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리커버 특별판)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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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話者)가 셋이나 있는 소설이다. 편지글의 주체인 로버트 월턴’, 저주 받은 창조주가 되어버린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분노와 악의에 찬 피조물로서의 괴물’. 이것은 또한 월턴이 누이인 새빌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글,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프랑켄슈타인과 월턴, 월턴과 괴물의 대화라는 여러 겹의 서술 장치로 이야기가 뒤얽혀들면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지식의 오만, 가족의 가치와 사랑의 미덕, 소외와 소통 부재의 고립에 도사린 문제 등, 실로 복잡 다양한 주제의식을 발산하게 한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을 다시금 읽게 된 동기는 21세기 신생 과학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몸을 버리고 새로운 불멸의 존재, 인간 생명의 의식을 가공할 차원으로 옮겨놓으려는 기술지상주의가 지향하는 인간 욕망의 고전적 뿌리를, 그 오래된 연원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문학이란 것이 그렇던가! 인간의 본성과 삶의 가치에 대한 반성의 사유는 물론 지배 이데올로기가 지니는 계급화, 범주화가 낳는 차별과 소외의 문제와 같은 그 풍성한 의미를 새삼 발견하는 즐거움에 빠져들고 말았다.

 

1. 자연을 보는 시각

 

소설의 시작인 월턴의 편지내용은 의외의 흥미로움이 있다. 아마 18,9세기 당대 계몽주의 영향을 피해 갈 수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21세기 오늘의 우리네에게 더욱 심화된 시각이기도 한 정복되어 지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인식이다. 월턴은 극점을 향한 미개척 항해의 여정에 나선 것인데, 그것은 극점 근처의 항로발견, 혹은 자기장의 비밀을 밝히게 될지도 모를 미지의 탐험을 통해 인류 최후의 세대까지 파장이 미칠 공헌을 하겠다는 열정이다.

 

이것은 월턴에게 흔들리지 않는 목표이며, “영혼이 하나의 초점에 지성의 눈길을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지점이다. 고향인 제노바를 떠나 잉골슈타트 대학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지닌 학문, 그를 매료시킨 자연철학으로서의 화학, 생리학을 통한 과학적 탐구의 경악할 열정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게다가 내가 인간의 육신에서 질병을 추방하고, 그 무엇보다 폭력적인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영원히 해방시킬 수만 있다면 그 발견에 따라오는 영예는 상상도 못할 것이 아닌가!” 라는 생명의 원리를 발견하겠다는 프랑켄슈타인의 천명은 월턴의 그것과 한 치의 차이도 없어 보인다.

 

극점이라는 지리, 환경으로서의 자연, 동물과 인간으로서의 자연은 이들에게 오직 지식으로서의 앎, 즉 파악되고 장악되어 소유될 수 있는 피지배적 대상으로 인식될 뿐이며, 이 대상에 몰입하는 인물들의 심리적 상태는 외곬과 몰입을 뜻하는 눈길의 고정이며, ‘경악할 열정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탈신체화의 욕망을 강렬하게 추진하는 극단적 실증주의에 심취한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과도 아주 흡사하다. ‘메리 셸리는 그렇다면 이러한 물화된 자연에 대한 인식과 이를 견인하는 프랑켄슈타인의 열정이란 무엇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2. 생명에 대한 이해, 지식의 오만

 

개체 발생과 생명의 원인, 무엇보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능력을 갖게 된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가진 존재의 창조에 착수한다. 그런데 이 조물주의 창조 작업이 온통 부패와 죽음에서 시작된다. “생명의 원인을 고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죽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법이다.”라며, “시체 안치소에서 유골을 수집하고, 불경스러운 무덤의 습지를 허우적거리며재료를 취득한다. 이러한 묘사는 다분히 상징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완성의 존재에서는 악취와 죽음의 냄새만이 떠돈다.

