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르 클레지오

열병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31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임미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어떤 경우에는 정신이 감각에 시달린 끝에 일종의 육체적 도취 상태에 빠져들기도 한다. 진실은 백열등보다 더 밝아서 보려고 하면 눈이 부실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금방이라도 깨질 수 있는 이런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다. 눈길이 가닿은 자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귀에 들리는 소리, 피부에 와닿는 감각은 무엇이건 의심해 보아야 한다. ('서문' 중에서) 이 모든 것 속에 와서, 이 맥락 안에 들어와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배는 섬을 향해 가는 것 같다' 중에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열병>은 르 클레지오의 중단편 9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발원한 '누보로망(Nouveau roman)'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장르에 굳이 얽어맬 이유가 있나 싶을 정도로 참신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다. 국내에도 방문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한국과는 꽤 인연이 깊은 작가라고 한다.

르 클레지오의 <열병>은 '이러이러한 이야기야!'라고 소개하기가 참 애매하다. 소설이라고 하면 스토리가 있기 마련인데, <열병>의 작품들에는 다만 '(언어의) 표현'만이 있기 때문이다. 열이 올랐음에도 출근해야 하는 로슈(열병),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할 정도로 똑똑한 천재인 12세의 마르탱(마르탱), 쓰레기가 쌓인 강가로 산책을 하는 희곡 작가(배는 섬을 향해 가는 것 같다), 25세 생일날 플랫폼에 서있는 앙리 피에르 투쌩(뒤로 가기), 연인이 떠난 다음 날 커피를 마시며 싱크대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듣다 거리로 나간 파올리(걷는 남자) 등 딱히 등장인물들의 '서사'라고 할 만한 게 없다.

하지만 르 클레지오의 매력은 서사에 있지 않다. 그의 '서문'을 읽어보면 (비교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에밀 시오랑이 생각난다. '태어난 것'이 고통이라는 염세주의가 시오랑의 그것과 꽤나 비슷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 클레지오가 표현하는 '언어'는 낯익은 것을 '낯설게' 만든다. 가령 햇빛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고, 어떤 영향을 주는지 언어로 표현될 때 그것은 기묘한 낯섦을 선사한다. 열이 나는 것도, 통증도, 혐오도, 자만도 하다못해 길을 걷다 마주치는 수많은 얼굴들, 건물들, 공기, 심지어 부모님마저도 낯설고 기이해진다. 그것들 중 '나를 아는 것'은 없다. 그 기묘한 낯섦이 바로 르 클레지오의 매력인 것이다. 

자신의 내부로 몰두하게 만드는 그 집요함ㅡ그것은 어느새 나를 르 클레지오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 눈을 떼고 나의 현실로 회귀할 때, 나는 잠시 현실과 언어의 경계선에 선다. 지독한 작가다. 지독한 글쓰기다. 르 클레지오의 글은 이렇다. '미치거나 무관심하거나.' 이젠 나의 하루에서 마주치는 모든 소소한 것들을 눈부시게 바라볼 것만 같다. 내 귓가엔 아직도 개수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통 통 틱!

사양(斜陽)/다자이 오사무

사양 ㅣ 에디터스 컬렉션 1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나에게 다자이 오사무는 '비겁함'과 일맥상통하는 저자였다. 현실에 좌절하고 여자들에게 얹혀사는 한 인간의 삶을 보면서, 그저 책을 글자로만 읽었던 나에게 그는 비겁하고 치졸한 요조, 그 자체였다. 그러나 조금 더 자라 조금은 '저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을 줄 알게 될 무렵, 불안과 우울의 시대 한복판에서 흔들리던 다자이의 요조는 어느덧 이해 가능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문예출판사의 에디터스 컬렉션 <사양(斜陽)>은, 몰락하는 귀족 가문의 모습을 저무는 태양에 비유한 제목으로, 당시 일본의 몰락해가는 귀족을 뜻하는 '사양족(斜陽族)'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고, 그 뜻에 '몰락'이라는 의미를 추가하게 만들 정도로 영향력 있던 작품이라고 한다. 오죽하면 다자이 오사무 기념관 이름을 '사양관(斜陽館)'이라 지었을까 싶기도 하다.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숨 쉰다는 것.

