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죽음 알베르 카뮈 소설 전집 5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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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가 끝나버리면 생의 갈등도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느끼며그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 그것이 아마 행복인지도 모른다

, 우리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감정 말이다.

- 안과 겉,긍정과 부정의 사이, 책세상, 200912, 개정15, 52


소설 행복한 죽음(La mort heureuse)은 카뮈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이방인에 앞서 써진, 작가가 생전에 결코 발표하지 않으려했던 작품이다. 구성의 미숙함과 산만하게 열거된 에피소드들, 한 청년의 방황과 일상의 실체가 그대로 투영된 글이기에 전기적 이해에 귀중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내적 고백에 가까운 이 글은 그대로 묻어두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살아있는 자들의 그 무한한 호기심이 작가의 사후 10년이 지나 세상으로 나오게 했다. 문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란 것이 한 인간 존재의 의지보다 과연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아무튼 이 작품은 이러한 상념 속에서 읽게 되었다.

 

모두(冒頭)에 카뮈의 첫 출간작인 에세이 안과 겉의 한 문단을 인용한 것은 이 소설이 1937년 동일한 시기에 쓰여진 글이기도 하거니와, 주제의 동일성 때문이다.  당신의 유일한 의무는 사는 것, 행복해지는 것입니다.”라는 자그뢰스가 메르소에게 전하는 한 문장이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생의 유일한 의무인 행복을 완수한 죽음, 그것을 명징하게 의식하며 죽음에 이르는 것이 곧 행복한 죽음에 대한 내 조악한 이해가 될 것 같다. 작품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자연적인 죽음의식적인 죽음이라는 부제가 달려있고, 읽어나가며 이 제목들이 아주 역설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적인 죽음은 메르소가 하반신을 잃고 타인의 도움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자그뢰스란 인물을 살해한 그날의 행위와 그에 이르는 두 인물의 대화와 회상들이다. 삶의 의지와 행복의 의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변적 이야기들을 따라가며 세계와의 합일, 인간들로부터의 해방에 이르는, 추구되는 행복한 죽음의 완성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에 사로잡혀있는 인물에서 오히려 나는 카뮈의 현실, 스물다섯 무렵의 프랑스 식민지 지중해 연안 알제의 청년을 생각했다.

 

소설에는 그의 현실 경험 속 인물들이 역할을 달리하여 등장하고, 그의 일기와 작가노트에 기록되었던 실제의 역사가 도처에서 허구와 현실을 넘나들며 달리고 있다. 그의 기억, 그의 삶의 실체를 잡아매고 있던 어린 시절, 리옹가()의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벨쿠르에서의 지독히 가난한 냄새에 대한 애착, 적어도 자신과 접할 수 있었던 그 너저분하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대결의 슬픔과 회한 속에서 되돌아오는 자신의 발견으로서의 장소에 대한 정경들이 있으며, 프라하 골목길에서 그의 마음속에 잠겨있던 모든 고통의 힘을 깨어나게 했던 냄새의 정체, 식초에 절인 오이가 불러내는 어머니와 둘만이 느꼈던 광대한 기억이 있고, 어머니의 침묵, 그 기이한 어머니의 무관심!에 깃들어있는 세계의 모든 부조리한 단순성의 의미 연결을 발견할 수 있다.


나에게로 올라오는 것은 보다 나은 날들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나 자신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차분하고 원초적인 무관심이다.”라고 메르소는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명철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모든 것은 단순함이라는 명징성임을 확신한다. 그 명징성과 단순성은 사형 받은 자를 가리켜 말할 때,   그는 사회에 대하여 죄 값을 치르려 하고 있다.“는 불분명한 말이 아니라 그의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가 되어야 함이라 말하듯, 그는 세상에는 자기 운명을 똑바로 마주 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 문장으로부터 그의 생 혹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치밀한 의지와 계획이 이미 수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운명을 마주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 내 흥미를 끄는 경험은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되어가는 경험들이거든요.”라고, 의사 베르나르에게 재단해 놓은 운명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급기야   한 인간의 문명이란 열정적으로 걸머지는 경우에는 언제나 흥미진진한 법이죠. 한데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흥미진진한 운명이란 미리 재단해 놓은 운명이죠.”라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무언가 훅 하고 명치를 들이미는 당혹감을 느꼈다.

 


메르소가 살해하게 되는 자그뢰스는 메르소가 사귀고 있는 마르트의 한때의 연인이었기에 만나게 된 인물이다. 메르소는 마르트와 영화 관람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메르소는 마르트의 분방한 남자관계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며 망상에 빠진다. 그리고는 불쾌한 망상에서 문득 깨어나 스크린 속에서 자동차가 전복되면서 고요한 가운데 오직 바퀴 하나만이 계속해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장면을 바라본다. 고집스럽게 허전하면서 사나운 마음속에서 생긴 수치와 모욕감을 함께 이끌고 돌았다고 심정을 묘사한다. 이 문장을 미리 재단해 놓은 운명과 연결 짓게 되면, 카뮈가 그의 문학적, 정치적 반대진영에 의해 무참한 시련에 놓여있던 고뇌와 불의의 자동차 사고를 왠지 우연한 불운의 사건으로만 보여지지 않게 된다. 자신의 작품 집필 순서나 체계는 물론, 행복함이라는 생의 완수를 끝낸 한 인간의 의지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2부 의식적인 죽음은 자그뢰스의 살해와 관념적인 연결고리는 맺을 수 있을지언정, 긴밀한 연속선상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그 구성상 그리 매끄럽지만은 않다. 그의(카뮈) 에세이 결혼을 구성하는 제밀라의 바람이나 사막등에서 느껴지던 고독과 운명의 정념들, 대지와 인간에 공통된 어떤 울림들이 소설적 구성으로 재등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제밀라의 바람에서 죽음에 대한 나의 모든 공포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쓰고 있다.

