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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3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기풍 ㅣ 미생 3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알려드립니다. 제 글은 이 책에 대한 서평은 거의 없고, 그냥 제 이야기만 써 놓은 것 입니다. 리뷰이나 리뷰가 아닙니다. 혹시나 책의 정보를 얻고 싶어 보시는 것이라면 먼저 미안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제1장 곤마(바둑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돌)
'나는 사랑에 실패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집착을 한 것이 아닐까? 그게 진정 사랑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후후 사랑이라...어찌보면 나의 집착을 이쁘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나의 착각을 아름답게 기억할려고 내가 만든 포장이지 않을까.
꽤 기나긴 시간이었다. 어떻게 흘러갔는 지도 모를 시간들...
무서운 것은 내 자신이었다. 영화나 TV에서 종종 등장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모습이 매일 24시간 내 눈 앞에 있었다. 내가 이리 집중력이 좋은가..어찌 이리도 그녀가 나타나는가. 뇌에 경련이 일어났는가. 왜 이러는가.
일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 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 이 시간에..나를 궁금해 하기는 한 것일까?' 오로지 그 생각들 뿐...심각한 병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나 스스로에게 공포스러웠다.
그 생각은 나를 지배하고, 그 생각만 하게 하였으며, 그녀가 누군가에 웃는 모습들, 나에게는 냉담했던 그 모습들, 하나 하나 옆에서 눈 앞에서 보이고 또 보였다.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들, 또 다시 기억해 내고 속으로 반복해서 그 의미는, 그 뜻은? 하며 혼자 주석을 달고 해석을 하며, 미친듯한 정신 상태를 보였다.
정신병 책이야 워낙 좋아해 그런 류의 서적은 종종 읽었지만, 망상증이라고 할까? 정신착란이지 않을 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오로지 틈만 나면 그 생각들로 난 생활을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담배를 피고 또 담배를 피고, 누가 내 옆에서 무슨 얘기를 해도 들리지도 않고 반은 넋이 나가 아무 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인지, 난 지금 무얼하고 있는 것인지...'곤마'다.
'사랑을 떨구는 그 순간, 세상은 허물을 벗었다. 나에게만 감춰졌던 세상은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에 대한 생각에 뒤이어 오는 다음 단계는 나의 신분에 대한 한탄, 나의 처지에 대한 한탄, 용기 없는 내 성격에 대한 한탄...그 심각한 패배 의식.
관리사무소에 우두커니 앉아 사람도 오지 않고, 그냥 그 고요한 적막만이 나를 감싸고 있는 곳에서 난 그렇게 오랜 시간 홀로 앉아 있었다.
길에서 우연히 한 번, 딱 한 번 말이다. 신이 실수를 한 건지, 아니면 무언가 나보고 죽으라고 저주를 하는 존재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과 건널목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연락을 끊고 내가 도망간 지, 한 달만에...
길 건너편에 사람들 속에 있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난 어떤 사람들 속에 있어도 그 사람은 한 눈에 알아본다. 이미 몇 번이나 길에서 그리고 어디에서든 그 사람과 비슷한 헤어스타일, 비슷한 체형의 여성의 뒷 모습을 보면 그녀가 아닐까란 생각에 계속 봤던 나였다. 그 사람은 100명의 무리안에, 아니 1000명의 무리 안에 섞여 있어도 나는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날씨가 좀 쌀쌀한 그 날, 검은 색의 하프 코트를 입고, 조금은 길어진 머리, 안에는 베이직 색의 티를 입고,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귀에는 이어폰을 꼽은 채 핸드폰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난 그녀와 정반대의 길에 있었고, 신호가 바뀌면 마주쳐 지나가야 했다.
'도저히 갈 수가 없다. 저 사람 앞으로 지나갈 수가 없다'
수 십번이나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거울을 보며 우연히 혹 정말 우연히 마주친다면 그냥 상쾌하게 지나가리라. 난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다. 난 당신에게서 도망가지 않았다. 난 당신이 싫어서 그래서 난 떠난 것 뿐이다라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외쳤던 나였다.
초조한 마음에 그녀를 한 번 봤다가, 신호등을 보며 난 그녀를 하염 없이 바라봤다. 이쁘구나, 참으로 이쁘구나...라며..
