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울음
일그러진 입에서 한 타래 울음이 풀려나오기 전에
아이는 도도하게 우주의 움직임을 정지시킨다.
한 울음을 낳도록 별과 세균과 하느님까지 일손을
멈추고, 팽팽한 풍선처럼 정적靜寂으로 부푼 우주가
첫 숨의 울음에 파열하려 가슴 조이며 긴장한다.
아이의 울음은 빠르게, 선명하게 흘러 나온다.
누군가 내던진 작살에 매여, 시간과 중력의
벽을 뚫고 빛나는 어둠의 염통에 꽂히기 위해.
뒤늦게, 위로와 기쁨이 울음을 쫓아 달려 가지만
한 번도 따라잡아 함께 돌아온 적 없으니,
솟구치는 어둠의 피로 제 얼굴이 물들 때까지
아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고,
아이의 두 눈에서 깨끗이 목욕한 하늘과 땅은
다시 더럽혀지기를 기다린다.
때때로 세상 끄트러미까지 나들이 간 새들이
오래전에 끊어진 울음 한 파람을 물어 와
어른이 된 아이에게 무지개를 만들어 준다. (P.51 )
친화력
밀짚으로 아이들이 불어 올리는 비눗방울들이
햇빛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어느 별 하나를
조심조심 끌어당기며 자라나다가
숨 막히는 그리움의 막다른 골목에서
그 별을 따라 둥둥 떠나가고
비눗방울에 이끌려 간 아이들의 눈망울도
되돌아온 적 없듯이, 병과 사랑이
우리의 축축한 입을 찾아올 때면
우리의 여윈 몸은 한 아이의 숨결을 머금고
작은 비눗방울이 된다. 우리가 떠 있는
대기와 풀밭은 티 없이 깨끗하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낯익은 윤곽들이 하나씩
지워지며 점점 희미해질 때, 우리는
햇빛에 가리어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어느 얼굴을 꿈꾸며, 소리 없이 부르며
닮아 가다가, 한순간 대수롭지 않게 떠나간다.
그 얼굴이 당기는 무서운 힘에 이끌려,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감한 사물들의
눈망울을 이끌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햇빛의 서릿발 같은 주렴을 지나 어둠의
허파 속에 싱싱한 포도알로 매달리거나,
밤마다 무리지어 노는 또 다른 별이 될 것이다. (P.52 )
시
한 노인이 조랑말을 데리고 강변에서 살았네
다리를 지키는 군인들이 우리 길을 막았네
아무도 노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어
노인의 조랑말은 점점 작아졌네
뼈만 남은 노인은 실성해서 마구 지껄였고
우리는 노인의 말을 듣기 위해 몰래
강물 속으로 뛰어 들었네 그런 일이 있었네 (P.81 )
초토일기 하나
나를 기쁘게하는 그가 나를 미치게 한다
나를 춤추게 하는 그가 남의 살을 썩힌다
나를 키우는 그가 남을 굶기고
나를 쓰다듬는 그가 남을 물먹인다
어린 누이를 겁탈한 그가 교회에서,
학교에서, 마이크 앞에서 가장 쓸쓸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고통을 추억으로 바꾸는 그가
미래를 무덤으로 바꾼다
유곽을 천국으로 만드는 그가
외아들을 십자가에 세우고 읇조리게 한다.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은 그의 외아들이
잠자는 개를 걷어찬다
걷어차인 개가 놀고 있는 닭을 괴롭힌다 (P.90 )
깻잎 위에도 피 냄새가 지나갔다
1
변방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말들이
피를 흘렸다
나라의 말이 통하지 않고
집 나간 개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이면 주인이 바뀌는 나라
화살은 우수수
아이들 등에 꽂혔다
인적 드문 고을에는 몸 파는
여자들만 남아,
늙은 할아비의 소매를 끌었다
서성거리며 나는 너를 불렀다
나는 너 대신 대답했다
모른다
몰라
몰라요.....
