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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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의 농담들 그리고 농담 같은 인생.


#공허
그때도 지금도 달라진 게 없는 공허함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사랑의 갈증에 목말라 허덕이던 난 생명의 샘물을 맞이하고 한동안은 기뻐했지. 하지만 흥청망청 다 마셔버린 후 나에게 남은 건 또다시 찾아온 공허함 뿐. 어떻게 이 반복을 끊을 수 있을까. 아니 혹시 공허함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그게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나인가.


[P18 ˝변질된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똑같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고, 서로 비슷하게 닮아서 그 둘을 혼동하기보다 더 쉬운 건 없죠.˝]


#사랑, 증오
사랑의 다양한 군상을 볼 수 있었던 소설. 사랑은 개인의 성향과 사회 이념들이 뒤섞여 여러 형태를 띠며 나타난다. 그래서 소설 속 인물들의 신념이 사랑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사랑이 인물의 신념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중에서 난 루드비크의 모습에 많이 공감되고 아팠다. 루드비크가 느꼈을 배신과 상처가 예전의 나를 떠올리게 했던 것 같다. 루드비크의 상처는 결국 분노와 증오로 얼룩지게 되는데, 그런 그에게 코스트카는 이렇게 말한다. [ P404 ˝당신은 그것이 말할 수 없이 부당한 처사라는 확신에 사로잡혀서 격렬하게 분노했지요. 그 부당함에 대한 원한이 오늘날까지도 당신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고 있어요.˝] 서른이 넘어서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너무 확신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를 둘러싼 부당함이 단지 나를 위해 만들어진 부당함인가? 주변을 둘러보면 더 힘들고, 더 외롭고, 더 소외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난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사랑이 나에게 어떤 의미이며 나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지를.


#제마네크
정말 한 대 패주고 싶다.


#아쉬움
소설에서 루치에의 감정을 좀 더 다루어 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가장 작고 연약한 존재의 그녀. 나는 그런 그녀가 어떤 생각은 하고 있는지 루드비크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다 사라지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아마 작가도 모를 감정이었겠지...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꼭 듣고 싶겠지만 만나지는 못 할 것 같다. 그녀를 보면 슬퍼질테니까.


나를 둘러싼 것들을 이해하는 날이 과연 찾아올까?

P525
루치에와 나, 우리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세계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던 까닭으로 우리는 거기에 등을 돌렸고, 그리하여 그 세계의 불행과 우리 자신의 불행을 다같이 악화시키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러나 정말 제대로 사랑하지는 못한 루치에, 네가 여러 해가 지난 뒤 나에게 와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인가? 유린된 세계에 대한 연민을 청원하러 온 것인가?

P456
어떤 사람들은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을 외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에 반대하여, 우리는 개별자로서만 개개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타당한 주장을 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며, 사랑에 대한 그 말이 증오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 된다고 덧붙이고 싶다.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 중략 ...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인간은 이 분노의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안다.) 가라앉히고자 할 때 결국 분노를 한 개인에게만 집중시킬 수 밖에 없는 법이다.
나의 공포는 거기에서 온다. 이제 제마네크는 언제든 자신이 변했음을 선언할 수 있고, 내게 용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끔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무어라 말할 것인가?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그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중략 ... 나는 그를 반드시 증오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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