 

내팽개쳐진 상태로 고독과 마주 대하고 있자니 불쾌한 감미로움이 입 안에 고였다.”라고 소설의 주인공 메르소가 말하듯, 프라하의 골목길을 걷고, 알제의 언덕 꼭대기에 매달린 듯 있던 세 여학생의 집에서의 일상이나, 슈누아에서 마주하는 고독한 삶에서 길어올리는 것은, 당시 카뮈의 경험 세계와 거의 동일한 모습들이다. 가난과 사랑, 여자와 꽃과 미소에 대한 욕망, 이러한 것들은 그의 성장을 이루는 빈곤의 장소, 즉 가장 혐오스러운 세상과 끊을 수 없는 유대의 긍정이며, 바로 그러한 삶과 자신이 공범자임을 소리쳐 말하는 충동으로 터져 나온다.

 

그는 자그뢰스의 살해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마침내 자신이 행복을 위해 태어난 인간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자기 인생에 대한 정당성의 입증, 메르소는 바다에 뛰어들어 비겁해지지 않은 채 자신과 일 대 일로 자기 육체와 대면하여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죽음을 바라보는 실행에 착수한다. 거기에는 오직 행복과 고독의 끝없는 사막이 있을 뿐이라고 되뇐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않은 세계의 진실로 돌아간다.

 

어쩌면 이 소설은 청년 카뮈가  문학예술 행로의 설계를 마쳤음에 대한 자신을 향한 선언이 아니었을까? 가난과 절망, 자신의 병(결핵)이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삶의 방해에 대해 끝없이 반항하는 삶에 대해, 그리고 그 반항을 형성하는 것들이 바로 어머니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 벨쿠르의 그 어두운 방에서의 절망적이고 슬픈 기억들에 대한 사랑이고, 여인들과 친구들, 그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이후 발표되는 이방인을 비롯한 그의 소설들이 어떤 단계를, 방향을 내딛게 될 지에 대한 예술적 지표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보여주는 그 무관심과 단순성이 무얼 의미하는지, 또한 인간 삶의 구체적 실체, 즉 인간적 숨결만을 묵묵히 추구하며, 기한이 정해진 미래라는 부조리는 단지 관념 덩어리로서 반항의 대상이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페스트의 리외에 가 닿는다.

 

메르소는 말한다. 어떠한 정열이 온통 나를 흥분케 할 것인지 잘 알고 있어요. [...] 지금은 행동하는 것, 사랑하는 것, 괴로워하는 것, 그게 바로 산다는 겁니다. 투명해지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그것은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요.”라고, 아마 이때 이미 반항 상태라는 삶의 여정을 출발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카뮈의 문학 세계를 거니는데 이 작품으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이해의 토대를 얻게 되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무심한 어조로 별 뜻 없이 말을 했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다.

그처럼 세계의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언제나 감동시키는 것은 이 세계의 단순함이다.”

- 안과 겉책세상, 200912, 개정15, 60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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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이 소설을 단순 명쾌하게 읽는 법?

 

삶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참고 견디는 이 여덟 시간의 사무실 근무가 그걸 못하게 막아요. 메르소는 격한 어조로 말했다.” -58


다만 행복해지려면 시간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돈을 버느라 삶을 허비해요. 돈으로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말예요. 바로 이게 내 관심을 끌었던 유일한 문제였습니다.” - 61, 자그뢰스가 메르소에게 하는 말

 

아마 메르소와 자그뢰스가 나눈 위의 두 대화 문장에 소설의 주제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가 될까? 메르소는 행복을 위해서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자그뢰스의 지적에 따라 그를 살해함으로써 자그뢰스가 모아 둔 돈 200만 프랑을 지니게 된다


"그 이튿날, 메르소는 자그뢰스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와 오후 내내 잠을 잤다." -74

 

메르소는 존재적 무용함인 여덟 시간의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이후 중부 유럽의 여행과 알제로부터 떨어진 교외지역인 슈누아에서 고독이라는 시간을 만끽한다. 바다에서의 수영, 태양과 꽃과 여자들, 완벽한 시간의 누림, 인생의 유일한 의무인 행복의 완성, 삶의 완성을 이룬 자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다? 라는 것.

 

사실 이러한 도식적인 해석으로 읽게 되면 물론 단순 명쾌함이 있지만, 과연 이 소설을 제목에 매여 읽을 필요가 있을까싶다. 오히려 이 작품은 가난한 청년이 자신의 삶과 세계와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내적 투쟁의 이야기로 읽을 때 더 풍부한 의미들로 살아 날 것 같다. 작가의 문학 여정이 시발점에 놓이기까지의 탐색, 그의 삶에 대한 의지와 문학적 청사진, 작가 경험의 실체와 그것의 문학적 연결 고리들을 읽어나가는 재미가 훨씬 쏠쏠한 소설이 되지 않을까? 특히 이방인의 뫼르소와 비교하며 읽는 재미는 또 다른 독서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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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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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 [...]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내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들었다. 모든 만남의 궁극적인 의미는 조언이나 설교가 아니라 포옹이다. 포옹이 필요한 사람에게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   - 120쪽에서

  

머릿속에는 온갖 지식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실천하고, 삶의 실천적 의지나 지혜로 실행하는 데에는 미숙하거나 좀처럼 삶의 일상으로 끌어오지 못하는 것이 실상이다. 더구나 좌절과 절망의 고통이나 상실의 슬픔, 이유를 딱히 규명하기 어려운 공허나 우울감에 휩싸일 때면 이성의 작동이 멈추기 일쑤이다. 결코 앎이 삶의 지혜로 전용되지 않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럴 때면 내 마음을 마음껏 토로하고 그것을 묵묵히 공감하며 들어줄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또한 따뜻한 포옹이 간절해진다.