아아, 그건 무슨 고역을 감내하며 치러내야 할

대과제란 말인가.

(158쪽)

다자이 오사무의 최고작이라 호평받는 <사양>의 내용은 사실 간단하다. 몰락한 귀족 집안의 후손인 '가즈코'를 화자로 과거의 영광이 몸에 밴 병약한 어머니, 과거와 현실 사이에 갈등하는 남동생 '나오지', 나오지의 스승이자 6년간 짝사랑해온 작가 '우에하라'의 이야기를 섬세한 필체로 다소곳하게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사양(斜陽, 1947)>은 <인간실격(1948)>보다 1년 앞서 출간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외길만 고집했던 <인간실격>에서의 우울덩어리 요조와는 달리 주인공 가즈코와 나오지 남매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마치 다자이가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는 모양새이긴 했어도, 아직은 '희망'의 여지가 보이는 이유다.

그리고 일본의 전통적 민족성을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야마토(大和)'를 조금만 들여다 보자. 현재 일본의 다수 국민의 뿌리이자,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야마토 민족'을 의미하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익히 알고 있는 민족주의(大和魂)의 뿌리이기도 하다. 왕은 왕의 자리에서, 평민은 평민의 일을 하는 것처럼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ㅡ이것이 바로 야마토의 의미였다. 겉으로 보기엔 꽤나 적절한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실상 이 야마토 정신이라는 것은 신분을 떠나 노력함으로써 지금보다 나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이를 어긴다면 왕이나 귀족은 질서유지 명목으로 이어받기를 거부한 자식 또는 일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글에 접근해 본다면, 나오지는 여지없이 갈등하는 다자이의 표상일 것이다. 아마도 나오지는 천성은 귀족이었으나 평민의 삶에 홀렸고, 평민이 되고 싶었으나 평민에 대한 혐오감을 지닌 귀족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뼛속까지 귀족이었던 나오지는 결국 동경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가즈코의 삶은 다자이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삶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반항과 혁명.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개척한 삶을 살기로 작정한, 확신에 찬 의미가 있는 삶말이다.

<인간실격>과 <사양>을 연장선상에 놓고 들여다볼 때 이 작품들은 다자이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싶다. 살고 싶다는, 살려달라는... 나에게 살아갈 의미를 달라고 하는.... 그 절절하고 피 끓는 삶에 대한 반어법 말이다. 가즈코와 나오지라는 선택지에서 결국 요조를 택한 다자이의 삶이 참으로 애처롭다.

누나, 나는 귀족이었어.

코미디언스/그레이엄 그린

코미디언스 ㅣ 페이지터너스
그레이엄 그린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빛소굴 출판사 페이지터너 시리즈의 네 번째 도서인 <코미디언스>는 20세기 영미문학권 최고의 작가, 수차례 노벨 문학상 최종 후보 명단에 언급되었던 작가, 그레이엄 그린의 1966년 작품이다. 1991년 백혈병으로 사망하기까지(향년 86세) 그린은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영화화되었으며, <코미디언스> 또한 1967년 리처드 버튼,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국내명 '위험한 여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귀환 불능 지점을 지난다.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와 도미니카 공화국을 운행하는 네덜란드 화물선 메데이아호는 몇몇의 승객들ㅡ수도에서 호텔 트리아농을 운영하는 '브라운', 어딘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자칭 '존스 소령', 1948년 미국 대선 후보였던 '스미스 부부', 단답형 대답만 하는 '페르난데스', 제약회사 직원 등ㅡ이 승선해 있었다. 그들 중 스미스 부부와 존스 소령이 브라운의 호텔에 숙박하기로 결정하면서, 특색 없는 이름을 가진 이들의 인생이 교차되기 시작한다.

