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 이옥 낭송Q 시리즈
고미숙 기획, 이옥 지음, 채운 옮김 / 북드라망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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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정조시대 이옥(李鈺,1760~1815)이란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수일 전 독서에서 주석에 설명된 스치듯 출처에 표기된 이름으로부터였다. 아마 서울의 이름난 가객(歌客) 송실솔(蟋蟀;귀뚜라미)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벌써 기억이 희미하다. 글 주제의 중심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임에도, 작가의 이름만은 뚜렷이 남아 그를 찾아보게 했다. 주류 문필가가 아니었던 고로 연암과 같이 주목받는 이가 아니었던 까닭일 것이다. 게다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시범 케이스가 되어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충군과 정거라는 이중의 처벌을 받아 10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내 시선을 끌어당긴 요인이었을 것이다. 문체반정이란 정조의 일종의 사상통제 프로젝트이다. 젊은 지식인들이 삿된 생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 했지만, 사대주의에 터 잡은 사상의 획일화를 옥죄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1790년 중광시에 합격하여 1792년부터 1795년까지 대과를 위해 성균관에 기숙하며, 급제에 도전했지만 번번히 정조는 무개념(無槪念) 문체를 계속 지적하며 불합격시켰다. 이옥은 왕이 수용하지 못하는 자신의 문체를 고집했는데, 그에게는 신개념(新槪念)이었던 것이다. 정조는 그에게만 가혹하다할 정도로 혹독한 벌을 내렸다. 이옥은 1799년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무관(無官)으로 살다 세상을 떠나고 잊혀졌다.

 

정조가 치명적 단점으로 지적한 것은 음조가 슬프고 빠르고 가볍고 들떠 있으며, 우주의 이치, 우국의 정과 성인의 도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하찮디 하찮은 것들에 대한 하찮은 쓰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이옥의 글맛이라는 점에 아이러니가 있다. 이 책 낭송 이옥은 이옥의 사후에 그의 벗 김려(金鑢)가 글을 모아 문집에 실어 전해진 것으로, 이옥전집에 수록된 글 중 일부 발췌된 것이다. 사실 내 관심은 문체반정에 향해 있었기에 이옥이 분명 어떤 형식으로든 항변하는 글을 남겼으리라는 기대였으며, 그것을 보고 싶었기에 선택한 것이고, 이러한 기대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은 다섯 성격의 글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독서(讀書), 다정다감의 정(), 마음의 풍경, 미물의 관찰에서 비롯된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타자들의 이야기이다. 다섯 장 41편의 이야기들 어느 한 편의 이야기도 서투르게 읽을 것이 없는 꼼꼼하게 다져진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글이 웅대한 삶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폄하하는 자들의 말은 벌레와 꽃, 거리 장사치나 건달, 사랑에 울고 아파하는 여인네들, 저마다 사연을 품고 신산한 삶을 살아내는 민초들에 세심한 눈길과 귀 기울인 이옥의 살아 숨 쉬는 글에 비해 오히려 하찮은 헛소리가 되고 만다.

 

이옥은 취하듯 읽고 토하듯 쓴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글을 모아 묵토향(墨吐香)이라 이름 지었다며, 위장에서 술이 넘쳐 위쪽으로 올라와 용솟음쳐 목구멍에서 토하게 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왜 쓰냐는 물음에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쓰고 있지만, 조정(朝廷)의 이해관계, 벼슬길, 지방관의 잘잘못, 재물과 이익, 여색등 칠불언(七不言)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기에, 자신은 새를 이야기하고 물고기를 이야기하고 짐승을 이야기 하며, 벌레를, 꽃을, 곡식을 채소를, 과일을, 풀을 이야기한다.“고 쓰고 있다. 그 잘난 중국사상과 중국말을 고집하는 너희들이 하는 대상은 나는 말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왕과 사대부 지배계급이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시하는 것들에 대해 쓰겠다는 저항으로서의 글을 쓰겠다는 다짐인 것만 같이 여겨진다.

 