어디선가 죽어 가는 말들이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2
식기와 숟가락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너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가로수들이 꼼지락거리며
욕본 하늘을 간질이고
호각 소리-
바다가 갈라지듯
순식간에
길이 트였다
뒤집어져 불타는 차車
바퀴가 신나게 돌고 있었다
저것 좀 봐! 누군가 말했을 때
내 관자놀이에서
주르르
피가 흘렀다
개 같은 놈들,
네가 넘어지고
파리떼가 달려왔다
3
그리고 하루 낮 하루 밤,
성 안에는 쌀이 떨어지고
공원엔 즐비한 시체
편지처럼
나뭇잎이 날아다니고
코흘리개 아이들은 총놀이를 했다
길가엔 젊은 여자들이
얼굴에 흙칠하고
손가락으로 땅을 파며
울고 있었다
울음이 높이뛰기 선수처럼
뛰어내렸다
그리고 사흘 낮 사흘 밤,
늙은 여인들은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지어 청년들을 먹였다
하루 살기가 불안했다
파리떼 파리떼 파리떼 파리떼
새벽엔 다시 총소리,
해가 뜨면 죽은 자식들이
눈을 까뒤집었다
그리고 열흘이 되기 전에 우리는 진압되었다
4
깻잎 위에도 피 냄새가 지나갔다
피가 흐르지 않을 땐 붉은 예감이 흐르고
어디선가, 다리가 두 개뿐인 개가
또 다리가 두 개뿐인 개를 낳았다
가구점 침대 위에서도 살인이 있었다
피가 흐를 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사람이 저지른 것을 사람에게 물을 수 없다고.....
깻잎 위에도 피 냄새가 지나갔다 (P.161 )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므로
천국의 입구에서
향기로운 병신들
향기로운 우리는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모르므로
어느 날은 이 삶의 기울어진
담벽을 사뿐히 뛰어넘을 것을 믿으며
천국의 입구에서
고통은 앞을 막고 뒤를 끊고 옆을 치고
천국의 입구에서
보고 싶어라 퀭한 눈,
주저앉은 코와 쭈그러진 이마
듣고 싶어라,
사람 숨소리 사람
일어나고 주저앉는 소리
사람 그림자 땅에 끄이는 소리
맨홀 뚜껑에 고여 있는 사람 냄새 맡고 싶어라
천국의 입구에서
향기로운 병신들
향기로운 우리는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 지 모르므로
향기로운 괴로움이
스스로 괴로워할 때까지
우리의 피는 초록,
꿈의 주방에선
요란한 종악鐘樂이 울려 퍼지고
궐기대회, 향기로운
병신들의 궐기대회 (P.198 )
명륜동에서
그 눈. 깊은 눈, 나는 삶에 죄졌다 십 년이 무엇을 부수고
무엇을 도려냈는가 하나의 눈동자가 세계를 부수고 남자와
여자를 부수고 동화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깊은 눈......
흰 꽃 하나가 다른 꽃 위에 눕고 부채춤처럼 펼쳐진 그 아래,
삶은 율동 없는 춤으로 노래했다 잔잔하게 떠밀리는 물살이
흰 꽃들 뒤로 끝없이 이어졌다, 커다란 눈이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십 년의 시간 속에 침몰하고서 아직 꿈틀거리는 것,
오늘의 들꽃을 바람에 떨게 하고 밤하늘을 푸르게 하는 것,
무엇인가, 춤추는 가수의 노래 속에 지금 노래하는 이것은 (P.287 )
고양이
어느 날 정말 손바닥만 한
작은 고양이가 밥집 유리문 앞에
잠든 것을 보았다 한 두 방울
비 뿌려 보도블럭을 적시고,
떼서리로 몰려드는 밥집
손님들 발에도 밟히지 않고,
번지는 빗방울처럼 작고 동그란
잠을 고양이는 자고 있었다.