 

이처럼 재료의 주된 부분들이 시신에서 추출되었다는 사실은 이 창조의 과정이 생명력과 연루된 자연과는 먼 거리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존재는 시초부터 다른 어떤 정상적 인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분류나 언어의 기반을 넘어선 이상한 부산물에 머무른다. 이것은 메리 셀리로부터 100년 후, ‘카렐 차페크에 의해 효율성과 기술적 관점에 기초한 생식력 없는 로봇(R.U.R)이라는 인간 대체물로 탄생하고, 다시 100년 후인 21세기 오늘에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부르짖는 기술종교주의자들에 의해 포스트휴먼(Post Human)'이라는 모호하고 야릇한 의미를 산출하는 언어로 변주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이 대학에서 학문의 진로를 탐색하던 시절, 화학담당 교수인 발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천재들의 노고란 아무리 오도된 것이라도 결국은 인류의 선을 공고히 하는 데 쓰이기 마련이라네.” 21세기 오늘 우리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 신봉이 헛소리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오도되는 즉시 인류에게 더없는 해악을 끼치는 산물임을.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적 정열이 책임감과 올바른 가치관을 동반한다면, 진실로 인류를 위해 바람직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의미는 될 수 있을까? 이건 보다 장고(長考)해 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진 괴물은 인간의 모습과 닮지 않은 외형이라는 소외를 야기하는 다름의 원천을 떠나서라도 조물주, 즉 인간인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분노와 악의를 부르짖고, 인간은 자신의 지식, 기술로 제작된 피조물을 통제하지 못한다. 결국 프랑켄슈타인, 그의 지식의 오만은 자신의 실존적 위기, 통한(痛恨)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인간 대체물에 대한 기술적 측면에서 유독 시선을 끄는 장면이 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한 채 떠돌다 독일의 한 농가에 은신하며 언어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가는 괴물의 자기 학습능력이다. 마치 오늘날 인공지능의 딥러닝(Deep Learning)을 연상시킨다.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각성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고하고 추론하는 피조물은 인간의 의지에 결코 예속되지 않는다. 괴물은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추한 모습이 인간들과 얼마나 다른지, 기형의 외모가 인간들에게 어떻게 배척되는지, 이것은 곧 자신의 창조자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전환된다. 자신이 느껴야만 하는 불행의 고통, 그 크기에 대한 조물주를 향한 항변으로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어린 동생을 죽이기에 이른다.

어쩌면, 작가 메리 셸리는 여기서 인간이 지닌 지식의 오만함에는 무지가 가득 차있다고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3. 소외와 소통의 문제

 

소설에서 소외와 소통의 문제는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각개의 시점으로 언급되며, 전자는 가족의 가치, 혹은 공동체와의 유대감에 대한 환기로, 후자는 타자의 범주화, 차별화에 대한 인간 인식의 편협성의 비판으로 이해된다.

 

프랑켄슈타인이 잉골슈타트의 감옥같은 방에 처박혀 괴물을 만들어내는 시공간은 외부세계와의 철저한 단절이다. 그의 말처럼 지향할 길 없는 광기에 가까운 충동에 내몰려 오로지 전진하는 시간이며, 이것은 극단적인 이기성과 사고의 경직성, 편협성을 확장하고,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이탈을 심화시킨다. 결국 스스로 공동체로부터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구나 괴물이 동생을 살해함으로써 자기 소외는 자기혐오와 우울을 동반하며 극한으로 치닫는다.

