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소사(Xosas)족의 자멸

-   집단의 맹목적 광신과 권력의 교활함에 대해서



인류의 위대한 정신,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군중과 권력은 군중의 물리학, 권력의 정신분석에 대한 독보적인 역작이다. 이 책의 한 장()군중의 역사에는 1856년에서 1857년에 발생한 남아프리카의 한 부족 전체가 최면에 걸린 듯 자멸을 향했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가 내게 준 강인한 암시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너무도 닮아있는 낯익은 광경이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적, 혹은 먹잇감을 손에 넣은 권력은 세계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 이외의 그 어떠한 존재도 미물, 벌레, 음식거리 이상이 되지 못하기에 부동의 오만함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란 군중의 맹목적 추종이라는 우매함과 반대자에 대한 거리낌 없는 죽음의 실행이며, 군중 전체로 권력의 욕망을 확산 주입시킬 반복된 소문을 지속할 매체와의 동거이다.

 

사실 한국 사회는 조중동 황색 미디어를 비롯한 기득권 박탈에 반감을 가진 매체들이 5년 내내 끈질기게 반복한 흑색선전과 왜곡이 광범위해져 결국 몽매한 군중 전체에게 심리적 진실로 무의식적으로 안착시켜 온 것이 작금의 결과일 것이다. 이야기의 실질적 내용에 앞서 군중에 대해 보수적 관점에서 군중의 심리를 파헤쳤던 귀스타브 르봉의 정의를 잠시 살피고 가기로 한다.

 

르봉은 군중은 예외 없이 정신적으로 무척 열등하다.”고 강력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단언했다. , 군중에게는 의식을 지닌 개성은 사라지고 개인의 감정과 생각이 집단화되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매우 뚜렷한 집단정신이 형성된 인간의 무리라고 말이다. 군중 구성원은 모두가 지닌 평범성을 공유하며, 독자적 의식이 사라지고 의지력과 분별력을 잃는다. 그리곤 무의식 활동의 우세, 감정과 생각을 똑같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암시와 전염, 암시받은 대로 즉시 행동하려는 경향(1)을 가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앎을 전제로 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18565월 크소사(Xosas)족의 한 어린 소녀가 물을 깃기위해 집 주변에 흐르는 시냇가에서 마주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소녀는 낯선 사람들을 발견하고 부족의 예언자인 삼촌 움흘라카자에게 시냇가의 이야기를 전한다. 움흘라카자는 시냇가에서 낯선 이들로부터 어떤 의식을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데, 그것은 죽은 자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황소를 받칠 것이며, 나흘 이후 자신들에게 다시 오라는 명령이다. 이 최초의 명령에는 어떤 목적도 발설되지 않은 맹목적 실행의 완수라는 권위적 명령만이 있는데, 마을의 예언자는 이를 저항 없이 수행한다.

 

나흘 후, 명령대로 다시 찾은 시냇가에서 움흘라카자는 낫선 이들 중에서 몇 해 전 죽은 형을 발견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부족의 누구였는지를 알아차린다. 죽은 자들의 혼령이다. 죽은 자들은 비로소 목적을 말하는데, 크소사족을 돕기 위해 바다 건너 저편에서 왔으며, 무적의 힘으로 영국인을 몰아내겠으니, 움흘라카자는 부족의 추장들과 그들 사이의 중개자 노릇을 하여야 하며, 이 조언을 받아들일 경우 놀라운 이적들이 발생하리라 말한다.

 

영매(靈媒)가 되어 움흘라카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살 찐 소들을 죽여서 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영계(靈界)로부터 전해진 이 이야기는 크소사족 사이에 급속하게 퍼진다. 소문을 잽싸게 나르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유별난 특성이다. 마치 자신이 제일 먼저 정보를 손에 넣었음을 과시하려는 듯이. 부족의 대추장 크렐리는 몹시 기뻐했다. 이것이 크렐리의 공작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대추장은 지체 없이 혼()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부족의 각 추장들에게 영계에서 전달된 명령에 조력할 것을 요청한다. 부족의 미래에 대한 예언, 죽은 자들의 입을 빌려 제시된 비전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즉 입증을 요구할 대상이 없기에) 자기 생명의 안전을 위협받는 상태에 몰리게 된다. 군중은 예외 없이 멍청하다는 르봉의 말을 입증하듯 전 부족민들은 광기에 휩싸여 자신들의 가축을 도축하고 한 톨의 곡식마저도 모조리 없애기 시작한다.