어느 날 패인 무덤 구르는
돌멩이 아래 우리가 그러하듯이 (P.290 )
-이성복 詩集, <어둠 속의 시>-에서
어둠 속에 피어난 꽃1977년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한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 ).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후 지난해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에 이르기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내놓은 그에게는 어느새 흰 머리카락이 수줍게 자리잡았다. 근 사십 년 동안 고통스러운 시 쓰기의 외길을 걸어온 그가, 이제 지난 시간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시와 산문, 대담 들을 세 권의 책으로 엮어 선보인다. 1970-80년대 미간행 시들을 묶은 『어둠 속의 시』, 마흔 해 가까운 세월의 다양한 사유들을 엮은 『고백의 형식들』, 그리고 서른 해 동안 이루어진 열정적인 대화들을 모은 『끝나지 않는 대화』가 바로 그것이다.
갑년(甲年)을 넘어선 시인은 이제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시인으로서의 그의 자리가 처음 출발했던 지점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달라졌다면 어떻게 달라졌는가, 혹 그 달라짐이 발전으로 생각될 수 있는가. 시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1970-80년대 청년 이성복에게는 시가 전부였다.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살았던 그의 가슴속에는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들끓고 있었다. 그는 미지의 시에 대한 열정과 고통 속에서 좋은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며, 그 고통스러운 꿈속에서 태어난 시들은 당시 독자들의 가슴속에 비수처럼 각인되었다. 이제 시인은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그 치열했던 시절의 견딜 수 없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불러내려 한다.
거울 속의 시간 - 시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더니 기껏, 빌어먹을…… 어머니한테는 말이 안 통한다
아무리 내가 어리석고 나의 시대가 어리석어도 할 말은 있다 카프카, 내 말 좀
들어봐 너처럼 누이들을 사랑한 사람은 없을 거다 누이들은 실험용 몰모트다
아니다, 장님-굴새우-속죄양이다 카프카, 누이들은 나의 시대, 창피 옴팍
당하고 양갈보가 되어도 나의 시대, 사랑한다 누이들! 너희는 잘못한 게 없다
나의 시대는 어리석고, 어리석었고 나는 어지러웠다 어머니, 당대의
씨암탉이시여, 당신이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으니 기껏, 어지러워요, 어머니!
-「병장 천재영과 그의 시대 둘」 중에서, 『어둠 속의 시』
1976년에서 1985년 사이에 씌어진 미간행 시 150편을 묶은 『어둠 속의 시』는,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두번째 시집 『남해 금산』(1986)과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말한 이성복의 ‘풍경’이 처음 자리잡은 당시를, 시인은 그의 정신적 성장의 ‘부름켜’로 생각한다. 이 시절 그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비정상의 도시에서 날 선 언어로 선열한 아픔을 토해냈다. 그는 곤핍한 현실 앞에서 눈을 감는 대신 썩어 문드러져 가는 상처를 상처 그대로 느끼며 아파했다. 능멸당한 누이 앞에서 그는 기껏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어머니를 찾는 자신의 ...
어둠 속에 피어난 꽃
1977년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한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 ).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후 지난해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에 이르기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내놓은 그에게는 어느새 흰 머리카락이 수줍게 자리잡았다. 근 사십 년 동안 고통스러운 시 쓰기의 외길을 걸어온 그가, 이제 지난 시간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시와 산문, 대담 들을 세 권의 책으로 엮어 선보인다. 1970-80년대 미간행 시들을 묶은 『어둠 속의 시』, 마흔 해 가까운 세월의 다양한 사유들을 엮은 『고백의 형식들』, 그리고 서른 해 동안 이루어진 열정적인 대화들을 모은 『끝나지 않는 대화』가 바로 그것이다.
갑년(甲年)을 넘어선 시인은 이제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시인으로서의 그의 자리가 처음 출발했던 지점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달라졌다면 어떻게 달라졌는가, 혹 그 달라짐이 발전으로 생각될 수 있는가. 시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1970-80년대 청년 이성복에게는 시가 전부였다.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살았던 그의 가슴속에는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들끓고 있었다. 그는 미지의 시에 대한 열정과 고통 속에서 좋은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며, 그 고통스러운 꿈속에서 태어난 시들은 당시 독자들의 가슴속에 비수처럼 각인되었다. 이제 시인은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그 치열했던 시절의 견딜 수 없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불러내려 한다.
