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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이포구의 쥬리아 십자가> 

 



       < 聖女이야기 >

 


 
< 狂風의 시대에 살았던 크리스천 >

 

 제 2 부 '이에야스'의 주변

 

  2 '크리스천 대명' '코니시 유키나가'의 최후 

 

 

 

<울산성 전투 1차>

 

 

 

 어쨌든, 그렇게 '7년'에 걸쳐서 행해졌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란 미치광이가 벌였던 '조선 침략'은 그 당사자였던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음으로 해서 (1598년 9월)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때 출병을 강요당했던 대명들은 완전히 지쳐버린 병사들을 이끌고서 겨우겨우 저마다의 영지로 돌아갔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에게 평온한 날들이 찾아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로부터 2년도 되지 않아서 이번에는 '세키가하라 전쟁'으로 내몰렸고, 그로 인해서 원래는 같은 편이었던 사람들이 동서(東西) 두 파로 갈라져서는 다시 전쟁을 치러야만 했던 것입니다.

 

 * * *

 

 그리고 그 사이에 '유키나가'는 '히고'의 '우도 성'으로 돌아가서 '쥬스타' 부인의 거처로 보내졌던 '쥬리아'와 재회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쥬리아'가 '일본'으로 보내진 지 '5년'이 지나고 있었던 때였고 '쥬리아'는 그때 아마도 11, 2세 정도는 되어있었을 겁니다.

 

 '쥬리아'는 그때 <신앙심이 뜨거운 현부인(賢夫人)>이라고 불렸던 '쥬스타' 부인의 딸로서 이미 세례도 받았고, 또 그 부인에게 예의작법(禮儀作法) 등을 배우면서 '코니시 가(小西家)'의 양녀로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또 '로드리게스' 신부와 '무뇨스' 신부의 보고서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그 후의 '쥬리아'는 성격이 규칙적이고, 꼼꼼하며, 총명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도 그때쯤에는 타고난 영리함을 발휘해서 '일본어'도 잘 이해하고, 또 읽고 쓰는 것도 가능했었지 않았겠는가 하고도 생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유키나가'도 오랜만에 보던 '쥬리아'의 그런 모습에 기뻐했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도'에 있어서의 '유키나가' 소식도

 그리고 '쥬스타' 부인과 '쥬리아'의 소식도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 * *

 

 '유키나가'가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와 함께 '히고'의 '농민폭동'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키요마사'와 함께 '히데요시'로부터 '히고'의 영지('유키나가'는 남쪽의 반, '키요마사'는 북쪽의 반)를 하사받았던 것은 1588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유키나가'는 그 후에 그 '우도'에다 성을 짓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으로 그가 그곳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키나가'가 그곳에서 머물렀던 것은 '조선 침략' 이후의 아주 짧은 기간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도'에서는 '유키나가'의 영향으로 여기저기에서 새 천주당이 건립되었고, 더불어서 영내 신자의 수도 점점 더 늘어갔습니다. 그리하여 1599년에는 10,000명의 신자가 더 생겨났고, 그 다음해였던 1600년에는 신도의 수가 80,000명도 더 넘게 되어서, 그 영내에는 14개의 천주당과 함께 선교사들의 수도원 또한 4개나 더 생겨났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키나가'는 그로부터 머지않아서 '우도'를 뒤로하고 '오오사카(大板)'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히데요시' 이후 천하의 자리를 물려받았던 '이시다 미츠나리'와 '이에야스'의 사이가 험악해져서 양파(兩派)는 그때부터 유력한 대명들을 저마다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슬그머니 공작(工作)을 펴기 시작했던 때문이었습니다.

 

* * *

 

 그때 '히데요시'로부터 '히고'의 북부 반쪽을 하사받았던 '키요마사'는 '이에야스' 측에 붙었는데

 그로 인해서 '미츠나리'에게 붙었던 '유키나가'와는 분명한 적이 되어서 서로 대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서도 아마도 당시, 그 '유키나가'와 '키요마사'처럼 대조적인 생을 살았던 무장도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

 그런데 그때 '키요마사'는 독실한 불교도였고 '유키나가'는 진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히고'의 '농민 반란'평정에서 공(功)을 다투던 때나 또 '조선 침략' 중에서도 '침략추진파'와 '강화추진파'의 두목(頭目)으로 대립해야 했습니다만, 그런데 그러했던 것이 결국에는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그 결정적인 경우를 맞이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카토우 키요마사'는 이른바 아주 젊었을 때부터 동향(同鄕-尾張-오와리)의 '히데요시'에게 붙어서는 수 없이 많은 전공을 세운 다음에야 비로소 대명이 되었던 사람으로, 그는 타고난 기질이 아주 강했으며, 한마디로 그 뼛속까지 무장이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카이(堺)'의 유력했던 상가(商家)에서 자라났던 '유키나가'는 경제에 밝았고 또한 교섭(交涉)을 잘 처리하는 능력을 인정받아서 '히데요시'에게 등용되었던 무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키나가'는 '조선침략전쟁'에서도 그 재능을 발휘해서 '히데요시'에게 은밀하고도 끈질기게 설득을 해가며 강화의 길을 끝까지 찾아내려고도 했었던 것입니다.

 

* * *

 그 두 사람은 성격적으로도 그렇게 별달랐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키요마사'는 '유키나가'를 향해서

 < 당신을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미츠나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었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정말로 그때 '키요마사'가 그렇게 말을 했던 거라면

 '키요마사'도 결코 뼛속까지 무장이었던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 * *

 아무튼, 그리고 또 이런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 소개하겠습니다. 

 

 

<비와호(琵琶湖)>



 그러니까 '히데요시'가 아직 '노부나가(信長)'의 중신이었을 때 '비와호반(琵琶湖畔)'의 '나가하마(長浜) 성(城)'으로 매사냥을 나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목이 말라서 그 근처에 있던 절(寺)에 가서 차를 한잔 얻어먹게 되었는데, 그러자 그 절의 동자승 하나가 아주 큰 찻잔에다 미지근한 차를 약 7, 8부정도로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그것을 한 번에 다 마셔버리고는

 <맛있구나, 한잔 더!>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자승은 이번에는 앞전보다 조금 더 적은 양의 차를, 그러나 조금 더 뜨겁게 해서는 찻잔에 반만 채워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그것을 또

 <맛있다!>

 하면서 한 번에 다 마셔버리고는 또 시험 삼아서

 <한잔 더, 바란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세 번째에 그 동자승은 작은 찻잔에다 아주 적은 양의 차를 조금 더 뜨겁게 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그것을 보고 완전히 감동하여 그 동자승을 자신의 종자(從者)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재치 있었던 동자승이 바로 당시 13세의 '미츠나리'였던 것입니다.

 

 

< 模擬天守 - 長浜城 >

 '미츠나리'는 그 후로도 '히데요시'의 마음에 계속해서 들어서 '히데요시'의 출세와 함께 자신의 가졌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중용되었고, 나중에는 '히데요시'의 측근인 대명까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장에는 나가지도 않고 또 '오사카 성'의 깊숙한 곳에서 마치 '히데요시'의 참모 역을 도맡아 하는 듯 수완가처럼 행세하고 있었던 '미츠나리'를, 전장을 제집처럼 누비고 다니던 '키요마사'로서는 어지간히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히데요시'가 죽자 '키요마사'는 바로 그 '미츠나리'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습니다만...

 

 * * *

 그런데 그 '세키가하라 전쟁'을 바로 앞두고서 '미츠나리'는

 <각 대명들이 전에 '히데요시'에게 맹서했던 대로 '히데요시'의 어린아이 '히데요리'를 보필하고자......>

 라는 말로 지난 날 대명들이 '히데요시'와 약속했던 일을 다시 거들먹거리면서, 그때 막 천하를 겨누기 시작하던 '이에야스'와 대결하도록 부추기는가하면, 그때 이미 같은 편이 되어있었던 대명들의 배신을 무서워해서였던지, 그 대명들의 처자식들을 인질로 삼기 위해서 '오사카 성'으로 불러 모으기까지 했습니다. 

 

 

< Osaka Castle -1868 >

 

 그런데 그 와중에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의 부인으로

 크리스천이었던 ‘가르시아’에게도 '미츠나리'의 부하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미츠나리'는 그때 '타다오키'가 '이에야스'에게 붙기 위해서 '에도'로 떠났던 틈을 노려서 그 부인을 인질로 삼아 '타다오키'를 다시 자기편으로 만들어 보려고 그렇게 했던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나 '가르시아' 부인은 '타다오키'가 미리 시켜둔 대로 집 밖으로는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미츠나리'의 부하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는 강제로 그 부인을 끌어내기 위해서 집에다 불을 질렀고, 그리고는 '카로우(家老-에도시대에 대명들의 으뜸가신으로, 정무 총책임자)'의 명령으로 등에 메었던 장도(長刀)로 그 부인의 가슴까지 찔렀던 것입니다...

 

 * * *

 

 그러니까 결국 '가르시아' 부인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이에야스' 측에 가담하려했던 남편의 체면을 지켜주었던 것이었지요. 그리고 또 그때 '가르시아' 부인이 비록 '카로우'의 명령이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순순히 가슴을 찔렸던 것은, 크리스천은 신으로부터 내려 받은 존엄한 목숨을 자기 스스로 끊는 것이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때 '가르시아' 부인은 크리스천의 교리를 마지막까지 지키고서

 그렇게 숭엄하게 하늘나라로 불려갔던 것입니다...
 