 

이때 가세하는 상황의 묘사가 있다. 예언자를 통한 계시들이 신속하게 늘어갔다.”는 것이다. 오늘로 말하자면 황색 미디어들의 줄기찬 반복적 주입이다. 신들린 수많은 사람들은 시냇가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인간사를 주관하는 혼령들의 목소리라 선언하며, 점점 많은 소들이 살육되고 희생물은 계속 늘어난다. 이러한 여론 몰이의 숨겨진 의도를 간파하거나, 이에 동조하기를 주저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깨달은 자들은 탈출하거나 마지못해 동조하거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이 요구는 살상과 죽음의 요구라는 자기 실존의 위협이라는 실체를 띠고 있음에도 부족민에게는 위대한 인물들과 현명한 인물들이 부활하여 성실한 후손들의 기쁨과 함께 하리라(2)는 낙관적 희망의 기대로 인식될 뿐이다. 의지력과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의 정신은 자신의 오염을 지각하지 못한다. 바로 광기이다. 문명을 떠받치던 도덕적 세력이 영향력을 상실하면 분별력 없고 난폭한 군중이 등장해서 그 문명을 해체한 것이 인류 역사(3)라고 했다.


 



권력은 이러한 역사적, 심리적 인식을 꿰뚫고 있다. 혼령들이 약속한 예언의 날이 다가올 때까지 공식 자료는 “1857년 한 해 동안 크소사 지역의 인구가 105,000명에서 37,000명으로 줄어들어, 대략 68,000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 기록에는 권력을 손에 넣은 자의 잔혹, 오만, 경멸(), 탐욕, 교활함이 모두 담겨있으며, 군중의 특성, 즉 군중이라는 다수가 지니는 힘의 과신과 그로인한 본능의 억제로 풀려난 야만성, 그리고 소문의 무지막지한 전염성과 파급력, 피암시성과 최면성이라는 맹목적 믿음의 상호작용이 불러오는 상승작용으로서의 자기 파멸성이다.

르봉이 군중 심리에서 열거한 군중의 감정과 도덕성중 몇 가지만 더듬어 보자. 군중은 순간에 일시적으로 받는 자극의 영향 아래 있을 뿐이며. 비판적 사고능력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무작정 맹신한다.” 이러한 군중의 상상력으로 사건이 왜곡되기 시작하면 전설이 만들어지고, 사소한 사건조차 곧 커다란 사건으로 변형된다. 논리적으로 아무런 관련 없는 일련의 새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중은 일관성을 따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집단 환각 메커니즘이란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정치적 앎에 대한 교훈이 있다. 화려한 언어적 수사로 꾸며진 명령에는 음흉한 목적이 있다는 것, 군중의 반목과 사회적 갈등을 조작하는 것, 그래서 자신들의 증가와 승리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 자신들의 예언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군중을 조작하는 군중결집체로서 작동하는 폐쇄된 군중집단(검찰, 황색언론기업, 등등-이야기에서는 시냇가 낯선 사람들)을 이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명령을 악착같이 반복하며 재촉하여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군중의 살상, 죽음의 전가라는 것이다. 파멸로 이끄는 무책임한 권력인지를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군중 개체이다. 군중에 휘말리면 사고(思考)는 흔적없이 사라진다.

 

사실 권력은 시냇가 낯선 사람들, 죽은 자의 욕망이다. 때문에 이 욕망의 주체인 권력은 교만과 무지를 그 태생적 본성으로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새로운 권력에게 국민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손에 넣은 것은 단지 언제든 씹어 삼킬 먹잇감에 불과하니까. 그들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타자에 대한 무심과 거들먹거리는 걸음은 모두 타당한 이해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외적 유사관계만 보이면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터무니없고 맹랑한 추론방식, 허망한 환상일수록 꼬이는 군중의 맹목적 열정이라는 토대, 이 단순한 무지가 대중을 휩쓸면 그것은 곧 퇴행과 자멸의 길일 것이다. 크소사족을 닮은 한국의 군중사회와 권력의 실상을 생각게 한 오래된 그러나 너무도 현실을 자극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出 處 :

(1) 귀스타브 르봉 . 군중 심리2022.1, 현대지성 , 39

(2) 엘리아스 카네티 , 군중과 권력2012. 바다출판사 , 255~265

(3) 귀스타브 르봉, 위와 동일,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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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가 헀더니 한 낮에는 마치 여름 날씨 같은 4, 어느 순간 여름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외부 세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책에 대한 욕망은 다시금 자기 축적을 계속한다. '아니 에르노'가 욕망을 잠재우며 읽던 '시몬 드 보부아르'레 망다랭을 뒤적이다, 부재(不在)에 대한 치열한 응시를 담은 사진의 용도를 주어담는다.

