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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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사회의 여성인식은, 아마 1970년대의 미국사회와 비슷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공식적인 국제기구들이 제공하는 수많은 '객관적 수치'상 뚜렷하게 여성들에게 가혹한 국가이다.

OECD 국가들 중에서 인권 수준도 높은 편이 아니지만, 여성 인권 수준은 낮은 편이 확실하다. 

안타까운 부분은, 우리 사회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살기 힘든 국가라는 점이다.

미국의 페미니즘이 꽃피운 70년대와는 달리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률은 둔화되고 있고, 청년들의 취업률은 사상 최저를 찍고 있다.

OECD 통계로도 우리나라의 남성들은 가장 많은 시간을 일하고,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가장 많은 이혼과 자살을 한다.

지옥불반도, 헬조선, 이 단어들은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성에게도 이 땅은 괴롭다. 

게다가, 남성들 스스로 체감조차 하지 못하는 가부장제와 남성 기득권을 무작정 비난부터 당하니,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다.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으로 대표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 

무엇이 떠오르나?

워마드, 메갈리안이다. 

 

 메갈리안은, 중동호흡기질환 - 메르스 사태때 촉발된 커뮤니티이다.

거대 커뮤니티의 메르스 관련 게시판에, 어처구니 없게도, 누군가 전염의 원인을 어떤 여성으로 특정했다.

이것은 명백히 우리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성차별적 시각이 툭, 하고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 최초의 글은 누가 뭐래도 명백한 여성혐오였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옹호하는 댓글들이 올라왔고, 순식간에 여성 전반에 대한 혐오로 불타올랐다. 

당연히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여성들이 반박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논리적인 반박이 따랐으나, 먹힐리가 없었다.

결국 여성들이 택한 방식이 미러링이었다. 급식체에는 급식체, 중2병엔 중2병으로 받아 칠 수 밖에 없다. 

혐오를 혐오로 받아치는, 본능적이고도 직관적인 단체행동이 시작됐다.


한편, 이 과정은 여성들이 자기 주도권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메르스 게시판에 가득찬 여성 혐오 글에 상처받은 여성들이 '메갈리안의 딸들' 이라는 여성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다. 흔히 '뒷담화를 하며 친해진다' 고 하지 않던가.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것은 매우 직관적이고 효과적인 전술이다. 이를 통해 여성들만의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공동체의 목소리' 를 낼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다. 우리 역사 상 가장 큰 여성들만의 커뮤니티였을터다.

이 와중에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졌고, 연이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들이 발생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국 남성들에 대한 뒷담화로 시작된 '반 여성혐오' 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억압당하고 고통받아온 여성들만의 커뮤니티는 사회 전반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보다, '여전히' 혐오를 혐오로 대응하는 스트레스 해소용 막말에 머물렀다.

발생 취지와 초기 발전 방향은 페미니즘의 그것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엄연히, '그렇지 않다.' 고 주장하는 근거다. 

슬프게도, 이런 모습들이 우리나라의 대다수 대중들에게 '페미니즘' 의 이미지로 굳어져버렸다.

촛불 시위에도 참여했던 많은 여성단체들이 있지만,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은 '한남충 타령'의 프레임에 갇혀있다. 

단지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과장하고 부풀리는 남성 커뮤니티, 혹은 언론의 잘못 역시 존재한다.

외국 사례를 봐도, 초기의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중심사회의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이것은 한때 우리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공산주의' 라는 프레임 안에서 억압받고 고통받았던 사례와 같다.

진보적인 사상은 언제나 기득권의 방어에 막히기 마련이다. 노동운동에 반하는 기득권층은 당연히 자본가들이었고, 여성운동에 반하는 기득권층은 당연히 남성들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성주의운동은 여러 이유로 '남성차별', 혹은 '남성혐오' 라는 프레임 안에 놓여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상당한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 건강한 활동들이 형성됐다. (히피운동과 궤를 함께 했던 미국의 여성해방운동은 폭탄테러와도 같은 과격한 방식이 기도된 적도 있다!) 

70년대 중후반의 풍요로운 미국에서 형성된 새로운 활동가들은 사상과 이론으로 페미니즘을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했고, 남녀 모두에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아젠다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등학생들에게도 통할만큼 교육적인, 남녀 평등을 위한 페미니즘 아젠다. 그것이 당대 페미니스트들의 지상과제 중 하나였던 것이다.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 책이 그 결과물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먼저 "페미니즘이란 간단히 말해서 모든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p.25) 이라고 정의한다.

70년대에 스텐포드에서 공부한 흑인 여성인 벨 훅스 역시 '남성들을 적대시하는 페미니스트' 라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위에 인용한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 역시 남성을 적대하지 않는 표현이 좋았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임신선택권, 외모주의, 페미니스트 내부의 계급투쟁, 일하는 여성들, 인종과 젠더의 문제, 폭력에 관한 부분, 활동하는 여성들이 남성성을 강요당하는 문제, 가정 내에서의 페미니즘 교육, 결혼관, 성에 관한 논쟁, 동성애 등 여성운동에 관한 거의 모든 문제를 한번씩 짚고 간다.