천지만물로부터의 깨달음이라는 책의 3장에 수록된 글은 이와같은 이옥의 미물(자연)에 대한 관찰이 얼마나 세밀하고 예리하게 벼려져 세상을 통찰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그야말로 절창들이라 할 것이다. 벼룩과 한 판 승부를 벌이는 경금자(이옥의 별명)와 벼룩도사의 은유를 통해 자성(自省)과 하찮은 이익을 쫓다 참 된 것을 잃어버리는 권력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 흐르고, 가라지(잡초)로부터 얻은 세 가지 깨달음의 변에서는 한나라 동탁과 송나라 왕안석을 비유하며 그 삿된 것들의 뿌리뽑기의 어려움과 해악을 하찮다는 자연물에서 끌어낸다. 한편으로 목화꽃이 무명옷이 되기까지의 그 고된 과정들을 비추며 곤궁한 민초들의 노고와 삶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어쨌든 이옥의 글쓰기는 그가 벌레를 대상으로 이야기했든, 잡초를 이야기했든, 그것은 자기 욕망의 해독과 보잘 것 없는 현실을 통해 삶의 여실함을 세상에, 특히 지배계급에게 당당하게 보여주려 했던 것이라 나는 읽는다. 특히, 1나는 읽고 나는 쓴다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문체반정에 대한 직접적인 항변으로 읽히는데, 그대의 이언(민간의 속된 말)은 무엇 때문에 지은 것인가?”라는 그의 글에 대한 위협과 비난의 물음에 답변하는 글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재자가 한 것이라 말문을 열면서, 짓는 자가 어찌 감히 짓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천지만물이 자신에게 들어왔다가 다시 나온 것이 자신의 글이며, 이는 짓도록 만든 자가 짓는 자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 바로 천지만물이라고 답한다. 이 비유로 나비와 국화꽃 이야기를 하는데, 지나가던 나비가 국화꽃에 매화, 모란꽃, 자두꽃의 형형색색의 빛깔을 띠지 않고 하필 노랑이냐고 비아냥거리자, 국화꽃은 때가 그러한 것이니 내가 때를 어쩌겠느냐고 쏘아댄다. 그리곤 그대는 어찌 내게 나비처럼 묻는 것인가?“라며, 정조를 향해 한 방 날리는 것만 같다. 세상을 봐라, 그리고 민초들의 삶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봐라. 라고 꾸짖는 듯하다. 어찌 네 잣대로 다른 삶을 측정하려느냐고, 그건 전혀 잘못된 측정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또한 그의 글에 여인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에 대해, 분바르고 연지 찍고 치마입은 여자의 일에만 국한되는 것은, 예가 아니기에 말하지 말라 했거늘, 이옥 너의 이언은 이 같은 것 아니냐고 추궁한다. 이옥은 바로 굴복하여 그것을 태워주십시오. 라고 말하곤, 감히 여쭙는다. 그렇다면 고매한 시전(詩傳)이란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 그가 몰라서 물었겠는가? 당연히 경전이라고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온다. 이옥은 지은이, 누가 골라 책을 지었는지, 그 대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효용은 또한 무엇인지 묻는다. 마지막에 말한 바는 무엇이냐고 묻고는 대다수가 여자의 일이라는 답을 얻는다.

 

세상의 가장 참된 것이 남녀의 정을 살피는 것임을 삶의 일상으로부터 건져 올려 논리적 설득에 이르고, 천도(天道)의 자연적 이치에 대한 논증은 무개념이나 하찮디 하찮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진실한 일이라는 것, 바로 신개념의 문체임을 보란 듯 설파하는 당당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한편 그가 본래 명칭대로 쓰지 않고 망령되게 제멋대로 토속이름을 따라 문자로 표현하였다는 추궁에 또한 답하고 있는데, 집을 악양루니 취옹정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백성의 삶과 괴리된 표현인지 지적한다.

 

정조가 보기에 석()을 돗자리로, 등경(燈檠)을 기름등잔으로, ()을 붓이라 쓰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의 반고씨가 천자가 되어서부터 칙명으로 내린 이름이 아니거늘, 마땅히 저들이 칭하는 것으로 이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옥은 이를 실제 삶에서 오는 소통 불능사태들을 예시한다. 현령이 아전에게 법유를 사오라 했더니 없다고 사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문체를 주제넘고 괴팍하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항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현실을 쓰고자 했던 것이다.

 

감상을 끝내기 전에 <가을 타는 남자가 진정한 남자>라는 2내 마음의 풍경들에 수록된 한 편의 글을 빼놓기에는 너무 아까워 간략하게 더해본다. ‘가을을 슬퍼하는 것은 선비다라는 이옥의 말에 대한 또 하나의 추궁이다. 그는 선비는 노동을 하지 않으며, 식견은 애상을 분별하기에 충분하고, 마음은 사물에 잘 감응하고, 고서를 읽으며, 고요히 그것을 살피며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사람이 선비들 말고 누가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하는 이야기다.

 

천지의 기미와 천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선비이니 서리 내리는 가을을 슬퍼할 수 있는 자는 선비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이옥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의 시선이 잘난 양반들의 몽매성에 한 방 갈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 당대 선비, 지배층은 이옥의 통찰에 대항할 산 지식이 없었을 것이다. 정조가 유독 이옥에게 잔인하게 대한 것은 아마도 그의 앎에 대한 시기와 질시가 아니었을까? 천지만물에 대한 17세기 인물의 생생하고 꼼꼼한 시선과 언어에 매료되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문체반정으로 인한 한 사람에 대한 비극이 오히려 독보적인 글을 후대에 남기도록 작용했으니 죄송한 말이지만 다행이라 하고 싶을 정도이다. 사상 통제에 대항해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고귀한 정신에 절로 겸허해진다. 시대를 앞서갔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매양 마음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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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06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멋진 책과 리뷰글..... 감사합니다. 북드라망 출판 도서는 역시나 좀 달라요.

필리아 2023-12-07 07:28   좋아요 0 | URL
댓글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자연물과 시장 풍경 등에 대한 미주알고주알 만화경같은 진술들과 비유가 넘치는 재치있는 글의 향연이기도 합니다.

호시우행 2023-12-07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하세요^^
 

<양심과 판단력에서 유리된 지식의 패악(悖惡)>



행동은 비루하고 언변만 학자인 자들이 나는 싫다.”