 

 

< Hosokawa_Tadaoki>

 

 그리고 또, 그런 이유 등으로 해서 '유키나가'도 '세키가하라 전쟁'을 목전에 앞두고서

 '쥬스타' 부인과 '쥬리아'를 '오사카'로 데려갔었겠지요......

 그리고 또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 전쟁'이 있었던 바로 그해에, 아버지였던 ‘류우사’와 함께 '오사카'에 거주하던 중병환자들을 위해서 병원을 짓는다거나, 또는 당시 항구에 흘러넘치고 있었던 고아들을 돕는다거나, 또는 교회에 많은 쌀을 기부한다거나 하면서 선행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했던 '유키나가'가 도대체 어떠한 생각으로 '세키가하라'에의 출진을 결심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또, '조선전쟁'에서도 어떻게든 강화의 길을 찾아보려고 홀로 분투했던 '유키나가'였습니다.
 그리고 또,  전쟁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을 그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유키나가'는 전쟁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러나 당시 사이가 좋았던 '미츠나리'와의 의리 때문에라도 '서군'에 가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쨌든 그 <천하 갈림길의 전쟁>은 이미 알고 계시듯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배신에 의해서 '이에야스'의 '동군'에게 승리가 돌아갔고, 또 이어서 '유키나가'는 '이부키 산(伊吹山)'에 피신해 있다가 농민들에게 붙들렸습니다. 

 

 

<이부키 산>

 

 하지만 아닙니다.

 그것은 붙들렸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유키나가'는 스스로

 <나는 '코니시 셋츠노카미(小西攝津守-‘셋츠’는 옛 지명, 현재 오사카 부)'다. 그러므로 나를 붙잡아서 '이에야스' 앞으로 데려가면 너희들은 포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산간(山間)의 농민들에게 자신을 스스로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코니시 셋츠노가미> 라는 말을 들은 농민들은 깜짝 놀라면서, 그를 붙잡기는커녕 멀리 도망을 가거나, 아니면 여기서 무사답게 깨끗이 할복(割腹)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유키나가'는 그에도

 <아니다. 나는 도망갈 생각이 없다!--------->

 라고 말하고는

 <할복은 쉬운 일이나, 크리스천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어서 빨리 나를 '이에야스' 앞으로 데려가라!--->

 라고 말을 하고는, 그 농민들과 함께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 攝津市 安威川 의 일몰>

 

 그러자 '이에야스'는 '유키나가'와 함께 '이부키 산'에서 잡혀왔던 '미츠나리' 그리고 그때 '미츠나리'의 참모 중 한 사람이었던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 惠瓊)' 그 세 사람을 '오사카'로 보냈고, 그리고는 범죄인으로 취급을 해서 '오사카' '사카이' 시내를 끌고 다니면서 한 바퀴를 돌게 한 다음 '쿄토'의 '로쿠조우가와라(六條河原)'에서 참수형을 집행시켰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때 '유키나가'는 죽기 전에 먼저 크리스천답게 손을 들어서 '로자리오(포-Rosario-성모마리아)'를 크게 외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때까지 자신의 몸에서 한 번도 떼지 않았던 '예수'와 '성모마리아'의 그림이 그려져 있던 성화(聖畵)를 양손에 받쳐 들고 그것을 세 번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는...

 <맑고도 평온한 얼굴로 잠시 동안 두 눈을 들어서 천상(天上)을 응시하더니, 다시 눈을 내려서 그 그림을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때, 카이샤쿠닌(介錯人-할복할 때 뒤에서 머리를 베어주는 사람)이

 <머리를 앞으로 내라......>

 라고 그에게 말을 했던 것입니다 ---------------------------.

 

 

 

<六條河原- 수많은 사람들의 처형이 이루어진 곳>

 

 그리하여 '유키나가'의 유체(遺體)는 크리스천들의 손으로 '쿄토'의 '이에즈스(예수)회' 수도원으로 옮겨졌습니다만, 그런데 그가 입고 있던 명주옷에서는 <'쥬스타' 부인과 자신의 자식들에게 유체를 전해달라...>는 뜻의 유서가 옷 안에 꿰매져있었습니다.

 그 유서에서 '유키나가'는

 <이 덧없는 인생에서 끝없이 인내해야만 하는 고통을 나는 요 며칠간에 알아왔다...
  오늘까지 저질러왔던 내 죄가, 이 힘든 운명을 가져온 것은 확실하다......>

 라고 써 두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것을 말한다. 차후에 너희들은 성심을 다해서 신을 섬길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다하길 바란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전부다 변하는 사람들뿐이고, 변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써놓았습니다.

 

 * * *

 그러니까, 그 최후의 순간을 바라보면서 '유키나가'는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뒤돌아보면서 뒤에 남겨둔 육친들에게

 <변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신(神)밖에 없다...>

 라고 하는 것을 강조해서 남겨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 * *

 그리고 또 당시 '유키나가'와 '쥬스타' 부인 사이에는 '츠시마'의 '소우 요시토모'의 처였던 '마리아' 외에도, 당시 12살의 아들이 또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아들도 나중에는 체포되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마리아'는 '세키가하라 전쟁' 때, 남편 '요시토모'가 '이에야스' 측에 붙음으로 해서 크리스트교인을 포기하자 곧 이혼을 당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 갑자기 병을 얻어서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유키나가' 사후(死後)에 '이에야스'는 '쥬스타' 부인 등, '유키나가'의 식솔, 특히 여성들의 죄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유키나가'의 형제들은 '유키나가'와 같이 '서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나중에 전부 체포 되어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또, '유키나가'의 영지였던 '히고'의 '우도'는 '키요마사 군'들에 의해서 악몽 같은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으며

 영내의 크리스천들은 전부 불교도로의 개종을 강요당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리하여 80,000명 가까이나 되었던 신자들은 곧 20,000명으로 감소했고, 게다가 개종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추방당하거나, 아니면 '아마쿠사(天草)', '시키(志岐)' 등의 섬으로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 원성 성곽 유적 >

 


 

 그 후, 신앙심이 확고했던 사람들과 그 자손들은, 그로부터 삼십 수년 후에나 일어났던 <시마바라의 난(島原의 亂)> 때 <아마쿠사 시로우(天草四郞)>와 함께 '하라 성(原城)'으로 들어가서 농성을 하며 막부에 격렬히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막부의 승리로 끝남

 

 

 

<Amakusa Shiro>

 

 

 그리고 또 '쥬스타' 부인은 '유키나가'의 영(靈)을 애도하면서 '쥬리아' 등과 함께 '오사카'의 저택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또 '쥬리아'도 그때쯤에는 자신이 전쟁으로 인해서 고아가 되었고, 그래서 '일본'으로 끌려오게 되었다는 것 이상으로, 양친들의 일들과 특히 양부(養父)였던 '유키나가'와 관련되었던 일들 그리고 또 인간들의 다툼에 대한 어리석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하고, 또 '쥬스타' 부인을 본받으면서 점점 더 자신의 신앙심을 고양(高揚)하고, 그리고는 그 부인에게도 성심껏 시중을 드는 생활을 이어갔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 *

 

 어쨌든, 그렇게 아름답고 또, 거기다 청순한 마음까지 가졌던 여성으로 잘 성장했음을 보여주었던 그 '쥬리아'가 바로

“오타아”였던 것입니다...

 

 * * *

 

 그러나 '조선'으로부터 끌려왔던 딸로서, 사람들의 험담과 모든 우려를 극복하고 잘 자라있었던 그 '오타아'는, 마침내 그런 것이 '이에야스'의 신하들에게 알려지게 되자 필경 강제로 '쥬스타' 부인의 거처에서 떠나게 되었고, 그래서 '후시미'의 '오오오쿠(大奧)' 시녀로 보내졌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伏見城>

 

 그리고 1606년(경장 11년) 11월 '이에야스'는 '에도 성'의 처음 개축공사가 그럭저럭 끝나가고 있었을 즈음

 '후시미'에서 '에도'로 옮겨갔습니다.

 그러자 또 바로 그때에 '쥬리아'도 '이에야스'를 따라서 함께 그곳으로 옮겨갔던 것입니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유령 전설이 있는 伏見桃山城 治部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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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이포구의 쥬리아 십자가> 

 



       < 聖女이야기 >

 


 
< 狂風의 시대에 살았던 크리스천 >

 

 제 2 부 '이에야스'의 주변

  1. 수 많았던 '쥬리아 오타아'들

 

 

 

    

                                                      <도성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도망가는 조선 왕-선조>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 번 '조선'의 전장으로 눈길을 돌려보겠습니다...

