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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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작업이라······ 클라리스 스탈링은 이번 건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 아닐지를 영민한 비글처럼 가늠해봤다. 어떤 일거리가 될 것인지는 대충 짐작이 됐다. 미가공 데이터를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에 입력하는 고되고 단조로운 작업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떤 직무로든 행동과학부에 들어가 근무하는 건 구미가 당겼지만 비서 업무에 한정된 일을 맡게 된 여성 요원이 결국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뻔했다. 퇴직하는 날까지 그런 일만 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잘 선택하고 싶었다. (p.14)

 

“한니발 렉터는 아주 조심해서 다뤄야 해. 수감소장 칠턴 박사는 자네가 렉터를 상대하면서 취하게 될 실직적 절차 하나하나를 걸고넘어지려 할 거야. 그러니 정도를 벗어나지 마. 어떤 이유로든 한 치도 벗어나면 안 돼. 렉터가 자네에게 말을 건다면 그건 그가 자네에 대해 알아내려고 한다는 뜻이다. 뱀이 새 둥지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종류의 호기심이지. 그자와 면담하면서 약간씩은 정보를 주고받겠지만 그자에게 자네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주지 마. 자네에 관한 개인적인 사실들을 그가 머릿속에 담아두지 못하게 해야 해. 그자가 윌 그레이엄 요원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자네도 잘 알 거야.” (p.19)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니야, 스탈링 수사관. 내가 그 일을 일어나게 만든 거지. 나를 외부 조건에 이런저런 영향을 받은 존재로 평가 절하할 생각 마. 당신은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을 포기하고 행동주의자들의 학설을 따르기로 한 것 같군, 스탈링 수사관. 당신은 도덕적 존엄성이라는 잣대로 모든 이를 평가하지만,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도덕적 존엄성의 결여 때문만은 아니야. 날 봐, 스탈링 수사관. 나를 악하다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악한가, 스탈링 수사관?” (p.46)

 

저장통에 든 건 턱 바로 밑에서 깔끔하게 잘린 머리였다. 보존액인 알코올 성분 때문에 이미 오래전에 희뿌옇게 된 두 눈이 스탈링을 마주 봤다. 입은 벌어졌고 거의 회색이 된 혀가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머리는 저장기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수년에 걸쳐 알코올이 증발하면서 공기에 노출된 정수리 부분은 부패가 진행중이었다. 얼굴은 올빼미처럼 제 몸을 내려다보면서 동시에 스탈링을 멍하니 쳐다봤다. 손전등 불빛을 아무리 비춰봐도 저장기 속 머리통은 죽은 채 말이 없었다. (p.99)

 

 

 

살가죽이 벗겨진 채 유기된 젊은 여성의 시선 여섯 구에서 검은마녀나방이 발견됐다. 이 연쇄 살인 사건에 투입된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은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볼티모어 주립 정신질환 범죄자 수감소로 향한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한니발 렉터’의 감방. 자신의 환자 아홉 명을 살해하고 그들의 인육을 먹은 그로테스크한 행동으로 수감된 그는 전직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다. 스탈링은 그와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며 연쇄 살인 사건의 진실에 서서히 가까워진다.

 

 