 


이 책에 손이 가 닿은 것은 누군가의 감정의 영역에서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을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쩔쩔매는 막다른 길에 서있는 듯한 답답함과 이젠 그만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도주의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까닭이다. 책은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를 내내 말없이 경청해주고 있는 듯, 시인과 그의 경험 속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지막하게 흐르며 슬퍼하는 다른 영혼을 토닥인다.

 

우리들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얼마나 섣불리 예단하고, 마치 다 안다는 듯 자신이 겪은 사례를 빌어 일반화하고, 공허한 말을 건네곤 하는가. 시인은 상처는 저마다의 고유한 경험이며, 영혼의 일이기에 모두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어야 함을 안다. 섣부른 아픔의 일반화된 말의 진부함이 아닌, “그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도록 거기 함께 있어주는 일로서 곁에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시인의 지적처럼  "하나의 모습으로만 굳어져 다른 모습들을 나로부터 제외시켜버린 에고의 고집과 자아집착" 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인용하여 전달하는 13세기 수피파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구절은 이처럼 삶의 바깥쪽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 채 꽃이 피어나지 않는 이유를 외부 세계에서 찾으려 한 내게 빛과 같은 깨우침이 되었다.

 

단단한 봄이 어떻게

정원을 만드는가.

흙이 되라, 부서져라.

그러면 그대의 부서진 가슴에서

수많은 야생화가 피어날 것이다.

.....[後略]......

 

한 가지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돌밭에서 그 무엇이 태어날 수 있겠는가, 부서져야 한다. 산산이 부서져 수많은 야생화들이 피어날 수 있는 흙이 되어야 함을. 이렇게 한 가지에 붙들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삶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간다. 마치 삶의 시간이 무한하다는 듯 메여있었으니 기쁨도 사랑도 잊어버린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삶의 기쁨은 이곳에서의 나의 머묾이 유한하다는 지각에서 시작된다. [...]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86)”  유한성과 결여가 바로 지금의 실존에 풍요한 감각을 준다는 이 뻔한 지혜가 잊고 있었던 생의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어쩌면 이 책의 많은 번뜩이는 지혜의 문장들은 새로워서 라기보다는 정말 우리네 감정의 정곡 언저리를 생생하게 들춰내어 그 바닥의 정서가 체험할 수 있는 영혼에 길을 비추어주기에 고마운 생의 선물이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책 속에서 요즘 거듭 마주하게 되는 유사한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시인은 인도북부 마나리에서 출발해 라다크의 라는 소도시에 이르는 여정에서 가졌던 축복의 순간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아찔한 4,000미터 고산지대 로탕패스(시체가 쌓인 고개라는 뜻)를 지나 5,300미터 타그랑라의 황량한 어디쯤 차를 멈추고 고개를 처 들었을 때, 존재가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너무 놀라 넋을 잃은 한 인간의 형용할 수 없는 환희를 전하고 있다. 내가 열리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시인은 이때 명백한 이것을 여태 보지 못하고 살았음에 후회와 다행의 감정을 오간다. 그래 나를 위한 로드무비를 찍는 여정에 나서 보아야 할 테다.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그 어떤 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

 

자신에 대한 절망 없이는 자신에 대한 사랑도 없다. 결함은 아름다움으로 가는 통로이다. (204)이 세계 혹은 자아와의 불화로 고통 받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기꺼이 그 고통을 단지 생각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실존적 문제로 경청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형을 잃어버린 한 소녀의 영혼을 돕기 위해 허구의 생생한 편지를 지어냈던 카프카의 작고 조용한 도움처럼, 이 책은 슬퍼하는 영혼들에 따뜻한 손을 내밀어 온기를 전해준다. 절벽으로 밀어줘서 날 수 있었다는 시인이 절실하게 갈구하던 그 어느 날의 기록에서 조금은 더 시간을 보냈다.

 

아마 내가 회피하는 것이며, 또한 반드시 처절하게 나를 밀어 넣어야 할 진실이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시인의 시 구절처럼 다친 새처럼 웅크린모든 이에게 시인은 이 책을 통해 손을 잡아주기 위해 그의 손을 내민다. 금 가고 무시당해 숨겨진 자아를 지닌 무수히 많은 이들에 기쁨을 위한 손을 내밀어준다. 그래 인생극장 특별석으로 초대하는 42편의 산문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해 자주 길을 잃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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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대 시인의 문장으로 시작된 은유의 정신사가 이 책에 이르게 했다. 배를 난파시키는 사나운 바람이라는 인간 시련의 상징적 은유는 18세기 프랑스인에 와서 양면적 성격으로 변화했다.

 

인간의 정념이란 그 얼마나 불행을 가져오는 걸까요! [...] 그것은 배의 돛을 

부풀리는 바람이네. 돛은 때로는 배를 가라앉히기도 하지만 돛이 없으면 배는 

나아갈 수 없다, [...] 만물이 다 위험하지만 그것은 모두 필연에 바탕하고 있네.