 그러니까 1592년(文祿 元年) 4월에 시작되었던 '일본'의 '조선 침략'은 전후(前後) 7년에 걸쳤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일본'의 역사에서는 <분로쿠(文祿), 케이쵸우(慶長)의 에키(役-전쟁)>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1593년 봄 '일본군'의 '부산 철퇴'까지를 <제1차 조선 침략> 1597년(경장 2년)에 재개되었던 침략을 <제2차 조선 침략>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의 휴전 기간 4년 간에는 '일본'의 사자가 '중국'의 '북경'으로 간다거나 '중국'의 사자가 '일본'으로 온다거나 하면서 강화 목적의 교섭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일본'은 '조선'을 침략해가면서도 정작 당사국이었던 '조선'은 무시하고 '중국'하고만 강화 교섭을 계속해나갔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때 '히데요시'가 '중국' 측에 표시했던 강화의 요구는

 1. '중국'의 공주를 '일본'에 보내서 천황의 비(妃)가 되게 한다.
 2. '일중(日中)' 양국의 대신이 서약을 교환한다.
 3. 그것이 이루어지면 '조선'을 남북으로 양분해서 '일본'이 그 반을 점유한다.
 4. '조선'으로부터 왕자와 대신(大臣) 1, 2명을 인질로 '일본'으로 데려온다.
 5.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란카이'(1부에서 설명했음)에서 포로로 잡았던 두 왕자를 반환하라...

 

 는 등의 7개 조나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일방적인 요구를 '중국' 측에서 받아들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문에 교섭은 결렬되었고 '일본군'은 재차 '조선'을 침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제2차 침략>에서 '히데요시'는 147,000명이란 대 군사를 쏟아 넣었습니다만, 그러나 육상에서는 그런대로 전투를 잘했던 '일본군'이었어도, 해상에서는 생각보다 성과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때 '일본군'들은 <제1차 침략> 도중부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던 <조선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수군의 활약에 아주 심하게 혼쭐이 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



 그때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배를 철판으로 덮어씌운 전차 같은 '귀갑선(龜甲船-거북선)'을 이끌고서 '일본'의 선단에 와락 덮쳐들어서는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가 이끌던 35척 정도의 선단을 시작으로, 불과 4일 간의 해전에서 '일본군' 선단 47척을 수장시키거나 태워 없애버렸던 것입니다. (옥포 해전-1592년 5월 7일 정오)

 

 

<거북선>


 그리고 또, 1598년 11월의 대 해전에서는 '일본' 선단 300척 안쪽인 250척을 수장시키는 것으로

 '일본 水軍'을 벌벌 떨게 했던 것입니다. (노량 해전-1598년 11월 19일-이순신 장군 전사)

 

 

<노량해전>


                                                                         <Toudou_Takatora>
 

 

 그러나 육상에서의 '일본군'은 광적(狂的)인 침략과 약탈을 계속해서 서슴없이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또 <제1차 침략> 때의 '히데요시'는

 <방화도 안 되고, 비전투 자, 농민들에게 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

 는 등의 말을 했습니다만, 그러나 <제2차 침략>에서는 방화, 약탈 등은 안중에도 없고, 오히려

 <'쿠비즈카(首塚-전쟁 시에 적군들의 머리를 매장한 무덤)'를 만들기 위해서 적병('조선' 兵)은 물론, 노약남녀(老若男女), 승려들을 막론하고 죄다 모아서 죽인다음, 그 머리를 '일본'으로 보내라!>

 는 등의 시달을 각 부대에 내려 보냈습니다.

 

 * * *

 

 그러니까 '중국' 정복을 목적으로 지나가는 통로에 불과했던 '조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교만스럽게 굴었던 '히데요시'의 안달이 그것으로 잘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때 '조선'으로 가려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 제1부에서 '미츠나리'의 '서군'을 배신했던 '히데요시'의 양자)'에게도 '히데요시'는

 

 <'조선인'이라면 죄다 죽여 버리고, 그 나라를 공터로 만들어버려라. 포로로 잡힌 놈들은 죽이든지 말든지 너 마음대로 하고, 머리를 자르지 않으려거든 그 놈들의 귀와 코를 깎아서(잘라서) 소금에 절인 다음 '일본'으로 보내라!>

 

 라는, 상식이 있는 자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일까지 시켜서는 '조선'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 * *

 

 그러나 그러했던 '히데요시'의 말들이 단지 병사들을 출병시키기 위한 단순한 격려 차원의 말이라거나

 허언만은 아니었음을 다음에 표시하는 숫자가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장 2년(1597년) 8월 하순부터 10월 중순에 걸쳐서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던 노약남녀는 물론

 적자(赤子-간난아이)의 것까지 잘라낸 '조선인'들의 코의 수는 무려 '29,251'개나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절로 눈을 감게 만들 정도로의 '일본군'들의 잔혹했던 갖가지 행태를 당시 의사로서 '조선'에 종군했던 '분고(農後-오오이타 현)' '우스키(臼杵)'의 '안요우지(安養寺)'의 주지 '케이넨(慶念)'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확실히 써놓았습니다.

 

 <...우리 무사(군인)들의 난폭하게 미쳐서 날뛰는 모습들은 완전히 무시무시할 정도다. 그들은 민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들이며, 산이며, 성(城)이며, 태울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다 태워버린다. 그리고 백의의 사람(민간인)들이 눈에 들어오기만 하면 노약남녀 구별 없이 때리고 칼로 베어버리고, 또 어떤 때는 포로들에게 쇠사슬 대용으로 대나무로 만든 통으로 목을 묶어서 질질 끌고 간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아들을 찾고, 아들은 또 그 아버지를 찾으면서 울며불며 슬퍼하는 모습들이란 어떤 지옥도에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함 그 자체이다...>

 

 <......'남원(南原) 성'을 나와서 잠시 걷는데, 가는 도중에 길에도 산야(山野)에도 노약남녀, 간난아이 구별할 것 없이 전부다 베이고 잘려져서 버려져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 임진왜란 때 일본군 남원 성 침공도>

 그리고 또 그 비참했던 대량 살인의 현장에서, 아무 생각도 못하고서 눈만 크게 뜨고 말았던 '케이넨'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광경도 목격하게 됩니다.

 

 <...'일본'으로부터 아주 많은 상인(商人)들이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에는 인신매매를 하는 상인도 들어있다. 그들은 '일본군'들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적당한 '조선인'들을 사서는 밧줄로 목을 묶은 다음에 그 줄을 모아 쥐고서 끌고 다닌다. 그러다 만약에 그 사람들이 잘 걷지를 못하면, 그들은 마치 지옥의 귀신이 죄인을 다루듯이 지팡이로 사정없이 때리면서 끌고 간다......>

 ! ------------------,

 그렇게 해서 인신매매 상에게 팔린다거나 또는 무리하게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무려 '50,000'명이 넘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끌려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 출병으로 인해서 집안 일을 하던 일꾼들을 잃게 된 각 대명들의 영내(領內)로 전부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때, 크리스천 대명이었던 '유키나가'조차도 그런 사람들을 자신의 영내로 많이 데려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끌려갔던 '조선인'들은 농업이나 강제노역을 당하거나 또는 노예 용으로 해외 여러 나라로 팔려나갔습니다. 그리고 또, 그 전쟁 중에는 농부 외에 도공(陶工)들도 많이 끌려와서 도자기 만드는 일에 강제로 투입되었습니다. '아리타야키(有田燒)' '나베시마야키(鎬島燒)' '사츠마야키(薩摩燒)' '하기야키(萩燒)' 등, 큐슈(九州) 각지와 '야마구치(山口)' '오키나와' 등의 대표적인 도자기 유(類)의 개조(開祖)로 되었던 사람들은 전부 다 바로 그때에 '조선'으로부터 강제적으로 끌려왔던 도공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때 '일본'으로 끌려왔던 사람들은 어른들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케이넨'은 또 일기에 이렇게 써두었습니다.

 

 <...오늘도 봤다.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생각일까? '조선'의 아이들을 개처럼 묶어두는 것은... '일본군'에게 두 손을 모아 탄원하던 양친(兩親)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리고, 그들은 아이들만 데리고 가버렸다...>

 

 그러니까 그때, 아이들도 역시 인신매매 선(船) 등에 태워져서 '일본'이나 또는 노예로 해외 여러 나라로 팔려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일본군'들에게 붙잡혀서 '일본'으로 끌려갔던 한 '조선인'은 다음과 같은 수기(手記)를 남겨놓았습니다.

