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자유,음악,평화 그리고 역사
우드스탁 센세이션 - 젊음, 자유, 음악, 평화 그리고 역사
마이클 랭 외 지음, 장호연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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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스탁(Woodstock)'은 뉴욕 북부의 작은 대안 마을의 지명이 아니라 1969년 이후부터는 “페스티벌 역사의 새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음악과 자유와 평화, 그리고‘문화공동체의 엄청난 에너지’의 집적을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 저작은 바로 1960년대를 풍미하던‘마이클 랭’이라는 한 젊은 히피문화의 주자가 “느슨하고 자유로운 페스티벌”을 열고 싶다는 불가능하기만 해 보였던 전망을 실현시킨 공동체 정신과 유토피아 비전이란 이상을 입증한 마술 같은 음악향연, <우드스탁 1969>의 생생하고 진솔한 기록이다.

미국 남부도시 마이애미 비스케인 만에 위치한‘카운터 컬처’의 거점인 그로브라는 지역에서 헤드숖을 열고 지역밴드를 섭외해 연주회를 여는 것으로 소일하던 청년‘마이클 랭’의 서로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하고 이들이 만나 하나가 되는 문화공동체의 구상에서 시작된 페스티벌이 어떤 이상과  이를 실현하는데 부딪친 많은 장애들, 그리고 극복과 세세한 준비과정에서부터 행사일인 1969년8월15일부터 8월17일까지 3일간의 경이적이고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자유’의 대 축제, 그야말로 센세이셔널(sensational)한 그날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사실 뉴욕시 북쪽으로 90마일 떨어진 우드스탁에서 이 페스티벌은 열리지 못한다. 우드스탁을 포함하는‘월킬’시의 시민집단과 공권력의 극렬하고 조직적인 반대로 불과 공연을 2개월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중지되는 위기를 맞는다. 이는 1960년대 소비자본주의의 완성으로 소외와 고립의 경험이 양산되자 이로부터의 출구를 찾던 미국 대중문화의 한 돌파구로서의 히피문화에 대한 주류집단과의 갈등의 산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로큰롤과 히피는 곧 마약과 성, 폭력의 집단이란 왜곡된 시선과 기성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던 당대의 첨예한 접촉점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건‘우드스탁 벤처스’라는 4명의 젊은이들이 합작한 이들의 도전은 우드스탁과의 거리는 멀어졌으나 뉴욕시 북부‘베델’의 600에이커에 달하는‘맥스 야스거’농장의 극적인 장소협조를 받기에 이른다. 역사가 창조되는 장소는 이렇듯 보이지 않는 무언의 힘에 의해 점지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드디어 역사상 전쟁이 아닌 경우로 한 공간에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것으로 기록될 전례없는 엄청난 에너지와 자유, 멋진 음악의 잔치가 펼쳐질 준비과정의 소소한 부분들이 전달된다. 여기서 대형페스티벌을 기획, 홍보, 제작, 운영에 관련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생동감 넘치는 매뉴얼이랄 수 있는 화장실의 수량 선정에서 주차, 섭외, 무대설치, 음식물과 매점, 식수공급, 흥행 등에 이르는 세세한 문제들과 진행과정의 노하우를 얻을 수 도 있다.

행사장에서 반경 20마일 지역의 모든 도로가 차단될 정도였다니 공연 참석자 행렬의 이동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한 장소에 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으니 이들의 안전문제와 먹고 자는 문제는 그야말로 끔찍한 사고의 전조로 여겨진다. 그러나 수많은 군중들은 어느덧 치안을 떠맡고 스스로 규율하고 통제하여 그냥 알아서 돌아가기 시작했다니 자유를 갈구했던, 그래서 스스로 야만인이 되어 진정한 인간의 권리 회복과 해방을 지향했던 소외된 대중들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멋지게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이 저작에는 당시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청중, 공연준비자, 지원인력, 가수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날들의 생생한 기억들을 전해주는데, 한결같이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전체가 하나의 문화공동체가 된 실로 마술같은 유토피아 마을”이라고 일관된 회상을 하는 것을 보면 타락한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출구를 찾지 못해 절망하던 이들에게‘우드스탁’은 진정한 출구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이러한 우드스탁의 문화, 사회정치적 의의에 대한 모습 못지않게 시선을 이끄는 것은 당시 이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가수들과 그룹들의 면모라 할 수 있다. 우드스탁에 참여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가 이후 로커들과 그룹사운드의 명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을 정도이니 참여를 거부했던 이들에게는 땅을 치는 아쉬움이었을 것만 같다. ‘카를로스 산타나’, ‘슬라이스 스톤’, ‘지미 핸드릭스’, ‘로비 로버트슨’, ‘레본 헬름’, ‘그레이스 슬릭’, ‘폴 버터필드’등 전설적인 유명 밴드와 가수들의 당시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떠한 긴장도, 분노도, 스트레스도 놓아버린 천연의 자유가 온통 화이트레이크에 넘실대는 것만 같은 낙원의 환영이 다 보이는 것만 같다. 참석 군중들의 모습에 떠오르는 한결 같은 환희의 웃음을 머금은 얼굴들과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 거대한 바다를 이루었다는 증언처럼 그 3일간은 정말 비현실적일 만큼 환상적인 자유가 넘치는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전쟁과 인종차별, 폭력이 넘쳐나던 당대의 기형적인 자본주의 미국사회에 대한 강한‘거부’의 의사이기도 하였으며, 공동체 정신과 이상향에 대한 비전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거대한 에너지의 실체를 보여준 위대한 사건이기도 하였으리라. 이후 이 정신이 계승되어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식장을 ‘워싱턴 우드스탁’이라 명명하였다는 것을 보면 1969년의 우드스탁은“대단한 사회적 실험”으로 유구하게 인류의 중요한 지적 재산중 하나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사설처럼 비폭력도 전염성이 있으며, 개인의 존엄을 존중하는 이상을 입증한 실험으로 말이다. 우리의 풍토에서 이러한 문화공동체의 축제를 실현 시킬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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