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 나태주 시집
나태주 지음 / 열림원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학교 때 동아리에서 시를 쓰곤 했었다. 세상이나 사랑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스스로를 퍽 어른스럽다고 여기며 살던 때였다. 당시에 내게 '시'라는 건 아무리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들과 심오한 문장들로 가득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시'를 떠올릴 때마다 자연스레 중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어른들을 흉내 내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여,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을 써내려던 어리면서도, 어리지 않던 시기의 내가 연상된다.

하지만 나태주 시인의 작품만큼은 늘 직관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어렵지 않은 단어들이 엮여서 마음을 단번에 툭 치고 들어온다. 나태주 시인의 글이 쉬우면서도, 사람들을 울리고야 마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관해 시를 쓰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듣는 것만으로도 읽는 이에게 기분 좋은 설렘을 안기며,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나태주 시인이 노래하는 사랑은 시집을 잘 접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익숙한 <풀꽃 1>에서 빛을 발한다. "자세히 보아야/예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스스로 위로를 얻게 되거나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특정 개인을 향해 읊조리는 듯했던 이전의 시들과 달리 인류애, 더 나아가 지구 자체에 마음을 쓰는 시들이 이번 작품에는 여럿 수록되어 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하던 사랑 시는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사랑을 거듭하면서도, 시인은 소유하려는 욕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사실 무언가에 애정을 가지다 보면, 자연스레 소유욕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아이가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태주 시인은 작품에서 사랑하되 거리를 두려는 인내를 발휘한다. 그저 보고 싶으니, 목소리만 좀 들어보자,라고 말할 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바람이 지나갈 정도로 선선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던 가수 양희은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나태주 시인도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할 때 사랑에서 비롯된 인간관계가 올바르게 지속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사랑을 쏟아내면서도, 상대가 자신의 자아를 찾을 수 있을 만큼은 배려를 한다는 점에서 나태주 시인은 진정한 사랑을 알고, 또 노래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는 나태주 시인이 등단한지 50주년이 된 해를 기념해서 출판된 작품이다. 1부에는 신작시, 2부에는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시, 3부에는 시인이 직접 고른 시들이 수록되었다. 300쪽 넘게 꽉꽉 채워진 시들을 읽으며, 시인의 성실함과 바래지 않은 순수함, 그 속에서 묻어나는 연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태주 시인의 시들이 간단해 보이지만, 50년 동안 또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를 쓰기 위해 태어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들로 사람의 근원적인 감정을 건드릴 수 있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책의 표지에는 한겨울이 그려졌지만, 시에서는 가을이라는 소재가 빈번하게 활용된다. 가을도, 겨울도 쌀쌀하고 추운 계절이지만 그것들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한 쪽이 극복할 수 없을 듯한 쓸쓸함과 외로움을 선사한다면, 후자는 포근하고, 희미한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집은 겨울의 이미지와 많이 닮아있다. 그립지만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슬픔을 묘사하다가도, 현재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시인은 상기시킨다. 그래,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지금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작은 풀꽃들 하나하나에게도 관심을 두고, 인사를 건네야겠다 : "꽃들아 안녕! 안녕! (p179, <꽃들아 안녕)", "지구님 안녕!/나도 지금은 잠시 안녕하답니다(p146, <지구 소식>)". 사소한 인사 하나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인생의 충만함을 감지하는 것이 나태주 시인이 독자들에게 건네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내가 뽑은 명문장

"읽다 만 책 몇 페이지

마저 읽지 못하는 것

좋은 사람들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것

그 또한 아쉽고 안타까웠다"

(p276, <누워서 생각했을 때>)

-

딱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죽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주위의 공기가 싸늘해지면서, 무섭고 두려워졌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쉽게 공포를 조장하지만, 때로는 용기를 주기도 한다. 어차피 다들 죽음을 맞게 되기라는 생각을 하면, 제멋대로 살아도 되리라는 확신이 든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될지 모르지만, 종국에는 그들도, 그들의 기억도 사라질 테니까.

