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천병희
p393.

52+6+24+20+12+2= 116... 맞지?

둘리키온에서 52명에 시중꾼 6명, 사메에서 24명, 자퀸토스에서 20명, 이타케 12명과 시종2명.
- 구혼자는 108명이고 딸린 종들 8명.

아니 이렇게나 많은 사지 멀쩡한 (버러지 같은) 젊은 🐥들이 오뒷세우스 집에서 몇 해씩 매일같이 밥을 축낸 거야?
- 많은 줄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명시는 여기서 처음함.

일단 오뒷세우스네 재력도 밑 없는 쌀독같은 느낌이긴한데...
보면 볼수롣 열받네.

남의 집에 방어할 남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무력으로 쳐들어와서는 머릿수를 믿고 거머리처럼 들어앉아서,
몇 년동안 집 주인인 부인에게 재산 다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는 거잖아.
구혼자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강도놈들인 것.

가라! 오뒷세우스!
제대로 복수하지 않으면 재활용 상자에 던져버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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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연수작가 때문에(? 여러가지를 찾아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 미야자와 겐지 얘기가 나올 땐
아, 은하철도의 밤!... 을 어디다 놨지? 하곤
갈등하다가 결국 책장을 뒤지게 되었다. (자려고 누웠中)

보다가 문득 어린왕자 얘기가 생각났다.
미지의 행성에서 여러 존재들과 부딪히는 전개 방식이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찾아본 결과,
은하철도의 밤은 1934 초판.
어린왕자는 1943 출판.

그냥 비범인들의 소중한 머리에서 나온 창작물들이
숫자만 묘하게 엮여있는 것으로. (34, 43 이라니! 왠지 좋아:-)

첨가.
소와다리 출판물은 소설은 인간실격을 봤었는데, 세로쓰기였던가 싶을 정도로 번역도 가독성도 좋아서 다시 구입해 보았다.

역시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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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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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글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소설 한 권 보다는 여기저기 실린 글 들과 에세이를 더 접한 것 같다. (번역도 하고있고)

쉬운 듯하지만 쉽지 않은 그의 글을 읽다보면
애정하지만 부정하고 싶은 일본 문화와 과거의 문화 격차에 대해서 상기하게 된다.
딱 20대 중반까지 사그러들지 않는 막연한 동경을 가졌던 것 같다.(직업적인 아유도 있었고)
일본 물품의 수입을 단절시켜버린 예전 정부들의 시책도 한 몫을 했을테고,
어쨌거나 가장 가까운 선진국이었으니까.

현재 50대인 작가는 30대까지 그런 사회에서 살았을 테니 당시의 노스텔지어를 듬뿍 담은 생각들을 현재와 연결하여 뿜어낸다.
그리고 그런 독특한 글쓰기 방식은 무라카미하루키의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일일이 열거하긴 힘들지만 소재나 어휘에서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적지 않게 느껴진다.(대신 하루키는 동물적인 느낌이라면 김작가는 식물적인 느낌?:-)

무라카미 하루키는 지금 70대.
하루키가 나이먹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걸 감안하면,
둘 사이의 갭은 10-20년.

일본의 7,80년대의 전성기는 우리의 90년대 정서와 비슷하게 맞아들어간다고 보기에,
앞서간 감각들이(물론 그 감각은 또 서양에서 옮겨온 것들이겠지만) 대중문화나 문학에서도 연결되지 않나 짐작하게 된다.

단편 모음집인데 한 편을 제외하면 코로나 시절을 빠져나오는 듯한 때에 쓴 최신 글 들이다.

그토록 평범하기에 행복할 수 있는 미래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성실하게 인내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다가올 100%에 한없이 수렴하는 미래에 대한 예견이자
거꾸로, 현실을 미래에 대한 인과로 돌릴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이 주제는 전체 단편들을 꿰뚫고 있다.

동시에 작가 역시 지겨웠을, 지난한 시간들을 벗어날 외침으로도 느껴졌다.
‘희망을 가지자!’

유발하라리는 안좋은 미래는 상상함으로서 피해갈 거라고 얘기했다. 결국 미래는 많은 인류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화할테니까.

마지막 단편에 할아버지가 인간이 240년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몇 년 전에 아이가 읽고 들려준 ‘기억 전달자’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모든 기억들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전승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회색으로 기계의 부품처럼 사는 곳에서 마지막 기억전달자가 결국 사람들에게 기억을 다 공유하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내가 보는 세계는 어떤 것인지
내가 주장하고 뱉는 말은 정말 나의 본질인지,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을 끄집어 내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전달할 수 있을지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머릿속을 헤집음과 동시에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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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쳐박아놨다가
문득 아침할 일들을 끝내고 눈에 띄길래 비닐을 뜯었더니,
옹이같은 투박한 손가락 다섯 개가 눈탱이를 친다.

