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프랑스 비행사의 체험문학을 다시금 손에 들게 된 것은 첫째, 프랑스 문학의 요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를 핵심테마로 삼고 있다는 박이문선생의 나의 문학, 나의 철학에서의 문장이 던져준 느닷없는 관심의 유발이었고, 둘째는 안주와 타성에 주저앉아 공허함만을 되뇌는 내 정신의 환기에 대한 기대여서라 하겠다. 다만 나의 지리멸렬한 현실을 넘어서려는 데 어떤 자극이 되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리라는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읽기는 동화할 수 없는 저항감을 내내 내게 안겨주었다. 아마 화석화한 기성의 해석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속하여 내 가치관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은 대의(大義)’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생텍쥐베리의 소설, 야간 비행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로 보였으며, 인간의 대지에서의 상당부분 역시 이에 할애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문학의 현대 휴머니즘계열에서 그 중간적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소위 행동적 휴머니즘이라 불리며, 위험의 참여라는 행동을 통하여 부조리하고 비극적인 인간의 조건을 정복하고자 하는 일견 영웅주의(Heroism)가 지니는 오만함의 당위였을 것이다.

 

사실 르포(Reportage)기사와 같은 소설, 인간의 대지에서 나는 인간의식의 용기를 북돋아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거나, 인간은 자신의 운명보다 강함을 확인하게 된다는 그런 인간의 초월적 참여와 행동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고 해야겠다. 이보다는 꽤나 즐비한 아름다운 사색의 문장들이 더욱 나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 우주의 작은 미립자에 불과함을 비로소 자각하는 그 겸허함, 사람의 마음을 발견했을 때의 그 풍요로움 들이 절로 삶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비행기 추락사고 이후 죽음이 스멀스멀 자신의 육체에 스며들려할 때, 깜박 졸았나 보다. 그리곤 이렇게 그 느낌을 술회한다. 사막에서 잠에서 깨었을 때, 밤하늘의 물웅덩이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 그 별들의 호수를 향하여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끝에서 발꿈치까지 나 자신이 대지에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문득, “새벽 식사의 향기로운 접시를 만들어주는이 별, 지구에 살아있음을 느낄 때, 그 경외(敬畏)감에 지그시 눈을 감을 때를 기억나게 한다.

 

그리고 이 문장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풍요로워짐을 느낀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이때 사람들의 모습은 서로 비슷하다. 바다의 광활함에 놀라는 해방된 죄인 같은 그 모습이.”

그러나 모두(冒頭)에서의 저항감으로 돌아가야겠다. 어찌 보면 어쭙잖게 요동을 쳐대고 있는 내 윤리의식을 진정할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1. 생명을 기만하는 오만

 

나는 생텍쥐페리에 반대한다! 인류의 대의(大義)라는 것에 한 인간의 독자성(獨自性)을 희생시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기만하는 문명이라는 위대성에 대해서. 또한 공리주의적 셈법에 대해서. 이것이 야간 비행인간의 대지가 말하는 요체로만 이해되었으니 말이다. 세평(世評)은 소위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 인도적인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내버릴 때 인간은 비로소 위대해진다.’라는 영웅적 행동의 고취, 인간 정신의 존엄성을 길어낸 작품이라고들 말한다. 나는 결코 이 위대함과 대의에 동의하지 못한다. 그것이 야간 비행의 주인공인 항공사 지배인인 리뷔에르이며, 인간의 대지에서 등장하는 생텍쥐페리의 동료 조종사인 기요메가 말하는 그 단정적 문장이라면.

 

소설 속에서의 야간비행이란 1930년대라는 아직은 조악한 비행장치와 관제, 조종이라는 기술적 상황 하에 오직 인간의 육신에 의존하여 사방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칠흑 같은 암흑과 즐비한 고봉을 통과하여 우편물을 운송하는 비행을 일컫는다. 따라서 조종사와 무선사 등 탑승자의 죽음이라는 생명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비행이다. 당연히 야간비행이라는 사업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이에 대해 이 사업을 관철시키고 진행시키는 사업지배인인 리뷔에르는 대답한다.

위험을 제거할 완벽한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따지고 들면, .....(중략)...경험이 법을 만들어 줄 겁니다.” 라고.

생명을 담보로 한 시행착오를 반복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야간비행에서 많은 조종사들의 죽음을 통해 비행조종술과 새로운 항공로가 개척되면 안정된 방식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일 것이다. 인류 사회를 위해 개인의 생명은 기꺼이 바쳐져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인간 본연의 책임이며, 바로 위대한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말은 인간의 대지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생텍쥐페리는 내가 한 일은, 결단코 어떤 짐승도 일찍이 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네.”라는 추락사고와 죽음에서 생환한 동료 기요메의 말을 전하면서 그의 행위야말로 칭찬 받아 마땅한 인간으로서 긍지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조금은 느끼고 있는 책임”, 바로 자기에 대한 책임이라고.