"행색이 초라한 사람 손에

들려진 등불일수록 더욱

멀리까지 비쳐짐을

제가 믿기 때문입니다"

(p249, <등불>)

이 작품에서 '등불'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시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행색이 초라한 사람'이라는 건 부정적인 감정들에 짓눌려 있는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종종 하는 생각이지만, 우울과 절망을 겪어본 자만이 타인의 슬픔에 더 잘 공감하고, 진정한 위안을 건넬 수 있다. 자신이 실패하고 나서야, 세상의 이면에까지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만큼만 남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잘 있겠지

잘 있을 거야

문득문득

네가 보고 싶어

(p77, <너 보고 싶은 날>)"

-

누가 보고 싶은지 알지 못하면서도, 막연하고 아득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너무나 힘들게 더디게 왔다가

너무나 빠르게 허망하게

가버리는 봄

우리네 인생에도

봄이란 것이 있었을까?"

(p199, <봄>)

-

봄이 되면, 동네에 벚꽃이 한가득 핀다. 분홍 잎들이 도로를 가득 메워 설렘을 안겨줄 수 있기를 날씨가 따뜻해지는 순간부터 고대한다. 하지만 꽃을 구경하던 즐거움은 1~2 주면 사라진다. 겨울이 오면, 그 자리에 벚꽃이 피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벚꽃길'이라는 팻말로 추억을 간신히 꺼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찬 바람이 부는 겨울에 그곳을 지날 때마다, 봄을 기다린다는 게 하잘것없고, 허망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래도 아마 나는 벚꽃을, 봄을 또 애타게 기다리게 될 것이다. 매일 산책길로 나가 꽃이 세상을 나올 준비를 얼마만큼 했는지 지켜보리란 생각을 한다. 기간은 아주 짧지만 서도, 그것들이 내 마음에 남기는 따스함과 기대로 마음이 충만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래는 SF 문학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상과학 소설은 논리적인 비약이 흔하게 일어나고, 마법과 같은 환상적인 스토리만 그려낸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SF 소설에 관한 그릇된 인식을 테드 창 작가의 <숨>이라는 작품이 통째로 뒤집어 놓았다. 그는 풍부한 과학 지식으로 그럴듯한 미래를 묘사했고, 깊이 있는 철학적 의문들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쉽게 읽어낼 수 없는 소설이었지만, 테드 창 작가가 주는 지적인 자극은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2019년을 돌아봤을 때 기억에 남는 작품들을 꼽자면 <숨>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테드 창을 대신할 한국 작가를 발견해냈다. 김초엽 작가의 작품들은 더 인간적이고, 따뜻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 인류가 아직 맞닥뜨리지도 못한 상황을 담아내고 있음에도, 우리가 이 책을 사랑하게 되는 건 항상 우주에 대해 품어왔던 환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작가는 과학 기술이 진보해도 세상에 존재할 보편적인 감정들을 작품에 엮어냄으로써, 상상 속 미래에서 현실을 감각하게 만든다. 죽은 자들이 남기는 상실감과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 희망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잘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느끼는 연민 등은 앞으로 인류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라도 오롯이 살아남을 감정들이다. 이번 작품집에서 김초엽 작가는 단순히 감정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소유해서 주체적인 위치에 서려는 시도를 한다(<감정의 물성>). 하지만 감정을 느끼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그것을 단단히 만지려는 노력은 끝끝내 좌절된다. 사람들은 소유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듯 보였지만, 종국에는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에 사로잡힌다. 과학 기술을 이용해 주도적인 위치에 서고자 했던 욕구는 마약 중독이라는 문제만을 야기한 채 실패로 돌아간다.

<감정의 물성>에서 '정하'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감정까지 구매하는 이유를 알아내고자 고민한다. 물질적인 수단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당연히 긍정적인 감정으로 삶을 채워야 맞는 게 아닌가. 하지만 세상에 비극이 없으면 완전한 행복을 찾아낼 수도 없다(<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비록 고통과 비탄으로 가득한 세계에 살지라도, 사랑과 함께 이런 세상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축복인지도 모른다. 불행을 느껴본 적이 없다면, 그와는 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행복과 즐거움에도 무감각해지고, 충분히 감지해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저 편"을 보지 못한다면 아쉽게 될까