차량의 신호를 알리는 신호등이 빨간 불로 넘어가면 내 운명의 신호등은 파란 불로 바뀐다. 차량 신호등이 노란 불로 갈 때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메세지를 다 보냈는지, 고개를 들고 좌우를 살피는 것 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눈에 새긴 채 뒤를 돌아 가장 가까운 골목길로 뛰다시피 갔다.
'공부를 하며 알바를 겸한 때문도 아니다. 용돈을 못 주는 부모라서가 아니다. 아버지가 일용직이고, 어머니가 몸이 아프셔서가 아니다. 그럼 너무 아프니까. 그래서 난 그냥 열심히 하지 않는 편이어야 한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 뿐이다.'
왜, 무엇 때문에 뛰다시피 들어간 골목길에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눈물이 펑펑 나왔던 것일까. 왜 내 눈은 괜찮다는 내 마음과 다르게 홍수 터지듯이 눈물이 나왔던 것일까...골목길로 또 골목길로 어디인 지도 모르는 길을 굽이 굽이 걸어가면서 눈물이 계속 나왔다.
영화보면 멋있게 울던데...난 그것도 아니다. 진짜 주르륵 주르륵 아주 추하게 계속 흘렀다. 소리도 내면서...울고 있었다.
저 골목길에선 담배 피던 중학생들도 놀라고, 이 골목길에선 집에 나와 쓰레기 버리던 아주머니도 놀라고, 사람 여럿 놀래키며 난 울면서 걸어갔다. 소리 내면서...
며칠 뒤, 길을 가다가 분홍색의 예쁜 여성용 목도리를 파는 것이 보였다. 하나를 사서 예쁜 쇼핑백에 담았다. '미안하다'란 짧은 쪽지를 목도리를 담은 쇼핑백에 넣고, 출근하기 전 새벽시간에 그녀가 일하는 병원 문 앞에 걸어 놓았다. 그녀는 건널목에서 목도리를 안하고 있었다. 그냥 그게 신경이 쓰였다.
새벽, 환경미화원 차량들이 지나가는 도로에서, 홀로 걸으며 그 씁쓸함, 뭐라 부르기 힘든 그 감정을 추스린 채, 정말 난 또라이다. 뭐가 미안한 것이냐...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희미한 기대가 있었다. 그녀도 내 연락처를 알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은 다 이어져 있으니 말이다.
혹시 연락을 주지 않을까 하는 그 나약한 미련, 그 사람이 날 알아봐 주길 원하는 그 쓰레기 같은 마음.
3일, 5일, 7일 시간은 흘러도 매일 난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앉아 있었지만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대리 부르세요 라는 대리운전 업체 문자만 금요일 아침에 정확하게 올 뿐....
제2장 우리 술 한잔 할래요?
겨울의 어느 날 화창한 토요일, 혼자 근무이기에 정신 놓고 또 앉아 있었다.
평온한 관리사무소의 벨은 울리고, 전화를 받으면 언제나 격정적인 목소리의 주민들의 민원.
"아저씨! 빨리 좀 와 봐요! 빨리!"
이 날카로운 목소리, 분명 화가 났어. 관리사무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화난 아주머니.'
또, 뭐야. 분명 별 거 아니다. 화장실이 막혔거나, 아님 윗 집에서 베란다 물 청소를 해서 자기 베란다로 물이 떨어진다 거나 그런 일이다.
아주머니가 콜한 아파트 앞에 가 보니 그 분은 어떤 아이를 앞에 놓고 손가락질을 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 병신 새끼! 이 병신 새끼!"
다가가는 나에게는 저 단어만 크게 들렸다. 얼굴은 자연스레 찌뿌려졌다. 왜 저리 욕을 하는가, 도대체 당신은 뭐가 그리 불만이신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아이는 초등학생처럼 보였다. 그러나 좀 묘했다. 윗도리는 잠바에 목도리까지 하고 바지는 입지 않은 채 회색빛 찬란한 내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가 아주머니가 저렇게 욕을 하는데도 왠만한 아이들은 울며 엄마 찾기 바쁜데. 이 녀석 당당하게 이 아주머니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뭐냐, 너 초등학교 일진이냐...'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들으니 이 꼬마가 엘리벨이터를 각 층마다 누르고 거기에 타서 1층에 내리면 다시 올라가는 것을 누르고 한다는 것이다. 그걸 반복을 몇 시간 째 자기가 엘레베이터를 타려고 보니 이런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근데 왜 이리 화를 내시는건지...이해가 안 간다. 살다 보면 뭔가 자신의 인생에 의미보다 자신이 사는 곳이 의미가 더 큰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이 아주머니 열변의 핵심은 이런 얘들 때문에 장애인 아파트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후후후 아주머니 토요일 날, 날 유재석 대신 웃겨주시는 건가요? 여긴 노인 및 장애인들이 많이 살아요. 어디든 이 분들은 다 살아요. 왜요? 당신은 아이에게 이렇게 욕하는 정신병자 아닌가요? 당신도 정신 장애자이지 않나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뜨겁게 무엇인가가 말이다. 한번 꿀꺽 삼키고 웃는다. 미친듯이 말이다. 어색한 미소, 돌아버릴 것 같은 어색한 미소로 아주머니를 진정시켜 보내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꼬마야, 그렇게 엘레베이터를 누르면 안 돼. 집은 어디니?"