 



사진은 쾌락을 위해 빠져나간 육체의 허물처럼, 그 잔존물인 옷가지, 구두, 악세사리의 자연스런 흐트러짐의 보존물이다. 유방암 치료 중이던 예순의 여인 '아니 에르노'와 연하의 연인 '마크 마리'의 공동의 작업물이다. 육체의 부재, 죽음의 징후들, 그 흔적물같은 사진을 찍고, 그를 확인하며 삶의 열정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각축을 벌인다. 아마 리뷰로 남기게 될 것 같다.

 

이렇게 느닷없는 연상 작용으로 주어 모은 책들이 다시금 탑을 쌓아 올리기 시작한다. 치 쌓아 오르기 시작한 책의 제목을 보면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무관한 것들의 집합인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이것들은 분명 무언가의 자극들, 그 영향이 빚어낸 결과물들일 것이다. 물론 미디어 매체들이 뿜어내는 선전에 힘입은 것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내 욕망의 산물들임에는 틀림없다.

 

'어빙 고프먼'자아 연출의 사회학은 벼르고 벼르던 책이다. 인간 관계의 다종 다양의 의례적 행위들에서 나타나는 선민의식의 치졸함이 내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상호작용 의례』를 읽고 난 후 한동안 잊었던 기억이 한 평범한 심리학 자기 계발서로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이 연극적 행위들, 인간 일상사에 내재된 미묘하고 흥미로운 탐사가 될 것 같다.

 

이 촉발은 여러 책으로 거듭 이어졌는데, 니체와 루소의 사유 중추에 대한 어떤 총체적 줄기를 내 독서의 중심 잡기를 위한 도움을 위해서 였다.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이 펴낸 니체'츠베탕 토도로프'덧없는 행복은 도덕성이라는 것을 다시금 살펴보는 기회가 되어주리라 믿으면서.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은 진리에 대한 내 믿음, 제한적 상대주의의 믿음을 확인하는 읽기라 할 수 있다. 단지 이성의 실패를 확인하는 읽기. 카너먼의 설득력있는 입증과 확인, 그리고 대중적 지지로 이어진 진실 추론에 직관의 영향을 더한 탐색을 아무튼 확인하고픈 마음에서 선택했다. 이렇게 정리하다보니 어떤 사유의 목소리들이 지닌 거대한 줄기를 정리하고 싶었던 소망의 실행이었던 것 같다


 '버넌 홀 2'서양문학 비평사또한 서구문학의 중추적 정신의 지향들을 정리한 책이다. 실재와 모방에 대한 문학 비평의 길고 긴, 그리고 공허하기까지 한 오만한 지성들의 싸움을 보며 자신들만의 건축물을 지으려는 어떤 힘을 향한 욕망에 대한 씁쓸함까지 느끼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은 이에 대한 참고 도서로, 그리고 플라톤의 실재와의 다름을 발견하기 위한 대조용 읽기였다.


구입한 소설 작품은 순전히 연상이 빚은 호기심의 이어짐일 뿐이다. '베르길리우스'아이네이스,' 매들린 밀러'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호머의 일리아드의 파생, 그 아류 작들이다. '어슐러 K. 르귄' 라비니아는 여성주의, 즉 배제된 진리의 복원 작업 일 것이다


알지 못했던 '이렌 네미롭스키'의 선집으로 기획된 6권 중 그 첫 번째 출간 작품인 무도회도 여성주의 작업과 그리 멀리 있는 소설이 아닐 것이다. 작가 사후에 수여된 르노도 상 유일의 수상작인 스윗 프랑세즈에 앞서 선보이는 맛보기에 가까운 네 편의 단편집이다. 표제작인 단편 무도회는 경박하기 그지없는 속물근성과 순수 욕망의 교차가 빛난다. 아마 오늘 중에 모두 읽어낼 듯 싶다. 요사이 시간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흐른다고 느껴진다. 어떤 생각의 중추를 건설해 내야 할텐데,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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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04-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이 남기신 <식인 자본주의>를 읽어보다가 이 글에 인사를 남깁니다.