과학 기술이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것은 맞지만, 언제나 옳은 해결책일 수는 없다. 급속도로 성장하는 기술의 진보에는 늘 윤리적, 도의적인 문제들이 뒤따른다. 김초엽 작가의 작품에서도 과학 기술에 관한 회의가 엿보인다. 기술이 주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거나(<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새로운 것들을 개척해내는 과정에서 배제되고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때로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단점, 예를 들어 약자를 차별하는 일, 을 가리기 위해 과학 기술이 동원되지만, 그 또한 인간에게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사람은 늘 자신에게서 결핍된 무언가를 좇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저 편(<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그러니까 과학이 개척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슬픔을 느끼게 될까. 저 편에 존재하는 것들이 그다지 새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위에 언급된 부정적 측면 외에도, 과학이 야기하는 문제들이 적지 않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나 <감정의 물성>에서 익명의 개발자들이 기술을 발굴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지만, 도의적, 법적인 책임은 지지 않는다. 또한 인공적인 기술이 현재의 세계를 모방하더라도 완전하지 못하다(<관내 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호기심이라는 본성을 억누르지 못해 오늘도 무언가를 탐구하고, 개발한다. 과학 기술이 더 나은 세상을 선물하리라는 예측은 이기적인 호기심이 아니라는 데 대한 긴긴 변명인지도 모르겠다.

과학 기술이 진보하는 일을 저지할 수 없다면, 인류와 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한 깊은 논의가 우선되어야 하겠다. 이번 작품에서 '목적지'라는 단어가 두 차례 반복되었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나는 이 동어 반복을 통해 작가가 우리를 잠시나마 제지하고,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기는 하는 거냐고, 묻고 있다고 느꼈다. 글쎄, 인간이 앞다투어 만들어내는 새로운 진보가 '안나'라는 캐릭터처럼 분명하게 특정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가? 나는 수없는 경쟁과 욕망을 목도해왔을 뿐이다.

우리가 아직 마주치지 못한 반대쪽 세상에 어떤 미지의 존재가 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일종의 프론티어 정신보다 "약한 인간"을 난도질하지 않고, 서로를 보듬는 인류 특유의 긍정적인 면, 즉 이타성(<공생 가설>)을 지켜내는 것이 앞으로의 변화에 있어서 중시되어야 할 부분이다. 김초엽 작가는 기술의 발전에만 무게가 실리는 세상 속에서도 이런 긍정적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어준 외계 생명체 '루이'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침묵을 지키는 인간 '희진'(<스펙트럼>), 미워하고 원망했던 어머니의 사후에 디지털화됮 어머니를 향한 이해와 용서(<관내 분실>)는 우리의 미래 속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안나'는 이렇게 물었다. 더 이상 도달하지 못할 행성에 거주하는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내뱉은 말이다. 여기에서 '빛의 속도'는 '안나' 개인의 역량 부족으로도 여겨지지만, 과학 기술의 부작용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인류의 진보를 위해 누군가가 배제되고, 희생되어야만 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안나'처럼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면,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접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랑, 더 강한 인류애로 나아가야 한다.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 마을을 만들어내고, 사랑으로 불의와 맞서 싸우는 그런 우주를 꿈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행운>은 비행기가 떠나고 남은 구름을 가리킨다. 제목은 어쩐지 희망차게 날아가는 모습을 암시하지만, 책에 담긴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방황한다. 첫 작품인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 '미영'은 좋아하던 선배의 부탁때문에 "누가 봐도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방송에 출연한다. 수치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미영'에게 선배 '준'은 그녀를 반하게 만들었던 그 대사-고개 좀 들어, 이 녀석아-를 친다.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봐주던 존재와의 관계가 좌절되자 그녀는 어릴적 죽을 뻔 했던 경험을 떠올린다. "생전 처음 겪는 공포가 밀려왔다. 아득하고 설명이 안 되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41p)" 물 속에 가라앉던 때의 경험에 대한 서술은 어쩐지 자신을 존재하게 만들었던 선배 '준'과 안좋은 끝맺음으로 인한 고통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을 구해주었던 '병만'을 떠올리며 "많이 아팠을텐데...(44p)"하고 크게 울어버리고 만 것은 '준'때문에, 즉 누군가의 관계로 인해 아파야하는 자신을 자신에 손톱에 눌려 아파했을 '병만'과 동일시한 것이다.

