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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그리고 이번에는 <재일(在日)한국인> 즉 <재일교포>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원래 일본에서 <재일교포>란 것은 없었고 <도래인(渡來人-주로 5세기에서 6세기 중기에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이 부르는 이름으로, 특히 4세기말에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한반도가 전란(戰亂)의 상황으로 빠지게 되자 도래인이 급증했다. 그래서 그 도래인으로 인해서 선진문물이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환영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의 개념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이름 자체를 붙여서 구분지을 필요가 없었다. 즉, 일본이란 나라 자체가 한반도인들이 만든 나라였기 때문에, 그래서 당연히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였지만, 그러나 역시 앞에서 소개했던 대로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본이 조금씩 자각을 하면서 정체성(正體性) 같은 것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때부터 일종의 국가(國家)의식이 강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또 역시, 1910년 경까지 일본에서 살고 있었던 한반도 사람들은 주로 유학생과 단기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특히 <단기노동자>들은 탄광이나, 철도 부설 공사 등에서 일을 했었는데, 그런데 1910년대부터 노동자들이 늘어나서 그 숫자가 1911년 말에는 2500명 정도였지만,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농민의 토지 수탈과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 경제의 급성장에 따른 노동력 수요의 증대에 의해서 그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그래서 <3.1운동> 바로 직후였던 1919년 4월에 일본은 <조선인 여행단속령>을 공포했고, 조선인의 일본 도항을 제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 일본 도항자는 더욱 늘어났고, 그래서 그때는 3만 명을 넘어섰고, 1930년대 말에는 30만 명을 넘어섰다. 그래서 또 1920년대에 이미 <동경>과 <오사카> 같은 대도시의 하천부지 등에 한국인의 집단거주지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대다수는 일용직 육체노동이나, 직공, 폐품 회수업, 볼트나 나사 등의 금속제조, 고무가공 등의 가내공업 규모의 제조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의 사람들은 그 집단거주지 내에서 조선식 식당이나, 식재료업, 또는 조선의 의료, 잡화점 등을 운영했는데, 그런데 또 1923년 9월 1일에 소위 <관동대지진>이 발생했고, 그래서 수많았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러자 또 일본인 특유의 <책임 전가> 또는 <제3자에의 복수> 또는 <막연한 분노> 등의 표현으로 그 피해에 대한 억울함을 <재일교포>들에게 풀었고, 그래서 또 당시에 <조선인(조센징 또는 센징)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 또는 <조센징들이 일본의 혼란을 틈타서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유언비가 돌기 시작했었는데, 그런데 그 말을 처음으로 퍼뜨렸던 수모자(首謀者)는 한때 경시청관방주사(警視廳官房主事)였고, 그 후에 요미우리신문사주(讀賣新聞社主)가 되었던 <쇼우리키마츠타로우(正力松太郞)>란 者였다.(이 부분에서는 본인이 쓴 관동대지진 참조. 그러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할 예정임) 그러자 일본의 청년회와 재향군인회, 소방단 등이 조직했던 소위 자경단(自警團)이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그래서 그 피해는 약 6300여 명(関東大震災犠牲同胞慰霊碑에서)이라고 알려졌는데, 그러나 또 당시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의 기관지(機關紙)였던 독립신문(獨立新聞-韓日强倂 前에 있었던 獨立新聞과는 다름)에 따르면, 6661명이라고 보고가 되었다.(金承學 等에 依한 自體 地震 調査團의 調査 結果-罹災同胞慰問團) 하지만 그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단지 233명이라고 발표했고, 그것은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대충 내놓았던 數値였다. 하지만 또 그 후에 <쇼우리키마츠타로우>가 자신이 거짓말 또는 최소 추측 기사를 흘렸음을 실토했던 것으로 한국인의 잘못은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일본인들이 그 유언비어에 속아서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또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이란 것이 만들어졌고, 이어서 1939년에 <국민징용령>이 공포됨에 따라서 조선에서의 군수물자와 노동력 동원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또 조선에서의 국민징용은 <모집의 형식> 또는 <관(官) 알선 형식> 또는 <징용 형식> 등의 형태로 적용되었는데, 하지만 결국은 일본의 강제에 의했던 것이었다. 그 결과 일본의 패망까지 탄광과 금속광산, 군수공장, 토건업, 항만운수 등에 끌려가서 강제노동으로 혹사당했던 조선인들은 100만 명이 넘었고, 1939년에 약 96만 명, 그리고 일본이 패망했을 때였던 1945년에는 200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에 갑작스러운 일본의 패망소식이 전해지자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은 서둘러서 귀국길에 올랐다. 그래서 <시모노세키>와 <하카다> 항구로 몰려들었는데, 하지만 또 그때는 일본 자체가 거의 무정부상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조선인 강제노동자들은 자력으로 배를 구해서 귀국하거나, 일본이 제공했던 귀환선을 이용해서 귀국길에 올랐는데, 그때 귀국자의 수는 약 140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또 그 중에는 <우키시마마루 호 폭침사건-이것 역시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할 본인이 쓴 우키시마마루폭침사건에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음> 같은 불행한 일이 생기기도 했었는데, 그러자 또 1946년 3월 당시에는 약 70만 명의 일본 잔류 인들 중에서 50만 명 이상이 귀국을 희망했다, 그러나 또 일본의 야비한 짓거리로 당시에 노동자들이 소지했던 재산과 물품의 반출을 제한했고, 거기다 한반도의 상황도 불안했던 점, 그리고 또 귀국해도 갈 곳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해서 귀국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또 1946년 말에 일본은 조선인들의 집단귀국을 종료했고, 그래서 그때까지 귀국을 망설였던 사람들과, 일단 귀국은 했었지만 그러나 고향에서 생활기반 등의 상실로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이 다시 일본으로 밀항했던 사람들이 주류가 되어서 역사적으로 현재의 <재일한국인>을 형성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잔류 재일 한국인>들은 당시 대량으로 해외에서 귀국했던 일본인들과 군수산업의 중단 등으로 인해서 일거리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용직 노동이나, 암시장, 막걸리 제조 등으로 연명해나갔고, 그래서 또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나, 일본에 남으나 생활에 별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종의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처음에는 <재일본조선인연맹>이란 조직의 결성으로 나타났다.(1945년 10월) 그리고는 일본 각지에 조선학교를 설립했고, 자신의 자녀들을 그곳에 보내서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 한국의 역사를 가르쳤다. 그런데 또 <연합국사령부(GHQ)>와 일본정부는 그들의 법적인 지위를 <해방인민(외국인)>으로 간주했던 한편, 동시에 <일본국민>이라고 이중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또 외국인의 자격으로 <외국인등록령>을 적용했으며, 그러나 또 일본국민으로 간주해서 그들의 자녀들을 일본학교에 취학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1948년 3월에는 <조선인학교>들에 폐쇄명령을 내렸는데, 그러자 또 <재일한국인>들은 그에 대항해서 <민족교육을 지키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阪神敎育鬪爭) 그러자 또 일본정부는 기동대를 조직해서 <조선학교>를 전면 폐쇄했고, 그곳에 다녔던 학생들 대부분을 강제로 일본학교로 전학조치했다. 그러자 또 <재일한국인>들은 그 운동을 계속했고, 그 결과 현재는 한국국적을 가진 한국인들의 자녀들은 주로 <동경한국학교(東京韓國學校)>와 <금강학원(金剛學院)> 그리고 <건국학교(建國學校)>와 <교토국제학원(京都國際學院)> 등의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북한국적(주로 조총련 계열)을 가진 사람들의 자녀들은 <조선대학교(朝鮮大學校)>를 포함한 <조선학교> 등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있다.