 

이를 반대측면에서 보면 소외의 극복, 삶의 균형을 위해서 가족의 사랑, 사회 공동체와의 연결은 인간의 보편적 삶에 있어 중대한 미덕임의 역설(力說)이랄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괴물은 기묘하게 낯선 존재로 이해됨으로써 소외의 의미를 명료하게 읽게 한다. 괴물의 기형적이고 끔찍한 몸의 묘사와는 상반된 프랑켄슈타인을 능가하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발휘하는 대립이다. 이 비정상은 낯선 것, 다른 것에 대한 인간사회의 본능적인 핍박과 주변화의 폭력성을 선명하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괴물이며, 악마라는 철저한 소외의 대상이 된다. 역겨움과 추방의 대상으로서.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을 찾아와 자신과 같은 여성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성적 욕망이 아닌 공동체에 대한 욕망, 소외와 소통의 단절을 극복하려는 언어적 존재로서의 타당한 권리처럼 보인다. 비정상성을 바라보는 인간의 타자성에 대한 인식은 곧 범주화와 차별이라는 폭력을 낳는다. 아마 당시 사회 깊숙이 자리잡은 계급의식, 혹은 젠더의식에 대한 각성, 인간 존재의 평등성에 대한 반성적 사유이자 비판이었을 것이다.

 

4. 욕망의 충돌, 그리고 죽음

 

지식의 오만이 불러일으킨 창조의 욕망은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고통만을 안긴다. 이러한 프랑켄슈타인에 위로와 작은 평온을 주는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괴물의 살해 위협은 또 하나의 괴물을 만들어야만 하는 역겨움과 혐오, 분노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괴물의 요구인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의 실현을 위한 또 하나의 창조물을 만들던 프랑켄슈타인은 새로운 존재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존재, 다른 추론과 사유의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완성에 이르기 직전 그 피조물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만다. 괴물과의 협상은 깨졌다. 이 충돌은 프랑켄슈타인의 모든 삶을 앗아간다. 그의 전락(轉落)한 삶의 회복을 위해 우정을 잃지 않는 친구 클레르발, 사촌 누이이자 연인인 엘리자베트, 아들의 안위에 모든 배려를 쏟아주었던 아버지를.

 

마침내 분노와 증오의 화신이 되어 괴물을 쫓던 프랑켄슈타인마저 눈을 감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습은 프랑켄슈타인의 더러운 투영이며, 자신이 생명을 얻은 그 날을 증오한다며, 저주 받은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의 죽음을 본 괴물의 성취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희망을 파괴하긴 했으나, 나 자신의 욕망은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라는 괴물의 독백처럼 허기진 욕망으로 남는다. 채워질 수 없는 것, 역시 죽음, 소멸만이 기다린다.

이 작품의 귀결은 소설 속 한 문장에 일찌감치 서술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식의 본질이란 얼마나 희한한 것인가! 일단 마음을 사로잡으면, 마치 바위에 이끼가 끼듯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는다....고통의 감각을 초월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P 160)

 

이 위대한 허구의 산물에서 오늘 우리는 정신의 소산인 열의와 의지가 방향을 잃을 때, 인지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지식의 오만이 방종할 때, 인간 자신에게 돌아 올 위기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며, 뿐만 아니라 타자성에 대한 이해의 미성숙, 그로인한 인종적,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의 비판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마 이 작품이 발표된 이래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의미들이 풍화되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한 채 더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막힌 직조 능력과 작가의 천재적인 지적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문학동네, 1818년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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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2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20세(19세?)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

필리아 2018-03-23 09:56   좋아요 0 | URL
네, 풍부한 의미로 넘쳐나는 위대한 작품이에요.
고맙습니다. 레삭매냐님~

꼬마요정 2018-03-2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여전히 궁금합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의 수첩...
메리 샐리 진짜 멋져요^^

필리아 2018-03-23 17:35   좋아요 0 | URL
ㅎㅎ 빅토르는 생명을 어떻게 불어넣었을까요?
21세기 오늘은 ‘웨트웨어그라인드하우스‘ 같은 탈신체화, 기계와 인간의 결합을 추진하는 기업들이 있어요. 그네들의 전망노트를 닮았을 것 같네요. 메리 셸리는 그야말로 천재라 할 수 밖에 없겠지요. 고맙습니다. 꼬마요정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