"......"
꼬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다. 이 자식 진짜 일진인가? 근데 이 녀석 눈도 나를 보지 않고 있다. 아까부터 다른 곳만 보고 있다. 초점이 없다. 뭐냐, 토요일부터 어디서 당신들은 솟아나 나를 당황하게 하는가.
결국 몇 번이나 물어봐도 이 녀석은 아무런 답변도 없고, 눈 하나 깜박 안하고 반응이 없었다. 콧물은 흐르고 있고, 짧은 스포츠 머리, 덩치는 좀 크다. 초등학교 3, 4학년 같은 이 녀석...추운 지 다리를 떨고 있다.
관리사무소에 데려와 경비 반장님 휘하 경비원 분들에게 물어봐도 이 녀석을 아무도 모르신다. 반장님은 어른의 스킬을 보여 주신다면 아이가 말을 하게 끔 한다며 재롱도 떠시고 말도 거시다가 자기가 참지 못 해 소리를 버럭 질러 아이를 울려 버렸다. 지옥이다. 지옥이야...
해는 떨어지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녀석에게 과자를 먹이며 TV를 보여주고, 이걸 어쩌냐, 이제 경찰을 불러야 하나...그러고 앉아 있었다.
"루쉰p 반장!!! 찾았어!"
오! 경비 반장님 역시나 베테랑이다. 그런데 뒤에 누군가 따라 들어왔다. 어깨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뭔가 겁 먹은 듯한 표정의 아가씨 한 명이었다.
"아, 글쎄 이 분이 누나인 가봐, 우리가 비번일 때 이사를 왔어, 그래서 우리가 몰랐던 거야. 자기 동생 찾아서 초소에 왔더라구."
아, 그랬구나. 그래서 우리가 몰랐구나. 아가씨는 조용한 목소리로 '죄송해요'하고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근데 이 녀석이 웃으며 달려오더니 누나 손을 꼭 잡고 뒤도 안 돌아보고 인사도 안하고 간다. 짜식아, 난 너랑 그래도 오후를 보냈단 말이야...뒤라도 돌아봐죠...
그 남매가 나가고 경비 반장님 자신의 조사 결과를 발표 하신다. 브리핑 시간이다.
"아, 글쎄. 저 꼬마가 머리가 모자른 장애인이래. 지체 장애라 뭐라나 그래서 집에 다가 놓고 갔는데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간다네..에유, 가족들이 고생이지 뭐. 아 그리고 저 아가씨 있잖아. 저 사람도 장애인이랴. 왼팔이 없어. 팔이...아 근데 모르니까 당하는거지 뭐, 돈도 제대로 못 챙기고 회사만 그만 두워다고 하던데..하여튼 지랄 같은 세상이야..."
눈치를 못 챘다. 팔이 없는 건 보지를 못했다. 경비 반장님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저 아이는 지적 장애 아동이었다. 어머니랑 누나랑 같이 사는 데 누나는 24살 정도. 나이 차가 많이 난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어떤 기계에 팔이 빨려 들어가 팔꿈치까지 손이 잘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지방에 자주 내려가 장사를 한다고 한다.
우울한데 더 우울해 졌다. 아주 깊이 우울해 졌다.
토요일에 내 근무일 때 그 녀석 혼자 나와 있으면 불러다가 TV를 보여주고 과자를 사 주었다. 그러면 그 아가씨는 항상 저녁 때마다 '죄송해요'라고 한 마디만 한 채 그 녀석을 조용히 데려갔다. 여전히 그 녀석은 나를 뒤돌아 보지도 않고, 다만 과자는 꼭 챙겨서 갔다.