한편 또, 그 시기에 <재일한국인> 내부에서는 <일본의 민주주의 운동에 참가할 것인지?>의 여부, 정치적으로 <남북한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가?> 등을 두고 대립하게 되어 여러 조직이 생겨났다. 그래서 결국 1948년에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약칭 <민단(民團)>이, 1955년에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 약칭 <조총련(朝總聯)>이 만들어져서 일본에는 두 개의 대립하는 민족단체가 성립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조총련>은 <반미(反美)> <반요시다내각(反吉田內閣)> <反 이승만정권> 측에서 활동을 했고, <民團>은 한국에 지원병을 보내서 한국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1952년 4월에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의거해서 일본이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하자 <재일한국인>들은 일본국적을 상실했고, 그래서 그때부터 <외국인으로서 특별한 재류자격>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1965년 6월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자 <한일법적지위협정(韓日法的地位協定)>이 맺어졌고, 그래서 한국적을 가지고 영주를 신청하는 사람들에게는 <협정영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재일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그 <협정영주권>을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않은, 또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고, 북한을 정치적으로 지지했던 <조총련> 통칭 <조선적(朝鮮籍)> 동포들은 거의 후자에 속했다. 하지만 또 1982이 되자 그들 즉 <조선적> 동포들에게도 <특별영주권>이 인정되었고, 1991년에는 兩者 모두에게 <특별영주(特別永住)>라는 자격으로 일원화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1세대가 줄어드는 한편,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그래서 또 모국(母國)과의 연대의식이 희박한 제2, 제3세대가 늘어났다는 사실이 있었다. 그래서 또 1974년에 일본에서 태어났던 세대는 75%에 달했던 후, 현재까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1955년에 <북한>이 <재일한국인>들에게 <교육과 취직의 보증> <차별 없는 사회에서의 생활> <풍요로운 삶의 약속> 등으로 북한귀환을 제의했다. 그러자 <조총련>은 <귀국운동>을 일으켰고, 그러자 또 북한, 일본의 적십자사 간의 <재일조선인귀환협정>에 의거해서 1967년까지 약 8만 8600명의 <재일한국인>들이 <니이가타>에서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들은 소위 <동토(凍土)의 왕국(王國)>으로 스스로 들어갔던 것이었고, 그 뒤에 그곳을 다녀왔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서 아주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일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온갖 차별을 다 견디면서 자신들의 생활과 지위 향상에 힘써 왔다. 그러나 결국 외국인이라는 벽을 넘지는 못했고, 그래서 또 마치 <차별을 생산>하려는 듯한 일본정부의 태도에 의해서 그들은 <외국인등록증명서>를 항시 소지해야 하는 의무와 함께, 등록증명서의 기한을 연장할 때마다 지문날인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또 그 <지문날인의 채취>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는 범죄자에 한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재일한국인>들은 반대운동을 시작했고, 그러자 또 그에 호응하던 일본인들도 생겨나서 2000년도에 그것은 폐지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재일한국인> 청년이 대기업인 <히타치제작소(日立製作所)>에 합격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사가 취소되었는데, 그러자 또 그것은 <외국인에 대한 차별사건>으로 사회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중에 재판을 통해서 입사을 인정받았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또 <공영주택(公營住宅)의 입주차별철폐 운동> <변호사 자격증의 국적 조항 철폐 운동> 등을 통해서 <재일한국인>의 법적인 지위도 신장되었으며, 최근에는 일본의 공무원 채용조항 중에서 <일본인에게만 자격을 주는 외국인 차별조항 철폐 운동>과 <외국인에게 지방선거권 부여를 촉구하는 운동> 등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또 <재일한국인>들 중에서 2세, 3세들은 일본어를 배우고 컸던 세대였기 때문에, 일본의 여러 문화영역에서 다양한 작품이나, 공연 등을 해오면서 일본사회의 일원으로, 일본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 중에서 특히 <문학>을 들 수가 있는데, 일본 패전 전에는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다가와 상(芥川賞)>의 후보에 올랐던 <김사량(金史良)-빛 속에서(光の中に)>과 <장혁주(張赫宙-餓鬼道)> <김소운(金素雲-시인으로 朝鮮民謡集, 朝鮮童謡選. 朝鮮詩集 등)> 등이 일본문단에서 활약했었고, 전후(戰後)에는 <김달수(金達壽)> <김석범(金石範)> <이회성(李恢成)> 등이 등장함으로 해서 <재일한국인> 문학은 일본문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고 <김달수>는 <후예의 거리(後裔の街)> <현해탄(玄海灘)> <태백산(太白山)> 등의 작품으로 대표적인 戰後의 <재일한국인 작가>가 되었고 <일본의 조선문화(日本の中の朝鮮文化)> 시리즈를 집필해서 한국으로부터 도래한 문화를 조사하고 소개했다. 그리고 <김석범>은 <화산도(火山島)> 등의 작품을 통해서 제주도의 <4.3사건>을 조명했고 <이회성>은 <다듬이질을 하는 여자(砧をうつ女)>로 한국인 최초로 <아쿠다가와 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외에도 <김학영(金鶴泳)> <이양지(李良枝)> <유미리(柳美里)> <양석일(梁石日)> <현월(玄月)> <(김윤규(金胤奎-필명 다치하라마사아키)> <김봉웅(金峰雄- 필명 쓰카코헤이)> <미야모토도쿠죠(宮本徳蔵)> <조충래(이쥬인시즈카)> <가네시로가즈키(金城 一紀)> 같은 작가들은 민족문제나, 역사문제, 가족과 개인의 문제, 차별과 고독 등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시인으로서는 김시종(金詩鐘), 이정자(李正子) 등이 활약하고 있다.

그리고 또 영화의 분야에서는 <윤이네 거리(潤の街)>의 <김수길(金秀吉)>과 <김우선(金佑宣)> 그리고 <달은 어디에서 뜨는가(月はどっちに出ている)>의 <최양일(崔洋一)> 그리고 <재일(在日)>의 <오덕수(吳德洙)> <도강(渡り川)>의 <김덕철(金德哲)> 등이 있고, 연극분야에서는 <신주쿠양산박(新宿梁山泊)>의 <김수진(金守珍)> <파란세(波瀾世)>의 <김지석(金智石)> 그리고 <마당극>의 <고정자(高正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음악 분야에서도 많은 가수들이 활약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 중에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지 않고 활동하는 가수들도 많이 있고, 스포츠분야에서도 일본인들의 영웅으로 활약했던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을 비롯해서, 프로야구의 <가네다쇼이치(金田正一)> <장훈(張勳-하리모토이사오)>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프로축구나, 기타 스포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일한국인>들이 많이 있고, 바둑계에서도 조치훈(趙治勳)이 일본 최상급의 기사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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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河井繼之助


 

 2. 修養과 遊學의 時期

  2.1 誕生-靑年期

 이 회부터는 그에 관해서 소설 형식으로 소개한 것을 올리려 하는데
 잠시 쉬어가는 코너라고 생각하고 즐겁게 읽어주길 바랍니다.

 

  小說  河井繼之助

 

 < 탄생 >

 때는 '분세(文政)'10년(1827년)의 설날...
 양력으로는 1월 27일 새벽의 일이었습니다.