- 파쿠비우스(Marcus Pacuvius; B.C. 220~B.C.130)

 

몽테뉴의 에세(Esse) 1 25현학에 관하여를 읽던 중 재밌는 구절을 발견하고 몇 자 남겨두기로 했다. 이야기는 고트족이 그리스를 침범했을 때, 그들은 단 하나의 도서관도 불태우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고트족이 지식과 문화를 존경하고 숭배해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 도서관들을 온전히 남겨두어야 판단과 실천의 장을 멀리하고 들어앉아 글에 코를 빠뜨리는 일에 몰두하게 되리라는 견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즉 문()을 숭상하고 이의 판단과 실천적 현장은 도외시하는 식자들만 우글거리기를, 그래서 칼집에서 칼도 꺼내지 않고 손쉽게 주인이 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몽테뉴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는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공부할 뿐, 그것을 판단하고 실천하는 법은 배우지 못하는, 남의 지식만으로 가득 채워진 지식의 무용성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16세기 조선 또한 서원에 들어앉아 세치 혀를 훈련시키는 데 열중하다 왜에 손쉽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것도 이와 다른 현상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 페리고르 지방의 이 귀족은 급기야 너무 많이 공부하고 너무 많은 재료를 (두뇌)에 채워 넣으면 둔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고 하기도 하지만, 반지성(反知性)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그 어느 때보다 도서관이 많이 늘어났다. 대부분의 도시에는 곳곳에 공공 도서관이 있어 기억의 창고를 가득 채우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발걸음들로 분주하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의 식견이 더 깊어졌는지, 혹은 이 사회가 더 선하고 정의로운 세계가 되었느냐고 물으면 선뜻 답변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 책과 학문에서 우리들은 무얼 배우고자 하는 것일까? 아마 법학, 의학, 경영학, 공학 등등 돈 버는 목표에 소용되는 것을 목표로 한 공부이기 십상일 것이다. 결국 정의를 실천한다거나 올바른 판단을 하기위해서나, 선한 행동을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러한 양상은 학교 교육 또한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더욱 극성맞게 판단력과 덕성에 관해서는 어떠한 것도 가르치지 않으며, 배우지 않는다.

 

때문에 고대 로마 시인 파쿠비우스가 말하듯 지식은 가득한데 행동은 비루하고 혀만 재빠른 인간들만 양산되고 있는 듯하다. 지식과 판단력을 비교해보면, 판단력은 지식 없이도 작동하지만 판단력 없는 지식은 파렴치하거나 악덕이 되기 일쑤이며,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결국 이 사회에 기억력은 충실하지만 판단력은 텅 빈 인간들로 득실대다보니 사회 정의는 실종되고, 선악이 뒤틀린 세계가 펼쳐질 수밖에 없게 된다. 몽테뉴는 법관을 임용할 때 지식만을 검증하는 시험은 그릇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양식(良識) 또한 검증되는 채용제도의 필요를 역설한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 사법의 정의를 위해서 정말이지 이들 기구에 지식은 물론 이해력과 양심이 함께 갖춰지기를!”이라고 썼다.

 

"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른 어떤 지식도 해롭다! "

-에세 125, 265, 민음사 2022.8, 13쇄에서

 

지식은 정말 위험한 양날의 칼이다. 판단력, 즉 선한 의지에 대한 배움이 없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필히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 세네카가 지식만을 채운 인간들이 나타나고부터 선한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듯, 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인간들에게는 다른 어떤 지식도 해롭기만 하다는 것을 오늘 정치검찰이 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현실로 입증되고 있듯이 말이다. 몽테뉴는 오랜 공부 뒤에 얻은 것이라곤 법조문에 불과한데 우쭐하고 오만해져 부어오른 영혼으로 바람만 잔뜩 들어간 인간들의 독성으로 가득 찬 정신을 비판하고 있다.

 

지식과 바른 판단력으로서의 지혜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지식과 실천적 행동 또한 그 거리는 한참이나 먼 것이다. 우리 사회가 17세기 프랑스인이 생각하기를 권했던 인격과 실제 행동으로부터 격리된 지식 쌓기의 그 혐오스러움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 더구나 이를 시정하기는커녕 더욱 고수하려 한다는 점에서 수치스러움이 엄습해온다.

 

지식 자체는 정신에 광명을 주는 것도, 눈을 뜨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이러한 지식의 직분을 혹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 보게 된다. 채워 넣은 지식이 올바른 가치 판단으로 이끌어주고, 판단의 속도를 조절해주는 지혜로 체화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인격형성과 선한 실천력으로부터 유리된 지식만이 난무하는 이 사회는 분명 잘 못된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일 게다. 글한테 망치질 당한 '글 멍청이(Lettreferits)'들이 설쳐대는 사회는 고트족의 좋은 침략 대상이 되리라. 양심과 판단력을 지니지 못한 공허한 지식이 휘두르는 칼날이 이 사회를 어디까지 추락시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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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개정증보 2판) - 복잡한 세상 명쾌한 과학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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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아톰(atom)의 세계에서 비트(bit)의 세계인 디지털 세계로의 급속한 이전이 이루어진 세상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이에따라 엄청난 초연결과 초융합의 세계가 열리면서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에 의해 새로운 차원의 서비스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무수히 복잡한 세계 그물망의 상호작용에 의한 창발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나, 이것이 인간 삶의 행복 증진과는 괴리된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의 도구가 될 뿐이다. 과학의 급격하고 가공할만한 진전이 인간 개체의 삶에 소용되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일까를 자문해보게 된다.