<벌레들>에서는 득실대는 벌레들로 가득한 '장미빌라'에서 고통받는 부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임신으로 한껏 예민해진 '나'는 끊임없이 나타나는 벌레들에 힘겨워하지만, "어쨌든 견뎌내야 했다. 모두가 그러고 있으니까 . 모두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으니까(65p)" 애쓴다. 떨어진 결혼반지를 찾기 위해 나갔다가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곳에서 출산의 징조를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게 말이나 되는건가, 싶을 정도로 고독하고 힘겹다. "단지 장막 한 장이 드리워졌을 뿐인데, 그 소리가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 울음이 날 것 같았다(...)모텔과 교회는, 아파트는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고, 나는 이 출산이 성공적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81p)" 이 긴급한 상황 속에서 새 생명을 맞는 '나'의 모습이 '고독사'로 죽어가는 독거노인들을 떠오르게 했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대비가 존재하긴 하지만, 평화로운 세상에서 "단지 장막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외롭게 버티는 모습은 닮아있다.

<물 속 골리앗>에서 작가 김애란은 암담함과 세상과의 단절로 인한 고독을 폭발시킨다. "20년 만에 이 집의 진짜 주인이 됐는데, 누군가 갑자기 새 주인임을 주장하며 나타난(90p)"바람에 어머니와 나는 집에서 나가야만 하지만, 갈 곳이 없어 머무르다 엄청난 폭우로 '강산아파트'에 갇히게 된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당뇨병으로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 어머니로 모자라, 동네를 물에 잠기게 한 비까지. 설상가상의 상황은 어린 주인공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만하세요. 네. 제발. 그만해. 그만하라고. 씨발!(108p)"

"자식과 손자들에게도 세습"된 낮은 "계급(157p)"과 그로 인해 부족한 정보력으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용대'.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에 등장한 '용대'는 반복되는 실수로 "사람들의 포기와 실망에 익숙해"져 있고, "도시의 속도에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철딱서니 없는 노총각(137p)"이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148p)"을 살게 해준 '명화'와의 시간은 극도로 짧았다.

<하루의 축>에서 '기옥 씨'는 "마치 많은 이들이 재떨이와 재떨이 청소부를, 승강기와 승강기 청소부를 동격으로 대하듯(200p)" 화장실과 동격으로 취급되는 공항 화장실의 청소부다. 그녀에게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아들 '영웅'은 택배를 훔치다가 붙잡혀 실형을 살게 되었다. "어째서 이렇게 한 가족의 단란이 시시하게 망가지는가 이해할 수 없었"던 "기옥 씨의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196p)". '추석' 등의 명절과 상관없이 단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잘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기옥 씨'들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추석에 쉬는 것보다 일을 나가 돈을 좀 더 모을 수 있길 희망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이 아렸다. 손님이 버리고 간 마카롱을 먹으며 내뱉는 그녀의 한 마디는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다. "왜 이렇게 단가...... 이렇게 달콤해도 되는 건가......(199p)"

"아직 젊고, 벌 날이 많다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늘 한 뼘 더 초과되는 쪽을 택했(214p)"던 <큐티클>의 '나'는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상황이 좀 나았다. 무리해가며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나'의 모습은 '손톱 케어'로 드러난다. 그녀가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드러내려던 "점수가 잘 나온 성적표(211p)"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내심 누군가 내 손톱을 봐줬으면 싶었지만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230p)" 라는 대목이나,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예쁜 손톱이었는데 정작 하객들은 내 겨드랑이에 생긴 커다랗고 우스운 얼룩만 보고 말았다(232p)"라는 부분에서 그녀가 그런식으로 과시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음이 드러난다.

<호텔 니약 따>에서는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좌절을 겪고 있는 국문과 학생들인 '은지'와 '서윤'이 나온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어둑한 술집에 죽치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지적이고 허세 어린 농담을 주고받다 봄 세상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아울러 은지와 서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 가장 빛나는 것을 이제 막 잃어버리게 될 참이라는 것을(251p)".

마지막 글인 <서른>에서도 대학을 졸업하고서 끝없는 방황을 해야했던 주인공이 있다.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315p)". <호텔 니약 따>와 <서른>의 글귀들은 나로서도 지금 지나가고 있는 시기이기에 공감이 되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대학에 들어가면 만사형통인 것처럼 대학을 홍보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오는 고통은 고스란히 우리 세대가 안게 되었다.