사람 손만 봐도 아픈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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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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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나의 물렁한 살갗이 들춰지고 근육층이 제거되며 보잘것 없고 앙상한 뼈마디만 남아있는 연약한 상태에서 여문 나무떼기로 툭툭 건드려지고 있는 듯한.
서문을 읽으면서 올라온 느낌이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버트런드러셀의 철학들이 떠올랐다. 아마 20세기를 오롯하게 꾁채우고 살아간 동시대의 철학자들이라 문제점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결방안을 비슷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만 러셀의 주장은 ’내면에 머물지 말고 외부로 한없는 에너지를 발산하라-!‘였다면 에리히프롬의 주장은 ‘ 외부로 향하기전에 진정한 내부를 보살필 수 있는 방안과 어긋나는 이유, 대책‘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에리히프롬을 읽고 러셀을 읽으면 순서적으로는 딱 좋을 듯:-).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라는 제목은 문제 제기이자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목차와 함께 살펴보자.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삶은 계속 완전해지려는 성질을 가지기에 그 자체가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 방해를 받으면 사랑을 향하지 않고 점차 죽은 것들에 끌리게 된다. 현대인들은 부산함 속에서 삶이 열정적이라 착각하지만 사실 내적인 활동성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지 못한채 살아가고있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과거 19세기에 악덕이라 여겨졌던 것들이 현재는 조금씩 변형 심화되어 기꺼이 인간 스스로가 사물이 되어 착취당하는 존재(수단)가 되기에 이르렀다. 결코 이성에 뒤지지 않는 감성을 기르고 창조력을 길러 무조건적인 소비와 수용에서 벗어나 가슴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인간자체의 목적성를 되찾자.

이기심과 자기애.
사람들은 이기심 자기애 나르시즘 이타적 이런 말들에 혼동하고 휘둘린다. 진정한 자기애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것에서 나오며, 자존애가 없는 사람이 이타적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이기와 나르시즘은 자기애의 결핍에서 나온 증상이다. 현대사회와 종교는 사람들에게 이타와 금욕을 강요하지만 결국 사회가 인간을 편리하게 다루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창의적인 삶.
창조적 자세는 생각하기에 따라 심플하다. 언제나 주변에 호기심어린 눈을 갖고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귀기울이고 오롯이 생각을 갖는 것.
저자가 유대교인 탓에 점점 구약에서 오는 예시가 많아지는 챕터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태도.
선선히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본능에 따라 충실하게 사랑을 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바와 상관없이 휘둘려 엉뚱하게 살고나니 미련이 남아서... 죽음이 두려워지는 것이라고.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자연스럽게 살아야 극복할 수 있는 것.

무력감에 대하여.
전업주부이다보니 가장 와닿았던 챕터이다.
집안 일은 대부분 물리적으로 힘이 필요한 부분이 많고, 휴식이나 휴무를 따로 떼기가 참 힘든 대표적인 365일 24시간 대기, 노로테이션 직업. 나라에 세금 내는 사람들 케어해주고 배출하는데 왜 무료 봉사직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데다, 누구나 적성에 맞는 건 아니라고 압축해서 푸념해본다.
무력감의 저변엔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의 의심을 낳고 결국 자신감 상실로 이어져 내면뿐만이 아닌 외부의 충격에도 대처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무력감을 감추려고 분주해지는 상태도 결국 껍데기만 있다는 걸 감추려는 기재. 사회의 권위(도덕적 의무, 종교등)에 자칫 맹목으로 누가 나를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무력한 복종만 남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기본 소득으로 자유를 얻으려면.
방법은 한가지다. 활동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소비하며 허덕이는 굴레에서 삐져나와야 한다. 소비로 스스로를 채우는 것은 끝이 없다. 내면에서 활동하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소비하는 인간의 공허함.
위와 비슷한 늬앙스.

활동적인 삶.
마지막 세가지 챕터가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자기발전을 지원하는 활동성을 키우자. 수동적인 줄도 모르고 수동적으로 사는 삶이 억지로 분주해지면 게으름과 진배없다.
외부의 압박에 노예가 되지 말고 수동적인 삶의 고통을 깨닫고,
앉아서 명상이라도 하며,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성장을 오롯하게 완성시켜 나가자.

내부의 에너지들을 긍정적으로 온전히 채우고 바깥으로 뻗어나가라는 얘기는 러셀의 행복의 정복, 아들러의 심리학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 산업발전은 서양의 것에 비해 약 백년 정도가 늦어진 까닭에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심리적인 박탈감도 그만큼 늦게 온 듯 싶다.
어릴적에 보았던 서양에서 들어온 영화나 드라마, 책등을 돌이켜보면 미국이나 유럽쪽은 이미 현대인들의 심리 회복에 대한 많은 고심이 있어왔고 대중매체에 녹아나는 경우가 많아서 ‘역시 선진국이구나-’ 하고 감탄했었나, 새삼 깨달았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대를 살고 있고, 이런 상태라면 온전한 사람들마저도 타격을 입을까 염려되는 상황이다. 어차피 예견되는 공황이라면 앞서간 철학들에게 지혜를 빌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는 듯 하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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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3-04-14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악은 무관심이다.

갱지 2023-04-1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도 죽었지만 사람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