이 포스트 속 책 두께들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시선이 멈추네요. 무대로 연결되는 사회. 앞과 뒤, 그리고 무대 위까지, 이제 자기에 대한 탐구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4-18 18:42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드립니다, 저는 외려 그 어느 때보다 자기 비판적 성찰의 요구를 느낀답니다...
 

 

찬사와 비난이 엇갈리는 비평이 공존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Ada, or Ardor: A Family Chronicle(에이다, 또는 열정: 어느 가족 연대기), 이후 에이다로 표기함의 국내 번역판이 존재하지 않는 아쉬움, 혹은 미련 때문에 이 조잡한 잡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보코프 작품에 대한 대중적 몰이해는 소아성애의 소재로만 읽히는, 다시 말해 오독만 난무 하는 Lolita;롤리타정도로만 기억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Pale Fire(창백한 불꽃이 번역 출간되면서 독자들의 나보코프 작품에 대한 지적 모험심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Pale Fire(창백한 불꽃은 문학적 단어 놀이랄 수 있는 애너그램(anagram)에서부터 다층적 서사, 극도의 조밀한 암시 등 매우 복잡한 글쓰기로 독자를 좌절의 지점에 내몰기까지 하는 아주 도발적인 복잡한 소설이었습니다. 롤리타 또한 단순한 비극적 사랑과 집착으로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성애에 대한 묘사를 읽는 사람들은 위선적 이중성을 보이곤 합니다. 즉 대상화해서 소비하려는 욕망에만 매몰되어 알고 있는 편협성에 기초한 말만 중얼거리죠. 나보코프는 대중들의 Lolita;롤리타를 소비하는, 즉 독해하는 방식을 보고 고통스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에이다; AdaLolita;롤리타를 오해한 사람들의 무지를 조롱하기 위해 집필되었다고 하기까지 한답니다. ‘에이다근친상간이라는 위반된 금기를 소재로 하고 있거든요. 에이다의 묘사는 대중적 표현으로 하자면 수위가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이다; Ada는 그 감상을 단순 명쾌하게 기술할 수 없을 만큼 독해의 장애물이 무척이나 많은 소설입니다. 일단 연대기 자체도 구조의 혼란을 정리 할 수 있어야 하고, 호흡이 긴 문장을 따라가며 집중을 놓지 않을 것이 강요됩니다. 역시 애너그램, 대체 역사, 다층적 내러티브와 소설의 배경인 ‘Anti-Tera(안티 테라)’ 등 우주 해설까지 그야말로 환각과 공상 아닌 공상을 오가는 상상으로 한 마디로 녹초가 되게 하는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작가 에릭 오르세나두 해 여름;Deux E'te's에서 나보코프의 에이다;Ada번역의 열기로 채워진 섬의 분위기를 묘사하며, 섬의 어디에나 색정의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中略) 향긋한 냄새로 미루어 근처 어디에선가 교접이 한바탕 벌어지고 있으려니 짐작하고 있었다.”고 전하기도 하듯이, 에이다;Ada는 아름답고 어떤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기술한다면 테라와 안티-테라로 불리는 쌍둥이 행성을 배경으로 한 천재 남매 사이의 뜨거운 사랑에 얽힌 해설사라 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거주하는 세계는 안티-테라이지만 이들은 테라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죠. 에이다와 밴 빈이 주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적 연대는 대략 19세기 후반인 1884년이 소설적 사건의 시기이고, 이들 주인공은 안티-테라라는 세계에서 극도의 부를 축적한 귀족의 신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실 두 남녀의 사랑의 불꽃을 위한 시간을 초월한 투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우주의 다차원 공간을 설명하는 물리학의 브레인(brane; )이론을 토대로 한 4차원의 갇힌 브레인의 상상을 통해 새로운 관찰자적 시점을 생각하게 하며, 무수한 학문적, 정치적, 과학적 제재들로 인해 복잡다단하게 설계된 퍼즐처럼 산개(散開된 장면들과 대사들을 맞추는 작업을 요구합니다. 어쩌면 제임스 조이스의 반향(反響)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19세기의 러시아 소설도 떠올리게 하는 정말 기이한 감응에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가 혼용되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단어 놀음까지 더해져 어학 역량이 천박한 사람인 저에게 이 작품의 이해는 한계를 가지게 합니다. 나보코프 문학의 관문이기도 한 문학적 언어 놀음과 퍼즐로 가득 찬 이 작품의 국내 번역을 기대하는 바람이 간절해집니다. 나보코프의 공식 완전판으로 불리는 단편 전집의 발간에 즈음한 독자의 아쉬움의 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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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전, 10권 131