'비행운'을 동경하며 "가슴 한쪽이 싸한 게 찌르르 아픈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심장이 빠르게 뛰"게 만들고,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말을 간절히 듣고 싶(301)"어 했던 '꿈'이라는 말을 좇던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생각보다 더 암울하고 불안하며, 누구도 자신을 기억하는 것 같지 않는 고립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297p)"라는 비관적인 생각밖에 할 수 없었던 건 <서른>에서의 주인공만 떠올리던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암울한 인생을 견디면서도 그들은 조그만 '날갯짓'을 하는 걸 잊지 않았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누군가 올 거야(126)"라며 골리앗크레인을 붙잡고 있던 <물 속 골리앗>의 '나'가 있었고, '명화'가 죽은 이후에도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못 가볼 나라의 말을 하면서 차츰 나아(166p)"져가던 '용대'도 있었다. 일일이 언급하지는 못했으나 작품들 속에서 주인공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삶을 버텨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모습이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눈물겹다.

이 책은 '질문서점 인공위성'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서점 '인공위성'에서는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으로 내게 "과연 의미없는 날갯짓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소설을 읽고 나면 명확한 답을 얻게 되리라 예상했지만, 소설들은 여운을 크게 남긴채 끝나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는 '날갯짓'을 의미가 있다 없다고 누구든 단정짓기 어렵다는 뜻이리라 짐작했다. 나는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이 지금은 점일 뿐이지만, 이후 선으로, 면으로 이어져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당신이 오늘 한 '날갯짓'도 의미가 있었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생경한 듯 잘 아는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 세상의 그 어떤 소음과도 차단돼 짧은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

나는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물속에 있었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숨을 참지 못해 수면 밖으로 나왔을 때--내 머리 위로 수천 개의 별똥별이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아메리카나> 는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묘사하자면, '이페멜루' 와 '오빈제' 의 어린 사랑과 불가피했던 이별, 이후의 애틋한 재회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전작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디치에 소설에서 사랑이란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녀는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시련들에 더 집중한다.

"말썽꾼, 별종" 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이페멜루'에게는 '오빈제'라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네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어. 너는 무얼하든 네가 하고 싶어서 하지, 남들이 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따라하지는 않을 사람으로 보였거든." 이렇게 말하던 차분하고, 이성적인 오빈제는 이페멜루가 스스로를 좋아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1권 앞부분에서 다루어지던 건 그들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에서 잦은 파업으로 대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닐 수가 없게되자 이페멜루는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더 잘 살아보고자 떠난 미국에서 그녀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나이지리아에서는 당연시 여겨지던 자신의 피부색때문에 끊임없이 차별을 당한다. "미국에 오기 전가지 나한테 문제가 있어야 하는 줄도 몰랐"던 이페멜루는 "이민자의 불안"을 가지고 있고, 고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더니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 되었다.

