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딱 열개만 먹으라고 했다 당신은 신문지를 펼쳐
놓고 펜치로 껍데기를 쪼개 은행알을 입에 넣어준다
조그만 박 같은 껍데기가 딱딱 벌어지는 소릴 들으면서
당신과 나는 눈짓도 낭비하지 않고 괜한 몇마디 말도 섞지
않는다
이 맛은 어떻게 왔을까, 공룡이 쉬던 중생대의 은행나무
그늘에서 왔을까, 공룡의 성대는 불룩한 자루처럼 길쭉할까
당신의 옆모습은 그저 무심결이네, 방금 거대한 황금빛과
공룡의 긴꼬리가 머릿속의 터널을 빠져나간 줄도 모르고 (P.25 )
-신미나 詩集, <싱고, 라고 불렀다>-에서
인기척
갓 결혼한 신부가 처음 여보, 라고 부르는 것처럼
길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불쑥 봉분 하나 나타난다
인기척이다
여보, 라는 봉긋한 입술로
첫 발음의 은밀함으로
일가를 이루자고 불러 세우는 저건 분명 사람의 기척이다
기어코 여기 와 누운 몸이 있었기에
뒤척임도 없이 저렇게 인기척을 내는 것
새 신부 여보, 라는 첫말의 엠보싱으로
저기 말랑히 누웠다 일어나는 기척을
누가 올 것도 누가 갈 것도
먼저 간 것도 나중 간 것도 염두에 없이
지나가는 기척을 가만히 불러 세우는 봉분의 인기척 (P.12 )
바람의 뼈
시속 백 킬로미터의 자동차
창밖으로 손 내밀면
병아리 한 마리를 물커덩 움켜쥐었을 때 그 느낌
바람의 살점이 오동통 손바닥 안에 만져진다
오물락 조물락 만지작거리면
바람의 뼈가 오드득 빠드득
흰 눈 뭉치는 소리를 낸다
저렇듯 살을 붙여가며
풀이며 꽃이며 나무를 만들어갈 때
아득바득 눈 뭉치는 소리가 사방천지 숲을 이룬다
바람의 뼈가 걸어나간 나뭇가지 위에
얼키설키 지은 까치집 하나
뼛속에 살을 키우는 저 집 안에서 들려오는
눈보다 더 단단히 뭉쳐지는 그 무엇의 소리 (P.24 )
울창한 우울
우울한 아이를 위하여 물구나무서는 어미가 있다 배꼽을
다 보이는 어미가 있다 발목을 접질린 어미가 있다 생피
를 쏟는 어미가 있다 우울은 울창한 비, 우물을 들여다보면
머리카락이 보이는 비, 혼령이 망령에게 말 걸게 하는 비.
빗줄기를 자르면 자꾸 생기는 우울의 꼬리, 우울의 꼬리
를 잡으려다가 우울에게 꼬리를 물린 어미가 있다 고층 아
파트 하나 남은 불빛처럼, 바깥을 내다봐도 자신만 보이는
밤의 유리창처럼
우울은 허밍, 울창한 빗물, 우울이라는 깔대기에 걸린, 할
딱 뒤집어진 우산 속으로 쥐똥나무 이파리들이 몰려든다 벌
레처럼 서로 머리를 맞댄다 공격과 방어가 뒤엉킨다 아이
정수리로 들어와서 어미의 목으로 비껴나간다
정수리에도 목에도 꿈틀대는 다족류들, 고독을 가지고도
고도를 가진 우울이 거적처럼 그 위를 지나간다 쥐
와, 쥐똥과, 쥐똥나무가 울창해진다 (P.44 )
묵언정진
1
나무 밑둥에 은근한 잉걸불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서서히 끓어오를 수 없다
뚜껑을 닫고 끓이는 관이 긴 물주전자
깊이 우려져 김이 솟는다
폭발하는 하얀 꽃, 묵언정진이다
2
꽃이 지자 거짓말처럼 새잎이 났다
뚜껑을 열어 식히는 물주전자
초록 잡내가 흥건하다
내 눈이 닿아서 이제 할말이 없어졌다
수염뿌리가 한 뼘은 길어졌겠다 (P.67 )
-천수호 詩集, <우울은 허밍>-에서
오늘의 결심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절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밌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P.44 )
밤, 기차, 그림자
밤은 무엇을 하는가
기차는 무엇을 하는가
좁은 골목은 무엇을 하는가
물안개 속 강은 무엇을 하는가
물을 건져 올리는 그물
손 닿지 않는 바다와
하늘은 무엇을 하는가
사과는 썩고
피부약은 뚜껑 밖으로 흘러넘치고
내의는 뒤집히고
구두는 떠나가고
어둡던 보관창고가
한꺼번에 열려버린 그날
그 밤에 비는 무엇을 하는가