- 18隱者에서

 

호기심이 이끈 독서는 인간 삶의 행복과 불행을 마치 예정된 조화인 듯 주장하는 이야기를 만나게 했다. 사실 이에 대한 시시비비는 사유의 저편으로 몰아내고 이야기 그 자체에 빠져들어 보기로 작정하고 읽었다. 19편 이야기의 연작으로 구성된 이 동화적 작품은 볼테르 자신의 삶의 곡절들과 절대 분리 불가능한 것만 같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이야기는 그가 욕망하는 사랑의 기원이 담긴 것 같고, 바로 이 사랑의 성취를 향해 겪어야 했던 불운과 행운의 거듭되는 반전의 사건들 속에서 삶의 동력, 인간 삶의 원천들을 보여주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품의 제목인 자디그(Zadig)는 아라비아어로 진실을 뜻하고, 히브리어로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자디그 또한 고대 바빌론의 유복한 가문의 고결한 청년으로 성장한 현자이며, 당시 철학에 거슬러 1년은 3654분의 1일이며,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확신하는 인물이다. 18세기 과학적 이성을 대표하는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분신일 것이다.

 

출처동서문화사 刊, 캉디드,미크로메가스,자디그, 426쪽에서


또한 소설 속 자디그의 궁정 생활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모압다르 왕의 왕비인 아스타르테는 그를 살해하려는 귀족세력으로부터 볼테르를 보호해주었던 샤틀레 후작부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몰이해와 소외로 고통을 겪던 볼테르를 알아주었던 이 지성의 존재에 대해 바치는 사랑의 서사로 읽을 수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경쾌한 작품은 가벼움 속에 번뜩이는 삶의 지혜들로 결코 진지함을 잃지 않으며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집안과 재산까지 고루 갖춘 청년 자디그는 바빌론 최고의 결혼 상대자로 역시 최고의 미인인 세미르와 약혼하여 결혼을 준비하던 중 이에 앙심을 품은 경쟁자 오르칸의 습격을 받는다. 세미르를 지키기 위해 결투하여 약혼녀를 빼앗기지는 않지만 눈에 상처를 입는다. 자디그는 한 쪽 눈을 치유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자 세미르는 애꾸눈 사내는 역겹다며 바로 오르칸과 결혼하곤 자디그를 멸시한다. 자디그는 명문 귀족과 재산을 지닌 종족들에 회의를 느끼고 심성 고운 평민인 아조라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정숙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며 그 천박성에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의 도움을 받아 시험에 들게 하여 그녀의 역겨운 위선을 스스로 이해토록 돌려준다. 아마 당대 프랑스 궁정사회 귀족들의 문란이 얼마나 기만에 싸여있는지의 비난이었을 것이다.

 

코믹한 이야기들을 이처럼 펼쳐내며, 당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버무려낸다. 그리곤 틈틈이 계몽주의 이성의 요소들인 세계의 현상과 대상들의 특성 연구에 몰두하는 자디그를 보여주며, 그의 이성적 지성이 수시로 광적인 멍청이들에 의해 위협받는 현실을 그려낸다. 그의 예리한 지성은 오히려 마법이라며 화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고발을 받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율법 논쟁을 종결짓자 신성 모독죄로 몰리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오늘의 독자인 우리들은 그네들의 역사적 사실을 조망할 수 있기에 당대에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볼테르의 비판적 견해로서 읽을 수 있게 된다. 1726년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감금하게 된 명문귀족이었던 발리에 드 로앙(소설에서는 오르칸으로 등장)의 사주를 받은 자들로부터 살해의 위기에 처했던 일, 볼테르를 궁정에서 몰아내는데 안달했던 궁정 권세가 부아예(Boyer)는 글자의 순서만 바꾸어 대주교 예보르(Yebor)로 등장하여 어리석음을 뽐낸다. 지나치게 박식해도 위험에 빠지고, 그래서 입을 닫으면 그것을 문제 삼아 위협하는 세상, 자디그는 외친다.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행복한 자로 불린다는 이유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파멸에 몰리고, 진실이 뜻하지 않게 입증되어 불행은 행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누군가의 행운이 오래 머무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행불행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그것은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섭리, 신적 질서의 조화로 향한다. 이성의 문제를 가진 것만으로 만족했다.”는 자디그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인간 개체의 운명의 증언에 있어서 섭리라는 숙명성으로 치닫는 것은 아무래도 시대적 사유의 한계처럼 여겨진다.

 

궁정 장관이 된 자디그는 왕비를 사랑하게 되고, 왕비는 왕의 앞에서 무심코 자디그를 빈번하게 칭송하게 된다.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에게 이러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친구는 현명하게 자디그를 경고한다. 사랑이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징후가 있는 법이거든, 자디그, 내가 이렇게 자네의 심정을 읽었는데 왕께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심정을 자네의 마음에서 발견하지 못했을지 생각해 보게. (8질투) ,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이성이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고의 말처럼 왕은 자기 눈으로 본 모든 것을 믿었고, 보지 않은 모든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제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어나가고, 자디그를 살해하고 왕비를 독살한 준비를 끝낸다. 사랑과 의심, 그리고 증오가 폭발하는 이 이야기는 여느 멜로드라마의 재미를 훌쩍 넘긴다. 왕비가 총애하던 난쟁이 시종의 사전 암시 덕택에 두 사람은 각자 도피의 여정을 떠난다. 이 여정에서 겪는 고초들은 지역마다의 문화와 관습적 차이, 경제적 불균형과 분배에 대한 문제로, 그리고 당시 사제의 신학과 같은 망상에서 생겨난 속임수에 대한 지탄을 통해 과학적 이성에 대한 신념을 이야기의 저변에 도도히 흐르게 한다.

 

이윽고 소설은 사드의 유명한 소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에서 유명하게 된 선을 낳지 않는 악은 없다.”고 인용된 원천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에 그 어떤 인과성이란 없다는 것, 인간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도 전체 질서 속에선 선의 원천이 된다는 생각, 예정조화설, 섭리 또는 운명에 도달한다. 설사 이것이 세계 원리라 해서, 인간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마 볼테르는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간 세계는 엄연히 악행이 있어 타자들을 궁지에 처박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분배는 왜곡되어 극단적인 괴리와 갈등으로 사회적 분열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몇 안 되는 정의로운 인간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으니 악을 신의 섭리처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면 아마 인간 세상은 벌써 종말을 고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시련과 행운을 오가며, 라이프니츠의 인과성 없는 개체들을 조화로 이끄는 거대한 힘에 대한 삶의 일화를 제시한다. 내겐 볼테르가 이러한 당대의 사변적 성찰을 내세워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전하려했다는 의혹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서 소설이겠지만 말이다.