전에 이화여대에서 들었던 강의에서 작가 아디치에가 자신이 문제로 삼지 않던 자신의 피부색이 미국에 가서는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녀의 경험이 책에 반영된 것 같다. "저는 인종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 왔어요. 한 번도 스스로 흑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미국에 와서 흑인이 됐죠." 이페멜루가 언급하는 흑인에는 여러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비미국인 흑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국인 흑인 등 우리가 분류하는 '흑인' 이라는 집단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이페멜루가 보기에는 분명히 다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흑인'이라는 주제 안에서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 점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이페멜루가 너무나도 공감이 되었다. 사실 한국인으로서 외국에 나가 지내도, 지금은 방탄소년단 등의 이유로 조금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을 '아시아인'으로 묶어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분명 비슷한 점이 존재하고, 문화적으로 닮아있지만 우리는 엄연히 다른 사람들이고, 서로를 보기에 우리는 너무도 닮지 않았다. 절대 '아시아인' 이라는 카테고리 하나로 묶어 모든 문제에 대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피부색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같게 취급당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외치는 이페멜루에게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안에서도 개개인이 너무나도 달라서, '한국인'을 어떤 사람으로 정의해야 하는지 어렵다. 그러니 '흑인', '아시아인' 이라는 분류로 각각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묶어버리는 것은 편리하기는 해도,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자루에 담긴 그들은 백인들이 주류로 차지하고 있는 사회에서 절대 어울리지 못하고, 계급에서도 최하층을 차지한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고, 불편을 감수하는지는 이페멜루가 소설 속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잘 드러난다. "때때로 미국에서는 인종과 계층이 동의어다.", "그가 보기에 내 외모는 그 위풍당당한 저택의 주인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공적 담론에서 '흑인' 이라는 집합 명사는 '가난한 백인'과 곧잘 짝을 이룬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수없이 업신여겨지고, "놈들은 벌써부터 애한테 낙인을 찍고 싶어 해."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이유없이 범죄자 취급받으며 살아간다. "미국 대중문화"에서 그들은 "투명인간"이고, 사람들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늘 애써야만 한다. 부당한 위치에 서면서도 그들은 "인종 차별에 대해 화를 내선 안 된다". 미국인들이 흑인이 인종차별에 대해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미국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책에서 '이페멜루'가 제기하던 생각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조금 놀라웠던 것은, 비슷한 불행 속에서 고통받는 흑인들끼리 "미국식 악센트라는 놀라운 업적 때문에" 누구는 존경하고, 자신은 영주권이나 시민권으로 미국에서 보호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만하며 같은 동족을 모른 척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한국인들도 외국에 나가서 살면 제일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같은 한국인이라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누구 보고 잘못 되었다고 손가락질 하기에는 좀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흑인으로서 부당하게 당하는 일들에 대해서 꼬집으면서, 작가 아디치에는 흑인들이 머리를 관리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릴랙서'라는 것으로 대부분의 흑인이 머리를 곱게 펴다가, 독한 화학성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이페멜루는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연의 머리를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이페멜루가 회사를 그만둘 때 또 다른 흑인인 '마거릿' 양이 "아가씨 머리도 문제였던 것 같긴 하지?" 라고 물을 때, 흑인들이 자신이 가진 예쁜 머리카락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릴랙서로 꾹꾹 눌러담는 것을 ,당연히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 점이 화가 났다. 아예 문제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고, 응당 그래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며 살아갈수록 아랫사람들이 피해를 봐야 한다. 어른들이 '원래 그런 거야' 라고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말해준다면,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어린 애들이 어떻게 나서서 고치려고 할까? 흑인들의 머리 모양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아디치에는 사회가 당연하게 강요하는 것들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는 걸 일깨워 주었다. "하느님이 제게 주신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다는 사실" (난 비록 종교를 믿지 않지만,) 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아디치에가 강연해서도 말했듯, 단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메이크업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코르셋을 입어야 한다는 건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 뿐이지,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증은 없다. 사회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천은 늘 어렵지만)

그토록 그리웠던 고향에 가서 적응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불안들을 나이지리아를 무시하는 걸로 메우는 '귀국인'들의 행동도 흥미로웠다. 그들은 고향 음식을 외면하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다닌다. 날리우드(나이지리아 영화)를 비판하는 말들을 늘어놓고, 나이지리아가 가진 문제들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이페멜루가 이후 이 귀국인 모임 '월드 나이지리안 클럽'에 대해서 남긴 글이 주목할 만 하다. "마치 라고스가 뉴욕처럼 되려고 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것처럼 라고스가 뉴욕과 다른 점에 대해 불평" 한다고 그들을 평했다. 나이지리아는 나이지리아 만의 길을 가는 것이고, 절대 뉴욕과 같을 수 없다는 지적이 '헬조선' 이라면서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나로서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글귀를 읽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우리는 다른 국가들과 같은 길을 걸을 필요가 없다. 좋아 보이는 국가에 가도 그들이 가진 문제점이 분명히 있고, 그곳의 사람들도 거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우리나라도 나름대로의 길을 일구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나이지리아에 대해 불평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네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이페멜루의 모습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니 잘난 척 그만하고 이곳의 삶의 방식이 그냥 그렇다는 것을, 모둠이라는 것을 깨달아라." 어쩐지 대한민국이, 서울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최선이라고 살아온 삶을 내가 너무 무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아디치에의 작품인 만큼 페미니즘에 관해서도 빼놓을 수 없다. "자기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규정짓고 의존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불구가 되어 눈에는 절박함을 담은" 여자들에게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보낸다. 소설 속에서 그녀들이 남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무시하기에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에서 있던 강연회에서 결혼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방식이, 자신이 하는 일들이 다 좋은 남편을 찾기 위한 일로 치부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던 아디치에의 말이 떠올랐다. 메이크업이나 옷으로 자신을 예쁘게 치장하는 것도 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이라던 아디치에의 당당함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소설 속에서 언급 되었던 것은 여성의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남자들도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둘러입는 갑옷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강요하는 차라던가, 집이라던가.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던간에 우리가 결혼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고, 누군가의 선택을 위해 그토록 애를 써야 한다니 왠지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부담감에 짓눌려 결혼을 포기하는 90년대생들이 늘어나는 것만 보아도, 이 슬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소설 <아메리카나>를 통해서 어떤 집단에 성급하게 분류되어 차별받거나 무시 받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기대야만 자신의 지위가 나아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결혼 이외에도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서러움을 겪고 있을 모두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나의 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인종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므로 감소시켰다고 칭찬할 것도 없다.