 

2001년에 초판이 출간 되고, 10년마다 개정증보를 하여 2020년까지 두 차례 증보(增補)가 이루어진 이 대중 과학 저술을 읽게 된 동기일 것이다. 특히 20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조르조 파리시의 복잡계 상호작용에 대한 저술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2020년 추가된 글에서 과학자 정재승은 복잡계 과학이 최근 10년 가장 많은 발전을 이룬 과학 분야라 말하고 있다. 무작위적이고 우연에 의해 촉발된 현상으로 이해되던, 무수한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어떤 법칙이나 질서를 알 수 없었던 대상으로부터 고유한 물리적 특성을 발견 규명하는 연구를 복잡계 물리학이라 거칠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삶의 현실로 돌아와서, 과학의 발전이 인간을 대체할 정도의 인공지능 구현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선전하지만, 이 세계에 작용하고 있는 변수들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자신들이 손쉽게 정량화할 수 있는 것만을 과대평가하고, 정작 사회구성원인 인간 개체에게 소중한 가치들인 쾌적한 환경, 창의적 교육, 국민건강, 민주주의와 같은 요소는 거의 고려조차 되지 않는 지표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복잡계 과학의 연구는 이제까지 보여진 국민행복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성장만을 주도하는 GDP(국민총생산)를 대체하는 새로운 지표의 수립을 위해 헌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물질적인 공공성격의 투자(후원)가 뒷받침되어야겠지만 말이다. 복잡계는 이미 자연 대상물과 교통망, 통신망, 주가 예측, 심장 박동의 질서 등에서 질서가 있는 카오스 운동을, 무질서해 보이는 미세 개체들의 상호작용에서 불완전한 질서를 발견, 입증해왔다. 그리고 이들을 표현하는 비선형 함수를 포함하는 카오스 방정식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의 물리적 해석을 해내기도 했다.

 

인간 세상에 대한 불합리성과 혼잡성에 관심을 가지고 입자물리학, 통계 물리학자들이 복잡계 경제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격변과 혼란으로 가득 차있는 복잡계로부터 정확한 예측을 기대하는 것이 분명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계 물리학은 인간 행동과 인간관계에 대한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질서를 발견하고 입증하는 데 나름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네 사람만 연결되면 전 지구의 인간이 연결될 수 있다는 케빈 베이커 게임( Six Degrees of Kevin Bacon)이론작은 세상 네트워크를 입증하면서, 몇 가닥의 무작위 연결이 국소적 무리로 이루어진 폐쇄사회를 전체에 열린사회로 만들 수 있음을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알려주었다. 잘 짜인 네트워크에서 이탈한 엉뚱한 단 몇 가닥이 거대한 조직이 모두 연결되도록 만든다는 물리학적 연구가 우리 포유류 인간 뇌의 신경 세포 작동 이해에 단서를 제공하였듯, 도로 설계와 통신망 설치에 유용한 상상적 도구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20세기 초 표현추상주의 회화를 이끌었던 잭슨 폴록의 물감을 질질 흘려 놓은 것 같은 그림이 모든 자연 현상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특징인 카오스와 프랙털이 반영된 작품임을 물리학이 규명해냈듯, 무작위 시스템에 내재한 불안정하지만 규칙의 존재를 입증해내지 않았던가? 아무리 작은 스케일에서 들여다보더라도 미세에서의 구조가 전체 구조와 유사한 구조를 되풀이하는 자기유사성, 프랙털을 발견했듯,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서도 물리학은 분명 결정론적 시스템과 무작위 시스템 사이에 놓여있는 카오스 시스템을 규명해내리라 생각된다. 이 세계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균형한가? 언제까지 측정할 수 없는 것이라 무시하고 측정 가능한 것들로만 이 세계를 왜곡하는 짓을 방관할 텐가? 과학이 지배질서인 주류에 편승하며 자기 이익에만 골몰한다면 아마 과학은 지금까지 학문으로서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출처본문 107잭슨폴록과 카오스 부분 발췌


인간의 심장 박동의 주기적 규칙성에 대한 신봉을 무너뜨리는 심장박동 간격의 불규칙성이 건강한 환자의 신호라는 과학적 발견처럼, 한동안 박동이 증가하다 반대로 줄어드는 요동을 반복하는 카오스 운동의 역동적 유연성이 이 세계의 자연 법칙에 숨은 질서임을 배운다. 질서와 균형을 통한 정적 평형상태의 항상성은 결코 생명 현상이 아님을, 오히려 정적 평형상태를 깨고 끊임없이 요동치고 변화하는 그것으로서의 항상성임을 알게 되었다. 나사(NASA)의 로켓 과학자들이 월스트리트에 금융공학자가 되어 입성하고, 경제주체들의 상호작용의 원리를 연구 규명하듯, 인간 삶의 균등한 성장과 생활터전의 건강성을 밝혀주는 지표를 왜 개발할 수 없겠는가? 국가의 공공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기득권을 차지한 정치권력과 관료집단은 분명 이러한 실질적 삶의 반영에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 대중이 권력에 요구해야 한다. 과학이 국민의 삶에 기여하는 연구에 나서도록 말이다.

 

자연의 가장 창조적 혼돈상태, 어떤 계의 물리적 형상이 변하는 것을 상전이(相轉移)라 부른다. 물이 끓어올라 수증기로 변화할 때 물이라는 계의 큰 요동을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다. 즉 요동이 크다는 것은 그 계가 어떤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는 순간이라 해석할 수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혼돈으로 요동치고 있다. 나는 이 혼돈을 무엇인가를 창발하려는 인간사회의 새로운 상태로의 전환을 알려주는 신호로 여기고 싶어진다. 연주회 관객의 박수소리가 동기화되는 박수의 물리학, 노이즈가 필수인 인간 정상 뇌에 대한 연구, 흐르는 모래 알갱이의 자기조직화와 임계성이라는 현상의 발견으로부터,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과 자극을 얻었다. 한편으론 현재 과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들, 인간 지식의 한계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비로소 직면하기도 했다.