 '에치고(越後)'는 폭설에 감싸져서
 '나가오카번 마키노가(長岡藩牧野家)'의 성벽 아래는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새벽 4시가 되자 그러한 적막을 찢으며 갑작스런 아기의 울음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고, 그것은 또 바로 그 '카와이가(河井家)'의 대망이었던 적남(嫡男)이 자신의 탄생을 알렸던 첫 탄성(誕聲)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세상에 나온 후, 자신의 부모 중 어느 쪽을 닮았는지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그 용맹성답게 양손을 꽉 쥔 채로 열심히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부친 '다이우에몬(代右衛門)'은 32세.
 그의 어머니 '사다코(貞子)'는 24세였습니다.

 당시 '다이우에몬(代右衛門)'은 '나가오카 번'의 회계담당 책임자(長岡藩御勘定頭)였고
 120석을 받고 있었던 번사(藩士)로서, 온후한 성품과 풍류(風流)인으로 그곳에서는 알려져 있었습니다.

 “사다코, 수고했소.”

 그러자 '다이우에몬'도 몹시 기뻤던지
 표정까지 무너뜨리며 아내 '사다코'에게 이렇게 말을 하며 위로했습니다.

 “튼튼하게, 생겼나요?”

 그러자 '사다코'가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또 바로 그때였습니다.

 “아----- 사다 님! 정말 큰일을 해냈소! 아주 믿음직한 골상(骨相)을 한 아이요!”

 하고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면서 그곳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사다코'가 놀라는 얼굴로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니? 료우칸(良寬) 님?!”

 하고 깜짝 놀라는 얼굴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하! 사다 님께서 곧 출산할 거란 소리를 듣고 어제부터 미리 와서 실례를 하고 있었지요!”
 "네-에? 그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에치고(越後)'의 명승(名僧)이라던 '료우칸(良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이우에몬' 쪽을 돌아다보며 예스럽게 멋을 낸 목소리로 또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키(秋) 씨! 이리하여 카와이가(河井家)도 이제는 만만세(萬萬歲)가 되었는가?!----------”

 * * *

 그런데 여기서 잠시, 방금 그 '료우칸'이 말한 '아키'란 '다이우에몬' 시호(諡號)의 첫 글자로, 전체로는 <秋紀(아키노리>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당시 서로 '료우(良)씨' '아키(秋) 씨'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에 더해서 '료우캉'은 '쿠가미(國上)산(山)'의 '五合庵(고고우-庵)'에서 내려올 때면 꼭 '카와이가(河井家)'를 방문했고, 그리고는 '다이우에몽'이 집에 없을 때도 서원(書院)의 '청송암(聽松庵)'으로 들어가서 책을 읽는다거나, 또한 마음 내키는 대로 밥과 술을 마신다거나 하면서 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집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별 특별한 신경은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존재는 그 집에서는 은연중에 묵인되고 있었고, 그것은 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과연, 기이한 관계다!>

 라고 할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 * *

 아무튼 그때 '료우캉'의 말이 또 이어졌습니다.

 “아키 씨, 오늘은 설날인데! 그러니 적남의 탄생과 더불어서 신년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우리 흠뻑 취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네-에? 하지만 료우 씨! 그것은 좀 심한 것이 아닐까요?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러자 '다이우에몬'은 깜짝 놀란 듯이 목소리까지 높여가며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또 '료우캉'이

 “흐흠!... 소심하시긴... 아무튼, 소승이 뭔가 할 말이 좀 있으니, 그럼 아키 씨 천천히...”

 하고 말을 하고는 익숙하게 산실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러자 이내 '다이우에몽'도

 “그럼 사다코, 푹 쉬시오. 난 료우 씨와 뭔가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으니까...”

 라고 말을 하고는 그 역시도 조용하게 산실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때였습니다.

 “후훗!...”

 하고 '사다코'가 마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 * *

 '다이우에몬'이 '청송암'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료우캉'은 큰 술병과 함께 단무지를 안주로 해서 마음껏 마시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아키 씨, 지난 번 아이를 가졌을 때와는 달리...”

 '료우캉'은 '다이우에몽'이 들어서자 먼저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 료우 씨, 그건 또 무슨 말씀을...”

 그러자 '료우캉'은 빨갛게 달아오른 탄(炭)이 타고 있던 화로에 손을 쬐면서

 “자, 일단 앉으시지요!”

 라고 말을 하고는 이어서 밥공기를 그에게 디밀었습니다.
 그러자 '다이우에몽'도 자리에 앉아서는
 그가 따라준 따끈한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고는 크게 한숨을 토해냈습니다.

 "하-아! 과연!..." 

 하지만 '료우캉'은 그때 하얀색으로 밝게만 빛나고 있던 미닫이창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곧 눈(雪)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지
 소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던 눈(雪)의 검은 그림자가 흐릿하게 창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아키 씨, 저 적남(嫡男)은 보통 아이로 보이지가 않아요!"
 "아, 그렇습니까?..."
 "네, 소승도 처음으로 보는 상(相)으로, 분명히 용(龍)의 화신(化身-龍相)인 듯!...”
 “아! 용(龍)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이우에몽'은 몹시 기쁜 듯
 그러나 마치 그런 감정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답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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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안녕하세요?

추석 연휴 잘 보내시고 계시죠?

제일 좋은 것은 과유불급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넘치지 않게, 지나치지 않게, 너무 앞서지 않게...

그렇게 해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기초일본어를 하시게 된 것을 축하 드립니다!

사실, 10강 만에 왕초보를 탈출하고 기초를 배우게 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본인은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외우는 것만 10년이 걸렸습니다.^^

 

믿어지지기 않으시죠?

사실, 처음에 일본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책을 구입해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러나 먹고 사느라 바빠서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쓰다보니 그렇게 시간이 많이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독학은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공부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동기부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국방송통신대학에 입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 아직은 90점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고

JLPT(일본어능력시험)도 N2까지 취득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 N1에 도전할 생각인데, 그러나 안 되더라도 내년에 하면 되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우님들도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본인은 나이가 벌써 환갑이지만, 학우님들은 아직 청춘이기 때문에 머리도 잘 돌아가고

센스도 빠르고... 해서 본인보다는 월등한 실력과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까운 시간을 내서라도 매일, 꾸준하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으면, 본인의 경험으로 항상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즉 <시간이 나면 일본어 공부를 해야 할 텐데...>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나중에 그것이 버릇이 되고, 그러면 본인처럼 환갑이 되더라도 일본어를 포기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서두는 또 이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그림은 이제 놀랍지도 않지요?

네, 그것이 벌써 왕초보를 벗어났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아주 친절하게 한글로 하나씩 또박 또박 썼으므로, 읽기도 쉬우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당분간은 이 그림이 제일 먼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직 히라가나에 적응이 되지 않는 분은 하나씩 다시 확인하며 상기하거나 외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직음

요음

청탁

모음

 

-

자음+

모음

청음

청음

청음

-

청음

-

-

탁음

무시

무시

무시

무시

무시

무시

무시

무시

비탁음

탁음

 

탁음

탁음

빠/파

삐/피

뿌/푸

뻬/페

뽀/포

뺘/퍄

쀼/퓨

뾰/표

반탁음

반 자음

+ 모음

 

 

 

-

 

 

 

 

-


 

그리고 아래는 카타카나(片仮名-かたかな)에 대한 소개이므로

역시,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이것은 자원(字源) 한자(漢字)에 대한 소개이므로

이것은 관심이 계신 분만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

 

그리고 보통 일본어기초 책을 보면, 히라가나와 가타가나 등을 소개한 후에 발음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이 이미 앞에서 언급해드린 대로, 지금은 그것이 바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천천히 배우면서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것이 인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매일 조금씩 사용하면서 완전히 익혀두시길 권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앞에서 소개를 드렸기 때문에 다 아실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다시 상기하는 차원에서 소개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본인사> 

 

