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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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노동을 경멸하며 모든 것에 가격표가 매겨져 있는 그의 농장도 경멸한다. 그는 단 몇 푼이라도 받을 수만 있으면 경치라도, 아니 그가 믿는 하느님이라도 시장에 가지고 나가 팔려고 할 것이다. 사실 그의 진짜 하느님은 시장에 있다. 그의 농장에서는 아무것도 공짜로는 자라지 않는다. 그의 밭에서는 곡식 대신 돈이 자라며, 그의 꽃밭에서는 꽃 대신 돈이 피어나며, 그의 과일나무들에는 과일 대신 돈이 열리는 것이다. 그는 과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으며, 과일이 돈으로 환금되기 전에는 완전히 익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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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번지면 여길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미도리에게 말했다. "지금은 풍향이 반대라서 괜찮지만 언제 바뀔지 모르고 바로 저기가 주유소잖아. 내가 도와줄 테니까 짐 챙겨"
"별로 중요한 것도 없어." "그렇지만 뭐라도 있겠지. 통장이나 인감이나 증서 같은 거. 일단 돈이 없으면 안 되잖아."
"괜찮아. 난 도망 안 갈 거니까."
"여기가 불에 타도?"
"응, 죽어도 괜찮아."
나는 미도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미도리도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말이 어디까지 진심인지 농담인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무렴 어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알았어. 같이 있을게, 너랑."
"같이 죽어도 좋아?" 미도리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설마. 다급해지면 난 도망칠 거야. 죽고 싶으면 너 혼자 죽으면 돼."
"거참, 냉정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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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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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어쩌면 자신 에게 삶의 무거움을 미리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농담과 웃음과 천연덕스러운 행동으로 자기를 지켜오고 관계를 맺어왔다면, 그저 그런 방법으로밖에 혜인을 대할 수 없었으리라고.
어쩌면 여자도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인에게 기대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혜인과 자신 사이를 망쳐버릴까봐, 혜인을 떠나게 할까봐 자제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랑한 사람이고, 나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는 가벼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어야지 버림받지 않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더이상 웃음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혜인은 생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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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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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그 이후에도 세상은 예전과 똑같았다. 일곱시 반까지 학교에 가서 0교시 수업을 듣고, 야자를 마치고 집에 가면 열두시였다. 시간이 가기를,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음이 무뎌지기를 미주는 바랐다.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미주가 미래를 기대하지 않게 된 것은. 무엇을 이루고, 어떤 일들을 경험하고,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일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게 된 것은, 자신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믿음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열여덟 미주는 바라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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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로 지은 집> 편 중에서

그때의 나는 화가 났을까 슬펐을까. 아마 외로웠던 것 같다. 모래의 말은 맞았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너의 삶으로 흡수한다는 것은 파멸,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쓴 영혼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서른다섯이고 그때의 일을 자주 떠올리지는 않는다. 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해본 적도 없다. 누구나 살면서 몇 개의 다리를 건너듯이, 그때의 나도 공무와 모래와 함께 어떤 길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른다. 다리의 끝에서 각자의 땅에 발을 내디뎠고, 삶의 모든 다리가 그렇듯이 그 다리도 우리가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다리 위에서 우리가 지었던 표정과 걸음걸이, 우리의 목소리, 난간에 몸을 기댔던 모습들과 함께..
당시는 몰랐지만 오랜 시간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공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커졌던 것 같다. 절대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그것이 나의 독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게 했다. 어느 시점부터는 도무지 사람에게 다가갈 수가 없어 멀리서 맴돌기만 했다. 나의 인력으로 행여 누군가를 끌어들이게 될까봐 두려워 뒤로 걸었다.
알고 있는데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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