 

세상의 많은 복잡계가 임의 연결망이 아니라 정교하게 연결된 독특한 특성을 지닌 구조체임도 아울러 명료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양자물리학의 대두와 함께 과학의 겸허함도 아울러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책은 세상 탐구에 나선 물리학, 나아가 과학의 동태보고서라 해도 될 것 같다. 아무튼 삶을 행복하지도 지속가능하게도 하지 못하는 GDP 성장 중심의 성장 경제를 대체할 새로운 지표의 개발을 위한 물리학자들의 전방위적 도전을 기대해 본다.

 

월스트리트에서 자기 이익에 투신하는 물리학자가 아니라, 인간 세계의 이익을 위한 과학자들의 출현이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연구되거나 진행 중인 물리학 연구의 진술들을 통해 새로운 발상의 촉발을 경험하고 또 다른 가능성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다가오는 새 십년에는 과학이 어떤 성취를 이뤄낼지, 2030년의 증보판을 기대해 본다. 2001년 이 책을 처음 쓰던 젊은 과학자가 이제 중년의 경험 많은 과학자가 되었을 터이다. 그의 연구에 인류 유익의 연구 성과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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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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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본디 크나큰 이야기인 셈 아닌가요? 그 이야기가 덧없이 끝나버릴까 두려워 잠들지 못한답니다. 혹은 세상이 너무 재미없어질까 불안하여 밤을 지키는 초병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 나는 거지로소이다, 81쪽에서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어떤 순간을 되돌려볼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상황을 전환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괜한 짓거리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역사의 주변부로 처리되어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익명의 존재들이 겪어내야 했던 삶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가, 이루지 못한 사랑에 결실을 맺어주고, 실패한 사건을 성취시키며, 사건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주인공이 되어 봄으로써 역사와 삶의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혹독함, 안타까움, 무력함에 들러붙었던 것들, 혹은 유무형의 높이 세워진 인위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선한 세계를 상상해보는 것은 결코 현실과 괴리된 망상으로 그치진 않을 것이다. 한문학 교수인 윤채근은 실록과 여타 역사기록물들, 조선조 소설과 민담 등을 상호연결해보고,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시대의 관념으로 상상력을 지펴내어 생생하고 흥미 넘치는 28편의 매혹적 이야기를 탄생시켜 놓았다.

 

책은 커다란 주제의식을 기반으로 전쟁과 혁명, 현장의 미스터리, 시간을 초월한 사랑, 세 부분으로 나뉘어, 국가의 창업과 흥망의 현장으로, 사건의 현장에서 번뇌하는 인간 존재의 일촉즉발 삶의 현장으로, 그리고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이야기로 재구성하여 시공을 초월한 이동 속에서 정서적 충격과 공감을 오가며 새로운 상상의 길을 펼쳐놓는다. 하나의 가공된 이야기마다 그 이야기의 근거가 된 사료와 기록들을 제시하며, 허구화되거나 재해석된 부분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작가적 상상의 구성 속에서 독자는 진실을 추정해보고 그러해야 할 세계의 당위를 생각해 보도록 돕는 역사와 문헌에 대한 간결한 안내 글은 새로운 독서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일본 구마모토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개인 원찰 혼()묘지 보물관에 보관되어있는 이순신의 서명과 낙관까지 갖춘 육필 칠언시에서 비롯된 왜장(倭壯) 와키자카의 목소리를 통해 구술되는 적장에 대한 경외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전쟁과 혁명의 이야기들은 북방의 드넓은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기상과 그 기원을 알리는 신화가 되어 살육의 덫에 갇힌 전쟁의 수레바퀴를 생각게 하기도 한다. 그리곤 1456년 찬탈한 왕위의 부도덕함을 시정하려는 숨 가쁜 반정(反政)모의 사건이 실패하는 시간 속에 내려놓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거사를 미뤄선 안 됩니다. 미루려는 자가 배신자이니 그 자를 먼저 베십시오.(윤영손 살아남지 못한 자, 33) 단종의 유모이자 반정모의의 숨은 역할자인 봉보부인 이씨가 단종의 이모부인 형조정랑 윤영손에게 거사 전에 당부하는 말이다.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갑자기 운검이 폐지되고 거사가 중지되었다. 성삼문인가? 신숙주인가? 누가 배신자인가? 거사는 중지되고 이튿날 성균관 사예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성승, 유응부, 권자신, 윤영손 등은 척살되었다. 정의의 작동을 멈추게 하고,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들은 누구일까? 왜 역사의 이 순간을 육백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들은 복기를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실록(實錄)과 남효온의 六臣傳에 근거하여 허구적으로 재구성된 이 날의 이야기에서 발견되어야 할 진실이란 무엇일까? 를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도적? 누가 도적이냐? 백성들의 주린 배도 못 채워주는 임금이 진짜 도적 아니냐? 이 나라를 누가 세웠더냐? [...] 임금은 백성이 필요한 때 만드는 거다.” 