에피쿠로스 철학에 대해 전해져오는 문헌이 워낙 적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그의 철학을 접할 수 있는 우리 말 번역 자료도 극히 미미하다보니 일반적 곡해가 진실로 둔갑해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형편이다. 왜 그의 사상에 성적 문란과 방탕함이란 꼬리표가 붙었는지, 육체적 쾌락을 좇는 음울한 변경 조직의 쓰레기 사상이 되었는지를 확인하고픈 충동을 물리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썼다고 전해오는 세 편의 편지 내용과 함께 당대 에피쿠로스를 음해, 매도하던 스토아주의자들의 거짓 소문의 진상을 말하고 있는 2세기 말 3세기 초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철학자전혹은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란 이름으로 옮겨지고 있는 책이 부분적으로 이 충동을 해소해주고 있다.

 

중세 유력 사본(寫本)중 하나는 철학자들의 생애와 학설의 집성 10으로 책이름을 가지고 있고, 책의 수록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저명한 사람들의 생애와 의견 및 각 학파 학설의 요약적 집성이란 표제를 붙이고 있기도 하다고 한다. 국내 한글 번역본 또한 이들의 제목을 각기 따르고 있는데, 나남 출판에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제목으로 2권으로 출간한 것이 있으며, 동서문화사에서는 영문번역 대본의 제목을 따라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은 철학 학파별로 구분하여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원전 3세기 전후에 활동한 에피쿠로스는 마지막 권을 차지하고 있다. 책의 저자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피쿠로스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던 스토아파 인물들의 저열한 비난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1. 누가 에피쿠로스를 왜곡했나? - 스토아파의 비난

 

103절에서 8절까지 소개되고 있는 스토아파의 비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합창가무단 무용수 출신의 냉소주의의 회의파 철학자로 불리는 티몬이란 자의 사악한 주장으로 시작된다. 이 자는 에피쿠로스를 자연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뒤처지고 창피함도 모르는 개 같은 사내(10-3)”라며 가장 환경이 나쁜 자라고 폄훼한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명문 필라이다이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실제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그 어떤 자연 철학자들보다 뛰어나며 독창적인 학문을 열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악의는 스토아파들에 의해 무수한 거짓말로 왜곡되어 매도된다. 마치 한국의 추한 공작 정치배들과 빼닮은 모습이다. 스토아파의 디오티모스란 자는 자신의 동료인 크리시포스(스토아파)’의 편지를 에피쿠로스의 것으로 편집(*무려 50통을 위조하였단다)하여 기만적 비난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창녀 레온티온에게 나의 구세주이고 주인인 분이여, (...) 나의 사랑스런 티온이여라고 편지를 썼다든가, 유부녀인 테미스타에게 만일 당신이 나에게 와주시지 않는다면 나 자신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으므로 (...) 어디라도 달려 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10-5)”라며 외설스런 사내라고 조작하여 매도하는 식이다. 이에 가세하여 포세이도이오스, 니콜라오스, 소티온, 테오도로스 등 스토아파 인물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과 원자(아톰)에 대한 사상은 남의 것을 훔쳐 쓴 것에 불과한 아무런 사상도 없는 것이라 비난하곤 매춘부 뚜쟁이란 낙인까지 찍어댔다고 한다. 또한 에피쿠로스의 철학 정원에는 역겨운 비밀 의식(秘儀)을 행하는 곳이라는 누명까지 씌워댔다는 것이다.

 

이 책이 써진 연대를 서기 2세기 말에서 3세기 중엽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는 기독교가 스토아 철학과 융합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던 시기이다. 원자론을 말하는 자연철학인 에피쿠로스에 대한 탄압이 극에 이를 때였다는 점에서 스토아파 인물들의 왜곡된 비난이 얼마나 억척스럽게 가해졌는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저자 디오게네스는 이들의 비난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에피쿠로스를 비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상도(常道)를 벗어나고(10-9)”있으며, 그 어느 누구도 미치지 못할 친절과 고귀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인물이었음을 당대의 증거들을 통해 반박 지적하고 있다. 그를 찬양하여 아테네에 세워진 동상, 다른 모든 학파의 학통이 끊어졌으나 여전히 많은 제자들에 의해 이어지는 학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학두(學頭)의 배출을 사실로 들고 있다.