'죄송해요'라고 가는 그 아가씨 왼팔을 보면 비어있다. 잠바에 왼팔 부분이 휭하니 비어있다. 난 웃으며 보내고 관리사무소 밖을 나와 담배를 폈다.
'산재 보험은 제대로 받은 것일까? 저 아가씨 회사에서는 도대체 무얼 해 준 것일까?'
그리고 어떤 날은 동생을 데리고 나와 관리사무소 앞에서 한 손으로 그네를 밀며 웃는 동생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 아가씨를 보면 사랑에 집착하는 내 자신...그런 자신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술 한잔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냥 좋아서 그런게 아니다. 동정심도 아니다. 그냥 같이 술 한잔을 하고 싶었다.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 허나, 지금의 자신을 보며 누군가와 술을 먹는다는 것, 내 깊은 어둠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욕심. 저 사람도 나보다 더 깊은 어둠과 싸울텐데 말이다....한심한 짓거리...
자책을 하고 담배를 폈다.
제 3장 착수
오랜만에 편집국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잡지사가 망하고 흩어진 채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오셨다. 서로 성공하고 만나자고 했는데 벌써 성공하신 것일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을 품고 종로의 빈대떡집으로 향했다.
먼저 와서 앉아 계신 국장님의 모습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으시다. 불 타오르는 듯한 꼬불꼬불한 곱슬머리, 무테의 안경. 네모난 얼굴. 저 타고난 웃음은 볼 때마다 환하다.
소주를 서로 번갈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빗소리와 함께 소주는 잘도 들어갔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다. 내 어둠을 누군가에게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국장님께는 더욱 더 말이다. 나에게 항상 격려를 해 주신 분이셨다. 고졸 출신의 기자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정말 훌륭한 잡지사 기자가 되자! 막 쓴 글이라 할 지라도 하나 하나 수정해 주시고 잡지의 기본을 가르켜 주신 분이었다.
이런 분에게 내 어둠을 던질 수는 없다. 근데 내 마음은 왜이리 약한가. 국장님은 눈이 날카롭다. 뭔가 우울하고 말수가 적은 나를 미심쩍게 생각하셨다.
"루쉰P 기자, 왜이리 우울했졌나? 관리사무소 직업병인가?"
이 분은 여전히 나를 기자라 불러주신다. 근데 왜 난 이 소리에 눈물이 나온 것일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국장님은 당황하셨다.
말이 터져 나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난 무슨 정신병에 걸렸는지. 말하고 또 말했다.
국장님은 처음엔 당황하시더니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담배를 피셨다. 밖에 시끄럽게 떠드는 연인들을 흘끗흘끗 보시면서 말이다.
내 이야기를 모두 마친 후 국장님은 소주를 한 잔 입에 탁 털어 넣으셨다.
"루쉰P 기자, 내 이야기 하나만 할까?"
울먹이는 나를 앞에 둔 채, 주변 사람들이 '쟨 뭐야?'라고 쳐다보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장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루쉰P기자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냥 내 이야기야. 들어줬으면 해서. 난 말이지 20대 중반에 처음 여자친구를 만났어. 5년을 사귀었어. 그 때 내 사정은 말도 아니었어. 맨날 책만 읽고 샀지. 생활을 하는 변변한 직장이 있나. 아니면 딱히 뛰어난 학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야.
남자친구로서는 정말 찌질이가 따로 없었지. 여자친구는 동네에서 내가 주도했던 문학 모임에서 만났어. 그 때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 데 책을 읽어 보고 싶었는지. 그 모임에 후배 소개로 왔더라고. 난 소설을 쓴 답시고, 자신감만은 넘쳐 있었지.
몇 번인가 나에게 무슨 책이 좋냐고 물어 보길래 여러 책들을 소개시켜 주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사귀고 있었지. 그 사람은 나를 인간 그 자체로만 봤어. 내 환경, 직업, 돈 이런 건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 그냥 내가 사랑스럽고 좋은 거였지.
자기가 힘들 게 일한 돈으로 맨날 나를 밥 사주고 책 사주고 보통 정성이 아니었어. 그리고 내가 반드시 소설을 써서 성공할 거라고 아주 확신에 가득 찼었지 광적일 정도로 말이야.
