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제법 발칙한 동기에서 이 작품을 읽게되었다고 하겠다. 'ㅇㅇ주의자'라고 하는 범주화된 제목에 대한 저항감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사람을 어떤 특정한 부류에 카테고리화하는 것, 이를테면 문화적 구별짓기와 같이 어떤 성향이나 취향이라는 일견 순수한 것 뒤에 숨어 사회체계와 분리될 수 없는 계급적 에토스(ethos;관습)를 만들어내는 폭력의 한 양식이라는 의미에서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은 반감을 자아낸다.  멀리 갈것도 없이 연작중 첫번째 작품인 <채식주의자>에서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라고 말하는 영혜에게 남편의 직장 전무부인은 즉시 "그러니까 채식주의자시군요?"  "골고루 못 먹는 것 없이 ~(중략)~ 정신적으로 원만하다는 증거죠."라고 한 사람을 범주화 해버리는 장면에서 바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범주화의 폭력성은 요즘 부쩍 회자되고 있는 '반지성(反知性)'으로 연결되어 더욱 고착된다. '우치다 다쓰루(內田 樹)'는 그의 저서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조금만 시간을 들여 알아보면 간단하게 들켜 버릴 거짓말, 근거가 빈약한 데이터, 일리가 있는 해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례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는 것인데, 이것이 문제적인 것은 사람들, 혹은 사회를 어떤 한 방향으로 몰아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그들은 "지식도 교양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하는일'을 하지 않는다. 특히스스로 생각하는 일." 이라고 그 편협성과 타자에 대한 불용이라는 분리적 폭력의 한 양태를 통찰하기도 한다.

 

아마 이 지점이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멈춘 사람들의 세계, 그러나 맹렬한 지적 정열로 타자를 압도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책략만을 구사하는 데 능숙해진 사람들이 넘실대는 세계, 그렇지만 이들 아무도 자신은 범주화, 반지성의 책략을 행사하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세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코 타자를 이해하려하거나 관용하려 하지 않는다. 영혜의 형부가 기억하는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외에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라고 기술하는 그녀의 남편이나 고기를 안 먹는다는 영혜의 두 팔을 잡고 강제로 입 속에 고기를 쳐넣는 영혜의 아버지에게서 이 일상적인 범주화의 반지성적 폭력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몽고반점>에서 처제인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있는 푸른 몽고반점으로부터 그녀를 오직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이용하는 실험예술가인 형부의 위선과 책략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믿는 지식과 정보에 정열적이다. 그리곤 이 열악한 것들로 상대를 누르는데 열중한다. 상대의 두려움, 공포, 고통은 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이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아버지에게 손찌검, 그 폭력을 뼈속까지 받아들이고 성장했다. 그런 그녀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의 꿈을 꾼다. 꿈 꾸기 전날 아침, 남편은 그녀에게 화를 내며 재촉한다. "제기랄, 그렇게 꾸물대고 있을 거야?"  그녀의 저 침잠해 숨어있던 심연의 그림자, 그 어떤 폭력에도 저항하지 않았던 내면의 분노와 마주케 했던 촉매였을 것이다.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녀 자신의 이 폭력성과 마주한 순간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하기가 불가능 해진 것이리라.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는 "무엇을 찌르려고 하는지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라면서 더이상 둥글지도 않은 자신의 가슴에서 점증되는 어둠의 그림자에 침전하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병원 벤치에 앉아있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목이 눌려있던 새 한마리가 떨어졌을 때, 거기에는  " 포식자에 뜯긴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몽고반점>은 어떤 의미에서 지옥도를 상상케한다. 불합리하고 음란한 인간의 측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많은 모더니즘 예술을 비롯한 실험예술에서 발견되는 몰인격, 예술의 형식으로 죽음을 포용하는 그것에서. 어떤 인상적인 대상을 영상과 음악을 넣어 편집해 시각적인 작품을 만드는 일종의 실험미술가인 영혜 형부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는데, 나는 그의 지성에서 오직 악마성만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신적 시련을 겪고 있는 처제 영혜를 대상으로 '몽고반점 1 - 밤의 꽃과 낮의 꽃'이라는 영상작품을 찍어대곤, 음란과 예술의 경계, 아니 자기 욕망의 마지막까지를 채우기 위해 '몽고반점 2'를 찍는다. 나무가지와 잎사귀, 꽃이 그려진 영혜와 자신의 몸을 섞는 그 이미지를. 머리만 무거워진 현대의 불안정한 지성,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원시적이고 충동적인 것들로 나아가는 도피와 은둔의 표상, 감각에 호소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기는 커녕 극도로 인격이 결여돼 있는 그것, 고통스러운 자기부재를 채우려고 타인의 생명을 빨아먹는 악마적 에너지 그것 말이다.

 

<나무불꽃>에 이르러 죽음, 무화(無化), 무의식에 엉켜있는 어둠의 그림자, 그 폭력성에 대항하는 여인을 보게된다. "오랫동안 혼자여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시선으로 차창을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를 바라보는" 영혜의 언니 인혜의 시선에서. "모든 이차성징이 사라진 기이한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요양원에 누워있는 동생을 보는 그녀의 고통에서. 그녀는 비로서 이혼한 남편의 열정어린 작품과 일상의 간극이 지닌 의미, 그의 눈에 담겼던 것이 욕정도 광기도 아니라 공포였음을 인식한다. 그네들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버텨냈던 자신의 모습을 그들을 통해 비춰본다. 영혜와 인혜의 남편, 고통과 공포 그것으로부터의 궁극적인 자유라는 그네들의 동일한 방향은 소멸이다.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아예포기하는 것 이상의 자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대상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자유일테니까. 그래서 영혜가 향하는 곳, 더이상 고통을 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출발점인 부동(不動)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물구나무를 서서 뿌리가 내리고 대지에 굳건히 자신을 내리는 나무가 되고있다는 영혜를 보는 것은 그렇기에 참아내기 힘든 아픔이다. 그러나 무화하려는 동생에게 인혜는 말한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인혜, 그녀의 구원은 삶의 견뎌냄이리라. 우리네 내면의 저 밑바닥에 있는 어둠의 그림자를 기꺼이 대면하고, 그것의 목소리를 듣고 자기의 실체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 말이다. 그것에 굴복할 이유도, 그것을 외면할 것 도 아니다. 마침내 그녀는 바라본다. "초록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범주화, 반지성, 폭력, 고통,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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