1. 아침인사 =  (오하요우고자이마스) おはようごじいます

2. 점심인사 = (콘니치와) こんにちは

3. 저녁인사 = (콘방와) こんばんは

 

<잠잘 때>

1. 안녕히 주무세요 = (오야스미나사이) おやすみなさい

2. 잘 자 = (오야스미) おやすみ

 

<감사할 때>

1. 고맙습니다 = (아리가토우고자이마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2. 천만에요 = (도우이타시마시테) どういたしまして

 

<헤어질 때>

1. 그럼 또 = (데와 마타) ではまた

1. 안녕히 가(계)세요 = (사요우나라) さようなら

 

<집을 나갈 때>

1. 다녀오겠습니다 = (잇테키마스) いってきます

2. 다녀오세요 = (잇테이랏샤이) いっていらっしゃい

 

<귀가할 때>

1. 다녀왔습니다 = (타다이마) ただいま

2. 어서오세요 = (오카에리나사이) おかえりなさい

 

<식사할 때>

1.잘 먹겠습니다 = (이타다키마스) いただきます

2. 잘 먹었습니다 = (고치소우사마데시타) ごちそうさまでした

 

<물어볼 때>

1. 어디입니까? = (도코데스카) どこですか

2. 무엇입니까? = (난데스카) なんですか

3.누구입니까? = (다레데스카) だれですか

4. 언제입니까? = (이츠데스카) いつですか

 

네, 이정도로 인사는 마치고요

그 다음에 꼭 알아두어야 될 것이라고 해서 앞에서 언급드렸던 것이 있었습니다.

네, 그것은 바로 일본인들이 잘 쓰는 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란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는 よろしくおねがいします(요로시쿠오네가이시마스)이고요

앞에서 봤던 기억이 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본인도 이것이 잘 외워지지가 않아서 길을 걸으면서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튼, 이것을 가지고 짧은 문장을 연습해보겠습니다.

 

일단 일본인이 말을 합니다. 이하 <일본인>으로 표기하겠습니다.

 

일본인= 처음뵙겠습니다 = 하지메사시테 = はじめまして

          저는 타나카라고 합니다= 와타시와 타나카데스  = わたしは たなかです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또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우조요로시쿠오네가이시마스 = どうぞ よろしくおねがいします

 

그리고 한국인이 답을 합니다.

편의상 김으로 하겠습니다.

 

처음뵙겠습니다. 저는 김 입니다= 하지메마시테. 김 데스はじめましてキム です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코치라코소 요로시쿠오네가이시마스こちらこそ よろしくおねがいします

----------------------------------------------------------------------------------------------------

 

네, 이렇게 해서 오늘 첫강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내용들도 조금씩 익여두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냥 끝내기가 아쉬워서 참고로 하나 더 말씀을 드리면

위의 내용들은 처음 일본어를 공부하시는 분들에겐 굉장이 어려운 내용입니다.

우선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말이 되지가 않고요

몇 번을 읽고 썼는데도 외워지지가 않고요...

그래서 상당히 애를 먹는 내용들인데요

그러나 우리 학우님들은 이미 공부를 잘 하시는 분들일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숨을 쉬듯이 원어민들처럼 그냥 바로 입에서 나올 정도로 만들려면 조금 노력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필요하시면 메모를 했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오늘도 수고가 많았고요

내일 하루 더 열심히 쉬시고, 다음 주부터는 또 열심히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데와 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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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井繼之助



 

 文政10年(1827年)1月1日に、長岡城下長町に生まれる。継之助は通称で、名前は秋義、号は蒼竜窟。幼い頃は、腕白もので負けず嫌いであった。17歳から陽明学を学び、鶏を割いて王陽明を祀り、長岡藩を担う名臣になろうと決意したといわれている。26歳の時に江戸へ遊学に行き、斉藤拙堂、古賀茶渓、塩谷宕陰のもとで、漢・洋学を学んだ。31歳で家督を相続した後、外様吟味役などの役職を務め、32歳で再び遊学。江戸で再び古賀茶渓の元で学ぶが、陽明学者である山田方谷に師事するため、1859年6月7日に備中松山藩へ向けて江戸を発つ。この西方遊学の様子は、日記「塵壺」に記されている。帰藩後、郡奉行、町奉行、御年寄役(奉行・家老)、家老上席などを歴任の後、軍事総督の任につく。1868年の5月2日小千谷談判の決裂で起こった北越戊辰戦争にて、軍事総督として長岡藩軍を指揮。数々の優秀な作戦を遂行したため、西軍は規模で劣る長岡藩軍に苦戦することとなる。長岡城が西軍の手に渡った折に八丁沖潜行作戦を実行し、長岡城奪還に成功するが。その後、再び長岡城は落城。只見方面へ敗走したが、八丁沖潜行作戦時に負った左足の傷がもとで、塩沢にて42歳の生涯を終える。結果として継之助は戦死し、北越戊辰戦争は敗戦。賊軍の汚名を着せられたが、北越の英雄として語られている。




                                                                                       河井繼之助 




                                                              

 

 2. 修養과 遊學의 時期

  2.1 誕生-靑年期

 

 그 후에 그는 藩校(한코우-에도시대에 藩士의 자제들을 가르치던 곳)의 崇德館에서 儒學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때 만났던 都講 高野松陰(타카노 쇼우인)의 영향으로 '陽明學'에 심취했다.


 


 * 天保(텐포우)

 日本 元號의 하나.
 文政 後, 弘化 前.

 1830년부터 1843년까지의 期間.
 그 時代의 日王은 仁孝.
 江戶幕府將軍은 德川家齊와 家慶.



 * 元服(겐부쿠, 겐푸쿠)

 奈良시대 以後에 行해졌던 男子의 成人式.
 一種의 通過儀禮.


 

 

 그는 天保13년(1842년)에 元服했고, 그리고는 秋義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그 信堅系 河井家의 堂主는 元服하고나서 대대로 通稱으로「代右衛門」을 世襲했지만

 그러나 그는 例外的으로 幼名이었던 繼之助를 繼續해서 使用했다.

 그리고 17歲 때 그는 닭을 잡아서 王陽明의 祭祀를 지냈고
 輔國과 藩을 守護하는 名臣이 될 것을 盟誓했다.
 그리고 아래는 王陽明의 簡單한 履歷임.

 





 * 王陽明(오우요우메이)

 成化8년 9월30일(1472년)
 嘉靖7년 11월 29일(1529년1월10일)
 中國 明代의 儒學者, 思想家.
 朱子學을 批判的으로 繼承했고
 學問만으로는 理에 到達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靜坐(명상) 등의 實踐을 통해서
 마음속의 理를 구하려는
 實踐儒學 陽明學을 일으켰다
 諱는 守仁
 陽明은 號이며
 陽明洞(地名)에 집을 지었던 것과 관련되었다
 字는 伯安
 姓名이었던 王守仁으로도 불린다
 文成公

 


 


 * 陽明學(요우메이가쿠)

 中國 明代에 王陽明이 일으켰던 儒敎의 一派로
 孟子의 性善說 系譜를 이었다
 陽明學이라는 通稱은 明治日本 이후에 퍼진 것이며
 그 이전에는 王學이라고 불렸다
 또, 漢唐의 訓誥學(훈고학)이나
 淸의 考證學과의 차이를 鮮明히 하고자
 (宋明) 理學이라고 불렀고
 같은 理學이라도 朱子學과 區別할 때는
 心學 또는 明學 또는 陸王學이라고도 불렀다
 英語圈에서는 朱子學과 함께
 ‘Neo-Confucianism’ (新儒學)으로 분류하고 있다

 


 



          < 王守仁 >



  그리고 그 다음해
 城下의 火災로 그의 집이 全燒했기 때문에, 現在의 跡地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 嘉永(카에이)

 日本 元號의 하나.
 弘化의 後, 安政의 前.