- 우리들의 위험한 이웃, 51쪽에서 


동인은 동쪽 문으로, 서인은 서쪽 문으로, 관복의 복색조차 달리하며 입조하던 양반무리들의 당파 싸움은 당대 정치가 백성의 삶과는 완전히 유리된 것이었음을, 한 내금위 무관의 시선으로 1589, 천 명에 가까운 서인을 죽이거나 유배시킨 기축옥사의 한 시공 속에 데려다 놓는다. 역성혁명을 주장한 정여립을 빌미로 동인과 전라도 쪽 동인의 씨를 말린 당대의 수구세력은 이렇게 정치적 학살을 자행했다. 가짜 왕이 득실대는 대궐, 백성의 고혈을 빨기위해 공맹(孔孟)을 만사의 법리로 강요하던 서인집단은 임진왜란을 자초했다. 자유로운 광대집단을 부르던 건달바가 백성이 실제 나라의 주인임을 외치던 대동계, 혁명 세력의 이름이 되어야 했던 시대의 언어에 기시감으로 전율하기도 한다.

 


이야기들은 시공을 마구 널뛰는데, 세상의 마지막 단군에서는 고구려의 창업 신화를 카르하미르(흑룡)강 연원에서 살던 쥬신 종족과 부여 종족의 피를 이어받은 코리족, 코코리 이야기가 환상적으로 전개되며, 아침 햇살 앗이 비추는 그 희망이 시작되던 세계를 거닐게 한다. 당골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탕구르, 아침 햇살 드는 곳 아사달, 우리의 기원은 어디일까? 우리 운명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나라와 종족의 근원에서 그 부침의 여정과 미래를 상상케하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도 된다.

 

이 소설집에서 특히 매료된 이야기의 하나는, 기근과 절망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의 출몰로 공권력조차 무력화된 임란 이후, 병자호란 사이의 세태를 배경으로 한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이다. 식인귀를 색출하여 처형하는 데 이골이 난 이충백이란 인물은 한양에 이르러 너무도 많은 식인귀들을 발견하고 몸서리를 친다. 모두 척살하여야 함에 신이 날 지경이지만, 그의 패두는 그에게 말한다.

 

누가 모르나? 알지만 모른 척 하는 기라. 들어봐라, 나라님이 식인귀라믄 믿겠나? 창덕궁에 드나드는 양반들 태반이 식인귀라믄 니는 믿겠나?” 

-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 128쪽에서

 

이충백의 힘과 패기를 신뢰했던 평안관찰사 박엽, 국경을 강화하고 적의 침략을 대비하여 엄격한 군사대비에 철저했던 이는 간신 김자점에 척살되고, 1627년부터 시작된 여진족의 침입과 병자호란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 우리 역사의 어느 순간에 도착해도 힘없는 민초들은 불의하고 사특한 인간무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 허구의 이야기들은 민초들의 끊임없는 저항과 승리가 감돌지만, 어디 가상의 이야기에 머물며 환상 속을 헤매는 것이 해결책이 되기나 할 텐가?

 

시적 흥취에 빠져들게 한 이야기도 있는데, 고려말 문장가인 이규보의 창작의 고통에 내재된 기이한 시인의 삶이 세상 너머까지 보아야하는 다른 눈을 주는 시마(詩魔)와 민족적 기원에 까지 연결되며, 짧지만 웅장한 한 편의 거대 서사의 물결에 휩쓸리게 하는 시마의 계약이라는 작품이다.

 

시는 머무는 자들의 것이 아니야. 바람을 봐. 우주를 감미롭게 찬미하지만 형체없이 떠돌고 있지. 땅에 집착하는 자에겐 시가 없어. 가질 수 없는 걸 사랑해야 시가 찾아와.” -시마의 계약, 153쪽에서

 

작가는 이처럼 국가라는 물질적 토대의 경계를 여러 작품에서 넘나드는데, 17세기 변경의 삶을 이해한 자이자 전란(戰亂) 속 고독을 노래한 시인 가수재(賈秀才)란 인물의 실종을 소재로 하여 임진왜란이 조선에 남긴 왜인 후손들의 삶을 조명하거나(가수재의 실종),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화가 최북(崔北)과 유녀 하나오기와의 사랑으로 에도 최고 풍속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로 이어지는 화풍의 관계 등 역사적 상상력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시인의 그것으로 마음껏 나래를 편다.(사랑이라면 도톤보리 운하에서)

 

조선주재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모리스 쿠랑을 주인공으로 한 모리스 쿠랑 이야기두 편은 19세기 외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근거지로 당대 세책방과 책쾌들을 배경으로 삼아 정치적 분열과 외세 의존의 지배계급 몰락의 양상을 지켜보게 한다. 백성이 외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계속 피살됨에도 국가는 아무런 것도 행하지 않는다. 외국인의 눈을 통해 쇠멸해가는 조선의 정세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교활하게 정치적 영역을 넓혀가던 일본, 러시아, 프랑스의 시점이 흥미롭게 그려진 소설이다.

