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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마을 - 에밀리 디킨슨이 사는 비밀의 집
도미니크 포르티에 지음, 임명주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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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환희로 시작했다가 죽음으로 끝난 책. 놀랍지는 않았다. 죽음과 함께 사는 사람만이 종이를 집어드는 법이므로.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 12월의 아침 에밀리는 창밖을 내다보다가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살 아이들의 환영을 봤다. 아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땅에 묻어버린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그해의 첫눈이 내릴 때 에밀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모든 시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열에 들뜬 시간, 잠이 오기를 기다리며 잃어버린 시간, 악몽을 꾸는 시간, 긴 침묵의 시간, 자신이 태어난 시간,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시간이 기나긴 끈이 되어 에밀리의 목을 조여왔다. (...) 괘종시계는 계속해서 남겨진 시간을 가리켰고 에밀리는 여전히 시간 보기를 거부했다.”

그런데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종이로 만든 마을》은 쓴다는 것보다 쓰지 않을 수 없음을 환상적인 종이의 언어로 들려준다. 나만의 마을에 간직하고 싶은, 여름의 햇살처럼 눈부시고 따가우면서도 겨울의 첫눈처럼 소복하고 서늘한 문장들이 많았다. 현실의 여러 집을 전전하는 작가 도미니크 포르티에는, 홈스테드와 종이의 집을 오가는 에밀리를 상상하여 종이로 만든 마을을 만들어냈다. 언어를 통해서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듯, 도미니크를 거쳐 미지의 존재인 에밀리를 이해하는 과정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그 세계는 에밀리로 시작되어, 종이로 끝난다.

“책 한 권에는 백 권의 책이 들어 있다. 책은 항상 열려 있는, 절대 닫히는 법이 없는 문이다. 에밀리는 십만 개의 바람이 들어오는 방에서 살았다. 그래서 항상 담요가 필요했다.”

“글자는 종이에 핀으로 고정하기에는 너무 연약한 존재다. 글자는 나비처럼 방을 날아다닌다. 혹은 옷에서 잠깐 튀어 나온 벌레처럼 기어다닌다. 글자는 색이 옅고 모험심이 부족한 나비다.”

“그것이 시라는 것을 에밀리는 알고 있다. 시는 시인의 화려한 언어 속이 아니라 얇은 알 껍질 속에, 태어날 존재의 아주 작은 심장 속에 숨어 있다.”

종이로 만든 마을은 완전하지 않다. 가장 작고 영원한 것과 별개로.
티티새. 민들레. 벌. 몽상. 우리가 마을을 채우고자 원하는 것들은 종이에 붙일 수 없다. 손끝에서 개발되는 언어만이 건축의 재료다.
종이로 만든 마을에서는 살금살금 걸어야 한다. “종이 마루에 구멍이 날까 봐 까치발로 들어”가야 한다. 쓰는 사람이라면 성큼성큼 빠르게 걷는 법이 없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종이 위를 걷는 사람과, 그냥 길 위를 걷는 사람.

“에밀리는 종이에 글을 썼다. 하지만 봄의 소나기와 거센 가을 바람을 잡아놓을 만큼 커다란 화첩을 만들 수 없었고, 눈을 납작하게 눌러 종이에 꽂아 표본집을 만들 수도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가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에밀리를 사라진 여름과 다가올 겨울, 두 개의 영원한 시간이 관통했다. 에밀리는 고개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여름과 겨울,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풀잎으로 만들어진 줄 위를 조심조심 걸어야 하니까.”

에밀리 디킨슨의 직업란에는 ‘집’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에밀리의 신상정보가 요약된 한 장의 종이와, 여러 종이를 거쳐 전해오는 에밀리의 시에 에밀리의 일평생이 담겼다. 결국. 우리가 삶에서 유일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작고 잘 구겨지는 종이가 전부다.
종이로 만든 마을의 끝에는 린든이 있다. 린든은 지도를 제작하는 회사가 다른 업체에서 표절하지 못하도록 새겨넣은 고유 부호 같은 것이다. ‘린든’이 있는 이상 어느 누구도 같은 지형을 보여줄 수 없고, 보여준다 해도 복제라는 것이 들통 날 뿐이다. 종이로 만든 마을에서, 에밀리는 마침내 린든에 당도한다.
마지막 페이지는 끝내 넘겨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과 죽음, 이 두 가지 불행 중 너는 무엇을 선택하겠니?” 언젠가 에밀리는 물었다. 종이로 만든 마을에서는, 둘 다 선택할 수도,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불변한다. 하루는 영원이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인생 전체가 펼쳐진다. 매일 밤은 작은 죽음이다. 하지만 또 날이 밝으면 에밀리는 다시 눈을 뜨고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기회지?”

“에밀리는 ‘쓴다’는 것은 목적어가 없는 자동사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다고 오래전에 결론지었다.”

매일 아침, 우리 앞에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진다. 나이가 들어도, 누군가와 함께하거나 이별해도, 다른 곳으로 떠나와도, 어김없이 딱 한 페이지가 있다. 그것을 누가 읽어주느냐는 두 번째 문제다. 가장 작고 영원할, 나만의 안온한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내가 만들어낸 유일한 집이 나의 무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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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론 - 닥치고 성공해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삶
손수현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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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이렇게 혐오로 점철된 책을 쓸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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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대남은 동네북이 되었나 -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대한민국 이대남 보고서
이선옥 지음 / 담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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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gus0829 2022-11-21 1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82년생 김지영이나 82회독 하세요

maibara 2022-11-21 2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점 테러하러 왔다는 게 너무 티나 ㅋㅋㅋ
 
입지 센스 - 한 번의 선택으로 부의 계급을 높이는 부동산 투자의 감각
박성혜(훨훨) 지음 / 다산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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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하단 이미지 실제 사진은 아니죠...? 아니어도 문제고 맞다면 더 충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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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우리 함께 오길 잘했다 - 베테랑 트래커 장군이와 함께한 알프스 여행
이수경.이장군 지음 / 들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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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과 트래킹이라니, 전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_ㅠ 정말 대단하세요! 늘 인스타로 구경만 했었는데 책으로 읽는다고 생각하니 매우 설렙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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