 1848년부터 1854년까지의 期間.
 그 時代의 日王은 孝明.
 江戶幕府將軍은 德川家慶, 家定



 * 側用人(소바요우닌)

 에도시대에 諸藩에 소속되었던 職名 중 하나로
 藩主의 公私에 관계없이 家政을 總攬했고
 藩主 嫡子의 秘書役割도 맡아서 했다




 그리고 그는 嘉永3년(1850년)에 梛野嘉兵衛(나기노카헤에-250石. 側用人)의 여동생 '스()가'와 결혼했다.
 그는 또 少年時代부터 主로 日本과 中國(宋明時代)의 儒學者나 哲學者의 語錄이나
 明淸時代의 奏議書 類의 책들을 寫本하길 좋아했다.

 그리고 또, 그 讀書法에 대해서도 後에 鵜殿團次郞(우도노단지로우)와 그 方法에 關해서 議論했을 때
 多讀이 좋다고 했던 '우도노'와는 달리, 그는 精讀을 主張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讀書姿勢는 나중에 遊學을 했을 때도 一貫 되었다.


 


 * 鵜殿團次郞(우도노단지로우)

 



 天保2년(1831년)-慶應4년(1868년)
 幕末期의 洋學者
 蕃書調所(江戶幕府에 의해서 設置되었던 飜譯機關)敎授
 號는 春風
 의붓동생(異母弟)으로 海援隊隊士 白峰駿馬가 있었다.(설명생략)
 慶應4년(1868년) 北越戰爭 直前에 38세로 死去
 (이하, 자세한 것은 생략)




 더욱이 그 時期에는 小山良運(160石, 藩醫, 長男은 明治期의 畵家 小山正太郞)이나
 花輪馨之進(200石, 후에 奉行本役) 또는 三間市之進(350石, 후에 奉行役加判) 또는
 三島億二郞(37石, 藩校助敎授, 후에 目付格, 代官) 등
 同年代의 젊은 藩士들과 밤낮 意見을 다투었고(論爭)

 그러면서 서로들 氣槪를 交換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그룹을 當時, 周圍에서는「桶黨」(물샐 틈도 없이 結束力이 단단했다는 뜻)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慶應期의 藩政改革 때는

 村松忠治右衛門(70石, 安政期 藩政改革의 主導者. 후에 奉行格. 勘定頭 郡奉行 외에 諸奉行兼任)과

 植田十兵衛(200石, 후에 郡奉行 町奉行兼任) 들과 함께 漸次로 要職에 從事했으며
 河井를 中心으로 했던 改革推進派의 主要 멤버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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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한일 관계>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고대부터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교류를 계속해왔다. 그래서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으며, 한반도 사람들도 정치적인 문제 등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은 한반도를 시작으로 해서 많은 나라들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현재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한일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려하는 것이며, 그 처음은 당연히 역사에 관한 것이다.

 

우리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것은 대략 60만 년 전부터라고 알려져 있고, 일본 열도에서는 대략 3만 년 전경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구석기시대로 타제석기를 주 도구로 사용하였고, 당시에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같은 땅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은 왕래가 많았고, 그 증거로는 양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당시의 유물이 있다. 그 중에서도 창 끝에 부착해서 사용하는 <박편첨두기(剝片尖頭器)>나, 나무나 뼈에 장착해서 사용하던 세석도(細石刀) 등의 수렵도구도 있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도 한반도에서는 즐목문토기(櫛目文土器), 그리고 일본 열도에서는 조몬토기(繩文토기)가 발견되어 두 유물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패총(貝塚)에서 출토된 원양어업 용의 <결합식 낚시 침(結合式釣針)>도 양국에서 출토되고 있고, 일본의 큐우슈우지역에서 생산된 흑요석(黑曜石)이 한반도 남부의 패총에서 출토되는 등, 양 지역 간에는 폭넓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벼농사라든가, 청동기(동검이나 동탁 등), 철기를 수반했던 <야요이문화>는 주로 한반도에서 건너갔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유물에는 많은 문제가 있고, 그래서 그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고, 일본에서는 한반도에서 건너갔던 사람들을 종래에는 도래인(渡來人) 등으로 불렀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조차도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한 신화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소위 부모도, 조상도 없이 태어난 신의 자식들이 되기를 갈망하는 것으로 해서 자신들의 미개성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으로, 마치 유기견이 자신을 구해주러온 구조대를 무서워해서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구조를 더 어렵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2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선진 철공기술을 가졌던 집단이 몇 번이나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고, 왜(倭) 세력이 세웠던 <야마토정권>은 그 <도래인>들로부터 수입했던 한반도 남부에서 생산되었던 우수한 철 자원과 기술을 받아들여서 세력을 확대해갔다. 그리고 4세기 후반에 <야마토정권>은 <백제>와 국교를 맺었고, 그때 유명한 백제의 <칠지도(七支刀)>도 전해졌다. 그리고 또 <광개토왕비문>에 따르면, 당시에 한반도 남부에서 고구려와 倭와의 일시적인 충돌이 있었고, 그것은 또 백제의 요청에 의했던 것으로, 한반도 남부로부터의 철 공급 경로의 안전유지를 목적으로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또 그 후였던 5세기 전반에는 백제의 대 고구려정책에 협력해서 倭는 군사까지 파견했고, 562년 이후에는 <가야>의 여러 지방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 해서 倭는 한반도에서 모두 철수했다.

​ 그리고 또 당시, 중국의 수(隋)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던 고구려로부터도 승례 <혜자(慧慈)>가 일본의 가장 오래된 사찰 <아스카데라(飛鳥寺)>로 파견되어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전했던 것으로 알려진 <담징(曇徵)>도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그러자 또 <신라>에서도 <대 고구려와 백제의 전략상> <야마토조정>과의 접촉을 강화해서 7세기 전반에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다. 그리고 또 7세기 전반에 일본에서 <당(唐)>으로 건너갔던 유학생들은 자주 신라의 선박을 이용했었는데, 그런데 660년대에 신라와 당 연합군이 백제에 이어서 고구려까지 패망시키자 <야마토조정>에서는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군을 보냈으나, 금강 하구의 백촌강(白村江)에서 대패했다. 그래서 또 그때도 백제와 고구려의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었고, 그 중에는 일본의 <간토(關東)>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사람으로 <고려왕>으로 불렸던 <약광(若光)>이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5세기 중엽부터 농민을 중심으로 했던 <하다씨(秦氏-하타우지)> 집단과, 수공업 기술자를 중심으로 했던 <아야씨(漢氏-아야우지)> 집단 등이 한반도 남부로부터 西일본 각지로 대량으로 진출해서 보리와 콩 등을 주로 했던 농업기술과, 양질의 도기 생산기술을 전수해주었고, 그래서 그 도래인 중의 유력자들은 6,7세기가 되면서 일정의 정치적인 지위를 세습하는 유력호족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 당시, 즉 6세기 전반에는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었던 백제로부터 <야마토정권>의 협력을 구하기 위한 외교의 일환으로 여러 박사(博士)들이 일본으로 파견되었고, 그들은 또 일본에 불교와 유교, 한자와 의학, 약학, 역학(易學), 천문학 등을 전해줌으로 해서, 일본의 고대국가와 <아스카(飛鳥)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일본의 입장은 다른데, 그들은 당시에 한반도가 아니었더라도 즉 <그런 것은 언제라도 중국으로부터 전수받을 수 있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영향력을 최소화, 또는 무시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특히 일제강점기에 역사를 날조했던 일본 어용학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인데,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서도 그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者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이 누차에 걸쳐서 말을 하지만, 한국인은 일본어를 배우고, 볼 것도 없는 일본 역사를 꼭 알아서 일본 우익들과 한국 친일파들을 상대하는데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중국의 수(隋)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던 고구려로부터도 승려 <혜자(慧慈)>가 일본의 가장 오래된 사찰 <아스카데라(飛鳥寺)>로 파견되어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전했던 것으로 알려진 <담징(曇徵)>도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그러자 또 <신라>에서도 <대 고구려와 백제의 전략상> <야마토조정>과의 접촉을 강화해서 7세기 전반에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다. 그리고 또 7세기 전반에 일본에서 <당(唐)>으로 건너갔던 유학생들은 자주 신라의 선박을 이용했었는데, 그런데 660년대에 신라와 당 연합군이 백제에 이어서 고구려까지 패망시키자 <야마토조정>에서는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군을 보냈으나, 금강 하구의 백촌강(白村江)에서 대패했다. 그래서 또 그때도 백제와 고구려의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 중에는 일본의 <간토(關東)>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사람으로 <고려왕>으로 불렸던 <약광(若光)>이란 사람도 있었다.