 

그런가하면 보물 635호로 지정되어있는 신라 황금 보검에 얽힌 페르시아와 신라의 빈번한 교역의 이야기가 왕자와 공주의 사랑이야기(불과 모래의 기억)로 변주되어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페르시아 서사시 모음집인 쿠쉬나메의 한 페이지로 시간여행을 감행하기도 한다. <페르시아 왕자 아브틴과 신라 공주 프라랑의 사랑 이야기>, 실재하는 이야기다. 발견된 신라 황금보검은 페르시아 역사학자들로부터 페르시아 왕실 의장용 보검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작가 윤채근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은 사실에 입각하되, 사실과 사실 사이에 벌어진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며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

 

어쩌면 사실과 환상을 얽어 가공한 이 팩션 세계로부터 새롭게 어떤 무엇을 발견하고 우리는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감행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읽어나가며 나 또한 이야기마다에 소개된 관련 문헌들, 특히 한문소설들과 이 세계의 역사들을 찾아 나섰으니 말이다. 풍화되고 변형된 이야기들 속에 일말의 진실들이 숨겨져 누군가로부터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새로운 숨결을 입혀 재탄생한 이 이야기들에 빠져드는 것도 역사의 진실을 향한 한 걸음이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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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 - 새로운 문학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에디토리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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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은 존재가 하나의 형식으로 결정(結晶)화 되는 의미를 획득하는

극소수의 부류들 가운데 하나 이다그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한정되지 않으며

[...] 유기체처럼 살아있다."  -176쪽



책은 20세기 문학의 여정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거장이 새천년(21세기)에 나아가길 기대하는 문학의 길에 대한 탐색으로, 1985~86학년도 하버드대학교 <찰스 엘리엇 노턴(Charles Eliot Norton) 시학 강의> 다가오는 새 천년기의 문학이란 주제의 한 학기 강의 내용이다. 총 여섯 번의 강의로 준비되었으나 마지막 여섯 번째 강의를 앞두고 이탈로 칼비노는 뇌출혈로 85918일 숨을 거두었다. 강연되지 못하고 준비되었던 이 마지막 원고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되어있다.

 

21세기 문학의 기능을 이탈로 칼비노는 여섯 가지로 압축하여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벼움, 신속성, 정확성, 가시성, 다양성, 그리고 시작과 끝>이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문학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문학작품을 왜 읽는가를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이 두 물음은 그리 다른 질문은 아닐 것이다. 내 경험의 다양성이란 사실 좁아터진 것이고, 그 좁은 터전에서의 사유란 것도 볼품없는 것이긴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 세계의 표현되지 않거나 표현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예술이 탐색한 표현 가능성은 아무리 치워버리려 해도 눌러 붙는 삶의 무게를 이해하거나 해소할 세계를 발견하는 데 중요한 시선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통의 고전적 과학의 시대는 저물고, 양자이론의 부상(浮上)과 함께 지금까지 무질서와 혼돈의 복잡성으로 이해되던 사물과 현상들에서 질서와 법칙을 발견하며, 마침내 두 모순되는 우주의 질서를 종합하는 최종이론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21세기 오늘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이 세계의 복잡성,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는 듯 인식되는 세계 속에서 특정한 개별적 현상들이나, 어떤 형식화된 질서나 법칙, 이러한 것들의 작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개체들의 형상에 일어날 법한 가능성이나 그 존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기도 할 것이다.

 

칼비노 또한 21세기 문학의 여섯 요소 중 <다양성>의 장에서 모든 인생은 백과사전이고, 도서관이고, 사물들의 목록이고, 양식들의 견본이다.”라고 말하면서, 문학 작품이란 이 속에서 모든 것이 계속 뒤섞이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재정리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즉 문학 작품은 우주의 백과사전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문학으로부터 무질서에 자리잡은 인간과 세계의 양태로부터 알지 못했던 어떤 특정한 작용이나 질서, 현상의 발견을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테다. 이처럼 나는 이 문학강의를 삶의 또 다른 발견을 기대하는 독자의 태도로 읽었다.

 

첫 번째 문학의 요소로 그는 <가벼움>을 말하고 있다. 아마 모든 작가들의 정언명령이랄 수 있는 시대 표현에 대한 의무에서 발생하는 무거움과 세계에 대한 불명료함의 발견이 글쓰기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예민하고 민첩한 삶의 발견에 간극을 일으키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칼비노는 이 상황을 벗어나 이런 형벌을 피하는 길은 오직 지성의 생동감과 우연성이라는 가벼움, 가볍게 이동, 도약할 수 있는 정확함과 결단력으로서의 가벼움이었다고.

 

그래서 삶의 무게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가벼움에 대한 탐색은 이 세계에 대한 모호함이나 발견의 포기가 아니라 세상의 견고함을 용해하는 지식, 다른 시각과 논리, 인식으로 날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동적이고 가벼운 것을 지각하게 만드는 최초의 위대한 시 작품"으로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만물의 모든 것(The Nature of things)을 예시하며, 물질의 진실한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로 되어있음을, 즉 가벼움에 내재된 진실을 비유한다. 또한 형태에서 형태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추적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도 가벼움의 도약에 내재한 형식의 변화, 새로운 세계의 구현 가능성이었음을 역설한다. 문학이란 존재를 얽어매는 촘촘한 강제성의 그물, 그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드러내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사려깊은 가벼움의 모색이어야 한다는 것일 테다.