- P1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배경은 나이지리아다. 독재 정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학교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기름 부족 사태가 발발한다. 가난에 다들 허덕이면서 살아가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는 '캄빌리' 와 '자자'는 그런 고통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대신 그들의 가정에는 가부장적이고, 신앙에 대해 지나치게 독실하고, 강압적이며 폭력적인 아버지가 존재한다. 내가 보기에는 응당 벗어나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계속 피해자인 채로 살아나간다.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고, 아버지만큼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하지만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P54)"

이처럼 캄빌리와 자자는 아버지가 세워놓은 목표치에 늘 도달해야만 하고, 주어진 자신들의 '일과표'에 맞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1등이 누구인지 알아낸 아버지 '유진'은 캄빌리에게 "저 애도 머리가 하나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p63)" 라고 야단친다. 또한, "하나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나한테는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 주는 아버지가 없었다.(64p)"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결핍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릴 때 성직자들에게서 받았던 도움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스스로가 결핍 속에서 느껴야만 했던 아픔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전부 자식에게로 또 대물림 된다. 유진이 만들어 낸 가정은 부유한지는 몰라도,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나는 자식들을 폭행하면서, 우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신앙으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듯 그의 자식들도 같은 믿음을 가져야만 하고, 자신이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걸 극복해낸 것처럼 자식들도 우수한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가 가진 강박을. 하지만, 그것이 폭력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절대' 어떤 이유에서든지 폭력은 정당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벗어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던 자자와 캄빌리의 삶이 달라진 것은 '은수카'에서 '이페오마' 고모와 함께 지낸 시간들 덕분이었다. "문화적 자의식이 있는 음악가들(p190)"의 음악을 듣고, "때가 되면 아버지가 결정(p165)"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대학과 전공에 대해, 자신과는 달리 각자만의 고민을 하는 사촌들이 있는 곳 은수카. 한 번의 방문만으로 자자와 캄빌리의 삶이 극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이페오마 고모와 함께 대학교 캠퍼스 투어를 하고 나오면서 오빠 자자는 사자상 밑의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p167)"라는 글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자자는 '존엄성'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된 것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이처럼 자신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촌들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삶 속의 왜곡된 지점을,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또다른 선택들을 마주하게 된다.