 

바람, 폭풍우가 우리를 난파시키는 악이지만 그것에 의해 우리는 삶의 추진력을 얻는다. 동의하면서도 온전히 수긍할 수만은 없는 반항심이 생긴다. 왜 바다여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정녕 바다위에 둥둥 떠다니는 배에 승선한 존재일까? 우리에게 단단한 대지는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옳은 것일까? 아무튼 나는 요즘 이 모순, 부조리의 불가능한 이해를 이해하려는 부질없는 짓거리를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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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과 구경꾼 - 항해로서의 삶, 난파로서의 이론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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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제반 학문을 비롯한 이론들은 명석판명(明晳判明)한 개념을 추구해 온 서구의 근,현대 사상적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은폐되어있거나 말 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거나, 또는 말로 표현 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애쓰는 사유를 더 좋아한다. 때문에 퀴퀴한 지하 창고에 잠들고 있는 오랜 문서고를 들춰내거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록들을 발굴해내고 연결하여 알지 못했던 진실을 길어 올리는 작업들의 노고에 귀 기울이고 찬탄하곤 했다. 사실 내 시선이 좁은 까닭도 있지만 이외의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가능성과 시선이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바로 은유라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 또는 말 할 수 있는 개념이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기 위한 언어기술, 즉 비-개념을 해독하는 방법을 통해 일의성을 향하는 경향이 있는 언어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모든 것이 부딪치는 불편함의 대안으로 은유를 우리들 앎의 지평 속으로 끼워 넣을 수 있음을 알았다. 이 책은 은유를 개념형성을 위한 보조적 기여도구로만 인식하지 않고, 우리들 생활세계 전반을 검토하기 위한 실마리로 삼아, 세계에서 은폐된 채 실존하는 실제를 건져내 세계와 역사를, 인간의 윤리 인식과 지성의 변천을 드러내고 입증해 보인다. 아마 지하에 숨기고 감춰 놓은 것들이 더 근본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리라는 믿음일 것이다.

 

이 시대의 거실에 진열된 앎이란 것들은 너무도 많은 것들이 감춰져 있어 사유와 정치에서 무수한 동굴의 영역으로 여전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감춰진 것과 은폐된 것, 연기된 것을 밝혀 움켜쥐려는 이 비-개념의 탐구는 우리들이 지각하지 못했음에도 인류가 지혜를 전달해 온 핵심 방법이라는 사실에 있다. 하버마스, 울리히 벡과 함께 20세기 지성계의 3대 문제작의 저술자인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이 국내 번역본에 없다는 것도 한국사회의 지성이란 것이 얼마나 편향적인가의 반증이라면 왜곡된 판단이 될까? 아무튼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소품적 성격의 이 철학 에세이라도 접할 수 있게 됨에 옮긴이와 출판사에 감사의 말을 먼저 전한다.

 

책은 독일어 초판본 소개 글로부터 시작되는데, 모든 문화에서 개념적 파악에서 벗어나는 것, 즉 세계, , 역사 전체에 대한 조망은 오랫동안 조탁되는 이미지 가공 작업 쪽에 이양되어 왔다며, 이러한 작업은 위대한 은유와 비유 속에서 압축되고, 변형되고, 정교화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모델 중에 인생은 항해다.”라는 은유를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해서 현실화의 역사를 추적하고, 세계와 인간이 맺은 관계의 변화를 식별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책의 끝에 부록으로 수록된 비개념성의 이론을 위한 전망을 본문 읽기에 앞서 읽는다면 책 전반의 정신을 헤아리기 위한 은유학, 또는 비-개념성의 이론을 이해하는데 더욱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나는 본문을 읽고 이 부록을 마지막으로 읽었는데, 때문에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됨으로써 다시 본문을 한 번 더 읽는 수고를 해야 했다.)

 

책의 제목으로 짐작되는 것이지만 이 사유의 시발점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해2서시의 다음과 같은 시작 구절이다. 즉 이 철학에세이는 루크레티우스 수용사(受用史)’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폭풍우 속의 바람이 파도를 뒤집어 엎을 때,

해안에 서서 남이 난파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리라.“

 

오늘 이 문장을 읽는 사람들은 이 구경꾼의 공감능력 없음과 그 관음증적 쾌락에 몸서리치는 혐오의 감정이 앞 설 것이다. 이 고대 원자론자인 시인이 난파를 보고는 우주의 섭리를 생각하는 사유의 즐거움에 빠져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사실 그의 쾌락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고대세계의 인간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는 것이고, 이것은 시대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지식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또 다른 세계인식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루크레티우스가 살던 시대는 바다란 인간의 계획이 실행되는 공간을 제한하기 위해 주어진 경계라는 것과, 육지와 달리 규정 가능한 힘의 권역을 집요하게 벗어나는 마력들과 신들의 지배하에 있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는 점에 있다. 바다로 나가는 인간에겐 의심의 눈초리가 주어졌고, 난파란 그 응당한 처벌이었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를 21세기 도덕의 잣대로 해석하면 당대의 인간과 세계관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항해와 난파, 그리고 구경꾼이라는 이 은유는 16세기 몽테뉴에 의해 일종의 보신주의 철학으로 변모하는데, 단단한 대지에 난파라는 몰락[침몰]과 거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에 만족하며 자기 보존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즐거워하는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에 잡히는 일에 집착한다. [...]