 

 <(1597년 9월) 23일, 어린 딸 '용(여자아이 이름)'과 '애생(愛生-여자아이 이름)'도 배에서 바닷물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러자 그 둘은 조금 있다 다시 물위로 떠올랐다. 울어 외치는 소리가 귀를 아프게 때렸지만,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방 그 소리는 끊기고 말았다...>

 

 <24일, 적선(敵船)에 우리 나라 사람 남녀들이 엄청나게 많이 타고 있다.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꿰뚫고, 바다조차도 울고 있는 것 같다. 적군에게 붙들린 후 여기 '순천(順天)'으로 끌려오기까지의 9일 간을 물 한 모금 마시질 못했다. 그러자 이제 여덟 살이라는 어떤 아이는 배가 고파서 바닷물을 마시고는 토하거나 설사를 하다 병이 들고 말았다. 그러자 한 '일본군' 병사가 와서 그 아이를 들어서 바닷물 속으로 쳐 넣어버리고 말았다. 자기 아버지를 부르던 그 아이의 울음이 지금까지도 귀에 들려온다......>

 

 * * *

 그리고 또, 여기서 마지막으로 소년 ‘카이오’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

 그때 '일본군'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소년 ‘카이오’는 '일본' 상인의 인신매매 배에 태워져서 '일본'으로 이송되던 도중 '츠시마' 근처에서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카이오'는 난파되었던 배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섬까지 헤엄을 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는데,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또 다시 '일본군'들에게 붙들리고 말았고, 그 길로 '쿄토'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어떤 절(寺)에 일꾼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만, 그런데 또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카이오'는 그날 병이 들어서 고열에 시달리며 가위에 눌리고 있었는데, '카이오'는 그 순간,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길에 휩싸여있던 어떤 탑(塔)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카이오'에게는 전란으로 인해 '일본군'들에 의해서 불태워지고 있던 '고향의 절 탑'이라고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또 바로 그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하늘을 그을리면서 격렬하게 타올라가던 불길 사이에서 아름다운 동자 한명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카이오'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카이오'여! 당신이 바라는 것을 조만간 당신은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후, 병이 나은 '카이오'는 그 절을 떠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그는 무작정 '쿄토'로 가서 잠시 부랑자 같은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런데 또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그곳에서 한 사람의 크리스천을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이 그를 그 근처에 있던 교회로 데려갔습니다. 그러자 '카이오'는 그곳에서 교회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것을 보고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그곳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카이오'는 그 교회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열렬한 신앙심을 불태우면서 종교에서 기쁨을 얻어갔고, 이어서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싫어할만한 중병환자들의 간호를 도맡아 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카이오'의 그런 헌신적인 간호 모습을 지켜 본 사람들은 '크리스트교'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자들까지도 그를 크게 칭송했습니다. '카이오'는 그 후에도 더욱더 신앙을 높여나갔고, 나중에는 '이에야스(家康)'가 '크리스트교'를 금지했을 때도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 - 1552 ~ 1615. 2. 4 )’ 등이 해외로 추방당했을 때, 그들과 함께 '필리핀'으로 떠나갔습니다. 

 

 

                                             <TakayamaUkon-Takatsukijyo城跡公園에 있는 高山右近의 銅像>
 


 그러나 그로부터 또 수년 후 '카이오'는 다시 '큐슈'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전도사가 되어서 포교금지체제에도 불구하고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포교를 해나갔습니다.
 하지만 또 얼마 후 '카이오'는 결국 막부에 체포되어서 '나가사키'로 보내졌고 곧 화형(火刑)에 처해졌습니다.

 

 그러자 그때 '카이오'는 마치 신(神)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었던 그 <불길 속의 동자(童子)>와도 같이...

 하늘을 그을리면서 끝도 없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던 그 불길 속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우면서...

 조용히 하늘의 부름에 응해갔던 것입니다...

 

 <그는 그때, 입고 있던 옷에 불이 붙고, 뜨거운 불길이 얼굴을 덮쳐왔어도, 평연(平然)함과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지그시 '天國'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카이오' 외에도 13세에 '일본'에 끌려와서 세례를 받고, 나중에 열성적인 수도사가 되었던 ‘뷘센시오(vicentio)’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뷘센시오'도 역시 '나가사키'에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만, 어쨌든 그 당시의 '일본'에서는 그렇게 다른 나라에서 끌려왔으면서도, 그 후에 '신의 사랑'에 눈을 뜨고는 청렴한 생애를 보냈던 <아주 많았던 ‘쥬리아 오타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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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이포구의 쥬리아 십자가> 

 



       < 聖女이야기 >

 


 
< 狂風의 시대에 살았던 크리스천 >

 

  제 1 부 - 변천하는 시대

 

 4 '쥬리아 오타아'를 둘러싼 의혹의 추리

 앞 장(章)의 마지막에서 본 필자는 '쥬리아'와 '유키나가'가 만났던 것은 '일본군'들이 '부산'으로 철퇴한 후의 '웅천'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가정일 뿐입니다. 사실은 고아였던 '쥬리아'가 '유키나가'와 만났던 장소도, 시간도 확실히 모르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에 싸여있는 것입니다.

 '쥬리아'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조선'의 귀족 출신 고아로 '평양'에서 '유키나가'에게 발견되었다가 '일본'으로 보내졌다...>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귀족의 고아>라는 것도 <평양>이란 것도, 그것을 뒤에서 받쳐줄 증거가 될 자료는 지금까지 그 어디에서도, 그리고 단 한개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녀의 진짜 이름뿐만이 아니라, 나이까지도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쥬리아'라는 이름은 그녀가 '일본'으로 데려와져서 또는 보내져서 '크리스트교'의 세례를 받았을 때에 하사받았던 '영명(靈名-세례명)'입니다. 그리고 <오타아>라는 이름도 그녀의 본명이 아니고 '조선어'의 '왔도다(ワトッタ)' '일본어' 的인 이름인 <오타아>로 변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혹은 '쥬리아'가 '일본'으로 데려와져서 '유키나가'의 부인이었던 '쥬스타(小西ジュスタ)'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을 때부터, 그 부인을 뵈러왔던 방문객들을 보게 되면 그녀가 <왔다-(ワッタ-), 왔다-(きた,きた)>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일본어' 적인 이름으로 되어서 그녀의 통칭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 * *

 

 그러나 위 두 번째의 설은 <'쥬리아'는 그때 '조선말'조차도 정상적으로 할 줄 몰랐다>는 <쥬리아 유아 설>을 엿보게 하는 것으로, 그렇다면 그때 '쥬리아'는 도대체 몇 살 정도의 여아(女兒)였다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는 '쥬리아'에 대해서 몇 가지의 추리를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의 의문은 '쥬리아'가 '유키나가'와 만났던 장소를

 어떻게 '일본군'의 '부산' 철퇴 후의 '웅천' 부근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 * *

 

 그러니까 앞에서 이미 소개가 되었습니다만, 어쨌든 당시 '일본군'의 선진을 맡았던 '유키나가 군'은 굉장한 의욕으로 침략을 거듭해서 20일정도 만에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을 함락했습니다. 그런데다 또 2개월 정도 만에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했던 격심한 침략 전쟁 중에서 '일본군'들이 그 사이사이에 전장에 버려졌던 '조선'의 고아들을 돌봐가면서 '일본'으로까지 보냈을 여유 등은 도저히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평양' 주둔 중의 10월 하순부터 다음해 1월 초순, 즉 '중국군'의 '평양' 포위까지의 약 반 년간은 '조선' 측의 거듭되던 반격도 있었고, 또 50일간의 휴전 중에서는 '일본군'들이 '평양' 외곽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때 역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때쯤에는 후방의 각 점령지에서 조국을 사랑하던 '조선'의 농민들이 '의용군'을 만들어서 침략을 계속하고 있던 '일본군'들에 대해서 게릴라 전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도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던 '일본'으로 상대국의 고아들을 보낸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거기다 또 '평양' 탈출 때는 문자 그대로 <입은 그대로> 탈출을 했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때도 그런 일은 당연히 불가능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전황의 발자취를 뒤돌아봤을 때 '쥬리아'와 '유키나가'가 만났던 것은 바로 '일본'이 '중국' '조선' 측과의 장기적인 강화 교섭에 들어갔던 '부산' 철퇴 후의 '문록(文祿)' 2년(1593년) 5월 이후의 일이었지 않았겠는가 하고 추정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또 그렇다면, 그때 '쥬리아'는 몇 살쯤이나 되었던 소녀였을까요?....>

 지금까지 '쥬리아'에 대해서 기록되어있는 것들 중에 '유키나가'에게 붙잡혔을 때

 그녀는 5세 또는 그보다도 더 어렸던 3세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쥬리아'는 그때, 정말로 그렇게 어렸던 것일까요?.....>

 '쥬리아'의 일을 일본인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주었던 1605년 '후시미(伏見)'에서의 ‘로드리게스’ 신부의 보고서에는 <그녀는 아름답고, 아직 어리고 한창 때라......>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거기다 또 그녀는 다른 시녀들에게 <언제나 신앙을 다지고 지킬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라고도 적혀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2년 후의 ‘무뇨스’ 신부의 '에도'에서 보냈던 보고서에는 <그녀는 '쥬리아'라고 불리고, 신앙심이 대단히 깊으며, 자비의 본보기라 할 수 있을 만한 아주 훌륭한 크리스천 부인이십니다. 그리고 교회가 도우슈쿠(同宿-使用人)를 필요로 해서 그 일을 전하면, 그녀는 자신이 양자로 데리고 있던 12세의 소년을 우리들의 교회로 보내주기도 했습니다......>라고도 적혀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으로 추리를 해보면, 아마도 <후시미 시대>의 '쥬리아'는 17, 8세 정도...

 

 아무리 낮게 보더라도 16세 이하로는 도저히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보다 12년 전이었던 '문록' 2년(1593년)에 '웅천'에서 '유키나가'와 만났을 당시

 '쥬리아'는 5세 정도의 소녀였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쥬리아'의 본명도 나이도 모르는 것은 '쥬리아'가 '유키나가'와 만났을 때, 그녀가 아주 간난아이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쥬리아 유아 설>이 생겨나게 된 이유입니다만, 그러나 '유키나가'와 만났을 때 그녀가 5세였었다고 가정해본다면 <후시미 시대>의 그녀는 17세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녀는 그때 3세가 아니었고, 5세였다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그녀는 그때 너무나도 어렸던 것이 아닙니까?....>.