 

남 몰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이 1 만 번이나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앞으로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발견 되지 않고 있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삶을 마칠 때까지 모르기 때문이다.” (10-35)

 

특히 에피쿠로스의 편지글은 시작될 때 사용하는 인사말의 특이성을 예로 들며, 스토아파들을 비롯한 에피쿠로스 철학의 적대자들이 저지른 위선을 비판한다. 이러한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에피쿠로스의 문장만이 한 위대한 철학자의 고귀한 정신을 드러낼 뿐이다. 부정과 기만을 밥 처먹듯 하는 오늘 한국 사회의 수구 정치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목이다.

 

 

2. 에피쿠로스가 직접 쓴 쾌락의 의미

 

에피쿠로스가 남긴 편지는 감각과 선취관념이 진리기준임을 설명하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자연의 탐구에 대해 말하는 피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윤리학을 말하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세 통이 전부이다. 이 중에서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삶의 목적으로서 평정심(아타락시아), 즉 쾌락에 대한 에피쿠로스 사상의 정수(精髓)를 이해토록 돕는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첫째의 선()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사람은 쾌락을 출발점으로 해서 모든 선택과 기피를 행하기 때문(10-129)”이라고 주장한다. 이 쾌락은 J.S.밀의 공리주의자들의 쾌락과 흡사하다. 쾌락이라고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며 불유쾌를 초래할 쾌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회피한다고 한다. 또한 고통(괴로움)의 인내도 보다 큰 쾌락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한다는 것이다. 결국 쾌락과 괴로움을 상호 비교 측정하여 판단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자신의 쾌락에 대한 개념은 방탕자들이나 성적 향락 속의 쾌락이 아니라 몸의 고통과 정신()의 동요가 없는 건강과 평정임을 거듭 역설한다. 이 말은 공복 일 때 빵 한 덩이가 최고의 쾌락이듯 불유쾌, 고통을 벗어나는 검소와 절제로서의 자연스러운 필요로서의 즐거움, 행복이다.

 

나아가 그는 덕을 선택하는 것도 건강을 위해 의술을 택하듯 쾌락 때문이지 결코 덕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편 정신은 삶에 관한 두려움을 몰아낼 때 완전한 삶으로 이행될 수 있으므로 정신적 동요를 가져오는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며, 이는 그의 자연 철학으로 이어진다. 자연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욕망을 투여한 신에 대한 자의적 믿음이 아니라 관찰과 경험을 통한 자연의 이치를 밝힘으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3. 에피쿠로스의 자연 탐구

 

에피쿠로스의 자연 탐구는 사람의 정신을 동요시키는 왜곡된 신의 상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신이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며,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부인하는 불경신(不敬神)인 사람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고(思考)를 신에게 밀어 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불경신의 사람인 것(10-123)”이라고 힐난한다. 그러면서 신의 불멸성과 지복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의 사상에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란 이미지를 뒤집어씌운 이유도 바로 이러한 주장의 곡해일 것이다.

 

아마 그의 자연 철학의 중심이 되는 원자(Atom), 즉 유물론적 사상의 기독교 교리와의 상충을 합리화하기 위한 스토아파들의 의도적 왜곡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음의 문장은 기독교를 자극하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에서는 아무것도 출현하지 않는다.(10-38)”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든 어디서나 생기고 사물이 생기기 위한 원인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만유는 언제나 지금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물체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다.(10-39)”고 주장했다. 특히 물체와 공허 외에는 완전한 실재로서 파악되는 것이고, 이것의 우유성(偶有性)이나 속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닌 것은 상상에 의해서건, 상상되는 것과의 비교에 의해서건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유의 구성인 물체의 근본이라 한 원자가 출현한다. 물체의 시원(始原)은 불가분한 본성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므로 공허가 장소를 양보한 영원히 운동하는 불가분으로 충실한 것으로서 원자를 말한다. 원자의 운동에 관한 두 가지 형태로서 상호 일정한 거리를 둔 운동과 진동을 계속하는 운동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현대 물리학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지만 2,300년 전의 고대 학자의 사유로는 가히 빼어난 지적 사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사람이 인식하는 사물의 표상을 사물 자체의 일종의 모방이 우리에게 와서 제각기 상응한 크기에 따라 시각이나 정신에 잠입하는 것이라는 이해는 쇼펜하우어나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물자체인 실재와 표상의 인식과 한참이나 거리가 먼 저급한 수준의 성찰이라 할 수 있지만, 인식론이라 할 수 있는 사유를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빼어난 인식을 발견 할 수도 있는데, 원자의 어떤 합성물인 집합체 가운데서 끊임없이 상호 충돌하는 아톰 운동의 연속성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라든가, 소리의 지각 성립에서도 소리를 구성하는 입자인 유체의 운반에 따른 것과 같은 사유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죽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산 자나 죽어버린 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0-125)