일단 이 책을 제대로 읽고나면,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그다지 큰 해악을 끼치는 이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어떤 테마들도 '남성 기득권' 과 충돌되지 않는다!! 


아마 많은 남성들이 '나는 차별주의자가 아니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남자에게든 '너 그거 여성혐오 발언이야.' 라고 지적하면, 대부분 손사래를 치며 '그럴 리 없다.' 고 펄쩍 뛸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엄연한 억압적 가부장제의 대표와 다름없을 정도의 남성중심사회이다.

그 예를 생활속에서 속속들이 찾을 필요도 없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 운동만 봐도 알 수 있다.

피해자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지적하지 않겠다. 그런 피해를 남성이 당했다면, 바로 공권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테니까. 직업적 약자, 게다가 여성은 단순한 갑질을 넘어 성적인 착취를 당한다. 공권력에 호소하면, 공권력으로부터 2차피해를 당한다. 굳이 장자연씨 사건같은 고위층이 얽힌 사건을 되새길 필요도 없다. 최근 청와대 청원으로 주목받은 단역 여배우가 2004년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과 협박에 시달리다, 2009년에 자살했던 사건의 전모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더 가볼까? 안희정 전 지사 사건도 우리의 사법체계가 지극히 남성중심적 시각을 갖고 있기에 범죄의 입증이 힘든 사건이다. 사실 대부분의 성폭력이 범죄 입증이 엄청나게 힘들고, 그 과정 안에서 피해 여성들은 2차 3차 가해를 당한다.

우리 사회 전반은 철저히 남성 중심적이다.

수많은 국제사회의 기준에 의한 객관적 수치들을 대입해도, 남성들은 '나는 누린게 없어' 라고 호소할터다.

사실일 수 있다.

가부장제에서 태어나 생득권을 취득했고, 누리며 살아왔지만, 무엇을, 어떻게 누렸는지 우리는 모른다. 

때문에, '미투운동' 을 통해 '착취당하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자 마치 착취가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했던 남성들이 벌벌 떨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당신이 뭐건간에, 다른 여성의 허벅지나 어깨를 함부로 쓰다듬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건 사회를 떠나 인격과 인격간의 가장 기본적인 예절이다.


이 당연한 '도덕' 을 60살 남성에게 또박또박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딸 같아서 그랬다' 면 눙치고 넘어가준다.

우리 사회가 남성주의 사회라는 증거이다. 

그렇다.

남성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그 방법과 형태에는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

어쩌면,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연하게 누려온 것' 을 가르치는 것보다,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알려주는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 

위에 언급한 벨 훅스가 내세운 테마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조차 여성들은 빼앗겨 왔다. 그것을 먼저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남성들을 가르치는 주체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한다는 생각 역시 차별주의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남성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오히려 같은 남성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다 여성주의적 시각' 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버려야 한다. 

한 명의 남성이 모든 남성을 대표할 수 없듯이, 한 명의 여성이 모든 여성을 대표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사회의 여성들 역시 남성중심 사고방식에 길들여있다.

여성들의 '자기주도권' 을 의식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남성들을 욕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치는 것 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그것을 통해 여성들이 자기주도권을 의식화한다면, 인정한다.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머무르면 안된다. 

자신들을 억누르고 있는 남성들이 '고작' '한남충' 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여성들의 자기 주도권으로 연결된다면, 그 다음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남녀를 떠나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목소리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타인의 인권을 낮추는 방법이 아닌, 여성의 인권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적 공감대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작게는 데이트 비용 문제에서, 생리휴가, 임신선택권, 육아 지원금, 미혼모 보조 정책 등등으로 단결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남성들의 군 가산점 찬반에 우루루 몰려갈 필요가 없다.

남성들의 권리를 뺏는다고, 여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남성들이 얻는 권리만큼, 여성들이 얻을 권리를 찾아야 한다.

남성을 비하하고 비난하는 일 따위로 감정을 소모할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모든 남성들에게 고한다.

어린 아이가 존중받는 사회가 지옥일 리 없다. 

노인이 존경받는 사회가 지옥일 리 없다.

일본인이 1등시민, 조선인이 2등시민인 사회가 지옥이다.

유색인용 화장실과 차량칸이 분리되어 있는 사회가 지옥이다. 

여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지옥일 리 없다.

남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지옥일 리 없듯이. 


남녀평등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가장 높은 고지이다. 

그러기 위해, 여성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사회 전체가 함께 공부하고, 학습해나가야 한다.

치고받는 공격과, 그를 받아치는 공격.

차별에는 차별로, 혐오에는 혐오로, 그래봤자 영원히 평행선이다.

여성 차별의 반대말은 남성 차별이 아니다.

모든 차별의 반대말은 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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