 

그런데, 이 신념, 즉 인류의 미래에 대한 책임, 인류의 진보를 위한 소명의식으로 가득한 리뷔에르란 인물을 들여다보면 자기에 대한 책임을 구성하는 당혹스러운 윤리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 속 한 에피소드에서 정시정각의 이륙이라는 강력한 규칙을 세워놓고, 안개가 자욱하든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와는 상관없이 이를 어기면 해당 조종사의 보상을 삭감하는 자신의 소신은 의지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기상조건의 악화에 따라 회항한 조종사를 다그치면서, 이는 미지의 세계 앞에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저 압력을 그 사람을 통해 공격한것이며, 오히려 그를 공포심에 구해준 것이라고 자신의 냉담함의 이면에 이렇게 깊은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기상일기가 회복되기를 조바심 나게 기다리도록 한 자신의 규칙, 죽음이라는 위험의 직면을 회피하려는 조종사에게 영웅심을 주입하려는, 마치 조종사들에게 신()으로서 행세하려는 리뷔에르에게서 나는 오만(傲慢)과 무사유(無思惟)의 지성만을 보게 된다. 그에게 인간에 대한 , 생명에 대한 어떤 권한이 주어졌기에 이러한 의지가 가능할까? 나는 어떤 인간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생명을 기만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설혹 인류의 멸망을 막는 일이라도.

 

2. 전진, 문명의 진보라는 자기기만

 

한편, ‘리뷔에르의 다음과 같은 주장 또한 실로 첨예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사람의 생명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인간의 생명보다 더 값나가는 것이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중략)...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무엇더 영속적인 것, 구해내야 할,.....중요한 것은 오직 전진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즉 인류의 진보라는 대의를 위해 인간 개개인의 생명은 그것의 수단으로 소용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와는 완전히 대립적인 주장의 문장을 인간의 대지』 「비행기편에서 발견하게 된다.

 

진보에 열광한 나머지.... 공장을 세우고 유정(油井)을 파는 일에 사람들을 종처럼 부렸다. 이런 건설들을 하는 것이 사람들에 봉사하기 위한 것임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리뷔에르가 자신의 조종사의 죽음을 담보로 한 야간비행 사업이 인류 항공문명의 발전을 위한 위대한사업이며, 여기에 희생되는 조종사들은 인류를 위해 자기 책임을 다하는, 소위 대의를 위한 행동이라는 것과 어떻게 융화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대지에서는 분명히 인간을 도구화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간 비행에서는 리뷔에르를 통하여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지점에선가 중요한 무엇을 빠뜨렸기 때문에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자기 책임이라는 단어 때문인 듯싶다. ‘자기 탓이 아닌 것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며,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조금은 느끼고 있는 책임이라고 생텍쥐페리는 말한다. 종처럼 부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 했으니 다른 것이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런 기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인지 인간의 대지에는 기막힌 맞춤의 문장이 있다. “곡괭이질이 있는 그곳이 반드시 죄인의 일터는 아니다. 행위 속에 추함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일터는 의미 없는 곡괭이질을 하는 거기에...” 그렇다면 종처럼 부려진 사람들이 팠던 유정은 의미 없는 것이고, 우편물을 운송하는 야간비행 사업은 의미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의미는 과연 누가 부여하는 것인가? 유정 파는 사람이?, 조종사가?, 유정 파는 종을 부리는 인간이?, 야간비행 사업의 지배인이?

 

기이하게도 인간의 대지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인간의 문명은 얇은 도금에 지나지 않는다. 화산이나 새로 생긴 바다 혹은 모래바람이 그것들을 지워버린다.” 또한, “인간이라는 길손이 무슨 까닭으로 꾸며낸 이 정원을 찾는지는 알 수 없다.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지질학상의 한 시대, 수많은 축복받은 날 중 하루라는 짧은 시간만이 주어진 이 위험한 정원을.”이라고. 초라한 무대 위에서의 자기 연극을 위해 타자를 살해하는 그런 윤리를, 아니 위대한 연극을 위해서 생명을 요구하는 그런 윤리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 야간 비행의 마지막 문장, “자기의 크나큰 승리를 지니고 있는 뤼비에르, 승리자 리뷔에르.”는 역겨움, 바로 그것이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이 영웅주의는 1930년대의 유럽에서는 당연히 지지받았을 것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그런 인간상이었으니까. ‘인간의 존엄성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존엄성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아마 자기계발류의 책들에서 말하는 사회적 안락에서 스스로 뛰쳐나와 인생의 심오한 진실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고행정신’, 자기초월의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 뭐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고 반론이 제기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용기가 잘 못 된 것이 아니라 용기가 목적이 아니라서, 그것이 순수함을 상실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무리하여야 할 것 같다. 인간과 세계와 사상과 가치의 모순, 이러한 모순은 하나의 월등한 원칙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경의여야 할 것이라고. 결코 이 인간은 인류가 아닌 독자성으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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