그리고 항구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다.” - 에세2교만에 관하여

 

그러나 개인의 난파와 거리를 지킴으로서 개인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만일 국가나 세계적 사태의 몰락의 경우 피해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 가능할 것이다. 당신의 도덕은 지나치게 자족적 도덕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그래서 우리는 약삭빠른 몽테뉴가 침몰에 몸 맡길 준비가 되어있을 조건을 까다롭게 높여감으로써 안전한 구경꾼의 입장으로 끊임없이 접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블루멘베르크는 구경꾼의 운명에 만족하는, 그리고 비참한 사건을 보고 고작 자기 인생의 고통을 환기하며 쾌감을 느끼는 몽테뉴에게 쓴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17~18세기의 괴테라고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에만 열중할 줄 알았던 이 역사철학이 부재했던 인간은 1806년 예나에서 프랑스에 패배하자 많은 독일 지식인들과 민중은 고통스러워했다. 예나대학교 역사학 교수였던 하인리히 루덴1847삶의 회고라는 책에서 괴테와 이 전쟁 패배에 대해 나눈 대화를 싣고 있다. 그는 괴테에게 솔직한 심정을 물었으며, 괴테는 고대의 구경꾼을 넌지시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대화록만이 그의 인식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철면피한 괴테의 자기 미화는 수없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 한 구절이면 족하리라 생각된다.

 

내가 불평할 게 뭐 있겠나, [...] 단단한 바위 위에 서서 사납게 놀치는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 난파자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밀려오는 거친 파도에 휩쓸릴 일도 없는 사람 같은 심경이네. [...] 옛 성현 말에 의하면 그것이야말로 쾌감을 준다고 하더구만...” 


이 대화에 동석했던 크네벨이 루크레티우스 입니다!”라고 끼어든 것은 제3의 입증인이 있는 진실임을 의미한다.

 

니체도 후일 선악의 저편에서 괴테에 대해 그는 평생 미묘한 침묵을 지켜왔다.”고 쓸 정도였으니 이것이 당대 누구도 도전할 수 없었던 대가 반열에 오른 인물의 인식수준이었다. 그렇다면 19세기 철학자 니체는 루크레티우스의 은유를 어떻게 수용했을까? 그는 바다와 난파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단단한 대지로서의 항구에 주목했다. 낡고 확고한 대지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경탄하는 난파자의 행복을 지복의 경지라 부른다. 이제 대지는 구경꾼의 장소가 아니라 난파에서 구조된 사람의 장소가 된 것이다. 감행한 모험의 보상으로서 신세계를 암시하는 항해의 은유를 확대한 것이다.

 

사실 니체의 철학을 자기극복의 초인성이라 예찬하지만 난파조차 새 세계 발견을 위한 모험의 불가결한 측면으로 이해하였듯이, 후일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비롯된 나치에의 이념적 기여를 니체 또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게 한다. 세계의 모험들, 식민지 건설, 심지어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위대한 헌신에 작은 기여라도 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숙고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의 난파와 구경꾼의 은유는 이제 자연을 길들이고 의인화해 자연 속에 반영되는 주체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항구가 보였다. 희망의 여신과 행운의 여신이여, 안녕!(즐거운 학문)”

 

이러한 인식은 갑자기 세기를 건너뛰어 니체에게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미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심취했던 과학기술과 우주적 이국취미에 의해 최초로 산출되었는데, 퐁트넬과 볼테르의 소설들에 나타난 호기심이라는 지식욕과 심미적 태도가 루크레티우스의 난파라는 은유의 독창적 변종의 출현을 보여준다. , 어떤 큰 난파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만들어 그들의 특이한 모습을 편하게 이 두 눈으로 얼마나 보고 싶은지요!(여러개의 세계에 대한 대담,퐁트넬)”라든가, 돛에 불어 닥치는 바람이 때로는 배를 전복시키는 일도 있지만 배가 움직이는 것도 바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자디그;Zadig,볼테르)”, 다시말해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위험하며, 모든 것이 불가결하다는 말이다. 난파란 추진력과 파괴의 위험이라는 이율배반의 증상일 뿐인 것이다.

 

인간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18세기를 전후하여 얼마나 급하게 변한 것인지를 우리는 이를 통해 조망할 수 있게 된다. 고대와 중세의 구경꾼의 태도였던 부동의 관조라는 정신은 불타오르는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한편으론 난파자의 대안으로서 단단한 대지가 아니라 인생에서 행복을 얻을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이 얼마나 획기적인 사고의 변화인가! 급기야 근대 이성주의는 구경꾼의 위치를 지워버린다. 쇼펜하우어는 난파자와 구경꾼의 위치에서 두 인간 주체의 동일성을 해명하기에 이르는데, 인간 본인이 겪는 고통의 구경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이성 덕분이다. 인간은 항상 현실과의 갈등에 휘말리지만 그것을 순수하게 관찰하는 입장에 도달한다면 삶 전체를 모든 측면에서 조망 할 수 있게 된다.”,

 

해서 이 인식 주체는 모든 욕망과 궁핍을 떠난 채 태연히 이념을 포착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의식은 니체의 그것과 유사한 냄새가 난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세계를 저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이 확고한 믿음, 이러한 오만은 곧 흔들리게 된다. 역사철학자 부르크하르트에 이르면 그의 저술 세계사의 고찰, 역사적 위기에서 폭풍이 계속 우리도 앞으로 밀고나가는 것을 깨닫고 있다. 파괴하고 동요시키고 난파를 야기하면서...”라면서, 폭풍우에 의한 파도 자체가 인간과 인간의 행위임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역사가는 그것의 추진력에 몸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이미 인간은 구경꾼이 되는 것도, 역사가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

