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 현대의 문학 이론 46
피터 브룩스 지음, 박인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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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학작품을, 소설을 읽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타인의 지리멸렬한 삶의 이야기에 불과한 그것을 마지막까지 읽어나가게되는 것일까? 아마 이러한 원론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우리는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정신분석이 창조적인 텍스트가 지닌 풍부함을 흔해빠진 범주에 가두고, 상투적인 옛 이야기만을 발견하게 되는 환원적인 조작이라는 비판이 있을지언정 허구적 작품들이 발생시키는 의미작용에서 보다 심층적 층위를 파악하는 역할 또한 부인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피터 브룩스는 첫 장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정신분석 비평의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한 개념의 설명에 할애하면서 눈에 번쩍 뜨이는 문학 텍스트의 미학적 형식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의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이것은 모두(冒頭)의 세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될 것 같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는 사람들은 불쾌해지거나 싫증이 나는 데 비해, 작가가 창조한 몽상은 어째서 쾌락을 주는가? 에 대한 예술적 성취의 비밀이랄 수 있다. 그것은 미학적인 쾌락을 제공하여 독자들을 유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전쾌락이라는 장치라는 것이다.

 

1. 텍스트 미학의 중추; 사전쾌락

 

사전쾌락(일종의 前戲:foreplay)이란 목적이나 결과를 향해 전진하는 움직임과, 목적이나 결말로부터 후퇴하는 움직임, 그러한 유희의 형식적 영역을 포괄하는 수사학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즉 텍스트 역학에 있어서 지연과 전진을 오가며 형식과 욕망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어떤 소설을 읽다보면 과정 내내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혹은 향긋한 향기만이 가득한 듯하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곧 발생할 사전의 신호로 읽힐 수 있는 이야기의 세부사항, 부속물, 대상, 인물, 장소, 플롯의 점진적인 창조과정에 지배당하고, 잘못된 예측을 유도하는 지연, 속임수, 수수께끼를 경유하면서 의미에 도달해간다. 이같이 피터 브룩스는 이것을 페티시즘과 관련하여 노출증과 관음증이 문학 텍스트와 독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확신한다.

 

결국 이같은 앎을 향한 충동’, 혹은 지식 애호증에는 성애적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롤랑 바르트S/Z에서 이것을 지연 공간(dilatory space)’으로 부르면서 텍스트의 중간본질이라 하기도 했는데, 도착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지연시키거나 후퇴시킴으로써 지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독자는 단지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텍스트를 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동(情動)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무엇들, 즉 사전쾌락은 소설의 미학적 형식의 중추라는 것이다. 인용되고 있는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에서 로돌프가 엠마를 최초의 성관계로 유도하는 한 장면은 명쾌한 사례가 되어준다.

 

그러나 그녀의 옷이 너무 길어서 옷자락을 뒤쪽으로 들어 올리고 걸어도 여전히 거치적거렸다.

그래서 로돌프는 그녀를 뒤따라가면서 그 까만 나사 옷자락과 까만 반장화 사이로 엿보이는

우아한 흰 양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왠지 그녀의 나체를 연상시키는 느낌이었다.” (P 55)

 

이 짧은 페티시즘적 문장은 소설의 독해과정을 오롯이 담고 있는데, 엠마 보바리는 한 인간이라는 통일체가 아닌 물신화된 부속물, 조각난 응시와 의식의 매혹적인 대상으로만 나타난다. 엠마가 하나의 통일체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가 전체성이 없는 존재이며 비논리적인 욕망 덩어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텍스트의 결말을 향해가려는 독자를 채근하며, 소설의 알레고리를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임을 우리는 읽어 내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러한 강렬한 섹시함을 느꼈던 이언 매큐언의 『넛셸』이 떠오르는데 ' 마치 영원한 전희(前戱)만 있는 쾌락의 정원 같기만 하다.'고 감상을 썼던 기억이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전쾌락이 형식주의적 미학의 기능을 함의하고 있음은 지식의 탐구가, 그리고 허구적 이야기의 직조가 실제로 관음증적인 동시에 지식애호증적이라는 인간 욕망의 본질이 투영되고 있음의 무의식적이거나 불가결한 반영일 것이다. 이것이 내러티브의 힘일 것이다.

