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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그동안 행복한 삶을 위해 부당한 억압에 대한, 자유를 위한 투쟁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고전을 읽다 보면 자유에 대한 비판을 자주 볼수 있다.


‘지나친 자유는 국가에 있어서나 개인에 있어서나 지나친 노예상태로 떨어질 뿐이네’
- 플라톤 국가론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사람보다 심하게 노예가 된 사람은 없다.’ - 괴테

‘자유의 표상을 유지하는 것만큼 완벽한 정복은 없다...전통적 관점에서 인정하고 있는 자유(해방)은 좀더 강한 혐오적 통제로부터 다른 형태의 통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 스키너

유튜브를 보면 ‘YouTube’s algorithm brought me here’라는 댓글이 유행 처럼 보인다. 분명히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은 사용자 본인의 자유로운 클릭이었을 텐데 ‘알고리즘이 내가 동영상을 보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분명 이런 현상이 유튜브 시청에만 해당 되진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자유로운 국가의 다음으로 등장하는 국가는 최악의 국가 형태이라고 하는 참주정이다. 참주정은 거지들의 왕, 노예들의 왕이 이끈다. 그리고 국가론에서 묘사하는 참주정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 반대로 국가론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라고 하는 철학자들의 나라의 모습도 같이 보이는 것 같다. 철학자들의 나라에서 부자들은 단순히 자기 재화만 모으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 재산이 올바르게 쓰일지 고민한다고 하는데 이는 세계 최고 부자 타이틀을 갖고있는 빌게이츠만 봐도 정확히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역시 하나의 예이며 빌게이츠 한명에만 해당 되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는 가장 최악의 국가와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같이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만큼 역동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의 행동과 판단이 중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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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지능에 대한 탐구는 그것을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튜링의 만능기계는 정형화와 반복문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완성 되었다. 미완성인 부분은 첫째, 튜링의 만능 기계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 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튜링 스스로도 인지 하고 있다. 50쪽에 4째줄 부터 "그는 상식이 없으며 아무리 터무니 없는 명령이라도 무작정 따를 것이다. 명령을 완수 했으면 그는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밥을 먹으라 같은 상시적 명령을 따를 것이다." 둘째 흉내게임이 단지 사람의 지능만 구분하는 것을 가정하고 설계된 점이다. 동물한테도 지능이 있다는 현대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동물의 지능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는듯 하다 첫째는 주변환경을 파악하고 몸을 이동시키는것 둘째는 자신의 행동 반경 내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 하는 것 이 두가지 지능은 곤충들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셋째는 욕구다. 욕구는 어떤 생물체건 지능적인 행동을 유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듯 하다. 그리고 곤충 이상의 지능을 가진 동물에게는 '모방'과 '자기반성'이라는 기능이 그들의 심적구조를 완성하는데 또 다른 역할을 하는것 같다. '자기반성'은 스스로에 대한 모델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의식'이라는게 있어야 하는데 튜링의 정지문제가 이에 대한 탐구가 아닌가 싶다. 또한 '자기반성'은 문제해결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러한 지능의 특징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가지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간 행동에 대한 올바른 안내와 인간과 똑같은 지능을 가진 동물에 대한 애정으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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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사전에 보면 인종 게임 이라는 말이 있다. 인종문제를 부각시켜서 어떤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 인종게임의 의미다. 전상진 작가는 이를 참고하여 세대게임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현재 우리사회는 세대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자본주의 시장에 의한 청년으로 부터 청년성의 탈골이다. 활발한 소비, 스포츠, 레저, 미용등 청년의 전유물이 더이상 청년만의 것이 아닌 시대가 왔다. 자본시장은 수동적이고 정적인 노인들을 주 고객으로 삼아서 소비활동을 부추기고 이익을 창출 하고 있다. 둘째로 문제거리로 전락한 청년층이다. 오늘날 청년은 밝은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노오력 해야 하며 그마저도 보상이 확실하지가 않다. 일부 정치 세력은 이 사실들을 바탕으로 세대간 갈등을 부추겨서 정책적 실패를 감추고 문제의 원인을 기성세대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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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순수한 영화. 마츠코처럼 순수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 모두 순수한 어린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하지만 사람은 순수할때 가장 악해질 수 있는 법이다. 마츠코는 어린시절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아서 원망하던 아버지를 선생이 되어서도 원망하고. 그 원인인 여동생도 원망 한다. 담임선생이면서도 돈을 훔친 제자를 호되게 꾸짖지도 못하고 오히려 무릎꿇고 부탁한다. 그 외에도 '어른'답게 해내지 못하는 일은 영화 내내 이어지며 그것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자기에게 모질게 군 사람들이 떠나갈땐 '왜?'라고 자문 하는 이유도 그들이 마츠코와 같이 순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츠코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았고 그때마다 어린시절 불렀던 노래를 반복해서 부른다. 조카가 마츠코는 죽을때 까지 무엇하나 똑똑하게 해내는 일이 없다고 했지만. 중년의 여성이 된 마츠코가 다시 삶의 의지를 찾고 캔맥주를 마시며 놀고있는 어린이들에게 호되게 야단 친다. 분명 극중 어른 스러운 행동을 한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지만,  그 어린이들에게 야구 방망이로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Michael buble 의 'feeling good' 노래 처럼 마츠코는 '세상과 화해'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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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은 인지 부조화를 다룬 영화다. 인지 부조화는 이상과 현실이 다른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다. 이러한 스트레스에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을 하는데 인셉션에서 멜, 코브, 피셔 세 인물이 중심이 되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 한다.