당시(1960년대) 아이티의 상황은 형편없었다. 군부 쿠데타로 혼란을 수습하고 독재 정권의 기반을 잡은 프랑수아 뒤발리에(파파독Papa-Doc/바롱 사메디)는, 자신의 사조직 통통 마쿠트(정식 명칭은 '국가안보지원군/MVSN)를 통해 공포정치의 끝판왕으로 등극해 있었고, 국민들은 뒤발리에 덕분에 '돈 없이 사는 법(252쪽)'을 배워야만 했다. 그러니 브라운의 호텔에 관광객이 있을 리 없었고, 스미스 부부의 야심찬 아이티 채식주의 센터 건립 계획은 어이없는 실소를 자아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아이티에 도착하고 얼마 후, 사회복지부 장관인 닥터 필리포의 시체가 호텔 수영장에서 발견된다. 자살이 분명해 보였으나, 아이티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주치의 마지오는 연루될 빌미를 애초에 차단해야 한다며 장관의 시체를 유기한다. 그러나 이 또한 어이없이 시체가 발견되는 바람에 그들은 통통 마쿠트의 관심을 받게 되고, 닥터 필리포의 가족들은 장례식에서 시체를 강탈당하는 기가 막힌 상황에 처한다.

그 놈은 진짜예요.

공포는 항상 진짜죠.

그레이엄 그린의 <코미디언스>는 나에겐 그다지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었다. 읽는 중엔 '도대체 왜 제목이 코미디언스일까?'에 매여 있었고, 읽고 나서는 마음이 갑갑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서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각자 나름의 사정에 의해 진행된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아도 음습한 그림자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파파 독이 있다.

파파독은, 독재자 뒤발리에가 태생은 마음씨 좋은 시골 의사 선생님이었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Papa Doc'은 어쩌다 공포의 상징인 '바롱 사메디(죽음의 정령)'가 되었을까? 그 해 아이티의 국민들은 파파 독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그가 선사하는 공포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이방인인 브라운과 스미스의 존재는 겉돌다 못해 기이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특히 장관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맥거핀이 등장하는 바람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이들의 연관성을 추정하느라 글의 방향을 잘못 잡은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리석은 읽기를 시도한 탓에 마지막엔 씁쓸함을 느꼈다. 이 사건은 다만 아이티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이엄 그린의 <코미디언스>는 어찌 보면 독자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그 배경에 존재하는 지독한 공포의 존재 '파파 독'을 지워버리려 한 게 아닐까 싶다.

판자촌이 가득한 수도 한복판, 굶어죽는 사람이 수두룩한 그곳에 채식 센터를 건립한다고 하는 스미스 부부나, 그냥 형식적으로 체포당해 고초를 당하는 존스 소령이나, 호텔 수영장에서 죽는 바람에 장관을 먼 친척 같은 사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브라운이나... 그들의 행동을 찬찬히 따라가며 어느 새 잊고 있던 아이티의 현실은 외부인 사이에서 문득문득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것은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는 공포다.

코미디언의 역할은 웃음을 통해, 때론 눈물을 통해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이다. 나의 처지를, 이 비참한 현실을... 그런 의미에서 <코미디언스>의 모든 등장인물은 충실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감당하는 코미디언이다. 결국 희극과 비극은 공존하며, 희극은 유예된 비극에 불과할 뿐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날 웃게 해줬거든요.“

나는 지리멸렬한 삶 속에서

이런저런 요령을 터득했지만,

남을 웃기는 재주는 익히지 못했다.

R.U.R(로숨 유니버설 로봇)/카렐 차페크 원작

R.U.R - Rossum's Universal Robots 로숨 유니버설 로봇
카테르지나 추포바 지음, 김규진 옮김, 카렐 차페크 원작 / 우물이있는집 / 2021년 11월

카렐 차페크의 원작을 바탕으로 재창조된 그래픽노블 <R.U.R. : 로숨 유니버설 로봇>은, 겉으로 보기엔 로봇이라는 비물질을 다루는 디스토피아 SF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인간'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에 기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에 대한 아름다운 찬가다.

가장 값싼 노동자,

부려먹기에 가장 경제적인 노동자,

로봇입니다!