 15세에서 17세라고 한다면 <그녀는 아름답고, 아직 어리고 한창 때....>라는 것에는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다른 시녀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의 여성....>으로까지는 아무래도 보이지가 않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아마도 '쥬리아'가 '유키나가'와 처음 만났을 때, 그보다 한두 살 더 많았던 6, 7세 정도였고

 그래서 <후시미 시대>의 그녀는 18세 또는 19세 정도였었지 않았겠는가 하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 * *

 

 그런데 여기서 또 잠시...

 그러면 '쥬리아'를 만났던 당시의 '유키나가'는 자기들이 남의 나라를 침략해나가고 있었으면서도

 육친을 잃고 헤매고 있던 '조선'의 고아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겨서 그랬던 것일까요?.....

 그러나 '유키나가'는 '쥬리아' 외에도 <국왕의 비서(秘書)> 라든가 <조선의 명문(名門)의 자(子)-손>란 사람들도 '츠시마'에 있던 딸 ‘마리아’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당시 '소우 요시토모'의 부인이었던 '마리아'는 자신의 자식 한명을 합숙제(合宿制-기숙제)였던 '나가사키'의 신학교에 입학시켰고, 그리고 또 한명은 신학교에 갈 수 있을 나이가 될 때까지 자신이 스스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똑같이 아들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쥬리아'와 같이 그 사람들도 지금까지 이름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외에, 그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수 많았던 아이들도 그 후에 세례를 받아서 크리스천이 되었고, 그리고는 온갖 박해 속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순교했던 사람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도 거의가 다 본명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또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들 전부다가 나이들이 너무 어려서 "자신의 이름도 나이도 몰랐었다..."는 이유에서였을까요?....

 그러나 당시의 '크리스트교' 관계 자료를 보게 되면 '일본인'이라도 이름을 영명(세례명)으로만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많이 있으며, 또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크리스트교'의 교리에 따라서, 그 신자들 중에서는 자신의 상하(上下) 신분을 그다지 생각지 않고 세례명으로만 부르는 관습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또 '유키나가'의 부인 ‘쥬스타’와 딸 ‘마리아’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직껏 '일본 명'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므로 '쥬리아'의 경우에서도 물론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스스로 본명도 모를 정도로 어렸었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의 결론을 다시 말씀드리면, 당시 '일본'으로 데려와져서 '유키나가'의 영지였던 ‘히고’의 '우도 성'에서 신앙이 뜨거웠던 '쥬스타' 부인에게 맡겨졌던 고아 '쥬리아'는 그로부터 머지 않아서 세례를 받았고, 또한 영명도 받게 되었으며, 그리고는 그때부터 영명으로만 불리게 되었다... 라고 결론을 내려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혹은 <'조선'으로부터 데려온 고아>였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말했던 그 <와톳타->가 '일본어' 적인 이름인 <오타아>로 변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도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리를 해보니 당시 '쥬리아'는

 <'웅천'에서 '유키나가'와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본명도 분명히 말할 수 있었던 6, 7세 정도의 아주 영리하고도 예뻤던 소녀...>

 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 제 1 부 - 변천하는 시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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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이포구의 쥬리아 십자가> 

 



       < 聖女이야기 >

 


 
< 狂風의 시대에 살았던 크리스천 >

 

  제 1 부 - 변천하는 시대

 

  3 '조선(朝鮮)' 침략

 

 

            <임진왜란 시, 일본군들의 침략노선도- 뚜렷하지는 않지만, 파란색은 주로 '유키나가' 적색은 '키요마사'의 침략도>


 그날 '조선(朝鮮)'의 남쪽 관문이었던 '부산(釜山)'의 '부산 성'을 지키고 있던 '정발(鄭撥) 장군'은 아침 일찍부터 '부산 항' 입구에 가로누워있던 '절영도<絶影島-현, 영도(影島)>'에 나가있었습니다.

 

 

 

<부산의 중심지 광복동 일대와 영도의 모습-부산의 명물 영도대교 등이 보인다>



 '정발' 장군은 그날, 부하들을 데리고서 토끼 등의 사냥감이 많았던 그 섬에서 하루 동안 사냥을 하고는 저녁 무렵에나 '부산 성'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발 장군>


 그런데 바로 그때에, 동쪽의 수평선 위로 흰 돛을 펼친 일군(一群)의 선단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게, 뭔가?...>

 '정발 장군'은 그것을 보고 처음에는 <'일본'에서 오고 있는 무역선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바다 위에 가득 찼고,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대 선단이었던 것입니다.

 <무역선이라고 하기에는 배가 너무 많지 않은가!...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보통일은 아니다!........>

 그러자 '정발' 장군은 급히 '부산 성'으로 되돌아 와서 즉시 방어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대 선단이 바로 그때부터 족히 7년에 걸쳐서 '조선'을 짓밟았던 '일본 침략군'의 선두부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선진을 맡았던 '유키나가'의 제1군 700여척의 배들은 '쓰시마' 항을 출발했던 바로 그날에 '부산'에 상륙을 했고, 그리고는 곧장 '부산 성'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釜山城攻略/『釜山鎭殉節圖』1709年初筆1760年模寫>


 그 '부산 성' 공방(攻防)의 상황을 '조선' 측의 자료에서 보게 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산'에 상륙한 적들은 다음날 새벽부터 성 주위를 백 겹이나 둘러싸고는 성 서쪽의 언덕 위에서부터 마치 비(雨)처럼 총을 쏘아대면서 쳐들어왔다. 그러자 '정발' 장군은 성의 서문을 지키기 위해서 활을 쏘며 적병들을 쓰러뜨리고, 필사적으로 적의 성내 침입을 막으려고 했으나 얼마가지 않아서 화살이 다 떨어져버렸다. '정발'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서 전사했고 성은 곧 떨어졌다...>

 그 싸움에서 '조선' 측의 전사자는 1200명, 포로는 200명...
 그리하여 '부산 성'은 불과 하루 만에 '일본군'의 손에 떨어지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 * *

 그때 '조선' 측은 '일본'의 침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확실히 <갑작스러운 대 사건>이었습니다. 거기다 또 '일본군'의 주 무기는 철포(鳥銃))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그때 철포(화승총)는 거의 없었고, 주 무기는 활과 창, 칼 등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래서 잠시도 지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키나가'와 '요시토모'의 제1군은 '부산'에 상륙한 후 바로 '부산 성' 침공에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산'에 상륙하고 나서도 여전히 '조선'과의 <강화>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때 '정발' 장군과 안면이 있었던 '요시토모'가 직접 교섭에 나서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우리들에게 '북경'으로 가는 길을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우리들은 귀국(貴國)에 어떠한 해(害)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정발' 장군을 설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발' 장군은 그에 대해서

 <가령, 우리 나라를 범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이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우리의 주국(主國)인 '중국'이 아닌가! 주국을 침범하려는 군대를 우리가 그냥 보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라고 거절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키나가'는 그럼에도 교섭을 계속하려고 생각했었지만, 그런데 또 바로 그때 '유키나가'의 제1군 후방에는 당시 불교도(佛敎徒)로 '유키나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카토우 키요마사’가 이끌던 제2군의 선단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키나가'는 더 이상 교섭을 하느라 시간을 빼앗길 수가 없어 '부산 성'을 군대로 둘러싸고는 공격으로 전환을 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유키나가'는 그때, 결국 후방의 '키요마사'에게서 쫓기는 느낌 같은 것이라도 받았던 것일까요...

 

 * * *

 아무튼 '유키나가'는 어떻게든 강화의 길을 찾아보려고 했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는 곧 들이닥칠 '키요마사' 군에게 선봉을 넘기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히데요시'에게 자신은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 전에 '프로이스' 신부가

 <혹시, '칸바쿠도노'에게 그런 일을 고자질이라도 하게 되면, 그는 '칸바쿠도노'에게 반항하는 자라고 취급을 당해서는, 그 즉시 영지도 지위도 모두 몰수당하고 만다...>

 라고 썼던 것과 같이, 자신도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히데요시'의 출병 목적이 <중국과 조선의 정복>에 있었던 이상, 선두 부대로서는 어떻게든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며 진격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런 이유 등으로 '부산 성'을 함락했던 '유키나가' 군은, 그 다음날은 그곳에서 약 8킬로 안쪽에 있던 '동래(東萊) 성'을 또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유키나가' 군의 한 병사가 마상(馬上)에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는 것도 좋다! 그러나 싸우기 싫다면 우리들에게 길을 열어라!>

 라고 쓴 판목(板木)을 '성' 안에서 볼 수 있도록 손으로 높이 들어서 올렸습니다.
 그러자 조금 있다 성으로부터

 

 <싸우다 죽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길을 여는 것은 그 보다 더 어렵다!>

 

 라고 쓴 반대 답장의 판목이 성 밖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러니까...