 

이제 19세기 과학의 세기는 기항할 항구(대지)도 구경꾼도 없는 바다에 떠도는,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상황임을 문득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극단적인 배의 변종이 출현한다. 도달 가능한 육지도 없으니 바다 위를 떠도는 배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 배는 거친 바다 위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선조들은 떠다니는 통나무를 이용해 배를 만들었으며, 그리고 그것을 계속 개선해 오늘날 편안한 배가 되어 인간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다시금 시작할 용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 편안한 배의 은유로의 전환은 인간을 자연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모험이 불가능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이러한 변종 은유는 역설적으로 편한 배에서 뛰어내려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 용기를 전파하려는 구경꾼을 자극한다. 그런데 새로 시작할 용기있는 사람들은 배를 만들 널빤지와 통나무를 어디서 구한다?

 

이 거대한 지성사, -개념의 은유지대를 거닐다보면 바다와 난파와 구경꾼의 은유가 실로 엄청난 인간 인식 능력과 그것들에 내재된 윤리의식, 세계관, 삶의 이해방식 등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때론 심미적으로, 때론 윤리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으로 구경꾼에 대해서, 난파에 대해서 저마다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유의 풍경들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난파자를 바라보는 구경꾼의 시선은 이미 한국사회의 병리적 실상 때문에 익숙한 재료이다. 또한 난파의 위험이라는 상시적 재난에 대한 사회와 제도의 미성숙은 위험사회를 교묘하게 은폐하기에 바쁜 몸짓으로만 이어지고, 난파자라는 타인의 고통을 향해서는 오히려 가학적 발언과 함께 소금을 뿌려대는 반사회적 고질병이 수구청치집단에 의해 난무하는 현실이다. 이 비-개념의 철학에세이를 읽다보면 매 문장마다 현실 생활세계의 현안들이 겹쳐 떠오르며, 무수한 말이 되어 둥둥 떠다닐 지경이다.

 

아마 우리들의 정신적 초상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최고의 지성사적 고찰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나에게,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에서 난파는 무엇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는지, 혹은 나와 이웃이 이미 난바다에 떠 있는 이미 승선한 동료는 아닌지, 그리고 나는 괴테나, 몽테뉴 같은 방관자이거나 자기 보신적 위선자는 아닌지, 나아가 난파자를 보고 루크레티우스의 관조적 즐거움이 아니라 낄낄거리며 남의 고통을 즐기는 반사회적인 정신 파탄자는 아닌지,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은유의 세계, -개념의 이론을 토대로 한 이 해박하고 재치 넘치는 글에 매혹되지 않는 이가 없을 듯하다. 블루멘베르크의 주저인 근대의 정당성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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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겨울 2023 소설 보다
김기태.성해나.예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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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바뀜과 더불어 찾아오는 소설보다를 읽어왔던 중 세 작품 모두를 홀린 듯 읽었던 기억이 없다. 이번 2023겨울 호에 수록된 김기태 작가와 예소연 작가는 시간상 그리 멀지 않은 2023 봄 호(예소연,사랑과 결함)와 여름 호(김기태,롤링 썬더 러브)에 이은 만남이어서인지 마치 잘 아는 작가의 작품을 만난 기분이었다. 특히 김기태 작가의 체제 내적 언어인 보편이라는 단어와 교양이라는 수상쩍은 단어가 결합한 보편교양은 그 익숙한 문제의식으로 생각의 친근성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성해나 작가의 진실과 거짓이라는 흔해빠진 언어를 피해 진짜와 가짜라는 낡아 버려진 듯한 단어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다시금 생각이란 것을 하도록 이끈 혼모노는 관통하는 주제 이전에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졌다.

 

예소연 작가의 우리는 계절마다는 연작으로 기획된 작품인 듯한데, 이 작품에 앞서 현대문학6월호에 발표된 아주 사소한 시절에 이은 성장소설의 한 부분으로 계획된 작품으로 알게 되었다. 억압된 진심, 애증의 감정을 그려냈던 단편 사랑과 결함은 내게 무섭게 돌진하던 로봇 청소기를 안아들던 화자의 행위로 뭉클했던 감각을 지금도 얼얼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예소연 작가의 작품에 대해 나만의 어떤 고정된 느낌을 가지게 되었는데, 타인의 영향력에 대해 냉엄하게 선을 긋고 돌아서지 못하는 여린 마음의 인물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우리는 계절마다의 주인공인 중학교 2학년 희조 또한 또래와 가족 등 주변의 타인들은 물론 이 세계라는 불가해한 힘에 의해 휘말리는,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억압이나 연결의 고리로 묶는 힘과 같은 타자의 탓으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존재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내적 단단함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는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초등학교 친구였던 미정과의 재회가 의미하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는데, 이 역시 애증(愛憎)이라는 양가감정과 다르지 않은 성분의 것처럼 여겨진다. 아마 소설의 문장을 인용한다면 그 이상한 낙차, 불가해한 타자의 힘과 벌어진 간극이 발산하는 나와의 견디기 힘든 그 무엇일 것이다.

 

성해나 작가의 작품은 내 기억으로는 이 작품 혼모노가 처음인 듯하다. 박수무당인 중년남자의 이야기다. 얼마나 꼼꼼하게 이 인물의 세계를 관찰했는지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어느 날 그의 내림 신이었던 장수할멈이 일언의 예고도 없이 빠져나가 신기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앞집에 앳된 신애기와 그 가족이 이사 옴으로써 삼십년 넘는 무당으로서의 삶이 가짜가 된 듯한 번민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이 진짜임을 입증하려는 몸부림의 여정으로 읽힌다.