20대 중반에 만났으니 그녀는 참 예뻤었지. 근데말이야. 루쉰P 난 최악의 인간이었어."
소주 잔을 바라보고 국장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도 뭐라 말 하기가 그랬다. 시끄러운 여러 연인들의 소리. 내 눈물은 그쳐 있었고, 난 조용히 국장님의 소주잔에 소주를 따라 드렸다.
"우연찮게 잡지사에 기고한 글이 채택이 됐지. 그리고 잡지사를 출입하게 됐어. 30살 때 였으니 그 때까지 직장도 없던 내가 얼마나 신이 났겠어. 글을 쓰든 못 쓰든 잡지사에 가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고 만나고 뜬구름 잡는 얘기만 신나게 했지. 사상을 논하고, 사회를 논하고 말이야.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그런데 말이야.
거기서 새로운 여성을 만났지. 내 글을 실어주는 담당 기자였지. 안경을 쓰고 새침하게 생겼는데 잡지에 글 올리고 혹은 작가랍시고 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았지. 그런데 그녀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업무상 필요할 때는 웃거나 말을 잘 해도 자신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지.
남자들은 그런데서 매력을 느끼는 지 더 안달이 났어. 없는 돈들에 옷들을 빼입고 와서 저녁을 먹자, 어디를 가자 그런 말들만 지껄였지. 그런 무리들을 보며 나는 한껏 비웃어 주었지. 난 처음에는 그 여성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어. 오로지 내 글, 내 문학이 나올 수 있을까란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지. 어떻게 써야 할까? 어떻게 어디서 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매일 고민이었지.
그러다가 그녀와 그런 것들을 놓고 이야기를 하게 됐지. 근데 그게 실수였어. 그냥 그 작품들 그런 것들에서 대화가 멈춰야 했는데 난 멈추질 못 한거야. 대화가 깊어지고 깊어 질 수록 서로 사는 얘기, 서로 생각한 것들 그런 것들이 이야기가 시작된거지.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거야. 거기서 내 병이 시작됐어. 그 때 여자친구를 만나지 5년 째 였고, 난 공기가 익숙하듯이 내 여자친구에게 너무나 익숙했지. 존재하는 것도 모를 정도로 생활이었으니까.
잡지사에 있는 이 여성과 이야기를 하며 여자친구와 대화할 때는 못 느꼈던 매력을 느꼈어. 그리고 다른 남성들은 이 여성과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안달인데 난 아주 자연스럽게 이 여성하고 그런 사이가 됐다는 것에 대한 승리감? 그런 비슷한 것도 취하고 말이야.
내 안에서는 악마가 자라나기 시작했지. 내 여자친구가 하찮아 보이기 시작한거야. 이 여성과 대화하며 막히는 것이 없는데, 여자친구는 맨날 밥은 먹었냐, 아니면 오늘 일은 어땠냐? 물어보는 그런 대화가 나는 싫증이 나기 시작했어.
사람은 참 무서워. 그 땐 내가 정신이 돌았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그 후에야 하게 됐지. 이 잡지사 여성과 대화를 하며 이런 게 사랑일까라는 착각을 해 버린거야. 무섭게 말이야. 그리고 그 때부터 내 여자친구에 대해 시선이 변하기 시작했어. 나를 위해 희생해 주는 것도 바보 같아 보이고, 책도 안 읽고 무식해 보이고, 대화도 안 통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내 변화를 여자친구도 눈치를 챘어. 하지만 이 사람은 워낙 수줍고 내성적인 사람이라 내색은 못하고 나에게 더욱 헌신적으로 해 주었지. 근데 난 여자친구에게 돈을 받아서 잡지사 여성하고 영화를 보러 가고 밥을 먹고 그렇게 다녔어. 내 여자친구가 고생해서 번 돈으로 말이야."
싸다귀를 날리고 싶었다. 진짜 내가 존경하는 국장님만 아니었다면 난 싸다귀를 양 쪽으로 날렸을 것이다. 끔직한 이야기였다. 국장님은 조용히 담배를 물었다.
"여자친구가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하면, 어쩔땐 측은 한 마음이 들어 자치방으로 데리고 가서 안심시키는 대화를 하고, 섹스를 했어. 어디서 읽었는지 모르지만 마치 욕정이 사랑인 것처럼 가장을 해서 여자친구를 안심시키고 내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 그런 짓을 했지. 그러고 그러면서도 난 그 잡지사 여성과 계속 만났지.