 


두 번째는 이야기의 경제성을 말하는 <신속성>이다. 사실 소설문학은 페이지터너와 같이 이야기의 리듬과 전개되어나가는 본질적 논리가 일치함으로써 재미라는 기쁨을 준다. 만일 지지부진하게 같은 말이나 맥락의 반복, 리듬의 어긋남 등은 읽는 이를 지치게 하고, 주제를 혼탁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한 기사가 귀족 부인에게 즐거운 얘기를 한다고 했으나, 버벅거리고 좀체 지루해 터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참을 수 없게 된 일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때 부인은 재치있는 말로 기사를 넌지시 비난한다.

 

기사님, 당신 말은 너무 힘겹게 총총거리는군요, 걸어갈 수 있게 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어요.” 이야기는 말()이며, 말하는 속도는 정신의 속도라는 것이다. 서투른 이야기는 말의 리듬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속성과 간결함에서 발생할 수많은 생각들의 고양을 차단해버린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 속도는 그것 자체로 기쁨이고, 문학의 중대한 가치라는 것이다. 더하여 신속성은 시간 절약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을 느긋하게 벌어주며, 이것은 다양한 리듬, 통사적 전개, 의외의 놀라운 형용사를 수반하여 언어의 독창성과 함께 문학에 차이를 더해준다고 강조한다.

 

세 번째는 언어와 문장 사용에 있어 <정확성>이다. 대충, 우발적, 경솔한 사용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준다면서 사전처럼 그리고 생각과 이미지의 풍부한 명암처럼 정확한 언어의 사용을 말한다. 칼비노는 이처럼 모호하고 흐리멍텅한 언어의 사용을 언어 페스트라고 언어의 질병, 즉 구체적이고 명료하며 간결한 표현을 개괄적이고 추상적 문구로 평준화해버려 의미를 희석시키고 불꽃을 모두 꺼버리는 폐단으로 지적하고 있다. 실제 나 또한 이러한 언어와 문장에 민감하지 못하곤 하는데, 특히 정치나 이데올로기, 관료주의적 획일성과 매스미디어의 천편일률성을 말할 때 진부한 언어들을 대충 사용하는 함정에 빠져,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퇴색시켜버리기 일쑤이다.

 

정확성과 엄밀성의 사례로서 폴 발레리가 창조한 테스트 씨(Monsieur Teste)는 불명확한 것으로부터 조화와 집중으로 이어지는 정확성의 재미있는 읽기를 제공한다. 발레리는 테스트씨를 고통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기하학적 추상 개념을 연습시키고 마침내 물리적 고통을 물리치게 하여 정확성을 증명해 보인다. 사물들의 감지할 수 없는 측면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보고할 수 있도록 언어적 노력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즐거운 참조가 된다.

 

네 번째 요소는 세계정신(世界精神)과의 의사소통 또는 우주의 진리가 보관 된 것으로서의 상상력과 이미지를 말하는 <가시성>이다. 아마 이미지 홍수에 치여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상상해내거나 어떤 논증적 사고를 길어 올리지 못하는 소설가와 현대 독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사실 이미지들은 우리들의 내적 삶에 투영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 언어 표현에 이르는 필수의 경로이다. 이미지들의 자발적 생성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전개 방식은 칼비노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상실하기 십상인 능력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새로움, 독창성, 창의력을 추구하는 시대에 모순되게도 상상력이 쇠퇴하는 세태는 정말 아이러니하다.

 

<다양성>은 그야말로 문학에서 기대하는, 아니 문학이 갖춰야 할 절대 요소처럼 내겐 여겨진다. 무엇보다 세계를 체계들의 체계로 인식하게 되는, 즉 세계의 요소들이 서로 뒤섞여 질서나 법칙을 만들어내는 그침없는 상호작용의 세계인 오늘에는 백과사전적으로, 인식의 방법으로, 무엇보다 사건들, 사람들, 세계의 사물들의 관계를 무한히 내포하는 것은 문학의 의무라 생각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고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처럼 전 세계의 도서관 책들을 필사하는 일에 삶을 바치는 두 독학자의 백과사전적 지식의 망라는 아닐 것이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재능이 결여된 존재들이다. 책으로부터 끌어내고 싶어 하는 무상의 기쁨에 적용하는 능력이 없는, 즉 기본 개념을 자신들이 원하는 실천에 이용하는 능력과 재능이 결핍된 인간들이다. 결국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고 필사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물론 정신의 질서와 엄밀성에 대한 취향으로서는 비할 데 없지만, 그 방법의 결여는 가히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독학자를 쓰기위해서 플로베르는 현실에서 농업, 원예, 화학, 해부학, 의학, 지질학, 교육학, 종교학1500권이라는 거대한 독서 모험을 강행했다고 하니, 지식의 허영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으로서는 과연? 하고 머리를 젓게 된다. 실제에 있어 많은 문학작품들은 의미가 풍부한 상징 요소들을 통해 이 다양성을 이미 훌륭히 사용하고 있다.

 

새천년을 향한 문학 거장의 소설이 담아내야 할 가치를 말하는 이 저술은 단지 문학 작품의 창작이나 독서의 이해를 위한 심층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현대적 삶을 사는 이들의 세계관찰에 대한 의미심장한 시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 칼비노의 개별 작품들에 의도나 경향성에 대한 참고적 이해의 기반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나서 문학에 대한 막연함, 그 피상성에 환한 빚이 드리워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단테, 보카치오, 세르반테스로부터 호손과 콘래드, 무질의 작품을 거론하며 소설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진정한 독창성과 기억에 남을 만한 서두와 결말에 대한 강론은 가히 절창인데, 호기심 많은 독자들의 읽기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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