 

신애기가 이사 오던 날 그 아이는 살기어린 눈으로 문수를 바라보며 중얼댄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아마 이 소설의 이야기 여정 자체를 읽는 재미도 가득하지만, 진짜와 가짜, 가짜와 진짜가 뒤얽혀 무엇이 진짜인지 혼돈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지막 굿 장면의 박수무당의 붉게 젖어든 장삼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이미지는 흉내만 내며 살아 온 인생에 대한 애틋하고 강렬한 삶의 증명을 위한 몸짓이 내재되어 뭉클한 무엇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작품 제목을 혼모노(本物)’로 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진짜배기 또는 진정한 영혼과 같은 긍정의 뜻을 지닌 혼모노라는 단어가 진짜 의미를 잃어버리고 가짜나 오타쿠같은 변질된 의미가 되어, 마치 이 변질된 가짜가 진실처럼 되어버리는 지금의 시대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하고 있다. 다수 혹은 내가 믿으면 그것이 진짜 의미로 둔갑하는 세계의 맹목이 판치는 세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가짜가 되어버린 문수의 이 마지막 외침은 가짜인 진짜의 소리로 와 닿는다. 짧은 단편에 세대의 관점과 욕망에서부터 이 시대를 장악한 거짓 진실의 이야기까지 여러 주제가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에 탄탄하게 결합되어 몰아지경으로 빠져들게 한다. 아주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김기태 작가의 보편 교양은 고 3생 자유선택 과목을 맡게 된 교사 곽의 시선을 통해 보편적 가치란 것이 과연 합의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가치의 공유를 위해 개인성의 침해는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의 과정을 담고 있다 하겠다. 요즘 고등학교에 새롭게 도입된 자주적 학습 선택권의 일환으로 개설된 선택과목에 얽힌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인식을 양분(養分)으로 보편성과 교양이란 언어의 윤리적 이성과 도덕적 판단력의 한계를 생각토록 한다. 교사 곽은 처음 개설된 고전 읽기과목을 위해 열정을 가지고 준비를 한다. 그리고 나름 강의의 내용을 구성할 고전작품을 고심하여 선정하고, 강의 준비물을 열정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선택과목의 현실은 타 선택과목에 비해 수월한 이수과목일 뿐이며, 아이들은 책상에 머리를 대고 잠에 빠지거나 타 학과 공부를 노골적으로 펼치는 공간으로 이용될 수단이다. 실제 다섯 명 남짓의 아이들만 선생의 강의에 관심을 보인다. 곽은 이 아이들을 위해서 강의를 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교장이 호출하여 학부모로부터 아이가 자본론을 읽고 있으니 걱정스럽다는 교양(?)’있는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교장의 말은 한마디로 전교조 교사가 수업시간에 지본론을 읽혀 빨갱이를 만들고 있다고 소문 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이다.

 

곽이 상기하고 있는 보편적 교양과 바람직한 인성을 형성하며 [...]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고, 읽은 것은 물론 말하기와 글쓰기 등 통합적인....“ 운운하는 선택과목 개설의 취지부터 사실 모순의 언어로 가득함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제도 교육, 기성의 질서체제가 요구하는 지식을 갖출 것을 요구하며, 문제해결과 같은 판단력의 성취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배반적인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하나일 것이다.

 

학부모의 의혹은 그 집 아이의 학업 컨설턴트의 말로 유야무야 되어버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아이는 곽의 표현으로 과제 자체의 의의를 스스로 판단하고 주장하고 설득할 줄 아는 것, 다른 말로 무언가를 읽었고, 의견을 생성했으며, 설득력 있게 표현해 낸. 곽은 아이의 수행평가 난에 이렇게 최고의 평가내용을 기재해주고, 아이는 서울대 일반전형에 합격한다. 이에 선생들은 곽에게 비아냥조의 말들을 건네는 데, 이제 애들 다 공산당선언읽히고, 머리에 빨간 띠도 매줘야 하는 거 아냐?“, 아무튼 이런 현실을 읽게 되면 교사들조차 이렇게 천박하다면 이 사회의 윤리적 건강성은 말해 무엇 할까? 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작품은 이 천하고 편협한 현실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러한 현실 사회 속에서 보편성이란 것이 대체 합의 될 수 있는 것인가의 회의적 물음이고, 이러한 가치가 어떻게 교양이란 것으로 묶일 수 있는가의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사회에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다. 작가는 작품 인터뷰에서 자기 자리에서 자기의 진정성만 조각하는 것이 무슨 힘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작품 속 교사 곽의 고뇌에 놓인 자기 인식의 발전에 침을 한 방 놓는데, 강의 시간에 선생의 시야에서 배제된 대다수의 방치된 학생들에 대한 숙고가 없다는 점에서 분명 보편성이란 것이 고작 제도 내 유연한 적응자만을 위한 것임에 불과한 것으로 그치는 것에 대한 지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독자인 나와 멈춰진 질문,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할 같다. 머리를 싸매고 이 문제를 타개하지 못하는 이상, 어쩌면 이 사회 교육의 미래는 혼돈의 양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답답한 지점에 이른다.

 

사실 현실 교육에 놓인 과제로서의 보편과 교양의 어려움은 성인 사회라고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교육에서 굳어진 개념의 오류는 사회로 이어져 편협과 왜곡, 그리고 갈등이라는 이것들의 연장이다. 지금 현실의 세계를 보면서 이를 보지 못한다면 아마 그것이야말로 맹목(盲目)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무튼 이번 소설보다겨울 판의 세 작품 모두 탁월한 이야기 구성과 더불어 그 재미를 넘어서는 주제들이 내 정신이 양분으로 삼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얄팍한 지성에 사유를 재촉했다. 모처럼 흥미로운 생각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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