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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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 국면을 클로즈업(Close-Up)하면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 고상하고 기품있고 아름다워 보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한 무엇에 렌즈를 가까이 갖다대면 댈수록 이내 그 본색인 천박하고 추하거나 불결해보여 외면하고 싶은 그런것, 이 작품집을 읽는 내내 이러한 감정 상태를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곤 자살, 추방, 폭력, 고립과 같은 단어들에서 발산되는 어둠의 답답함이 시종 가슴을 압박하는 불쾌한 기분에 짓눌린 기분이었다고 해야겠다. 오늘의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이런 것이라는, 우리의 의식이 손사래를 치며 은폐시키고 있던 것들을 어쩔수 없이 마주하는 그런 수치심, 몸서리, 분노, 자괴감이 뒤엉킨 무기력 같은 것...

 

1. 너무도 현실이어서 비현실적인

 

"아버지가 칼등으로 블루길의 대가리를 찍었다."라는 첫 페이지의 문장이 시선을 장악하는 이 소설집의 첫 단편인 <미끼>의 흥건하게 흐르는 폭력의 피비린내가 훅 하고 내 정신을 훑는다. "버텨 살아남은 놈이 주인이 되는 거야, 알겠어?", 아들인 화자(話者)를 절름발이로 만들어놓은 아버지가 하는 말이다. 대어를 잡아들이는 떡밥의 비밀을 취재하기 위한 VJ의 탐욕스러움이 가세하여 이들 부자(父子)가 하는 낚싯가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폭력의 쇼는 바로 그 속성인 완력, 힘의 자기 파괴력일 것이다.  그래, 살아남은 놈이 주인이 되는 거다. 바로지금 우리의 정치사회에서 벌어지는 어이없기그지없는 쇼의 궁극이 바로 이것이지 않은가? 어떻게 이 구조적인 사슬을 끊어야 할까?  약자는 모두 쓰레기처럼 풀 숲에 던져버려지는 것이 진실인가?

 

나는 수록된 이 소설들을 모두 읽어낼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이 클로즈업된 전경들을 마주할 수 있을까하는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거의 소설집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다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단편에 이르렀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게하는 문장을 만났다. "가만히 잠든 아이의 얼굴위에 베개를 올려놓았다. 아이의 숨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가만히 베개를 누르자...."  파업 노동자인 남편의 자살 후 천문학적인 파업손해배상액을 빚으로 떠 안은 정신분열의 시어머니, 어린 두아이의 엄마가 견뎌야하는 잔인한 현실의 결말이다. 쓰레기처럼 방치되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지나치게 현실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현실,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들...

 

단편 <폭염>의 화물트럭 운전으로 딸아이를 키워내는 여인, <흉몽>의 모텔 청소부인 여인, 억척스런 생활의 몸부림에도 그네들을 모욕으로 점철시키는 우리들의 사회는  "나도 따라 죽을거야.", 혹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찢어진 눈매를 치켜보며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거나, 삶이란 절망과 고통스런 의혹일 뿐이다.

 

2. 언어나 문자 따위로 전할 수 없는

 

'다카다 아키노리'라는 일본 철학자의 '궁극의 선택'이라는 어휘가 떠오른다. "똥맛 카레와 카레맛 똥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와 같은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적 속박을 일컫는 말이다. 아마 우리들중 많은 이들은 오늘 이러한 속박을 피할 길 없는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것(사회적 속박)을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아마 자살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김이설'의 소설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물들로 가득차 있다. 내 존재를 떠 받쳐주는 타자가 없는 이들, 세계가 외면한 곳에는 항시 죽음의 그림자가 떠돈다. <폭염>, <흉몽>, <복기>, <아름다운 것들>..., 또한 한결같이 등장인물들은 아이를 갖지못한다. 이 사회의 번식녀 계급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 잔혹한 폭력의 세계...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않은'또는 '언어나 문자 따위로 전할 수 없는'이라는 비밀의 얘기로 돌아가자. 사실 우리들의 사회가 은폐한 것들의 이야기이니 이 소설집의 모든 작품들이 비밀의 발설이라 해야할 터이다. <비밀들>이라는 단편의 주인공은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인 이혼요구를 받고 친정으로 내려온 여인의 이야기다. 그런데 "내 부모와 세상이 바라는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문장이 눈길을 끈다. 사회적 속박의 다른 표현이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의 혼란과 방황이다. 온갖 편협한 편견들과 반지성이라 불리는 옹색하고 천박한 자기주장, 이미 윤리적 도덕적 올바름을 망각한 세계가 말하는 '정상'이란 단어처럼 의심스런 것도 없으리라. 이 구조적인 폭력이 여인이 온전히 서 있을 곳을 지워버린다.  "여전히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울행 버스가 도착했다. 정수리에 박힌 햇빛이 뜨거웠다."  이 마지막 문장이 왜 그리 울려대는지...

 

"비밀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외롭게 되어있어." 라는 단편 <부고>의 문장에 가 닿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라는 화자(話者)의 독백에서 또한 자기의 이야기가 없는 인물을 만난다. 그녀의 삶에 자기 것이라곤 일체 없다. "논문을 쓰다보면 그것이 내 논문 같고, 내가 석사 박사가 된 것 같았다. 학원으로 출근하다보면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 같았다. 상준과 누워있으면 아내 같고,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 뒤로는 여자의 친자식 같았다." 다음 시간 단위에서 발생하는 일이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들의 지속이라면 아마 우린 순간을 살아내는 것 뿐일 것이다. 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을까? 이런 상황에 계속 굴복하여 살도록 강요하는, '시몬 베이유(Simone Weil)'가 말한 '공장화된 현대사회'의 본성인 '타인의 의지로만 움직이는 물건이된 인간'을 떠 올리게 된다.

 

'OO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란,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TV광고 속 그와 그녀 같은, 드라마, 스포츠, 재벌,...의 그 무엇과 같은. 급기야 단편 <빈집>에 이르러서는 신도시에 아파트를 장만한 여자 '수정'은 이렇게 말한다.  "새 아파트는 잡지 사진과 최대한 닮은 것"으로 만들겠다고. 모방, 지속되는 결핍, 미완성의 고통만이 늘어날 것이다. 그녀는 말끔히 정리하곤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들어앉아 비로소 평온을 느낀다. 그 고요함이 마냥 지속되기를.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를. 이 은밀한 고통들, 폭력들, 속박들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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