 

2. 전이(轉移)와 내러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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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와 내러티브는 이 저술, 정신분석을 토대로 하는 문학비평의 중심을 관통하는 내용일 듯하다. “정신분석은 내러티브에 대한 학문이라한 프로이트의 말처럼, 문학 작품의 텍스트란 환자와 분석가가 주고받는 대화의 진척에 따라 점진적으로 완결되어가는 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어떤 결말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완전한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 이야기의 여정은 마치 비틀리고, 기억의 단락이 있으며, 연대기적 진행의 불가해한 모순, 억압된 소재를 비밀리에 보존하는 은폐된 기억으로 가득한 정신분석 피분석자의 비일관적인 내러티브를 반복, 심화시켜가며 일관성을 지닌 완전함으로 가는 것과 같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있는 무수한 분석사례에는 환자의 기억을 구조화하고, 불완전한 것을 다시 반복 요청함으로써 완전한 내러티브로 재현해 나가는 의사와 환자, 청자와 화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있다. 이때 의사, 청자 혹은 독자는 자신이 점유한 장소를 텅 빈 장소로 제공함으로써 화자 또는 발화된 내러티브의 욕망이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우리는 책읽기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자의 욕망을 우리들의 욕망으로 현실화 시키곤 한다. 즉 인식의 변화, 확장, 삶의 충일함을 더하게 된다.

 

그런데 전이는 텍스트와 독자, 텍스트내 서술자와 수신자 사이의 대화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텍스트 구성의 주도권 장악, 또는 이를 통제하려는 싸움이기도 하다. 우선 독자와 텍스트의 관계에서 전이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거부되거나, 혹은 실패한다면 그 독자는 언제나 동일한 텍스트만을 읽게 되거나, 독아론적인 해석만을 실천하는 데 그칠 것이다. 구태여 소설을 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책을 읽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욕망의 되먹임도, 변화의 움직임도 없는, 아무런 전이도 없는 그런 독서 행위가 경계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연유일 것이다.

 

한편 텍스트 내 화자와 청자, 서술자와 수신자 사이의 관계에서 전이가 발생시키는 변화의 다양한 양상을 목격 할 수 있는데, 발자크의 소설 아듀처럼 청자가 개입하여 화자의 과거를 재현하여 현재의 결과를 고쳐 쓰려 할 경우 발생하는 재앙적 효과의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가하면,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과 같은 내러티브에 전이의 반복적 상호 되먹임의 복잡한 작동 방식을 통해 별도의 이야기(액자 이야기)에 품고 있는 욕망의 전형을 발견하게도 한다.

 

3. : 기억과 욕망

 

이야기, 내러티브란 일관성과 이해를 원하는 본질적인 심리적 요구에 따라 사람들이 인식하고 작동시키는 정신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소설의 창작과 그것을 읽는 행위는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내러티브의 충동은 우리 존재가 육체와 시간 속에 있다는 인간적 진실에 대응하기 위한 본능적 시도라는 점이다.

 

내 소박한 기억의 일화도 어쩌면 내러티브 충동의 일면에 닿는 것 같아 그 이야기의 한 토막도 맞춤일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면 누구나 마주하는 일인데, 하나의 책이 또 하나의 책으로 이어지게 하는 책 읽기의 연상작용을 생각하던 끝에 불현 듯 열네 살 소년이었던 시절의 기억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종로 2가에 있던 대형서점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향하던 내 어린 모습과 책을 사려고 차비를 아끼며 모은 돈으로 벼르고 별렀던 책을 사던 전경이다.

 

그리 특이할 것 없는 옛 기억이지만 당시에 이 과정을 잠시 기록으로 옮겨놓았었는데, 그 내용이 온통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호기심과 소유와 인정의 욕망들이 빼곡했다. 이것은 백일몽, 회상 또는 환상이 지닌 재현 행위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세 개의 시간대를 꿰뚫고 개인이 품고 있는 어떤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상황임을 지적하는 정신분석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었다는 발견이랄 수 있다. 아마 아래의 인용문장은 이처럼 인간의 기억, 정신에 내재된 것의 성찰(정신 분석)이란 것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이해를 선사하는지 충분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정신분석은 문학 분석에 이용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은 유난히 스스로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상호텍스트다.

정신분석은 두 가지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 사고함에 따라, 정신이 현실을 다시금 형식화하는 방법,

그리고 우리가 꿈을 꾸거나, 욕망을 가지거나, 해석을 하거나,

무엇보다 자기를 인간 주체로서 구성할 때 필요한 허구를 만드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이와같은 이해의 토대를 견고하게 하면서도 복잡화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P 71)

 

정신분석은 허구적 작품들이 발생시키는 의미작용에서 보다 심층적 층위를 탐구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문학의 구조 역시 정신의 구조라는 말처럼 문학작품이 심리적 장치로서 정신의 경제적, 역동적인 조직을 설계하는 구조화 과정임을 이해할 때 정신분석 비평은 당위성을 지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은 문학작품에 대한 정신분석 비평이 무엇을 발견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 설명이자 또한 문학비평이기도 하다. 즉 정신분석적 지식을 갖춘 문학비평이 인간주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어떻게 사용되는지, 특히 문학 텍스트의 형식과 욕망의 상호작용, 내러티브의 구성과 재현 방식에 내재된 욕망의 힘에 대한 이해, 이야기로서의 문학작품이 지닌 삶의 경험 전달과 변화를 유인하는 역할의 설명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본적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임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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