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BE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

 

출간 전 연재 7화_연대는 역사다!

 

 

 

지금 한국은 사회적 재앙이 현실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국민들을 농단한 세력이 하루가 멀게 새로운 비리가 드러나 막장성 드라마 못지않다. 아니, 드라마는 편하게 누워서라도 볼 수 있지만, 현실로 다가온 재앙은 몸과 마음마저 불편하게 한다.

 

급기야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으로 모였고, 선거권이 없는 청소년들까지 미래라는, 어른들이 오롯이 짊어지지 않았던 출사표와 함께 거리에 모였다. 그러나 광장엔 성별과 나이가 없었다.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은 달랐지만, 내가 사는 공동체를 위한다는 마음은 하나였다.

 

비로소 국민통합이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이 그토록 외쳤던 공약 하나가 이뤄진 현장이다.

 

 

 

 

 

자연재해가 발생한 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공동체 지향의 행동양식들은 18세기 미국의 작가이자 국제적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이 그의 혁명적인 글에서 고무하고자 했던 바로 그런 미덕이다.

 

2차 세계대전과 자연재해에서 사회가 붕괴된 모습을 관찰해 사회 회복 탄력성에 관한 폭넓은 이론을 만들어 낸 찰스 프리츠도 이러한 점에 주목했다.

 

그는 현대 사회는 항상 인류의 경험을 특징지어왔던 사회적 유대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각종 재난과 재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고전적이고 유기적인 관계 맺기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그러니까 재난은 고통받는 자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이 공동체는 개개인으로 하여금 타인들과의 엄청나게 마음 든든한 일체감을 경험하도록 해준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실존에 대한 위협과 맞서게 되면서, 계급의 차이는 잠시 사라지고 소득 격차는 아무 상관도 없는 쟁점이 되며 인종차이도 무시하게 되어 개개인은 단순히 그가 집단을 위해 무엇을 할 의향이 있는지에 의해서만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프리츠는 알아냈다.

 

그리고는 이렇게 느꼈다.

 

 

 

 

 

 

이것은 잠깐이긴 하지만 일종의 사회적 유토피아다.

보통사람들이 매우 흡족하게 느끼는 유토피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겐 완전한 치료제 역할을 하는 유토피아 말이다.”

 

 

 

 

 

 

1970531, 칠레 중부의 도시 융가이를 초토화시켜버렸던 대지진 및 암석 슬라이드 사태 연구에서도 프리츠가 내린 결론이 옳았음이 다시 증명되었다.

 

융가이 주민의 90%가 거의 즉사했고, 인근 지역에서 약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그 지역이 핵 공격을 받을 경우에 예상되는 피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암석 슬라이드 사태로 공기 중 먼지가 얼마나 많이 생겼던지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없었고, 융가이의 생존자들은 며칠 동안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자력으로 견뎌야 했다.

 

이처럼 끔찍스러운 진공 상태에서 새로운 사회질서가 싹텄다

개인의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은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인류학자 앤서니 올리버-스미스는 고통 속의 형제애라는 논문에서 그렇게 적고 있다.

 

또한 이 위기는 그 때문에 생겨난 초기 단계 공동체에 대하여 신분이나 지위를 파괴하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당장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원주민 인디언, 하위 계급과 상위 계급 등이 협업 형태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자…… 일종의 형제애 같은 감성이 분위기를 지배했다.”

 

 

 

 

 

 

이렇게 사회가 붕괴할 위험에 처하면 나타나는 이타적인 모습들은 인간의 본능인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서로서로 도우며 살게끔 만들어진 측면이 너무나도 강렬한 데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사회적 혜택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을 위해서도 그처럼 흔히 자신의 목숨까지 거는 것이다.

 

, 진화론적으로 생존을 위한 가장 합리적으로 발달한 본능인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우리의 사회를 붕괴시키려는 국정농단 세력이 득세하고 있고, 분노에 찬 국민들이 들불처럼 분연히 일어섰다. 광화문의 촛불은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생존과 번영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연대의 촛불인 것이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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