<R.U.R.>은 총 4개의 막(서막, 1~3막)으로 구성된 희곡이다. 1920년, 작은 외딴섬에 해양 생태 연구를 위해 '늙은 로숨'이 도착한다. 그는 극단적 유물론자로서 '신이 필요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결국 '살아있는 물질'을 발견한 그는 생명을 만드는 시도를 통해 '개선된 인류'를 불완전하게나마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아들인 '젊은 로숨'과 로봇의 대량 생산에 관한 갈등을 빚으며 미완성 실험체만을 남긴 채 사망하고, 젊은 로숨은 로봇의 대량 생산화 기술을 고안해 낸다.

세월이 흐른 후 늙은 로숨의 노트를 손에 넣은 로숨 로봇회사의 사장인'해리 도민'. 그는 완벽한 인간, 완벽한 유토피아를 꿈꾸며 인간을 섬기기 위한 로봇을 대량 생산해낸다. 그리고 로봇의 섬에 글로리 그룹의 딸인 '헬레나 글로리'가 도착하면서 이야기의 서막이 오른다.

<R.U.R>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헬레나가 섬에 도착하고 10년이 지난 후이다. 그동안 로봇이 주는 편리함에 길들여진 인간은 나태하고 무기력해졌으며, 생식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인간과 로봇의 숫자는 역전을 향해 달려갔고, 신의 영역에 손을 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헬레나의 부탁으로 생리학 박사인 '갈'은 일부 로봇의 두뇌를 개선하기에 이르고, 이것은 결국 로봇 혁명의 발판이 되고 만다.

<R.U.R>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페크의 조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에서 분리된 공화국이었다. 철학자이자 유물론자 그리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1850~1937)'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마사리크는 가톨릭을 배척하고, 휴머니티를 선호한 사상가였으며, 이를 정치의 윤리적 기반으로 상정했다.

마사리크는 노동문제를 인간의 존엄성과 연관 지음으로 사회주의자로 보이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마르크스의 계급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완벽한 인간의 구현'. 그것이 마사리크가 원한 휴머니티 사상의 사회주의였다. 이러한 마사리크의 행적을 돌아볼 때, '늙은 바숨'은 바로 '마사리크'의 표적이며, 해리 도민의 모습에서도 어느 정도 그의 모습이 보인다. 마사리크 또한 늙은 바숨과 마찬가지로 아들인 얀과 반목하였으므로 이러한 유추가 과장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갓 독립한 신생국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 자생 능력이 없는 국가의 독립, 이데올로기의 투쟁, 산업화에 의한 빈부의 격차. 이 모든 것들은 블랙홀처럼 조국을 집어삼켰고, 그 한복판에 서있던 차페크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었으며, 이러한 혼란이 <R.U.R>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인간에 대한 찬가'는 먼저 로봇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차페크의 '로봇'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차가운 금속 덩어리가 아니라 인간과 같은 조직으로 이루어진 '유기합성 인간형 로봇'이다. 마치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칸트나 FSS(The Five Stars Stories)에 등장하는 파티마 같은 존재 말이다. 즉 인간과 로봇을 나누는 경계 따위는 출생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것, 인간이 아니지만 더 인간다운 존재. 그들이 차페크의 '로봇'이었다. 결국 이야기는 노동과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건축가 '알퀴스트'의 마지막 행동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사라진다. 필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삶은 계속될 것이고, 우리가 모르는 그 시대를 로봇들이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꿈만 꾸었으나 그들이 살아있는 한 우리가 꿈꾸었던 시대를 그들은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인간의 단점을 제거한 로봇이야말로 늙은 로숨이 꿈꾸었던 '완벽한 인간'이었고, 차페크의 로숨 유니버설을 완성시키는 '완벽한 로봇'이었을지 말이다. 나도 그러길 바란다. 새로운 세대의 로봇 유니버설(Robot Universal)이 우리가 꿈꾸던 현실(Real)이었기를... 그것이 새로운 R.U.R이기를.

생명은 끝나지 않았네!

생명은 끝나지 않을 걸세!

끝난 것은 우리들 뿐이네.

[100자평] 사양

사양 ㅣ 에디터스 컬렉션 1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다자이 오사무의 냉소는 언제봐도 즐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