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 쓴 한국근대사
강만길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의병
나는 ‘의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서 용감히 싸우신 분들. 그분들이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처음으로 자세히 봤던 것 같다. 후반기를 대략 6개월로 잡고 전투 횟수를 생각해보면, 하루에 10번을 싸웠다는 말이다. 전국적으로 여러 조직이 각개전투를 했다는 걸 고려해도 한 집단이 삼시세끼 밥 먹듯이 아니면 하루에 꼭 한 번은 일본과 싸웠다는 뜻인데 이게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이었을까. 나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너무 쉽게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했던과는 달리 전국민이 들고 일어난 대항쟁이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움과 감동을 느꼈다. 비록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이 정도의 저항정신이라면 우리는 어디서든 살아남을 것이다.


#열강들이 사회진화론
당시 민중을 계몽해야 한다는 계몽운동의 오류를 이 책을 통해 정확히 알게 된 것 같다. 당시의 사람들도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에 경계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사상의 바탕 위에 있는 배움이라면 우리는 철저히 경계했어야 했다. 이걸 깨닫지 못한 자들이 바로 이완용 같은 인간들이다. 열강들의 제국주의 사상에 의해 많은 나라들이 고통을 겪는 역사를 걸었고, 우리도 그릇된 사상으로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역사를 만들었다. 앞으로 나도 이런 점을 경계하고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읽겠다고 생각했다.


#국문소설의 발달
한문소설보다 서민층을 대변하는 국문소설의 발달 부분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17세기 말에서 18세기경에 얼마나 많은 소설들이 나왔으면 현재까지도 6백여 종의 작품들이 살아남았을까를 생각하니 가슴 벅찼다. 전에 읽었던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의 <설득>이 1817년 작품이고 그녀의 주요작품들이 대부분 19세기에 쓰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홍길동전(1612) / 구운몽(1687) / 춘향전 (18세기경 판소리형태로 창작)이 그보다 앞선 시기에 쓰였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영국의 문학도 17세기 말부터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고 하는데, 그것과 우리의 문학발전 시기가 다르지 않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책의 유통에서도 방각본(상업적 이윤을 목표로 출간된 소설을 뜻함)이 등장하고 세책집(도서대여점)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조선의 문학 문화가 얼마나 융성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조선 후기의 소설에는 당시의 야담 · 민담 · 설화 등을 작품화한 것이 많았다. 조선의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하여 창작되기도 했지만 그중에는 중국소설의 번안물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저술된 소설들 가운데 대략 6백여종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소설문학이 풍성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P205)

한일 ‘합방‘이 임박한 1908년에서 1909년 사이에는 의병 참가 인원수가 급증했고 일본군과의 전투 횟수도 많아졌다. 대한제국 정부 경무국의 조사에 의하면 1908년 후반기에만도 의병과 일본군의 접전 횟수는 1900여회나 되었고, 참가 의병 수도 약 8만 3천명에 이르렀다. ‘합방‘ 전해인 1909년 전반기에는 1700여회의 접전에 3만 8천여명이 참가했다.
또한 1906년에서 1911년까지 6년 사이에 일본 경찰을 제외한 정규 일본군과의 접전 횟수만도 2800여회에 이르렀고, 참가 의병의 연인원수는 약 14만명이나 되었다. 해산 당시 대한제국 정부군 총 수가 8800명에 불과했는데 민병인 의병에 참가한 사람의 수는 14만명이나 되었으며, 1907년부터 1909년 사이에 그 가운데 약 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P288)

1859년 영국 생물학자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이후, 이 학설은 곧 사회사상으로 변모했고, 생존경쟁 · 적자생존 · 자연도태에 관한 생물학의 이론이 인간사회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 이 시기의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을 통해 각 민족이 생존을 경쟁하고 제국주의가 팽배하는 상황에 대한 논리적 설명의 근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사회진화론은 밖으로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인종간의 대립을 강조하는 제국주의적 침략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안으로는 민족 내부의 일반 민중을 미개한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일면이 있었다. 이런 논리에 빠진 개화기의 일부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를 위해 투쟁하는 기본단위를 민족보다 인종 내지 종족에서 찾고자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과 중국 · 일본 등 세 나라 황인종이 협력하여 백인종과의 투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사회 진화론은 또 일제 침략의 이론적 도구로 전용되지도 했고, 국내 민중을 약자로만 보거나 계몽의 대상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한 면이 있다.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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