문자를 보고 또
보며
통곡하고 통곡하다 실신하기 여러 번
엄마 아빠는 더 이상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가 않다
환생이 있다 하더라도 이 나라에 다시 태어나 달라
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위험한 때일수록 어른의 말을 듣고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그 가르침마저도 뼈저리게 한스럽고 원망스
럽다
어린 너희들, 선생님들, 또 다른 승객들이 물에 잠겨
유명을 달리하던 날
대한민국도 물에 잠겨 버렸다
나라는 지금 국상 중이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고
다닌다
차라리 자연재해였더라면.....
전쟁이 나면 왕이, 대통령이 백성을 버려둔 채 먼저
도망을 가고
사고가 나면 지하철 기관사가, 배의 선장이 승객을
버려둔 채 먼저 도망을 가고
사고, 또 사고가 나도 고쳐지지를 않는
인간의 가장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야비한 인간들
돈만 아는 더러운 인간들
대한민국아
야수들이 설치는구나
대한민국아
물살 세기로 유명한, 칠흑같이 캄캄한 서해 바닷속
에서
얼마나 추웠니
불쌍한 아가
이 죄는 선장 아무개, 선원 아무개의 죄만이 아니라
이런 너희를 지키지 못한
대충대충 밥버러지로 살아온
어른들의 죄며
바로 이 아빠와 엄마의 죄며
나라의 죄다
기적처럼 태어났으니 기적처럼 돌아와 달라고 빌고
또 빌었건만
차디찬 물속에서 건져져
뜨거운 불속에서 태워지다니
어린 네꿈이며
가슴 설레던 이성 친구며
함께 재잘대던 네 친구들이 모두 떠나서
어린 네가 연기로 화해서 사라지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란 말인가
아가
우리를 용서 말거라
이 시간만큼은 내세를 믿고 싶다
부디 내세가 있어
그곳에서 너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내 새끼 내 자식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 수 있다면 (P.46 )
의인義人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자신의 구명동의를 제자에게 벗어 주고 숨져 간 남
윤철, 고창석, 박육근, 최혜정 교사
친구들을 구하다 사라져 간 양은유, 정차웅, 최덕하,
권혁규 학생
선원은 맨 마지막에 나가는 것이라며 어린 학생들에
게 구명동의를 입혀 탈출시키고 희생한 박지영, 정현
선, 김기웅, 안현영, 양대홍 승무원
학생 스무 명의 탈출을 도운 김홍경 승객
구조작업을 하다 끝내 물속에서 숨져간 이광욱 잠
수사
구조를, 수색을 위해 끊임없이 캄캄한 물속으로 뛰
어드는 잠수사들
이런 의인들이 있기에
그래도 죽지 않고 우리가 산다 (P.47 )
죽을 곳
군인에게는 전장
조종사에게는 항공기
선원에게는 배
잘 죽을 수 있는 곳이다
세월호 선장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탈출을 지휘하고
구출됐다면
또는 탈출 못한 승객들과 승무원과 끝까지 남아 배
와 함께 장렬하게 순직했다면
'이준석 선장을 기억하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며
한국 선원들의 자존심으로 교과서에 올라 후세들이
배우는 교훈이 됐을 것이다
그가 승객들을 선실에 가두어 두고 팬티 바람으로
제일 먼저 황급하게 해경의 손을 잡고 탈출의 발길을
내딛는 순간
그는 모든 한국 어른들을 비겁한 존재로 몰아 뺨을
후려치고 말았다
한 번 죽어 오래 살 수 있는 영웅의 길에서 살아도
이미 욕되게 죽어 버린 살인자의 길로 내딛고 말았다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잘 죽어 오래 사는 행운을
헌신짝처럼 벗어 던져버리고 맨발로 도망쳤으니
누구나 결국은 죽는 것인데
어리석도다
어리석도다
하기야 아무나 될 수 있다면 그게 어디 영웅이랴 (P.48 )
-유자효 詩集, <아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