 

 <부정한 일에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대한다!--->

 

 라고 하는 의미의 '조선' 측의 결의 정도가, 그 판목에는 그렇게 분명히 표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동래부순절도=東莱城殉節図>


 어쨌든 그때, 그 '동래 성'안(東來城內)에는 농민 등을 임시로 모집했던 7000명 정도의 병(兵)과 피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유키나가' 군은 무장을 했던 18000명의 대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그 성을 지켜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 <밀물처럼 성내로 쏟아져 들어갔던...> '일본군'들은 닥치는 대로 상대를 죽이고, 난폭이란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듯 <지붕 위로 피신해 있던 여자는 질질 끌어내려졌고, 노인들과 아이들이 잡혀있던 곳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죽임 당했다...>라고 했던 전쟁으로 '조선' 측은 3000명의 전사자와 포로 500명을 내고는 그날 안에 '동래 성'도 '일본군'의 손으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출병 즈음에

 1. 비전투 자, 농민들에게 난폭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1. 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
 1.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도 안 된다.
 1. 비전투자, 농민들로부터 물건을 빼앗는 것도 안 된다.
 1. 곤란에 처한 비전투자가 있으면 구제하라

 라고 포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그런 것은 전혀 지켜지지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만이 일어났을 뿐이었고, 거기다 비전투 자였던 노인들과 여성 그리고 어린 아이들까지...
 그들은 <닥치는 대로> 마구 죽여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 * *

 

 당시 '조선'은 정치가들이 두 파로 갈라져서 권력을 다투느라 문란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관계가 없었던 '성' 안에서의 일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일본군'들의 진공 도중에 접수했던 그 많았던 성들의 창고에서는 그 어디라도 농민들로부터 공물(貢物)로 거둬들였던 쌀들이 가득히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으로 보아서도 일반인들의 생활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그들은 빈곤하게 살면서도, 별로 큰 항의도 없이 태평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산의 금정(金井) 산성>


 어쨌든, 그리하여 '유키나가' 군은 한층 더 병사들을 다그쳐서 계속해서 성을 함락해나갔고, 그러면서 '조선 반도'의 중앙부로 통하는 길을 따라서 진공을 계속해서 해나갔습니다. 그리고는 5월 3일이자 '부산' 상륙 후 21일째 되던 날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京城-漢城-서울)'에 드디어 입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때 다른 길을 택해서 올라왔던 '키요마사'의 제2군도 '유키나가'의 뒤를 이어서 곧 '경성'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부산'과 '경성' 사이의 길은 보통 걸어서 20일정도의 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 '일본 침략 군'들은 무기와 탄약 그리고 식량까지 운반해가면서도 거의 같은 일수(日數)로 '경성'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의욕으로 진공을 계속했던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 *

 

 어쨌든, 그러자 '조선'의 조정(朝廷)은 왕성을 비운 채로 제2의 수도였던 '평양'까지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일본군'들은 그곳에다 군의 본부를 설치하고, 작전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유키나가' 군(軍)은 국왕을 뒤쫓아서 '평양(平壤)'으로 가고 '키요마사' 군은 두 왕자를 뒤쫓아서 '조선'의 최북부에 있던 '오란카이(兀良哈-현재 중국 동북부. 함경북도 회령 근처. 오랑캐의 땅이란 의미)'로 진격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나머지의 부대들도 저마다 각각 중요하다고 생각되던 지역을 향해 가는 것으로써 '조선 전토(全土) 침략 작전 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6월 15일 '유키나가' 군은 별 전쟁도 치르지도 않고 곧 평양을 곤경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만, 그러나 그 후에 몇 차례에 걸쳐서 '조선' 측의 격심한 반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유키나가'는 자신의 아우였던 ‘루이스’가 '조선' 측에 포로가 되어서 처형을 당하는 일까지 겪어야 했습니다만, 그러나 더 이상의 반격만은 어떻게든 막아서 8월에 들어가자 강화(講和)를 위해서 서로 간에 50일간의 휴전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平壤中心部(1945年以前)>


 그러나 그 50일간의 휴전 중에 '일본군'은 '평양' 외곽으로는 나갈 수 없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도 '부산' 상륙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진공을 거듭했던 탓으로 몹시 지쳐있었던 '일본군'들에게는 그것만큼 반가운 휴전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유키나가'가 원했던 강화는 결국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또 다시 각지에서 국지 전을 계속해서 치러야만 했고, 그러다가 드디어는 그 혹독했던 '조선'의 겨울을 맞이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쯤에는 식량도 거의 바닥이 나서 '일본군'들은 본토로부터 식량을 보급 받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이미 그때 침략 부대는 너무나도 '조선'의 내부 깊숙이까지 진격해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 또, 그때쯤에는 '일본군'들이 점령하고 올라왔던 후방의 각지에서 애국심에 불타던 '조선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용군'들이 마구 생겨나고 있었으며, 그로인해 그곳에서는 '게릴라전'까지도 활발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 * *

 

 그렇게 해서 식량부족으로 배를 곯던 '일본군'들은 나중에는 밥을 묽게 한 죽 같은 국물조차도 먹지 못하게 되자, 수수 같은 것도 마다않고 다 갉아먹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수수조차도 '조선'의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일본군'들은 '조선' 농민들이 식량을 숨겨놓으면, 그 집 안을 다 털어서 인정사정도 없이 그것들을 전부 강탈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히데요시'가 출병 때 경고했던 것들을 지키는 '일본군'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 * *

 

 어쨌든, 병사들은 '일본'의 겨울보다도 월등히 혹독했던 영하(零下)의 날씨가 계속되던 '조선'의 추운 겨울 속에서 입을 것조차도 없이, 공복까지 참아가며, 그리고 얼면서() 계속해서 전쟁을 치러나갔습니다만, 그러나 날이 갈수록 환자가 속출했고, 이어서 대부분의 자(者)들이 전의 상실-----------------.

 

 나중에는 싸울 기력조차도 모두 잃어버리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다 또 설상가상...

 해가 바뀌었던 그 다음해 1월 '중국'의 원군(援軍)마저 '조선'에 도착을 했던 것입니다.

 

 * * *

 

 그때 '유키나가'의 제1군은 계속해서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런데 그 '평양'을 대포 등으로 무장했던 '중국군'들이 사방(四方) 3000명, 총 12000명 정도의 대 부대로 그 '평양'을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유키나가'는 적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척후병(斥候兵)을 내보냈습니다만, 그러나 그 척후병의 보고를 받은 '유키나가'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습니다. 그대로 계속 있다가는 바로 독 안에 든 쥐... 군은 곧 전멸하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군'은 큰 북을 울리고, 그 포성은 천지를 떨게 하고, '평양' 성문을 단번에 부셔버렸다......>

 라고 했던 상황 속에서 '유키나가'는 용단을 내렸습니다.

 '유키나가'는 그때, 걸을 수도 없었던 수많은 부상병들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자신들만이라도 그곳을 탈출하기로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힘을 얻었던 '중국군'들은 '유키나가' 등이 그런 결정을 내리고 있던 중에도 '평양' 탈환에의 격심한 의지를 드높이면서 마구 공격해왔습니다. 그러자 대장이었던 '유키나가'조차도 입은 옷 그대로인 채로

 <구소쿠(具足-일본군들이 전쟁 시에 완전히 갖추어서 입던 갑옷) 따윈 버려라. 구소쿠 하의(下衣-아래만 두르는 갑옷) 하나만!>

 하고는, 참담한 모습으로 당시 '일본군'의 근거지였던 '경성'까지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구소쿠의 예- 甲冑>


 그러나 그 '경성'까지의 퇴각 모습 또한...

 <극심한 피로로 인해서 눈 위에 쓰러진 자는 그대로 눈 위에서 죽었다. 눈 위에는 먹을 만한 풀 한포기 보이지 않았다. 눈을 먹으면서 도망가야 하는 길... 얼음이 언 큰 강을 건너가는데, 맨발에 조우리(일본인들이 신던 신발)만 신은 자들은 동상에 걸리고, 발가락이 끊어져나간 자들도 많이 있었다......>

 라고 했었던 만큼, 그것은 실로 비참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군'들은 애초부터 겨울에 대한 대비 같은 것은 전혀 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종군했던 한 병사는...

 <손발은 눈(雪)에 타서 붓고, 옷이라곤 갑옷 아래에 걸친 것밖에 없고... 산전(山田)의 허수아비와도 같이 바짝 마른 모습들이라, 서로 간에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조차도 없었다......>

 라고 그때의 퇴각 모습을 적어서 남겨놓았습니다.

 

 * * *

 

 아무튼,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 남았던 '일본군'들은 어떻게든 겨우겨우 '경성'에 도착을 했습니다만, 그런데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처음에 15000의 병사였던 것이, 그 반 정도인 8000명으로 줄어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마저도 부상병이거나, 영양부족으로 새 눈(鳥目)을 하고 있던 자가 거의 태반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까지 해서 겨우 '경성'까지 퇴각을 했던 '유키나가' 군(軍)을 필두로 각 군의 대장들이 모여서 다음 작전을 세워보려고 회의를 열었지만, 그러나 그때 '일본군'의 수는 전년(前年) '조선'에 출병했을 때의 1/3이었던 53000명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또

 <싸움으로 목숨을 잃은 자들보다는, 식량부족이나, 혹독한 추위로 인해서 병이 나서 죽은 자들이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라고 당시의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 * *

 

 아무튼 그때, 대다수의 대명들과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진공을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일본 군'으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의를 열고는 '부산' 근처까지 퇴각을 해서 강화 교섭을 가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1593년(문록 2년) 5월-----------,
 '조선' 출병에 나섰던 대명들은 '부산'에서 전부 모였고, 그리고는 각자 '부산' 근처로 분산해서는, 주둔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 후 '유키나가'는 '웅천'(熊川-현재 경남 진해)에다 성을 짓고(개축), 다음해 12월에는 사자 ‘나이토 죠안(內藤如安)’을 '북경'으로 파견하는 등 하면서 '조선' '중국'과의 강화 교섭을 계속해서 해나갔습니다.