고모가 자자를 오포보의 자자왕-저항자-와 비교한 대목도 흥미롭다. 이후 그는 아버지가 신앙을 강요하는 데에 반항하고, "사생활을 좀 갖고 싶(p236)"다면서, 방 열쇠를 보관하겠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지주일 전에 그 말을 들었던 자자와 그 이후에 자신의 알을 깨부수려는 자자를 통해서, '저항자'라는 말이 자자에게 어떤 깊은 울림을 주었는지, 그리고 고모와 사촌들이 그의 인생을 얼마나 송두리째 바꿔 놓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아버지가 너희가 여기 며칠 더 있었으면 한대." 그 때 오빠가 어찌나 활짝 웃던지 이때껏 있는 줄도 몰랐던 오빠의 보조개가 보였다.(185p)"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자의 마음이 여실히 느껴져 마음 아팠던 대목이다. 모르고 살았다면 괜찮았을 수도 있지만, 자자가 '다른 선택'에 대해서 알게 된 이상, 그는 '저항자'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자의 여동생인 '캄빌리'는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다. 할아버지 '파파은누쿠'와 사촌 '아마카'가 보이는 다정한 모습들을 보며, 어쩌면 자신이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은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절대 가질 수 없을 뭔가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p205)" 집에 갇혀서 아버지가 준 일과표만 따르고 살았던 자자와 캄빌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어린아이들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부모님의 애정이 부족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야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캄빌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두고서도, 아버지를 따르려고 노력하고 그 부당함에 대해서 침묵하는 아이였다. 자신에게 비아냥거리는 사촌 '아마카'에게 소리치며 대꾸하자 아마카는 (내가 보기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너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수도 있구나, 캄빌리.(p211)" 이후 아마카의 캄빌리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변화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캄빌리를 조롱하지도, 비아냥 거리지도 않는다. 나는 아마카가 캄빌리를 비난하던 것은 그저 자신의 사촌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서 빠져나오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도망치려고만 하지 말고, 현실과 마주하고 그 알을 깨부숴주기를, 아마카는 바랐을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는 자자와 캄빌리는 소설 내내 엄청 적극적으로 아버지에게 대항하지는 않는다. 영성체를 거부하거나, 죽은 파파은누쿠의 그림을 몰래 보관하는 일. 그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그들이 한 반항은 그들의 최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나는 비늘판 몇 개가 빠지고 방충망이 찢어진 창문을 쳐다보며 저 작은 구멍을 찢어서 그리로 빠져나가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p233)" 캄빌리가 창문으로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녀가 기특했다. 그래, 그렇게 한걸음씩 벗어나는 거야, 라는 응원을 하면서 소설을 읽었다.

"공포 때문이었다. 공포라는 감정은 익숙했지만 매번(다른 맛과 색깔을 띠는 것처럼) 전과는 다른 공포를 느꼈다.(241p)" 아, 어째서 1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서 극도의 공포를 느끼면서, 불안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단 말인가. 가정폭력을 당하는 어린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즉 소설이 전혀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 슬프다. 슬프다라는 말로는 전혀 채워지지가 않을 만큼.

캄빌리가 아버지에게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것은 한 번 뿐이었던 것 같다. "은수카에 다녀온 이후로 변했고 모든 것이 예전과 달라질,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운명(p256)" 이라고 느끼는 캄빌리는 아버지가 파파은누쿠 그림을 조각내어 찢어버리자 그것들을 감싸 안는다.

"원래 그것은 잃어버린 무언가, 내가 가져 본 적도 없고 영원히 가질 수도 없을 무언가를 상징했다.(p256)"

"파파은누쿠의 몸이 그렇게 작은 조각으로 잘려서 냉장고에 보관되는 것을 상상했다. (257p)"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하고, 아픔들에 대해서도 침묵했던 캄빌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할아버지 뿐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모, 사촌들과의 추억들, 아마디 신부에 대한 애정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웃음들,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다정하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 캄빌리는 조각난 그림을 엎드려 보호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아버지로부터 지켜내고자 했을 것이다.

"결연하네. 바구니에 담긴 달팽이를 몽땅 사서 그 한 마리만 풀어 주고 싶었다.(288p)" 탈출하고자 하는 달팽이를 보면서 연민을 느끼던 캄빌리는, 탈출하는 꿈을 꾸던 그녀와 오빠인 자자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로워진 자자와 캄빌리는 이제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자유의 노래가, 웃음이 되어 나오(356p)"게 만들어준 은수카에 가서 오빠와 함께 지낼 미래를.

소설을 읽는 내내 분통이 터졌다. 책의 배경은 나이지리아지만, 가정폭력이나 가부장제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느곳에나 있다.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단체에서 나서고 있고,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캄빌리나 자자처럼 그 상황을 타파할 시도를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그들의 선택이니 스스로 책임을 지어야 한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들도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삶에 '은수카' 같은 곳이 나타나주기를, 나로서는 바라는 수밖에 없겠다.

캄빌리와 자자의 내면 묘사가 세심하게 그려진 점이 제일 흥미로웠다. 아무렇지 않게 당하기만 하던 아이들이 조금씩 벗어나고자 마음을 먹을 때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지.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아버지라는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힘들겠지만, 캄빌리와 자자가 이제부터라도 원하던 인생을 조금씩 찾아가게 되면 좋겠다.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그들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