양들의 침묵?!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수없이 많이 들어봤다. 책으로도 영화로도 하지만 이렇게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왜? 책이 출판되었을 당시에는 내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고, 영화가 개봉할 때는 내가 너무 어렸으니까. 뭐, 대충은 알고 있다. 한니발이라는 잔인한 살인마가 나온다는 것 정도? 진짜 무섭고 끔찍하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그래서 아직 안 읽은 걸까. 사실 읽기 전부터 겁을 좀 먹었더랬다. 나란 여자, 무서운 걸 너무 싫어하니까. 근데 꼬박 다 읽어냈다. 누가 그랬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아니다, 이번에는 틀렸다. 십 수년이 지나서도 그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내가 바로 범죄 스릴러의 교과서다’ 하고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보인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렉터 박사와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스탈링의 밀고 당기는 심리전에 긴장감이 솟구쳐 오른다. 숨막히는 추리와 폭발적인 반전, 소름끼치는 차가운 문장들이 문학적 공포를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세월이 무어냐,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어찌나 흡입력이 좋던지, 정말 순식간에 빨려들어간다. 그야말로 시간순삭! 그 공포가 뇌리에서 박혀 떠나질 않는다. 혀를 내두를 정도! 마지막 장 638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쉴 틈이 없다. 지금부터 정주행,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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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의 발견 - 오늘부터 가볍게 시작하는 일상 우울 대처법
홋시 지음, 정지영 옮김 / 블랙피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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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좋든 싫든, 습관에 속박된 존재다. 우울증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불행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부정적인 습관에 사로잡히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매일 잠이 오지 않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습관이다. 그러니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바꾸어보자. 습관을 만드는 요령은 ‘오늘만 해보자!’라고 의식하는 것이다. 하고 싶지 않아도 일단 오늘만 한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한다. 내일이 되면 또 오늘만 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오늘만 하는 일에 대해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다 보면 지속할 수 있다. 그것이 습관이다. (p.40)

 

우울증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많아서, 전문가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도대체 어느 쪽이 옳은지 몰라서 헤매다 보면 오히려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으므로 몰라도 되는 것은 모르는 편이 낫다. 이를테면, 정신과 의사 중에서도 항우울제를 먹어야 한다는 사람과 먹지 않는 편지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는 듯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헷갈린다. 이때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내가 들어야 할 것은 내 주치의의 의견이며, 일면식도 없는 책 속 정신과 의사의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인데,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좋지 않다. 전부 참고하는 정도로 끝내야 한다. (p.89)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항우울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그렇지만 약만 먹으면 된다고 굳게 믿어서는 안 된다. 다른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지나치게 약에 의존하면 우울증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 상태가 좋아져도 약 때문이고, 나빠져도 약 때문이며, 본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믿고 싶은 마음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생활습관은 약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본인이 아무 노력도 안 하는데 좋아질 리가 없다. 항우울제를 무조건 부정해서도 안 되고, 무조건 믿어서도 안 된다.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요소로 생각하고 스스로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다지자. (p.99)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자신이 정한 기준으로 타인을 계속 이겨야 한다. 그것은 정말로 괴로운 일이다. 나는 행복을 느끼는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다음 세 가지 일에서 행복을 느낀다.

 

· 독서

· 블로그에 정보를 올려서 알리는 일

· 개와 노는 일

 

이런 일에 다른 사람과의 경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즐기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자기 기준의 행복을 정해두면 경쟁 사회에 뛰어들어도 견딜 수 있다. 그곳에서 스트레스가 쌓여도 ‘나에게는 이런 행복이 있어’라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p.148)

 

 

 

 

 

흔히 “약을 먹고 자고 일어나면 우울증은 낫는다”라고들 한다. 저자도 줄곧 이 말을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더니 분명 조금은 좋아졌다. 하지만 잠만 자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이전의 호흡만 하는 생명체에서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있었지만 가족과 대화하거나 밖에 나가서 쇼핑하는 일, 하물며 회사에 복직하는 일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약으로 좋아질 수는 있지만, 약간 호전되는 정도구나.” 이것의 저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약만으로는 자신의 병을 완전히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한 저자는 우울증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것부터 일반적으로 안 하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일까지, 뭐든 다 해봤다. 시도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생각으로 정말 여러 가지 방법을 실행했다. 그 결과 여전히, 밖에 있는 시간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지만 예전만큼 우울하지는 않다. 4년 전에 우울증에 걸리고, 현재는 안정되어 증상이 거의 없어졌다.