 


                                                                                   <웅천읍성>


 그런데 바로 그 즈음에 '유키나가'는 전쟁으로 양친과 육친들을 모두 잃고 고아가 돼있던 <쥬리아>와 만나게 되었고, 그리고는 바로 그녀를 '히고(肥後-쿠마모토 현)'의 '우토(宇土) 성'에 있던 ‘쥬스타’ 부인(유키나가의 부인菊姫-洗礼名:ジュスタ)에게로 보냈던 것입니다.

 


                                             <명치시대의 쿠마모토 성 또는 별명으로 宇土銀杏城-ぎんなんじょう>

 

<구마모토의 우토 위치도- 노란색>

 

<宇土古城址(中世宇土古城)千畳敷への虎口>

 

                                                                 <고니시 유키나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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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이포구의 쥬리아 십자가> 

 



       < 聖女이야기 >

 


 
< 狂風의 시대에 살았던 크리스천 >

 

  제 1 부 - 변천하는 시대

 2. '히데요시'의 욕망


                 

                                                                         <Toyotomi hideyoshi>
                                  


 '세키가하라 전쟁'이 일어나기 8년 전이었던 1582년(天正 19년) 2월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을 평정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을 보좌해서 정치를 하는 이른바 <칸바쿠(關白)>의 지위를 조카 '히데츠키(秀次)'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타이코우(太閤)' 라고 칭하며 그 위에 군림하면서, 점점 더 '중국(明)' 정복의 계획을 구체화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히데요시'는 그 전부터 ['일본'을 평정하면 '조선'을 굴복시키고, 거대한 '중국'을 정복해서 '일본'의 '천황'과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거기다 '인도'와 '필리핀' '대만(台灣)'과 '유구<琉球-현, 오키나와(沖繩)>' 등을 거느리면서 동남아시아를 지배하고, 그리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가를 세우겠다...]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방법으로 '중국' 정복의 길목에 있던 '조선(朝鮮)'을 복종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히데요시'는 그때, 스스로 그러한 계획을 밀고나가는 것을 <내 오랜 세월의 꿈이었다!>라고 했습니다만, 그런데 '히데요시'의 그러한 계획은 또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던 것일까요?...

 

 

                                                                                   <本能寺의 變>


 당시 '히데요시'의 주군으로 '일본' 국내 평정의 선봉에 나섰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혼노우지의 변(본능사의 변-1582년)'으로 가신 중 한 사람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모반에 의해서 비명으로 최후를 마감했습니다만, 그런데 그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았던 '이에즈스 회'의 '플로이스' 신부는 '노부나가'가 죽었던 바로 그해에 '로마'의 '이에즈스 회' 본부로 보냈던 '일본포교보고서' 속에 <'노부나가'는 '일본' 전국 통일을 이룬 다음에는 대 함대를 편성해서 '중국'을 정복하고, 그 영토를 자기 자식들에게 나누어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써두었습니다. 

 

 

                                                                              <Odanobunaga>


 그래서 또 아마도 그때 '히데요시'가 그 '노부나가'로부터 그 계획을 전수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히데요시'는 1585년 9월에 가신 중 한 사람이었던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一柳末安)’에게 <'일본'은 미흡하나마 '당국(唐國-중국)'까지 진격한다!...>라고 '노부나가'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해 '오사카 성'이 완성되었을 때(1586년)는 '이에즈스 회'의 일본 부관구장(副管區長)이었던 ‘가스파루 코에류’ 신부와 회견했던 자리에서 또 다시 그 '중국 정복 계획'을 다음과 같이 확실히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금도 은(銀)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오직 나의 명예와 권세를 죽은 후에까지라도 계속해서 전하고 싶은 욕심뿐이다. 그리고 곧 '일본'이 안정되면 이 나라는 동생 '히데나가(秀長)'에게 양도하고, 나는 '조선'과 '중국'을 정복하는 일에 전념하고 싶다. 그러므로 그 대군들을 옮기는데 필요한 배 2000척을 만들기 위해서 지금 목재의 벌채를 명해두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을 했고, 거기다 또 신부들에게도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하게 되면 저 거대한 '중국'이 나에게 무릎을 꿇고 복종의 예를 올리게 될 것인 바, 그렇게 되면 나는 그 나라 땅이 닿는 곳까지 크리스천 교회당을 건립하게 하고, 또 '중국인'들 전부를 크리스천이 되게 명할 것이다......>

 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히데요시'는 가히 <권력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웅대한 '오사카 성' 내를 외국 선교사들의 선두에 서서 몸소 안내를 하고, 또 <전부 황금으로 만든 이동식 다실> 등도 보여주면서,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을 했던 것입니다.


                 
                                                                        <OsakaCastle-명치시대의 모습>


 그러니까 그 '히데요시'의 <오랜 세월의 꿈>도 또는 '노부나가'의 그 <계획>이란 것도, 모두가 다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독재자들의 제멋대로인 호언장담이었거나, 정복욕이 낳은 망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어쨌든 '히데요시'는 그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단시일 내에 실행에 옮겼습니다.

 1587년 '오사카 성'에서 '코에류' 신부에게 <중국정복의 계획>을 말했던 그 직후부터 '히데요시'는 당시 '쓰시마(對馬島)'의 도주(島主)였던 '소우요시시게(宗義調)' '요시토모(義智 - 그러나 요시토시로 부르는 곳도 많으므로, 참고바람)' 부자(父子)에게 '중국' 정복의 길목에 있던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종할 것을 교섭하라고 명했고 <만약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군대를 파견해서 나라(朝鮮)를 멸망시켜버리겠다!>라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쓰시마'는 이미 아시는 대로 현재 '일본(日本)'과 '대한민국(大韓民國)' 사이에 있는 섬으로 '큐슈(九州)'의 '하카타(博多)'까지는 147킬로, '대한민국'의 남쪽 관문인 '부산(釜山)'까지는 약 5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는 섬입니다. 그리고 전도(全島) 약 700 평방 킬로 정도인 그 섬은 2, 3천미터 높이의 산들이 겹겹이 서있고, 또 토지가 척박한 관계로 과거부터 경작지가 적지 않아도 농산물은 그다지 많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15세기 초부터는 '조선'으로부터 매년 쌀과 콩 등을 지원받거나 '부산'에 관청을 설치해서 '일본'과 '조선'의 통상, 무역의 교섭을 하거나 하며 살아왔던 그런 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던 그 '조선'에 갑자기 <복종하지 않으면 멸망시키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그 섬에서는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 그때 도주였던 ‘소우요시시게’는 '히데요시'의 그런 명이 나오자 깜짝 놀라서 어떻게든 일을 순조롭게 해결 해보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조선'의 왕에게 <현재 '일본'에 새 왕(히데요시)이 탄생했기 때문에 우호의 인사차로 사자를 보냅니다...>라는 위조 서장(書狀)을 써서 사자와 함께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소우(宗) 부자(父子)'는 자신들의 가신을 '일본' 국왕(히데요시)의 사자로 위장시켜서 '조선'에 보낸 다음, 그 답례 차로 오게 될 '조선'의 사자를 '히데요시'에게로 바로 보내서 그들끼리 뭔가를 서로 해결하게 해보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아무 사정도 모르는 '조선'의 사자를 '일본'으로 불러 들여서는 그들이 '히데요시'에게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일을 해결하려 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소우 부자'로서는 아주 큰 연극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들의 생각대로 '조선'의 사자가 결국 '일본'으로 오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히데요시'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히데요시'는 그때 '조선'의 사자들이 가져온 '조선 국왕'의

 <멀리서 전해온 바에 따르면, 대왕(히데요시)이 '일본' 전 국토를 통일하였다고 들었는데, 이 차에 서로의 평화를 확보하고, 이후에도 인접국의 우호를 돈독히 하면 좋겠소......>

 라고 섰던 인사 서장을 보고는, 분명하게

 <나는 '중국' 거기다 '인도'까지도 정복하고, 나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은 무조건 '일본'에 복종해라!>

 라고 하는 아주 거만하고도 무례한 답장을 써서는 '조선'의 사자들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의 서장에서 '히데요시'는

 <나의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어머니는 태양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셨다. 그러므로 나는 태양의 아들이다!>

 라는 것도 같이 써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나는 단지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틀린 사람이다. 그런 기적에 의해서 태어난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에, 동양의 모든 나라들뿐만 아니라, 서양의 나라들도 나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라는 것도 써서 '필리핀'과 '대만' 등지에 보냈습니다.

