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
차무진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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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릭시르의 한국 작가 장르문학 라인은 정말 최고인 것 같다.

[궁극의 아이], [불로의 인형], 그리고 [해인]에 이르기까지. 

아주 신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익숙한 개념들과 중심 스토리의 조화가 무척 뛰어나다.

세련된 문체와 유려한 필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관과 설정을 억지로 현실 세계에 가지고 들어오면 자기 파괴적인 오류가 일어나곤 한다. 팬들은 흔히 "설정 오류" 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장르적 완성도를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이야기의 흥미마저 떨어뜨린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을 키워 나가는 '팩션' 이라는 하위 장르의 경우는 더 위험하다.

상상력을 덧대 실제 역사적 사건의 인과를 재조합하는 작업은 '역사소설'은 물론 '역사서'에도 필요한 일이다.

'팩션' 은 그러한 인과에 완전히 세계관이 다른, 생경한 개념을 집어넣는 일이다.

주술이나, 마법, 특별한 능력을 지닌 초인이나 불사인 등 말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을 직접 다룰 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오류를 가늠한 '눈' 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해인]은 '아기장수 설화' 를 모티프로 아기장수를 잉태할 '성모' 와 성모를 수호하는 '박마' 라는 존재를 만들어 역사의 이면에 녹아들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자칫 세계관을 설명하다가 끝날 수도 있는 복잡하고도 장대한 설정이 세밀하게 정립되어 있다. 

시점상 현재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조선시대로 훌쩍 거슬러올라가며 성모와 박마, 아기장수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아기장수는 현실을 뒤엎을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사람이다. 아기장수가 무사히 태어나, 자라나면 세상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제대로 정기를 물려받지 못한 아기장수의 혁명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혁명에 실패한 사람들은 거의가 '쭉정이' 아기장수였다.

성모는 아기장수를 수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여성이고, 남자의 씨와 관계없이 아기장수를 가질 수 있다. 박마는 성모가 아기장수를 잉태하면 아기장수가 무사히 태어날 때 까지 성모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 특수 요원이다. 성모가 아기장수를 무사히 낳지 못하면 박마는 죽거나 승려가 되야 한다. 새로운 성모가 태어나면, 새로운 박마가 그 역할을 물려받는다. 지역마다 비밀리에 양성되는 박마들이 있다. 소수지만, 천문, 지리, 무술에 능통한 박마들은 성모가 태어나면 자신의 임무를 시작한다. 

 하지만, 백한은 벌써 몇번이나 눈 앞에서 성모와 아기장수를 잃었음에도 이 땅 위에 살아있다. 죽기는 커녕, 불사의 몸이다. 그가 지켜야 할 성모 '숙지' 가 영원히 성모로 다시 태어나는 저주와도 같은 윤회에 갇혔기 때문이다. 아기장수를 잉태할 숙지가 영원한 윤회를 되풀이하게 된 계기는 한때는 친구이자 연인, 형과도 같았던 '만인' 이라는 박마였다. 만인은 백한과 함께 영원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숙지를 살해한다. 백한은 만인을 막고 숙지를 지켜내야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항상 한 발씩 늦고 만다. 

만인은 고려시절, 여진족이었던 백한을 박마 스승인 '백지' 에게 소개해준 인물이기도 했다. 백한은 백지로 인해 불사의 몸을 얻었고, 박마의 칭호까지 얻었다. 그 사이에 '숙지' 라는 성모가 나타났다. 

백한은 숙지를 사랑하지만, 숙지는 백지를 사랑했고, 만인은 숙지에게서 태어날 아기장수를 보필해 혁명의 한 축을 담당할 계획을 세운다.

영원한 술래잡기의 시작이었다. 


작품의 서사는 널을 뛰듯 시간축을 평행으로 옮겨다니지만, 읽기는 쉬운 편이다.

저자가 친절하게 연도를 알려주고, 이자춘(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순신(충무공), 전봉준(동학농민운동), 윤심덕(사의 찬미)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내세우기에 시대가 헷갈릴 이유는 없다. 설사, 헷갈린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중심 흐름에서 벗어날 일은 없다. 

작가가 애초에 시간의 흐름을 뒤섞은 이유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조금 헷갈리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메인 혼란' 에 지장을 줘선 안된다. 시간축은 양념이자 미장센일 뿐, 진정한 혼란은 클라이맥스 부분에 느닷없이 달려든다. 

시간축을 흐트러뜨린 것은 오롯하게 엔딩을 위한 것으로, 세심히 읽어보면 반전의 단초들이 섬세하게 자리잡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인 백한과,  안타고니스트랄 수 있는 인물, 만인이다. 

백한은 만인으로 인해 박마가 되었지만, 끊임없이 그를 옭아매는 그림자다. 언제나 '한 발 빠른' 그림자. 이것이 반전의 힌트.

이 두 인물의 독특한 설정이 이야기에 강력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해인]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고려시대 에피소드는 역시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데, 특히 만인과 백한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만인과 백한은 수직적인 관계다. 군인인 이들은 실제 지위상으로도 그렇고, 실력면에서도 그렇다. 거침없는 폭력과 동성애적 행위들이 공존하는 이 둘의 관계는 정립된 직후부터 최후의 그 순간까지 변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폭력과 섹스는 특정 인물들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치였지만, 이 작품이 활용한 방식은 꽤나 흥미로웠다. 어쩌면,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 - 특히 섹스라는 장치를 사용함에 있어 품고 있던 낭만주의나 나이브함이 확 깨지는 느낌이었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눅진하고 질퍽한 불쾌감이 녹아있다.

임신, 낙태, 태아살해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필연적으로 사람을 가르고, 베고, 피를 쏟아내는 장면들 또한 끊임없이 등장하는데다가, 끊임없이 실패하는 백한에 대한 정서적인 피로감이 중첩되고, 사실은 결말조차도 개운하기는 커녕 더 진창속으로 잡아 끄는 내용이어서 템포조절에는 다소 실패한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정서적으로 안도감을 줬으면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그럴만한 대목에서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이 드러나는 바람에 카타르시스나 위안보다는 혼란과 충격이 강했다.

그 뒤에라도 다소 정신적인 여유를 줬으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주구장창 괴롭기만 한 이야기는, 다음이 기대되지 않으니까...

투비 컨티뉴?? 영원히 고통받는 백한!!! 읽기싫어!!!! ㅜㅜㅋㅋㅋ 


그래도 소재 발굴부터, 여러 장치들까지. 장르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술들을 골고루 맛본 느낌이었다.

여러모로 공부할 가치가 있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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