 

그 후, 즉 <백촌강 대패> 이후, 신라는 일본과 교류가 없었으나, 그러나 다시 외교가 재개되어 8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또 그 시기에는 일본의 견당사(遣唐使)가 중단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의 율령국가(律令國家) 완성에 신라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779년에 신라와 일본의 외교는 다시 단절되었는데, 그때까지 신라는 20회, 일본은 신라에 17회 외교사절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장보고(張保皐)의 등장으로 민간교역이 활발해지기도 했었고, 신라의 상선(商船)들도 일본을 왕래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신라가 일본에 전해주었던 수많은 물품들은 <나라(奈良)>에 있는 <도다이지쇼소인(東大寺正倉院)>에 지금까지도 많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또 그 중에는 모직깔개라든가, 먹, 금속제품 등이 있었고, 신라가 중개무역에서 취득했던 동남아시아나, 서역(西域)의 향료나, 약품 등도 있었다.

 

그리고 또한, 신라의 <촌락문서(新羅帳籍-755년에 작성된 통일신라시대의 토지문서로, 현재의 청주지방인 서원소경(西原小京) 부근 지역의 네 개 촌락의 호구(戶口)와, 전답, 가축의 필(匹) 수 등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가 화엄경(華嚴經)의 경질(經帙-두루마리로 된 불경을 담아 두는 공예품으로, 한국에서는 현재 순천시의 송광사에 고려시대의 경질이 남아있고,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134호로 지정되었다)로 남아있어서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또 발해(渤海)에서도 일본과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그래서 또 발해로부터는 34회, 일본으로부터는 13회 정도 사절(使節)의 왕래가 있었다. 그러다 점차로 정치적인 목적에서 경제적인 목적으로 교류가 변질되어 왕래는 더욱 활발해졌고, 그 중에는 발해의 사절들과 일본의 문인들 사이에 한시(漢詩)를 교환하는 교류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고려시대에 들어서, 920년에 고려는 일본에 국교수립을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고, 1019년에 여진족이 침공했을 때, 한반도 근해에서 여진족의 포로가 되었던 일본인을 보호한 뒤, 일본에 송환하면서 다시 국교를 요청했지만 일본은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상인들의 왕래는 이어졌는데, 하지만 그 후에 몽고(元)가 고려를 침략함에 따라서 그마저도 단절되었다. 그 후, 몽고는 일본침공을 계획했지만, 그러나 <삼별초(三別抄)의 난> 등으로 인해서 시간이 지연되었고, 그 사이에 또 고려가 여러 가지의 이유를 들면서 일본침공을 지연시켰는데, 하지만 결국 <여몽연합군>은 두 번에 걸쳐서(1274년, 1281년) 일본정벌에 나섰지만 태풍 등의 영향으로 실패했다. 그러자 또 그동안 고려와의 무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큐우슈우>와 <세토나이카이>에서는 무역을 하지 못해서 공백기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결국 그들은 해적(海賊)이 되어서 한반도 연안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바로 고려시대에 급격하게 늘어났던 왜구(倭寇)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당시 일본의 <남북조 상황>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하며, 그래서 그 왜구들은 14세기 후반부터 급격하게 늘어나서 1370년부터 1380년, 그 10년 사이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자 고려와 조선은 그들을 정벌하면서 <무로마치막부>와 西일본 영주들에게 왜구의 단속을 요청했고, 그 결과 1404년 조선과 <무로마치막부> 사이에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래서 또 그때부터 양국(兩國)은 선린외교(善隣外交-이웃 나라와 친선을 목적으로 행하는 외교정책)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경제와 문화면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또 1443년에는 계해조약<癸亥條約-조선 세종 25년(1443)에 변효문(卞孝文) 등이 일본의 쓰시마 섬(對馬島)의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와 세견선 등에 관해서 맺었던 조약으로, 일본의 무역선을 50척으로 하고, 조선에서 원조하는 곡식을 200석으로 제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이 맺어졌고, 그래서 또 15세기~16세기, 약 150년간, 많았던 경우에는 연간 200척 정도의 무역선이 양국을 왕래했다. 그래서 또 당시에 조선의 면포(綿布)와 일본의 동(銅)을 중심으로 많은 물품들의 교역이 이루어져서 양국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고,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비롯해서 불상과 불화(佛畵), 종(鐘) 등도 대량으로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수묵화의 교류와 다기(茶器) 등도 수출되어 활발한 교류가 이어졌던 시기였다. 하지만 또 그 후에도 왜구(倭寇)의 침입은 그치질 않았고, 그러다 <미친 개>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일으켰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의해서 교류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즉 두 번에 걸쳤던 왜란(倭亂) 때 일본군은 30만명이 한반도를 침략했었고, 그리고는 한반도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들은 도공과 학자들, 그리고 수많은 농민들과 남녀노소들을 강제로 일본으로 끌고 갔고, 대량의 서적이나, 동활자 등도 약탈해 갔다. 하지만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비롯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에 의해서 일본군은 비참하게 패배하여 물러갔고, 그 결과 <미친 개 히데요시>의 가신들도 몰락을 길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또 그 뒤를 이었던 <도쿠가와이에야스>의 <에도막부>는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위해서 노력했고, 그 결과 1607년에 국교를 회복했으며, 이어서 1609년에는 <조일통상조약(朝日通商條約)>까지 맺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에야스>의 계락은 다분히 불순했던 것으로, 그것은 순전히 <에도막부 정권 유지> 목적으로 조선을 이용했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리하여 1624년까지 3회의 <회답사겸쇄환사(回答使兼刷還使)>가 파견되었고, 1636년부터 1811년 사이에 9회에 걸쳐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1회에 300명에서 500명 규모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것은 또 당시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에 국교를 체결하고 있었던 나라는 <조선>과 <류큐왕국> 뿐이었기 때문이었고, 거기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도쿠가와쇼군>의 국제적인 지위를 일본 전국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통신사>는 <막부> 외에도 <에도>에 이르기까지 거쳤던 각 지역의 영주들, 즉 <다이묘(大名)>들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또, 그러던 중에 이루어졌던 환영행사를 통해서 양국의 문화교류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는데, 그러자 또 그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 일본 백성들이 모여들어서 성황을 이루었으며,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일본의 각 지역에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많은 문화교류의 흔적이 남게 되었다. 그때의 흔적으로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오카야마 현>의 우시마도초(牛窓町) 축제 춤인 <가라코오도리(唐子踊)>가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좋았던 일 외에, 사고로 인해서 교류를 했던 예도 있었고, 그래서 또 양국의 선박이 상대국에 표착했던 사건으로, 1599년부터 1872년까지 조선에서는 약 1000건, 1만명 정도, 일본에서 한반도에 표착했던 예로는, 약 100건의 1천 명 정도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표착지에서 우호적인 대접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때 표류자들이 필담 등을 통해서 남겼던 교류의 기록도 현재 다수 남아있다.