결국 난 여자친구를 보면 그 잡지사 여성이 생각나고 그 양 쪽에서 갈팡지팡을 하다가 여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해 버렸지. 울면서 왜 그러냐고 묻는 그 사람에게 싫증났다고 그러니까 그만 만나자고 했는데 서서 울고 있는 그녀를 두고 냅다 뛰어가 버렸어. 그게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
그러곤 며칠 뒤에 그 잡지사 여성에게 만나고 싶다고 고백을 했지. 어떻게 됐을 것 같나? 루쉰P. 하하하 루쉰P기자가 만났던 그 여성이 했던 말과 비슷하게 그녀는 나에게 했어. 처참했지.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그리고 내가 사랑한 줄 착각했던 사람에게 버림을 받은거야.
난 아주 병신이 됐어. 병신이 말이야. 그리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갑자기 밀려오더군.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어. 내가 그 사람을 배신했던 그게 용서가 안 되더군. 그리고 이런 쓰레기 같은 나를 사랑해 준 그 사람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어. 아마 그 때 내가 돌아갔다면 그 사람은 나를 용서해 주었을 수도 있었어. 그만큼 나를 사랑해 주었으니까. 근데 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거지. 술에서 깬 사람처럼 내가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르고 이렇게 살 수가 있는가. 자신이 보이길 시작한 거지.
글도 쓸 수가 없었네. 내 모멸감에, 그리고 그 잡지사는 발을 끊었고, 지방으로 내려가서 직장에 취직해 일을 했어. 루쉰P기자처럼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 매일 매일 괴로웠지. 지옥이었어. 하루에도 수백번 그녀를 찾아가 용서를 빌고 싶다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가기를 여러 번 이었지만 차마 가지를 못 했어.
그 때만큼 지독한 나를 본 건 처음이었네. 아주 지독한 인간이었어. 최악이었고. 나도 놀랬지 내가 이런 인간이란 사실에 말이야..."
비는 하염없이 쏟아지고 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서로 밖을 보며 그냥 앉아 있었다.
"내가 다 지난 이런 소릴 하는 건. 나 같은 인간도 있다는거야. 루쉰P기자. 자네는 이런 쓰레기 같은 나와 같지는 않잖아.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한거야."
속으로 '정말 심하긴 심했다.' 란 생각에 아무런 답변을 못했다.
국장님은 이야기를 마친 후, 갑자기 나에게.
"루쉰P기자, 우리 약속 기억나지. 서로 성공해서 보자고한거. 자네가 관리사무소에서 일을 한다는 건 아는 사람들을 통해 들었어. 난 자네가 노무사든 뭐든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 사람이란 걸 알아. 그리고 난 자네가 아까워. 혹시나 나를 믿는다면 한번 내가 주는 기회를 받아주겠나?"
국장님은 이야기인 즉슨 친구가 주무관인데 대학교 행정직 직원을 뽑는데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하시기에 나를 추천하고 싶다고 하셨다.
사랑에 대한 배신감 느끼는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니,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시고 내가 더 당황했다.
국장님은 계약직이라고 했다. 2년 근데 대학교 행정직이고 6시 칼퇴근이기에 공부를 하는 걸 도전하며 이 쪽으로 꼭 가보라고 하셨다. 관리사무소는 답이 없다. 그게 국장님이 날 만나고 싶어했던 핵심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국장님의 그 사랑과 나의 직장 추천과 도대체 뭐가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비를 맞으며 국장님과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오는 데 빗물에 눈물이 흘려가고, 국장님은 전철역 앞에서 혀가 꼬여가며 나에게 말했다.
"사람은 살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야. 루쉰 선생의 이 말 기억하지. 절대로 지금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 내 젊을 때 모습 같아. 그건 아니었네. 반드시 부수고 나가. 우리가 예전에 같이 일했을 때처럼."
국장님을 전철에 태워드리고, 전철 역을 나와 담배를 피며 젖은 벤치에 앉아 엉덩이가 젖은 것도 모른 채 담배를 피며, 울었다.
머리는 젖고 담배도 젖어 불을 계속 꺼지고...지나가던 차는 물을 튀기고...
하지만 상쾌했다. 모든 것이 다 씻겨 내려 가는 듯이 그렇게 전철 끊길 줄도 모르고 앉아 있다가 찜질방에서 잤다.