멜의 경우 코브와 함께 림보에서 말그대로 꿈 같은 인생을 살게된다. 그러나 멜은 현실로 돌아가기 싫었고 림보가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꿈에서 깨기 위해서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거나 꿈속에서 죽게되면 꿈을 깨는데 코브는 의도적으로 멜이 자신과 함께 자살하도록 만들어 꿈에서 깨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신의 현실을 마주하기 싫었던 멜은 꿈에서 깼는데도 현실을 부정한다. 코브가 림보에서 했던 말이 영향이 컸다. '당신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어, 당신을 멀리 데려다 줄 기차를, 당신이 바라는 곳에 데려다 줄 기차인 건 알지만, 당신은 거기가 어딘지는 몰라,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아, 왜냐면 당신과 함께하니까' 죽더라도 함께니까 괜찮다는 말이 멜을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코브는 멜이 자살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그도 림보에서 빠져나오기위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사랑하는 멜을 너무 그리워하고 미안해해서 틈날때마다 자신의 꿈속에서 멜을 만난다. 코브가 일할 때도 갑자기 등장해서 모두 망치는 경우까지 있다. 멜을 생각할때 코브는 멜처럼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 하고 있다. 그러나 꿈속에서 코브는 자식들을 절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도망자 생활을 해서 절대로 자식들을 볼수 없는 현실때문에 자식들을 보게 된다면 멜처럼 그것이 현실이라고 덜컥 믿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코브과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유일한 일이다. 그러나 영화 막바지에 코브는 림보에 다시 빠져서 꿈속의 멜과 다시 이야기를 한다. 사실상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너는 현실이 아니야 너를 볼때마다 나는 죄책감을 느껴' 그동안 멜에 대해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있었는데 코브는 드디어 구분하는 방법을 찾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피셔는 본래 꿈이 있는 인물이 아니다. 단지 현실에서 아버지와의 갈등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코브일행은 피셔의 아버지가 '나는 너에게 실망했다. 나는 너가 날 따라하려고만 해서 실망했다.' 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피셔가 꿈꾸게 함으로써 아버지와 화해하고 회사를 매각하게 만든다. 

멜은 현실을 부정하고 꿈만 쫓았고, 코브는 착실하게 현실을 살아가려고 했지만 꿈 때문에 너무 힘들었고, 피셔는 꿈이 그의 현실에 새로운 발판이 되었다. '꿈을 크게 가져라', '꿈은 이루어 진다', '나는 할 수 있다.' 는 현대 사회의 구호는 우리를 그릇된 망상에 빠지기 쉽게 만든다. 우리의 꿈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망상일까? 단지 아름다운 꿈일까? 꿈은 많은 것을 이뤄낼수 있는 만큼 부정적인 면도 많다.


나는 요즘 민주주의 사회에 대해 인지부조화의 관점으로 생각할때가 많다. '만민이 평등한 사회', '누구나 지도층이 될수 있는 사회', '능력만으로 인정받는 사회'... 피셔 처럼 꿈이 새로운 발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코브의 꿈속에 아름답던 멜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듯 현실은 시궁창인 경우가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코브를 괴롭히던 멜처럼 이러한 민주주의 기반이 현대인들을 hard worker로 몰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자기만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지만 꿈이니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요즘 온갖 루머와 음모들도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들 멜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의 정점에서 그 한계를 보고있는 지도 모른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제 꿈은 그만 꾸고 우리의 현실에 만족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마치 코브가 멜을 현실과 구분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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