 

어제도 우울했는데 오늘도 기분 꿀꿀한 당신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쉬운 기분 전환법! 《기분의 발견》은 우울한 감정을 정리하고 기분 좋아지기 위해, 저자가 직접 시도해본 33가지 방법을 담은 책이다. 저자가 4년간 앓아온 우울증을 끝내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듯,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루빨리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난 경험을 토대로 우울증에 효과가 있었던 일과 없었던 일을 정리하여 이 책에 담았다. 직접 겪어본 사람은 알테지만, 우울증에 걸렸을 때 가장 괴로운 점은 증상 자체보다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울증 경험자가 가까이에 없으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밖에. 정보는 인터넷에 수없이 넘쳐나지만, 정작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정리된 정보는 거의 없다. 이 책에는 일상에서도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우울증 대처법이 가득하다. 저자가 지금까지 실천해온 우울 증상의 대처법은 총 33가지. 반려동물, 허브티, 취미에 몰두, 유튜브 시청, 잠자기, 단것 줄이기, 심호흡, 트위터, 산책, 상담, 독서, 여행 등 정말 각양각색! 모두 어렵지 않은 일이라 우울증으로 고통받으면서 자신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싶다. 하지만 주의할 것! 우울증에는 어떤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증할 수 있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 나에게 맞지 않았던 방법이라도 맞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보면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길 바란다. 경험상 증상이 미미하면 별상관이야 없겠지만 그 반대라면 의사와의 상담은 필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나을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기분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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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김종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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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가운데 마음을 움직이는 꽃은 목련이다. 지는 벚꽃은 화려하지만 목련에는 좀 더 단순한 슬픔이 있다. 떨어지는 꽃의 무거운 중량감 때문일 것이다. 무거운 꽃송이가, 단두대 위에서 잘리는 무엇같이 툭, 하고 떨어진다. 흙먼지에 쉽게 더러워지고 뭉개지는 꽃잎을 보는 일은 자못 서늘하기까지 하다. 처음 목련의 매력을 느낀 때는 꽃을 피우는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툭, 하고 떨어지고 뭉개지는 꽃잎을 보고 난 이후였다. 그다음 해에야 꽃을 피우는 목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p.12)

 

한 시간 후 나는 어느 작은 숲길에 있었다. 깊은 그림자가 드리운 숲 안에서 잘게 부서져 들어오는 햇살들을 보고 있었다. 새들이 초현실적인 대화를 이어가고, 나는 거기서도 알아듣고 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느끼게 된다. 눈뿐만 아니라 귀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을. 새와 작은 벌레와 저 멀리 바다에서부터 시작된 바람과, 바람에 부딪히는 돌과 바람이 스치는 나무와 숲, 나의 숨소리, 그리고 가끔 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카카오톡 알림음. (p.58)

 

왈츠를 추는 여인들의 편안한 얼굴과 그 우아한 손끝이, 불안정했던 나의 마음을 잡아주었다. 검푸른 바다도 기억 그대로였다. 하지만 <여름밤>을 처음 보았던 그때 느꼈던 막연한 낙관은 모양을 달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여행에서 얻었던 어떤 것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그림을 보고 돌아오며, 나를 지나치고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잃어버렸지만 그림이 주는 위안은 그대로였다는 것,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들 때문에 위안은 더 깊어졌다는 것. 달빛에 의지한 여인들의 왈츠가 있는 그림은, 지금 여기에서의 남루한 재회로 인해 비로소 의미가 생겼다. (p.82)

 

내 보잘것없는 작업들이 가진 큰 의미는, 내가 스쳐간 그 많은 순간들을 다른 방식들로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세팅되지 않은 채 거리와 그 거리의 사람들 앞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가끔 기막힌 우연이 그 공간에 들어오는 기적을 만난다. 나는 그렇게 그 장소의 한 시절을 영화의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p.110)

 

 

 

이 책은 2012년 출간했던 저자의 첫 책 『사라지고 있습니까』의 개정증보판이다. 1부에서 4부까지 이어지는 글들은 『사라지고 있습니까』에 담겼던 대략 십 년 전에 쓴 글들이다. 십 년 전의 상태에서 그 전의 기억과 감정을 이야기했다. 십 년 동안 조금은 바뀐 것들이 있다. 계절은 매번 같은 얼굴로 찾아오지만 거리와 사람들 몇은 사라지고 모습을 달리하기도 했다. 그동안 저자가 살고 있는 거리도 바뀌었다. 십여 년 전까지는 이문동에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효자동에 살고 있다. 살고 있는 동네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사소한 변화는 5부에 담아 놓았다. 그리고 6부에서는 안소희 주연의 <하코다테에서 안녕>과 아이유 주연의 <밤을 걷다> 시나리오를 담아냈다. <더 테이블>, <최악의 하루>, <조금만 더 가까이> 영화감독 김종관이 눈과 마음으로 기록한 어쩌면 잊혀질지도 모를 순간들.

