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6
가라타니 고진 지음, 윤인로.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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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저술 중 가장 대중친화적인 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13조의 저술이다. ‘칸트의 실천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의 탐험, 일본인의 도덕관과 책임의식의 실체를 규명 연구하고, 인류사회의 지속가능한 순환적 사회의 구축을 위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사유를 환기시키는, 하나의 토대로 여럿을 알게 해주는 까닭이다. 궁극적으로는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도덕성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지만 이 궁구(窮究)의 여정에 등장하는 일본인의 공동체의식이나 천황의 전쟁책임과 같은 제재(題材)들이 우리 한국인에게 시사하는 것들 탓에 이해에 구체성을 띠게 된다.

 

일본 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적군파의 인질살해사건의 일화로 시작하는데, “도대체 책임이란 것에 회의적인 일본인들이 왜 열렬하게사건 가담자들의 부모에게는 책임을 추궁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여기서 소위 주체나 원리도 없는 사회도덕이라는 일본의 특수한 현상을 들춰낸다. 그 실체는 마을공동체라는 것으로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사회로 보이지만 단지 개인 자신들의 고립이 두려워서 모이는 것뿐이며, 그들 사이에 돈독한 우정이란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정이 존재키 위해서는 자기가 있어야하는데 바로 이 공동체라는 것에 자기가 없는 것, 즉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데 자기(에고)도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도 없는 이 모호한 공동체가 도덕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관련도 없는 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기이한 현상으로 표출되는 것이지만 정작 도덕적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의 주체로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 이 고찰은 주체의 자유가 도덕적으로 어떠한 위치를 지니는지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자유라는 관점에서 도덕을 인식하는 칸트의 실천윤리에 대한 담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과연 자유의지라는 것이 진정 존재하여 선택하는 것인가에 이르면 그 자유는 이내 불확실해진다. 마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디까지나 인과성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며, 따라서 인간의 행동은 모두 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자유 따위는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결과가 되고 만다.

 

여기서 칸트는 자유는 결코 이처럼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인식하고자하는 의지, 바로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으로 비로소 자유가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도덕성은 선악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문제이며, 자유 없이 선악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연적, 사회적 인과성을 배제하고 오직 자유를 의지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니, 실제로 자유롭지 않다고 할지라도 자유로웠던 것처럼 간주하는 것, 다시 말해 인생을 타인이나 주어진 조건 탓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자신이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책임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를 보다 진전시켜 생각해 보면 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을 그렇게 믿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윤리적(자유)인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한편 공동체의 도덕을 도덕으로,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을 윤리로 구분한 칸트의 세계시민(Cosmopolitan), 즉 공공적(公共的)으로 생각하는 의지를 지닌 시민의 상정은 인류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하는 윤리의 도달점을 말한다. 즉 진실이지만 자기연대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 (부정한 조직을 정의심과 용기로 공개할 경우 자신의 조직에서 배제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곧 세계시민으로서 행동하면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조직을 위해 좋은 구성원, 가족을 위해 좋은 아빠가 되는 소위 사회도덕을 지키면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인 윤리를 지킬 수가 없게 된다. 이는 윤리적이라는 것은 바로 도덕성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진정 윤리적이라는 것은 이처럼 자기와, 연대의 희생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영미(英美)계 윤리학의 중심사상을 이루는 타인에게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된다!”는 공리주의의 경우 이미 자기 원인적, 즉 자유가 아니라는 점에서 도덕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더구나 공리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현대자본주의가 분업과 교환이라는 타자를 수단으로 삼는 것, 즉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는 것을 희생시키고 있으며, 공공적 합의라든가 사회적 계약과 같이 지극히 협소한 타자, 즉 살아있는 타자에 한정되어 미래의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된다.

 

()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등식,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추구라는 신념을 고수하여,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려 한다면 전()지구적 환경파괴, 에너지와 식량부족 등 비참한 사태가 초래되는 것은 불가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참한 사태를 체험하는 것은 미래의 타자이며, 이들 미래 인간이 참여하지 않은 공리주의의 공공적 합의라는 것은 이미 도덕성을 결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린 미래의 인간을 위해서 희생(생태계의 복원, 자원의 절제 등...)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의무’, 윤리(실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후(戰後) 일본 천황의 형사적 책임에 대한 논의들을 통해 책임이라는 도덕적 의무를 성찰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과 일본의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의 문제로 관심을 증대시킨다. 독일의 경우 전후 뉘렌베르크 재판을 통해 전범들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물음으로서 정치적, 도덕적 책임의 단계로 진전되었으나, 일본의 경우 천황의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고 엉뚱하게도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라고 국민의 책임으로 전가하여 전쟁 책임의 논의가 모호하고 불투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누구도 책임을 질 사람이 없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무책임 체계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천황 대신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어딘가 부당하다는 것이며, 이는 일본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부족한 이유가 되고,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 나아가지 못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적 관심을 배제하는, 일종의 무관심(저자는 괄호에 넣는 것이라는 기발하고 유용한 표현을 하고 있음)을 통해 도덕을 보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지적 쇄신과 책임의 요청이 있다하겠다.

 

사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우리들이 풍요로움과 물질적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현재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항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연환경의 리사이클 수준을 넘어서는 위기와 남북문제와 같은 양극화로 인한 갈등을 비롯한 숱한 윤리적 문제가 있다. 우리가 현재의 행복을 위해 미래의 인간에게 계산서를 돌린다면, 즉 그들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것은 윤리의 공공연한 부정과 파괴가 되어버린다.

 

아마 민족주의의 환기와 자국민의 행복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칸트의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윤리는 그래서 21세기 지속가능한 순환적 사회를 형성하는 우리 인류의 생존을 위한 모럴이라 하여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이성비판(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누비며, 마르크스주의의 가능한 코뮤니즘의 이상에 이르기 위해 언급되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가라타니의 철학적 향연은 문학적 감상을 초월하는 재미에 빠져들게 한다. 칸트, 니체, 스피노자, 키에르케고르, 프로이트, 야스퍼스, 헤겔, 아도르노, 데리다 등을 종횡무진하며 자유와 이성, 도덕과 윤리를 수월한 언어로 대중에게 전달해주는 이 저술은 보편적 도덕 법칙에 대한 칸트주의의 실천철학 안내서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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