 

이것(원자 이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정신의 동요가 빚어내는 사람의 고통이 근원 없는 것이라는 데로 이어진다. 사람의 육체라는 물체란 원자의 우연한 결합이라는 점이다. 또한 선이나 악은 감각에 속하는 것이고 죽음이란 이 감각을 잃는 것, 결합 원자의 해체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감각의 부재는 곧 두려움의 부재이기도 하다. 죽음의 본질인 이 감각 부재를 이해한다면 삶에서 두려움, 정신의 동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함께 별도의 감상으로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다.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즉 고통을 벗어나 평정심이라는 행복의 영속을 위한 방법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은 자연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통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치유(治癒)적 사유이다.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물론적 사유가 싹 텄으며, 후일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라는 인간을 통해 비결정론적 원자론, 마주침의 유물론의 토대가 되었음을 안다면 꽤나 기뻐하지 않았을까?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한 저작으로나마 고귀한 사유의 모퉁이를 읽을 수 있도록 한 인류의 지성들에게 보내는 경외는 항상 미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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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나룻배 2022-03-18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연히 본 리뷰글을 감명깊게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3-18 18: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꿈꾸는나룻배‘님~,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우주의 시원성에 대한 사유, 특히 ‘클리나멘‘이 오늘의 사람들에게 주는 영감이 무엇보다 소중하죠. 원자들의 미세한 빗겨남으로 마주치는 그 우발성의 결합, 이것은 정말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답니다. 지금 우발적 마주침의 유물론을 성찰한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있어요. 즐겁고 평안한 시간 되십시요 :)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고(同苦)이고 동고가 아닌 모든 사랑은 사욕이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4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 2고찰에서

 



'동고(同苦)'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성정을 말한다. 이 말은 '의지'에 대한 선행적 이해를 요구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세상 만물과 현상이 왜 그렇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그 의지를 결코 알 수 없다. 의지는 사물과 현상 속에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맹목적 충동인 의지가 무생물, 생물, 인간으로 현상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단지 오감으로 이를 직관하여 파악한 것, 즉 표상을 세계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인간이 파악한 이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실재와 동일한 것인지, 감지한 것과 실재한 것이 같은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칸트의 언어로 말하면 쇼펜하우어의 의지(wille;意志)는 물자체(物自體).

 

결국 의지란 인간의 욕망에 따라 통제, 지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의지는 단지 의지대로만 움직일 뿐이다. 인간의 고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실로 참담한 착각을 하며 살고 있다. 인간의 모든 고민과 고통이 의지로 인해 일어나는 목적없는 움직임임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는 세계를 표상으로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실은 개체들 모두가 의지의 표상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모든 개체 저마다 독립된 존재로 오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고뇌와 고통은 태생적이라는 의미이다. 표상을 하는 ''라는 개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를 긍정한다. 특정 개체가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는 이기심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구현된 의지만을 긍정하고 다른 개체에게 구현된 의지를 부정하게 되면 의지와 의지의 충돌이 발생한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이렇듯 목적없는 개체 간의 엇갈림이 원천인 것이다. 어차피 의지의 움직임에 이유가 없음을 생각하면 이만저만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체마다 구현된 의지가 충돌할 뿐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다시 말해 의지에 어쩔 수 없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이해되면 개체 서로는 애틋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 모두는 의지의 현상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동고가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의 유일한 동기이게 된다. 모든 존재가 의지의 맹목성에 좌우되기에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인식할 줄 아는 삶의 의지에 대한 통찰이다. 그럼에도 의지의 새로운 긍정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각성하고, 의지로부터의 자유, 의지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평정의 길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길은 가까우면서 한없이 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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