 

창작이 정체된다고 느꼈던 시기, 저자는 에세이를 집필할 당시 십 년 전의 이야기와 현재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일상의 변화들을 차곡차곡 담아낸다. 글은 어둠침침하고 쓸쓸함이 묻어 있다. 마치 빛바랜 사진을 꺼내어 보듯 저자의 지난 기억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 그 거리, 그 사람 등등 그 기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곳저곳에 많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글과 그 글들 사이로 간간히 드러나는 사진에 찰나의 순간을 가두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저자를 따라 천천히 거닐다 보니 어느샌가 끝에 다다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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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온 - 잔혹범죄 수사관 도도 히나코
나이토 료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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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지금도 그는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치고 싶어진다. 어째서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긴 것일까. 얼마나 무섭고 아프고 괴로웠을까. 사건의 참상에 평정을 잃고, 악마의 소행을 멈출 수 없었던 자신을 후회한다. 물론 그는 그 일에 아무 관련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몸 속 깊은 곳, 어딘가 알 수 없는 장소에서 부글부글 분노가 끓어올랐다. 두 눈동자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아이 대신 눈물이 흘러넘쳤다. 그의 눈구멍에는, 붉은 녹이 슨 계단 아래 더러운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 있던 딸기 캔디 한 알이, 그 뒤로 계속해서 저주처럼 박혀 있었다. (p.7)

 

저도 모르게 지른 자신의 비명에 놀라서, 히나코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네 평쯤 되는 일본식 방에는 남자가 드러누운 채 죽어 있었다. 크게 벌어진 눈은 허옇게 흐려져 부어오른 얼굴에서 튀어나올 듯 올라와 있었고, 몸의 구멍이라는 구멍 모두에서 검붉은 체액이 흘러나와 있었다. 입에는 뭔가 천 같은 것이 쑤셔 넣어져 있었다. 복장은 몹시 흐트러져서 상반신은 거의 벗은 상태에 알몸인 하반신은 피투성이였으며, 옆에는 피 묻은 커다란 술병과 커터 나이프가 떨어져 있었다. (p.27)

 

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간 씨가 사진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히나코의 눈에서 둑이 터지듯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영정사진 속에서 밝게 웃는 사나에의 얼굴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미야하라가 저지른 너무나도 강렬한 악의에 마음이 흔들렸다. 눈물 때문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던 노비 선생, 아니 나카지마 다모쓰의 기분을 뒤늦게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p.62)

 

“이게 오늘 밤 영상입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독방에 있다. 영상을 본 히나토의 인상은 딱 그것이었다. 식사 중이던 사메지마는 갑자기 국그릇을 떨어뜨리더니 누군가에게 가슴을 걷어차인 것처럼 바닥에 쓰러졌고, 벽 쪽으로 질질 끌려가서 얼굴을 벽에 부딪쳤다.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움켜쥐고, 혼신의 힘을 다해 벽을 들이받는다. 마치 괴력을 지닌 뭔가가 사메지마의 팔에 깃들어 있는 듯했다. (p.85)

 

 

 