눈송이들은 무엇을 하는가
기차는 무엇을 하는가
기차를 탄 밤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세상은 무엇을 하는가
세상이 무엇을 할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내가 무엇을 할 때
세상은
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P.54 )
연애의 횟수
그 나라 입국할 때는 기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밤의 횟수를
가령 검은 눈물 자국
베개를 지나
침대 밑으로 죽은 팔처럼 길게 흘러내린 팔
그렇게 죽음의 태도를 지녔던 첫 결별의 밤
스물한 살의 봄이었는지
열일곱 살의 책가방 든 가을 고궁이었는지
서른다섯 살까지는 몇 번의 태도가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는 누구였는지
온 생애 단 한번의 태도도 없었던
불행한 자를 제외한 누구나
실연의 피격(被擊)과 가격(加擊)의 횟수를
실명과 주소까지 낱낱이 기입해야
골목의 모양과 부피가 다른
지도를 허락하는
밤의 입국심사서를 써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P.66 )
시인의 봄
낯선 여직원과 서류 때문에
말다툼할 순간
유리창과 백목련 자목련 햇빛들
몸 기울여 구경 온다
입을 다무는 쪽만이 시인이 되는 것
그대도 어디선가 분홍색 뺨이고 자목련이며
풍선 같은 애인이고 불쌍함이리라
소금 심어
벚꽃 한 됫박 얻는다 (P.104 )
즐거운 이명
작은 검정 프라이팬이 귀에 들어앉아
나뭇잎을 뒤집어가며
햇빛도 굽고 빗물도 달구고
사과도 파먹고
포도씨도 멀리 뱉고 구름도 작대기로 털다가
경축 전보 왔다고 초인종도 몇 번씩 누르고
아니 위독 급상경요망이었던가
여하튼
전깃줄 위 참새들인가 했더니
까마귀 떼
턱시도 잔뜩 차려입고 나와서
빠른 즐겁게 그러나 약간 미쳐가는 듯*
- *피아노시모 페르덴도시 콘 모토
종일
불붙은 성냥개비를 휘둘러대는 마술 (P.122 )
모래, 낙타를 짜다
초겨울 비 오는 점집
그 옆 야채가게
부서진 의자 위에 새끼고양이 한 마리
아슬아슬하게 웅크려 잔다
그 몸 위에
술꾼 아저씨 비틀대며
커다란 배춧잎 한 장 주워다 가만히 덮어준다 (P.142 )
-김경미 詩集, <밤의 입국 심사>-에서
추석 지나고 어느덧 또 주말이다. 동네에는 가끔씩 도토리를 주워와 햇볕에
말리는 모습들이 익숙하다. 산에 가 도토리를 줍지는 안 하지만, 그래도 이웃
친구가 도토리를 반으로 자를 때 옆에 앉아, 그 반쪽의 열매에서 나오는 숲의
싱그러운 냄새를 즐겁게 맡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는 어느덧, 가을.
어제는 모처럼 홀가분한 시간이 나, 녹두빈대떡과 막걸리를 마시고 그간 받은
시집 몇 권을 찬찬히 읽었다. 손에 쥐어지는대로 읽다보니 어쩌다 모두 여시인
들의 시집들이다.(시인에 뭐, 남시인 여시인 구분할 일 있겠냐만) 사람마다 다
모습이 다르고 삶이 다르고 느낌이 달라 더욱 즐겁게 읽는다.
그리고 아침에 함께살기 님의 <아파트라는 시멘트덩어리 + 관념지식인 차윤정>
을 읽으며 2012년에 차윤정이란 사람의 인터뷰를 읽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울컥, 했다. 김경미 시인의 시 '오늘의 결심'이 새삼 더 다가오고, '밤, 기차, 그
림자'를 읽으며 다시 생각해 보는 그런 가을의 아침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세상은 무엇을 하는가/ 세상이 무엇을 할 때 나는 무엇을 하는
가/ 내가 무엇을 할 때/ 세상은/ 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하는가, 곰곰 생각을 하는 가을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