 

한편 <에도시대>의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에 끌려갔던 강항(姜沆) 등, 조선의 학자들과, 약탈해갔던 서적들이 주자학 확립에 큰 공헌을 했다. 또한 약탈해갔던 금속활자에 의해서 인쇄술도 크게 발전했고, 도공들도 일본의 도자기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또 그때, 조선과의 무역을 담단했던 것은 <쓰시마 번>이었다. 그래서 <쓰시마>는 처음에는 부산의 두모포(豆毛浦-현재의 부산광역시 東区 佐川洞 앞 바다)에, 1678년부터는 그보다 조금 더 옆의 초량(草梁)에 왜관을 설치하고 외교와 무역업무를 행했었다. 그리고 당시 왜관(倭館)은 약 10만 평 부지에, 평상시에는 4~500 정도의 관리와 상인들이 상주했었고, 특히 남자들에게만 거주를 허용했었다.


그리고 그곳 왜관을 통해서 들어왔던 것은 물소의 뿔이나, 후추 등, 동남아시아이 산물들과, 동, 은 등의 광산물이 주류를 이루었고, 조선으로부터 수입해갔던 것은 쌀과 면, 인삼 등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평화적인 우호관계가 유지되면서 정치와 경제,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서서히 깨기 시작했던 일본인들은 그때부터 자각을 시작했고, 그래서 또 한반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후에 <요시다쇼인(吉田松陰)> 같은 者들이 나타나서 소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거기다 <정부군>과 <구 막부군>의 싸움이었던 무진전쟁(ぼしんせんそう-戊辰戦争-1868년-상세한 것은 본인이 쓴 카와이츠쿠노수케 참조)까지 발발하자 일본의 혼란을 가중되었다. 하지만 결국 <정부군>이 승리를 했고, 그러자 또 정한론(征韓論)을 구체화하려했던 일본은 1875년 <강화도사건>을 일으켰으며, 이어서 1876년에는 <조일수호조규>까지 성사시켰다.

 

그리고 또 당시, 조선은 서구 열강들이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부했고, 그러자 또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조선 고종 3년(1866)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의 상선. 평양 군민과 충돌하다가 불에 타서 침몰하였다>까지 와서 문제를 일으켰으며, 이어서 프랑스의 함대까지 와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했다.(병인양요-1866년) 그래서 계속해서 안밖으로 고전을 하던 조선은 점점 무기력해져갔고, 일본마저 <조일수호조규>란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후, 노골적으로 약탈의지를 보임으로 해서 조선 민중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져갔다. 그러자 또 일본을 따라서 서구 열강들도 차례로 와서 문호개방을 위한 조약을 체결했고, 그래서 결국 조선은 그들 열강들의 세력 다툼의 무대로 변해갔다. 그러자 또 인내의 한계를 보였던 민중은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켰고, 그 후에 갑신정변(甲申政變)까지 발생했던 등,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갔는데, 그러자 또 1894년 동학교도였던 전봉준(全琫準)이 이끌었던 동학혁명(東學革命)까지 발생하자 조선정부는 완전히 절망적이 되었다. 그래서 자력으로 어쩔 수가 없었던 조정에서는 우선 급한 차에 중국에 원병을 요청했고, 그러자 또 일본도 마치 그때가 기회라는 듯 스스로 병력을 출동시켰다. 그래서 결국 <동학혁명>은 실패했으며, 이어서 일본군은 청군을 공격했고, 그 다음에는 조선의 침탈이 이어졌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던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청에게 인정하게 하고, 요동반도와 대만까지 양도받았지만, 그러나 또 삼국간섭(三國干涉)에 의해서 요동반도는 청에게 반환했다. 그러자 또 조선에서는 <삼국간섭>을 주동했던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일본의 힘이 약해졌는데, 그러자 또 일본은 그것을 만회하고자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楼)> 등을 조정해서 일본군과 낭인(浪人)들을 궁궐에 침입시켰다. 그리고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야만스러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충격적인 만행까지 저질렀는데, 아래의 그림은 그 <미우라>란 놈의 모습이다.

 

 

 

그리고 일본은 <러시아>를 한국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해서 <영일동맹>을 맺고 1904년에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개전과 동시에 조선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해 일본군의 행동의 자유와, 기지 사용의 권리를 확보했다. 그리고는 <제1차 한일협약>에 의거해서 외교와 재무에 고문을 앉히고, 조선을 제압했다. 그리고는 또 <포츠머드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적 지위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자 <제2차 한일협약(1905)>을 강요했고, 그것으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고, 외교의 권리까지 박탈했던 다음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했다. 그리고는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켰으며(1907), 사법, 경찰, 통신 등의 권리를 박탈한 뒤뒤, 1910년에 드디어 조선을 강제 병합했다.

그 후 <통감부>는 <총독부(總督府)>로 개명했고, 초기에는 군인총독하에서 헌병과 경찰을 일체화했던 <헌병경찰>을 전국에 배치했다. 그리고는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빼앗았고, 조선인을 철저히 탄압하는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실시했다. 그리고 또 그와 동시에 소위 동화정책(同化政策)을 강요했으며, 이어서 조선인들에게 충성스러운 일본국민이 될 것을 제도적으로 강요했다.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해서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박탈했으며(1910~1918) <회사령(會社令)>이란 것을 공포해서(1910) 조선인의 회사설립을 제한했고, 민족산업의 성장을 억제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조선인들의 반일운동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만주와 상해, 미국 등, 국외에서도 독립운동이 전개되었고, 그것은 또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나타났던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 풍조와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았던 것도 있었는데, 그래서 또 일본이 유학생들이 먼저 1919년 2월 8일에 독립선언을 발표했었고, 이어서 3월 1일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서울에서도 독립선언을 발표함으로 해서 <3.1운동>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시위는 전국적으로 순식간에 퍼졌고, 그래서 또 일본군은 총칼로 그것을 저지했는데, 그래서 또 그 운동에 참가했던 사람은 약 200만 명, 그리고 체포되었던 사람들은 약 5만 명, 그리고 순교를 했던 사람들은 약 7500명이 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자 그에 놀랐던 일본은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회유책으로 전환했고, 그와 동시에 동화정책도 강화해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 배제를 획책했다. 그리고 일본의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산미(産米)증식계획(1920)>이란 것을 세워서, 한반도에서의 쌀 증산을 유도하면서 그것을 거의 일본으로 반출했다. 그러자 조선의 백성들은 풀뿌리며, 나무의 속살까지 벗겨서 먹는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러나 일본인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그 모든 것을 당연한 듯, 풍족하게 즐겼다. 하지만 또 그들은 전쟁이 계속되면서 모든 것이 부족해졌고, 그래서 일본인들 역시 나중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러나 역시 日王 등, 고위직의 사람들과 귀족 등은 풍족한 생활을 했고, 오로지 자신들의 지위를 보전하는데만 급급했다. 그래서 현재도 쇼와 일왕이 전쟁을 반년만 더 빨리 끝냈어도 엄청난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을 것이라고 했지만, 일본의 고위층은 그런 소리에는 지금도 귀를 막고 있다.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 땅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갔던 곳이 만주였다. 그리고 물론, 친일파들은 그때 일본으로 떠나기도 했었고,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아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화전민이 되기도 했었는데, 어쨌든 그 사이에도 일본은 조선을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삼고 <만주사면(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을 계속해서 치러나가면서 필요했던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서 식량과 지하자원의 증산, 중화학공업의 육성, 무기공의 건설 등을 꾀했다.