거울 속의 시간 - 시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더니 기껏, 빌어먹을…… 어머니한테는 말이 안 통한다
아무리 내가 어리석고 나의 시대가 어리석어도 할 말은 있다 카프카, 내 말 좀
들어봐 너처럼 누이들을 사랑한 사람은 없을 거다 누이들은 실험용 몰모트다
아니다, 장님-굴새우-속죄양이다 카프카, 누이들은 나의 시대, 창피 옴팍
당하고 양갈보가 되어도 나의 시대, 사랑한다 누이들! 너희는 잘못한 게 없다
나의 시대는 어리석고, 어리석었고 나는 어지러웠다 어머니, 당대의
씨암탉이시여, 당신이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으니 기껏, 어지러워요, 어머니!
-「병장 천재영과 그의 시대 둘」 중에서, 『어둠 속의 시』
1976년에서 1985년 사이에 씌어진 미간행 시 150편을 묶은 『어둠 속의 시』는,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두번째 시집 『남해 금산』(1986)과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말한 이성복의 ‘풍경’이 처음 자리잡은 당시를, 시인은 그의 정신적 성장의 ‘부름켜’로 생각한다. 이 시절 그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비정상의 도시에서 날 선 언어로 선열한 아픔을 토해냈다. 그는 곤핍한 현실 앞에서 눈을 감는 대신 썩어 문드러져 가는 상처를 상처 그대로 느끼며 아파했다. 능멸당한 누이 앞에서 그는 기껏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어머니를 찾는 자신의 나약함을 자책할 뿐이었다. 이 시들을 통해 독자는 이성복의 ‘치욕’과 ‘아픔’의 시편들이 태어난 자리를 정확히 되짚을 수 있으며, 시퍼렇게 살아 있는 감각적 언어, 말의 암편(岩片)들을 통해 ‘불가능’의 꼭짓점에 이른 오늘의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이 세 권의 책은, ‘출판사 열화당(悅話堂)’이 그 모태가 되는 선교장(船橋莊) 열화당 건립 200주년(1815-2015)을 한 해 앞두고, ‘인문열화 200년’이라는 오랜 염원 아래 선보이는 첫번째 출판이다. 그동안 책의 존재형식에 대해 탐구하고 실험해 온 열화당이 ‘문학은 결국 문자로, 책으로 완성된다’는 믿음 아래 세상에 내놓는 이 책들은, 문학출판의 다소 희귀하고 이채로운 본보기가 될 것이다. 표지의 ‘인문열화 200년’ 로고는 안상수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지난 주말, 저녁 술자리에서 이성복 시인의 책 세 권을 선물 받았다.
열화당에서 나온 책답게 담담하고 단정한 장정이, 받는 기쁨을 더한다.
- 1976년부터 1985년까지 씌여진 이 시들은,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와 두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시들과 같은 아궁이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대부분
발표되지 않은 시들이지만, 발표된 뒤 당시의 여러 사정으로 간행되지 못한 시들도
다수 있다. 이 시집은 앞선 두 시집과 결합하여 하나의 '퍼즐' 혹은 부절附節을 이루는
것으로 이로써 참담했던 한 시절이 온전히 되살아나게 되었다. 깊은 어둠 속에 잠들
어 있던 시들을 고이 닦고 감싸 아름다운 책으로 염殮해 주신 열화당에 감사드린다.-
는 시인의 [어둠 속의 시] 서序가 의미있게 다가왔듯, 150편의 시들이 시퍼렇고 펄펄
하다.
그런데 이 시들이 씌여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듯한, 어쩌면 더 깊은 어둠의
시간들 속에서 맹인처럼 귀머거리처럼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지금 여기, 에서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