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도서출판 은행나무의 문학지(文學誌) Axt 10(2017.1/2)부터 15(2017.11/12)까지, 6회에 걸쳐 게재된 작가 김 숨의 장편소설 떠도는 땅에 대한 리뷰입니다.)

 

 

월간, 격월간, 혹은 계간에 이르기까지 연재(連載)된 장편소설을 찾아 읽는 것은 내겐 손에 꼽는 극히 예외적인 독서 행위라 할 수 있다. 소설의 흐름이 단절된 상태를 다시 복원하여 기억을 되살려내야 하는 불편 때문이며, 이 과정 속에서 독서의 의지를 상실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랄 수 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떠도는 이야기가 있어, 연결되기를 기다리게 되는 드문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아마 떠도는 땅의 화자(話者)들이 실려 있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아기가 태어날 땅, 그 땅이 어떤 땅일지 금실은 모른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 된다. 1937103,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어디로 가는지, 그것이 죽음의 처형장인지, 삶의 무대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가축운반용 열차에 실려 그저 끌려가는 여인과 그녀의 뱃속 아기, 그리고 미지의 땅에 대한 이야기임을.

 

팔다리를 접고 웅크린 사람들의 두루뭉술하게 뭉개진 윤곽으로 표현되는 조선인 무리로 그득한 열차안의 풍경, 그리고 뼈들이 구르고 구르는 동안 부서지고 마모되어서는, 마침내 열차가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가루가 될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마치 이를 잊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들이 토해내는 고독과 그리움과 생존, 안주(安住)를 향한 처절한 삶의 투쟁에 대한 기억들과 소회들이 흐른다.

 

지주의, 일본의 개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한 그릇의 죽이라도 먹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버려진 이국의 땅을 찾아든 조선인들, 무리를 이끈 가장도, 그들의 손에 이끌려온 아이도, 그리고 그 척박한 곳에서 생을 시작한 이들까지, 그네들이 이루어낸 환경에서 무참히 내쫓겨 가축처럼 실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열차 안에서 꾸려진다. 그것은 그네들의 사연과 기억이란 기록 속을 오가며 , 삶의 뿌리가 내려지는 곳,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편견과 의혹들이 인종적으로, 때론 민족주의에 실려, 그리고 이념과 영토와 국가라는 허구적 실재가 사람들을, 땅을 어떻게 갈라놓는지를 드러내 놓는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는 능숙하게 숙련된 지식인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순박함과 귀동냥한 소박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아기도 살수 없는 그 어떤 곳으로 자신들을 이끄는 처참한 가축용 열차 칸에 태운 스탈린의 처사를 말하는 인물들의 면면이다. 유대인의 머리가 큰 것은 하도 머리를 쳐서라고 믿는 을녀, 오순, 백순, 공덕과 같은 사람들의 물음과 대답이 엮여 디아스포라(Diaspora)에 이르고, “뭔가 죄를 지었으니까 떠돌며 사는 거겠지에 도달한다.

 

소설에서는 그네들 자신에게 씌워진 죄의 굴레에 대한 인식의 대립이 인설일천이라는 두 인물에 의해 그려진다.

소련 내에 외국 스파이, 해충, 변절주의자....들로 가득하다....‘ 소련 정부가 조선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떠들어대던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따지고 보면 반역자들 때문에 우리가 이 꼴을 당하는 거 아니겠소?”

누가 반역자인가요?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를 위해 싸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외치던 조선인이 반역자인가요?”

 

고난의 여정인 강제이주 열차는 이러한 담론들의 격전장이기만한 것은 아니다. 7개월 된 태아를 지닌 여인 금실인설에게 감도는 삶의 태동, 흐릿한 희망의 움, 그 잿빛 무대에서도 실낱같은 빛이 있다는 것이다. “금실의 눈길이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설을 향한다. 남편 근석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낯설고 미묘한 감정에 그녀는 어깨를 떤다.”

 

“103일 페르바야 레치카 역을 떠난 열차는 30여일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구릉들과 갈대밭뿐인 버려진 땅. 다시 반복된다. “너희는 무슨 죄를 지어서 아무것도 없는 땅에 버려졌지?” “신조차 용서 못할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버려진 거야?”

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허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믿은 죄,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 죄..., 아니 죄 없이 버려진 죄. 떠난 자들을 망각한 자들의 죄....

 

80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세대들은 무심히 하바롭스크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또한 알마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곤 예기치 않게 위령비와 곡창지대로, 화려한 도시로 변화된 그곳들을 거닐게 된다. 소설 속의 후손들,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형제와 자매들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알지 못한 채. 땅에 대한 그 절박한 필요가 있었던 삶들에 대한 찬연(燦然)한 애가(哀歌)를 이제야 들으려 하고 듣게 된 우둔함과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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