 그러자 어쨌든, 그리고 비록 인사 차로 오기는 했었지만, 그런 무례한 답장을 본 '조선'의 사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 국왕'의 사자를 '일본'으로 불러들여서 '히데요시'와 만나게 하려했던 '소우 부자'의 연극은 어떻게든 성공을 하였으나, 그러나 아무 사정도 모르고 왔던 '조선' 측에는 그야말로 폐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러자 '조선'의 사자들은 그때 <이것은 도(道)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을 깔보는 자다!>라고 말을 하고는 <그는 미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만, 하지만 이어서 열렸던 화려한 '교토'의 '취락제(聚樂第)'에서 거행되었던 회견 모습 또한 크게 예의에 벗어났던 것이었습니다.                                                                 

 

 

                                                                              <聚樂第風圖>


 그날 '조선'의 사자들은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결국 회견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히데요시'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꿇어앉아 있던 '조선'의 사자들과 줄지어 있던 중신들 앞에 갑자기 유아였던 후계자 '츠루마츠(鶴松)'를 안고 평복차림으로 나타나서는 그 '츠루마츠'를 어르면서 회견장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 갑자기 '츠루마츠'가 '히데요시'의 옷에다 오줌을 싸버리고 말았는데, 그러자 '히데요시'는 <야, 야, 야, 이거, 이거...>하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시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 '츠루마츠'를 시종에게 건네주고는 그곳에서 바로 옷을 갈아입었던 것입니다.

 그것까지 본 '조선'의 사자들은 <전부가 실로 제멋대로다. 우리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면전을 가리지도 않고. 그것은 우리를 얕본 태도였다!>라고 글로 써서 남겨놓았습니다.

 ※ 참고 - 히데요시는 그때, 안하무인하게 특히 조선의 사신들 앞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으로도 일본의 야만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특히 히데요시의 비 인간성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으로 생각함.

 그러니까 아무리 <자신은 태양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국의 국왕이 보낸 사자를 영접했던 태도는 아니었지요.
 거기다 또 '히데요시'의 요구는 예의에도 벗어났고 또 도(度)를 지나쳤던 이상 그것을 '조선' 측이 받아들일 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사자들이 돌아간 후에도 '히데요시'는 여전히 '쓰시마'의 '소우 부자'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종할 것을 교섭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1585년에 ‘소우 요시시게’가 갑자기 병사(病死)하자 '히데요시'는 후계자였던 젊은 '요시토모(義智)'의 보좌역으로 크리스천 대명 ‘코니시 유키나가’를 붙여서 계속해서 교섭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코니시 유키나가'는 당시 상업의 도시로 알려졌던 '사카이(堺)'의 유력자로, 친교가 있었던 ‘프로이스’ 신부로부터 <대단히 선량한 크리스천>이라고 불렸던 '코니시 류우사(小西隆佐)'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론,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의 부친이라고 전해지는 그 '류우사'는 당시 도시 외곽에 많이 있었던 '한센 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짓는다거나 하면서 '일본'의 '크리스트교' 포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유아 때 세례를 받아서 크리스천이 되었던 '유키나가'도 청년시절 한때 상인으로 활약했던 적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후에 '히데요시'에게 중용(重用) 되어서, 무장으로써 크게 활약을 했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했던 '유키나가'에게 어떠한 생각이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유키나가'는 그 즈음에 자신의 딸이었던 '마리아'를 ‘요시토모’에게 시집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요시토모'는 23, 4세 '유키나가'는 34, 5세 정도였기 때문에, 고도(孤島) '쓰시마'로 시집을 갔던 '마리아'는 당시 아직도 어렸던 15, 6세 정도... 아마도 소녀 같은 천진스러움이 남아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남편이었던 '요시토모'도 나중에는 크리스천이 됩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부자(父子) 관계가 되었던 '유키나가'와 '요시토모'는 그때부터 함께 '조선'과의 교섭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런데 여기서 그 두 사람의 교섭 행태를 잠시 보게 되면, 그때 그들은 어떻게든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과 침략을 저지하려 했던 고심이 역력히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호국 '조선'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는 사위의 생각에 '유키나가'는 깊은 이해를 표시하고 또한 그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유키나가'와 '요시토모'는 어떻게든 '조선'과의 교섭을 계속해서 펼쳐나가려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당시의 '조선'은 거대한 '중국'을 주인의 나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측의 요구 따위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조선'은 <주인의 나라인 '중국'을 버리고 어떻게 '일본'과 손을 잡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거절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키나가'는 '조선' 측과의 교섭을 연장시켜가면서 어떻게든 '히데요시'의 출병을 중지시켜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그러나 조급해하던 '히데요시'는 급기야 '조선'과의 교섭을 중단하고는 결국 '조선'에의 일방적인 침략을 개시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히데요시'는 '유키나가'와 '요시토모'에게 교섭을 계속해서 시켜가면서 뒤에서는 '조선' 출병 준비를 척척 진행해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1591년(天正15년) 10월에는 '히젠<사가(佐賀) 현>'의 '마츠우라(松浦)반도' 북쪽 외곽에 있던 구릉지에 '조선'과 '중국' 침략 목적의 본진이었던 '나고야(名護屋) 성'의 축성을 대명들에게 명했고, 그리고는 또 5개월도 되지 않아서 주변 16킬로의 땅을 확보했으며(쓸 수 있는 땅으로 평지를 만듦), 이어서 5층 7계(階)의 천수각(天守閣)이 하늘로 치솟았고, 그리고 또 그 성 주위에는 대명들의 진영들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축성 전에 그곳은 인가도 별로 없었던 아주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했던 곳이 반년도 되지 않아서 <천수각이 하늘 높이 치솟은, 직경 4킬로도 더 되는 신도시>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아무리 권력자의 권세라고는 하지만, 실로 무서운 것을 보여준 한 예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그런데 그때의 공사 모습은 또 어떠했을까요?...                                                                   

 

 

                                                              <Nagoya Castle-名護屋城天守跡>


 <'히젠'의 '나고야 성' 축성>에 관해서 '프로이스 신부'의 글이 아직도 남아있어 그것을 잠시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그곳은 산간 벽지로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식량뿐만이 아니라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 공급되어야할 전 필수품이 부족한 상태이고, 또 산도 많은데다 한쪽은 늪지인 아주 황량한 곳입니다. 그렇지만 '칸바쿠도노(關白殿)'의 명령이 아주 엄해서 대명들은 사람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개척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그런 것은 아예 머리에서 지워 없애버린 듯) 할당받은 일들을 인수해서는 4만, 5만의 사람들을 모았고, 그리고는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노동으로 인한 피로와 고통으로 죽어갔지만, 그러나 어쨌든 불과 수개월 안에 그곳에는 거대한 궁전과 성의 여러 건축물들이 아주 멋지게 완성되었으며, 그리하여 허허벌판에 또 하나의 새로운 도시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공사에 참여했던 대명들은 누구라도 마치 '다른 대명들에게는 뒤질 수 없다'는 듯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혹시라도 공사에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했을 시에는 공사감독자들 <그 중에 한 사람은 '히데요시'의 친척이었던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로부터 사람의 면전(面前)에서도 서슴지 않았던 수모를 당해야만 했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또 혹시라도 '칸바쿠도노'에게 그러한 일에 대해서 고자질이라도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금방 '칸바쿠도노'에게 반항하는 자라고 취급을 해서는 영지도 지위도 모두 몰수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명들은 스스로 자신의 군사나 영내(領內)에서 모집했던 많은 수의 인부들을 데리고서, 일부러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숲이나 산으로 가서 나무를 베어서오거나 '칸바쿠도노'의 성벽이나 대문에 사용할 거대한 돌들을 운반해오거나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히데요시'의 야망을 위해서 혹사당했던 각 대명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성이 완성 되자 이번에는 겨우 일 개월 정도의 휴식기간을 가진 후에 '조선 출병'을 위한 준비에 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다음 '프로이스' 신부는 계속해서 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기와 탄약을 조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산(遺産)과 전답을 처분해서 채비를 단단히 하는 등, 그것은 여태까지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아내의 눈물, 내버려두고 가야하는 자식들, 그리고 또 그 가족들... 너무나도 비정한 이별들이 생기고, 깊은 마음속 저 안에서부터 번지는 슬픔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것은 얼마나 많은 말을 한다고 해도 족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축성(築城)에 끌려가서 중노동을 부과 당했던 그 많았던 무명(無名)의 병사들과 농부들은 그런 고단함을 치유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육친들과 헤어져서는 바다를 건너고, 또 그 생사조차도 알 수 없을 저 '조선(朝鮮)'의 전장으로 끌려가기 위해서 '히젠'의 '나고야 성' 아래로 모두들 다시 모여들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때 '조선' 출병을 위해서 편성되었던 부대는 제1군의 '코니시 유키나가' '소우 요시토모' '히젠(나가사키 현)' '아리마'의 '아리마 하루노부' 마찬가지로 '오오무라(大村)'의 '오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등, 주로 크리스천 대명들로 이루어졌던 18,700명과 이하, 제9군까지 158,000명이라는 대 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부터 '유키나가'가 이끌었던 '제1군단'은

 700척도 더 되었던 배에 올라타서는 '조선'으로의 침략을 개시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592년 (분로쿠-文祿 元年) 4월 12일----------------------- .

 '유키나가'의 제1군은 대기하고 있던 '쓰시마'의 항구로부터
 은은히 섬 그림자처럼 보이고 있었던 '조선'의 항구 '부산(釜山)'을 향해서
 차례로... 차례로... 출범해 나갔던 것입니다 -----------------------------





                                                                   

 

 

                                                                           < 쓰시마의 Aso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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