제 4장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국장님의 권유에 찾아간 대학교에서 난 엑셀을 다룰 줄 안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엑셀은 그냥 재미있어 배워논 것인데 이렇게 갑자기 활용도가 있을 줄은 몰랐다.
면접을 보며 몇 년간 안 입던 정장을 입고, 머리는 젤을 한 것 바른 채, 촌놈인 지 아닌지 모를 내 스타일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질문에 내 모든 것을 바쳐서 대답했다.
올 해 3월, 벚꽃이 지던 그 때, 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바로 자리를 뛰쳐나가 아무 것도 모르는 경비 반장님의 손을 잡고, 합격 소식을 전했고 경비 반장님 휘하 경비 아저씨들은 모두 나와 나를 축하해 주었다.
아...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광경이 생각이 난다. 토요일 마지막 근무, 밤에 우거진 관리사무소 주변에 벚꽃들은 지고, 경비 반장님과 아저씨들에게 담배 한 갑씩과 박카스 한 병 씩을 나눠드리고 난 조용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여기를 떠 나는 것인가,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인가? 왠지 모를 아쉬움. 정들음. 밤이 깊고 깊어도 난 잠이 오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이제 떠나야 하지만 그 소년이 마음에 걸려 오후까지 퇴근하지 않고 그 친구가 나오나 관리사무소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어머니랑 누나와 함께 오는 소년이 보였다. 뭐라 다가가 말하기도 그래서 그 아가씨가 인사를 하기에 나도 가벼운 목례를 하고, 만나면 주고 싶었던 과자 몇 가지를 산 봉지를 그 녀석 손에 쥐어 주었다.
어머니나 누나나 이런 거 안 주셔도 된다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난 그냥 주고 싶어서 그런다고 말씀드리고 그 녀석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셋이서 가는 뒷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왼쪽에 원래 있어야 할 팔이 없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결의를 했다.
다시 가는 그곳에서 난 반드시 해 내고야 만다. 기필코 말이다!!!
지금 그렇게 다짐하고 산지 벌써 몇 개월째다. 조그만 대학교의 행정직으로 들어와 고졸 학력에 사람들과 뒤섞여 일하고 있다. 매일 캠퍼스에는 젊은 남녀 학생들을 본다.
그리고 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그녀가 내 마음 속에서 나타나 나를 괴롭히면 격렬하게 내 목표를 잊지 않고 공부를 한다. 그렇게 지금 살고 있다.
'미생'은 이 직장 생활에 들어와 읽은 책이다. 많은 도움이 된다. 댓글들에도 써 있지만 마치 내 생활과 같다. 만화를 좋아하지만 이 작가의 열정에 놀랄 뿐이다.
그리고 내 마음이 재생이 된다.
매소드 배우 : 작중의 인물이 되기 위해 자신을 지우고 극 중 인물이 되어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 후유증으로 작품이 끝난 후에도 그 극 중 인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난 장그래가 참 좋다. 그를 연기하는 매소드 배우가 되고 싶다. 물론 후유증은 사양이다. 하지만 어떤 캐릭터와 나를 동일시하고 살고 싶다는 욕심은 오랜만에 가진 듯하다.
사랑은 나를 만들고 해도 늦지 않다. 바람 부는데로 가버리는 나약한 나 따위는 이미 내 인생의 연극에서 지워버렸다.
난 새롭게 살리라. 아주!!!
역시나 미생의 이야기는 하나도 못 쓰고 제 이야기만 썼네요. 아이리시스님, 사자님, 양철나무꾼님, 달여우님, 감은빛님, pek0501님, 쉽싸리님, 섬님, cyrus님, 소이진님, 다락방님, 차좋아님, 꼬마요정님, 베리베리님 그리고 모두 모두 전 이제 그곳에 잊지 않아요. ^^ 1년의 시간 동안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저를 찾아와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저 진짜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너무 길게 쓰다보니 뭘 썼는지도 모르겠어요. ㅋ 대학교 행정직 정말 저에겐 안 맞는 거 같아요. 그리고 생명은 2년, 그 다음에 살아날 지 모르나 지금 전 걸어가고 있습니다. ㅋ 패배 따위는 없습니다. 책도 읽으며 나아갈께요. 그리 자주 못 읽어도 말이죠. 항상 우리 알라딘 동지들에게 감사해요. 오랜만에 써서 읽기 불편하셔도 참아주셔요.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