 

한편, 일본은 <동화정책>도 계속해서 추진해나가 <황민화(皇民化)정책>이란 것까지 만들어냈고, 그래서 <황국신민의 선서>란 것을 제정했으며(1937) <신사참배(神社參拜)> <일본의 궁성참례> <일장기게양> <일본어사용> 등을 강요했다. 그리고 또한, 조선인들을 한반도 내의 광산이나 군수공장으로 징용했으며, 나중에는 일본으로 강제로 데려가서 광산과 군수공장, 철도, 항만 등에서 노역을 강제로 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시키기 위해서 1938년에 <육군지원병제도>를 시행했고, 그래서 결국 1944년에는 <징병제>까지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미 소개했듯이, 그 후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비참하게 패배했고, 그래서 결국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가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모두 수락하고 항복한다는 라디오연설을 함으로 해서 일본의 광기(狂氣)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히로히토>는 항복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고, 어쩔 수 없다거나, 운이 나빠서 종전을 결정한다는 등의 책임 회피성 발언만 했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그것으로 바로 독립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연합군은 <얄타회담>에서 <신탁통치(信託統治)>란 것을 결정했고, 그렇게 해서 한국은 다시 혼란의 시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1946년까지 일본인의 자국귀환이 이루어졌는데, 그래서 또 북쪽에 있었던 일본인은 약 30만 명 정도가 자국으로 귀환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남쪽에 있었던 일본인들은 약 57만 명 정도가 자국으로 귀환했던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정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한국의 독립에 대해서 논의가 되었는데, 그러나 소련과 미국의 대립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가운데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강력한 요구 등으로 해서 남한만 단독으로 총선거에 임했으며, 그 결과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자 또 북쪽에서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그래서 결국 1950년 6월 25일에, 북쪽의 괴수(魁首) <김일성>이가 남쪽을 침법함으로 해서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일본은 병참기지 역할을 맡게 되었고, 각지에 미군기지와 군항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일본에서도 생산하게 되어 일본은 전후(戰後)에 완전 재기불능상태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해서 다시 일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즉 <한국의 고통은 언제나 일본에게는 즐거움이 되었다>는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또 그래서 일본은 그 때문에 급속도로 회복을 했고, 이어서 1952년 4월 28일에는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의 발효로 인해서 연합국의 점령상태에서도 독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에 소위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일본은 미국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한국에 경제협력을 약속했고,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임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해서 다시 한국과 국교수립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정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는데, 어쨌든 그 후에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5억 달러의 원조자금을 받았고, 그것으로 경제성장을 꾀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기업도 다시 한국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또 당분간은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러나 또 <김대중>의 <동경호텔납치사건>과 <문세광의 815저격사건>으로 국모였던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는 일 등이 생겼던 것으로 해서 두 나라의 긴장도는 높아지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무난하게 그 일들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또 그 후에도 일본은 <역사교과서 왜곡(歪曲)>이란 문제를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으며, 그래서 또 피해국이었던 중국과 한국의 반발을 받고 있는데, 그러나 아직도 그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는 상태이며, 오히려 독도(獨島)가 일본의 땅이라고 우기는 망동(妄動)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전후(戰後)보상문제>라든가 <위안부할머니들 문제> <친일파쳑결문제> <식민지근대화론 논쟁> 등, 많은 문제들이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어 두 나라의 갈등은 쉽게 없어지지 않고 있고, 최근에는 <혐한(嫌韓)시위자>들까지 설쳐대는 등, 두 나라의 화합은 갈수록 요원한 입장에 있으며, 현재는 <아베>의 <전쟁국가 회귀 목적 헌법 개정 추진>과 그에 따른 <우익의 양산> 등으로 한일관계는 절망적인 상태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영원히 반성을 할 줄 모르는 나라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그런 小人들에게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어야 하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따끔하게 가르쳐주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일본은 <동화정책>도 계속해서 추진해나가 <황민화(皇民化)정책>이란 것까지 만들어냈고, 그래서 <황국신민의 선서>란 것을 제정했으며(1937) <신사참배(神社參拜)> <일본의 궁성참례> <일장기게양> <일본어사용> 등을 강요했다. 그리고 또한, 조선인들을 한반도 내의 광산이나 군수공장으로 징용했으며, 나중에는 일본으로 강제로 데려가서 광산과 군수공장, 철도, 항만 등에서 노역을 강제로 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시키기 위해서 1938년에 <육군지원병제도>를 시행했고, 그래서 결국 1944년에는 <징병제>까지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미 소개했듯이, 그 후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비참하게 패배했고, 그래서 결국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가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모두 수락하고 항복한다는 라디오연설을 함으로 해서 일본의 광기(狂氣)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그것으로 바로 독립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연합군은 <얄타회담>에서 <신탁통치(信託統治)>란 것을 결정했고, 그렇게 해서 한국은 다시 혼란의 시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1946년까지 일본인의 자국귀환이 이루어졌는데, 그래서 또 북쪽에 있었던 일본인은 약 30만 명 정도가 자국으로 귀환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남쪽에 있었던 일본인들은 약 57만 명 정도가 자국으로 귀환했던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정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한국이 독립에 대해서 논의가 되었는데, 그러나 소련과 미국의 대립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가운데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강력한 요구 등으로 해서 남한만 단독으로 총선거에 임했으며, 그 결과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자 또 북쪽에서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그래서 결국 1950년 6월 25일에, 북쪽의 괴수(魁首) <김성주>가 남쪽을 침법함으로 해서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일본은 병참기지 역할을 맡게 되었고, 각지에 미군기지와 군항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일본에서도 생산하게 되어, 일본은 전후(戰後)에 완전 재기불능상태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해서 다시 일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즉 <한국의 고통은 언제나 일본에게는 즐거움이 되었다>는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또 그래서 일본은 그 때문에 급속도로 회복을 했고, 이어서 1952년 4월 28일에는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의 발효로 인해서 연합국의 점령상태에서도 독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에 소위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일본은 미국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한국에 경제협력을 약속했고,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임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해서 다시 한국과 국교수립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정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는데, 어쨌든 그 후에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5억 달러의 원조자금을 받았고, 그것으로 경제성장을 꾀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기업도 다시 한국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또 당분간은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러나 또 <김대중>의 <동경호텔납치사건>과 <문세광의 815저격사건>으로 국모였던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는 일 등이 생겼던 것으로 해서 두 나라의 긴장도는 높아지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무난하게 그 일들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또 그 후에도 일본은 <역사교과서 왜곡(歪曲)>이란 문제를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으며, 그래서 또 피해국이었던 중국과 한국의 반발을 받고 있는데, 그러나 아직도 그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는 상태이며, 오히려 독도(獨島)가 일본의 땅이라고 우기는 망동(妄動)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전후(戰後)보상문제>라든가 <위안부할머니들 문제> <친일파쳑결문제> <식민지근대화론 논쟁> 등, 많은 문제들이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어 두 나라의 갈등은 쉽게 없어지지 않고 있고, 최근에는 <혐한(嫌韓)시위자>들까지 설쳐대는 등, 두 나라의 화합은 갈수록 요원한 입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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