갓 형사과에 입사하여 서류 정리 업무를 맡은 신참 형사 도도 히나코. 오후 8시를 넘길 무렵, 형사부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히나코는 차 당번이라 자리를 떠나 있어 ‘간 씨’라고 불리는 베테랑 형사, 아쓰타 이와오가 수화기를 들었다. "미야하라 아키오...!" 히나코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의 데이터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미야하라 아키오, 1983년 6월 아키루노 시 출생. 스토커, 강제외설 혐의 등으로 세 번 검거된 경력 있음. 2006년 3월과 6월, 2007년 5월. 2009년 12월에는 부녀자 폭행 용의자로 체포되었지만 피해자가 신고를 취하해서 석방." 그는 자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현장에 들어선 순간 폐에 달라붙는 듯한 악취가 났다. 곰팡내 같은, 분뇨 같은, 피 같은, 토사물 같은 견디기 힘든 냄새가 서서히 몸에 달라붙었다. 발견한 사체는 잔혹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목이 졸린 흔적과 크게 벌어진 눈, 온몸의 구멍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 속옷으로 막혀진 입. 그리고 그곳에 박혀 있는 커다란 병. 인간의 존엄 그 자체를 죽이려는 듯한 피도 눈물도 없는 속이 메슥거릴 정도의 광기 어린 시체. 놀랍게도 시체의 상태가 3년 전 미해결 사건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2010년 8월, 하치오지 니시 인터체인지 아래서 발견된 여자 고등학생의 교살 사체. 시신은 입 안이 속옷으로 막혀 있고, 그곳에 콜라병이 꽂혀 있었다. 감식을 끝낸 뒤 선배가 입을 열었다. "히나코, 이 녀석은 3년 전 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어" 보복 살인이 의심되지만 단서는 죽은 남자가 스스로 죽어가는 스마트폰 동영상뿐. 도대체 누구의 짓일까? 사건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는 사이 독방에 갇힌 연쇄 살인범이 스스로 머리를 박고 죽는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그 역시 첫 번째 사건과 같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어갔다. 게다가 자살장면이 담긴 교도소 CCTV 영상마저 인터넷에 유포된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과 같은 방식으로 죽어가는 범죄자들. 인터넷에 올라온 범죄자들의 자살장면이 담긴 동영상. 과연 그들의 죽음은 자살인가, 살인인가?!

 

 

저자의 데뷔작인 <온>은 일본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으면서 제21회 호러소설 대상 독자상을 수상했다. 이후 독특하고 매력적인 초보 형사 도도 히나코를 전면에 내세운 시리즈가 이어지고 있으며, 2014년에는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어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미해결 사건 파일 1, 2, 3! 등장부터 심상치 않다. 초보 형사 도도 히나코는 비상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아 무엇이든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는 특별한 기억력의 소유자다. 한문 쓰기가 미숙해 경찰 수첩에 조사 내용을 O나 X, 스마트폰, 트럭, 병, 단추, 안경 등의 기호나 그림으로 그리지만, 그 그림을 슬쩍 보기만 하면 그 당시의 대화 내용이 머릿속에 동영상처럼 재생된다. 괴짜 중의 괴짜! 하나코뿐만 아니라 그녀 주변의 동료들도 하나같이 특이하다. 덴디한 스타일의 베테랑 형사 간 씨, 언제나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선배 형사 쇼지, 모태 솔로 오타쿠이자 감식반 에이스 미키, 산 사람보다 죽은 시체를 더 사랑하는 돌싱 검사관 사신여사까지 모두들 끼가 다분하다. 이러니 푹 빠져들 수밖에. 충격적인 살인사건에 긴장하여 몸이 움츠러들었다가, 사건 피해자의 이야기에 분노하였다가도 이들의 모습에 피시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흥미진진! 예측불가!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인간이 저렇게 끔찍한 방법으로 죽다니. 정말 살벌하게 무섭다. 그런데 계속 안 읽을 수가 없다는 거! 이 사건들은 과연 살인일까, 아니면 자살일까? 궁금하다면 직접 확인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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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 - 오늘을 견디는 법과 파도를 넘는 법
김승주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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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에 오르면서 이 거대한 선박에 압도되었던 첫날을 기억한다. 먼 곳을 향해 떠나는 밤바다 위에 섰던 날의 마음은 복잡했다. 들뜨기도, 두렵기도 했으며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했다. 어느새 눈가를 적신 눈물의 의미도 모른 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거라면 땅으로는 이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될 텐데. 육지를 완전히 벗어나 온통 물뿐인 대양 한가운데 선 나는 더는 약해져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삶의 터전이며 생존을 위한 격전지니까. (p.26)

 

‘나는 강해졌을까?’

‘나는 강해지고 있는 걸까?’

나에게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다. 두려운 만큼, 외로운 만큼 잘 견뎌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육지를 떠나 있으면 소중한 것에 대한 의미가 새로워진다. 사회적 배경, 재력, 남자, 스펙 따위는 아무짝에 쓸모없다. 가장 그리운 건, 땅이다. 그리고 그 땅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뿐이다. 당장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이란 게. (p.43)

 

우유부단한 나의 성격이 바다 위에서는 치명적인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날이었다. 바닷길은 차가 다니는 도로, 즉 육지와는 확연히 다르다. 눈앞에 아무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수면이 전부다. 비교하자면 도로에 노란 선, 흰 선, 신호등, 표지판 없이 검은색 아스팔트만 있는 셈이다. 정답은 없다. 오른쪽으로 피하든 왼쪽으로 피하든 잠시 속도를 줄였다 가든 충돌을 피하기만 하면 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위험이 감지된 순간 결정을 빨리 내리는 것. 일단 결정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면 길은 계속 이어져 있고, 이내 다음 갈 길이 보인다. (p.49)

 

소중한 사람을 볼 수 없고 제한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배 타는 삶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지내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감사하다. 육지에서의 시간이 남들보다 훨씬 짧기 때문에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일분일초 모두 헛되이 흘려보낼 수 없는 귀한 순간들.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하게 되고 부지런해진다. 하고 싶은 일에 과감히 도전하게 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고 감사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p.111)

 

목표가 없어도, 꿈이 없어도 좋다. 그리고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눈앞에 놓인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일이 보였다. 그때 바로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도.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배에서 석양이 지는 붉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배를 타고 있는 이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항해사로서 배를 타고 있는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는 최선을 다했다. 만족한다. 그리고 계속 최선을 다할 것이다. (p.166)

 

 

이 책은 바다를 유영하는 스물일곱 항해사의 이야기다.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별반 다를 것 없는 각박한 현실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흔들리는, 아직은 인생에 서툰 항해사의 일상을 담았다. 현재 27,799톤 그러니까 3만 톤의 컨테이너선을 운항 중인 그녀는 장애물 하나 없는 바닷길을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일 년의 절반을 배에 갇힌 채 살아간다. 오로지 바다, 바다, 바다만을 바라보는 동안 외로움이 도둑처럼 몰려온다. 나는 왜 항해사가 되었을까 하는 끊이지 않는 질문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바다라는 거대한 존재의 위압감까지. 땅과 바다, 서로 머무는 곳은 다를지라도 고뇌의 뿌리는 같았다. 저자는 대학을 졸업한 후 스물네 살의 나이에 바로 3만 톤의 배를 운항해야 한다는 압박감, 책임감과 마주했다. 그 무게 앞에서 두렵지만 맹렬히 맞섰다. 두렵지 않다면 도전이 아니니까. 아니 도망칠 수 없었기에 맹렬한 기세로 뛰어올랐다.

 

항해사?! 실상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흥미로웠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다 놓은 느낌? 읽으면 읽을수록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도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길을 스스로 개척해 홀연히 나아가는 저자의 모습이 너무나 경이로웠다.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바다의 세계. 육지도 아닌 망망대해 바다 위에서, 하나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 한 순간 내린 선택이 자칫하면 목숨과도 직결되는 커다란 배 위에서, 선원 중 유일하게 혼자 여성이라는 상황속에서 저자는 삶을 억지로 극복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순응하며 다시 나아갈 길이 열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이런 저자의 삶은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지 있는 곳이 다를 뿐. 저자는 알고 있다. 조금 느리고 서툴러도 자신만 믿으면 언젠가는 이 파도가 지나간다는 사실을.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시련에 지금은 미칠듯이 힘들고 괴로워도 나만의 속도로 묵묵히 버티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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