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저희가 자랑하는 <합리주의>(현대인에게서 신성한 힘이 있는 상징과 관념에 반응하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 원흉)가 인류를 <심리적 지하 세계>의 처분에 맡겨 버린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류는 이제 미신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다(혹은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해방되는 과정에서 인류는 지극히 위험한 수준까지 그 도덕적, 정신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도덕적 또는 정신적 전통이 붕괴된 순간부터 인류는 이 세계적인 규모의 방향 감각 상실과 분열을 그 대가로 치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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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세계에서 사람들이 특유의 무력감을 느끼는 까닭은 이 같은 정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서방 세계 사람들은 이제야 자기네의 문제가 바로 도덕적인 문제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야, 핵무기의 비축이나 경제적 <경쟁>만을 강조하는 것은 양날이 선 칼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윤리적 혹은 정신적인 방법이 그런 방법보다 더 효과적이리라는 것을 이제 이해하게 되었다. 윤리적, 정신적 방법은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감염 현상에 대 해 심리적 면역성을 키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 또한 시도 자체만으로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 나고 있다. 적어도 우리 자신을 상대로나 세계를 상대로, 나쁜 것은 항상<저들>(즉 우리의 적대자들)이라고 주장하는 한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악덕과 어두운 그림자(우리 본성의 그늘진 측면)를 인식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자기 본성의 그늘진 측면을 인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윤리적, 정신적 감염에 대한 면역이 가능한 것 이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우리는 모든 감염 현상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그 까닭은 우리 역시 저들과 똑같은 일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악덕에다 훌륭한 예의범절의 허울을 씌워두고는 이러한 사태를 보려고 하지도, 인식하려고 하지도 않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저들보다 약점이 하나 더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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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니 2020-03-30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인은 아닌거 처럼 말하는 군
 

기계의 주인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기계의 탄생과 함께 인간의 거의 모든 일자리가인공지능으로 대체되리라 예측된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하며살 것인가? 노동의 종말 이후 인간은 한없는 행복과 사치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인가, 아니면 인공지능이라는 노예에 외려 종속되어 놀면서 받아먹기만 하는 잉여 인간으로 전락할 것인가??
질주하는 과학기술은 머지않은 장래에 사이보그나 복제인간같은 새로운 인류 종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 포스트휴먼 시대 가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면, 현생 인류인 사피엔스는 과거의 네안데르탈인처럼 멸종해버리고 마는 역사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
이 같은 종말론에 직면해서 오늘의 역사학이 물어야 할 근본적 질문은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문학 3문이다. 인간의 거의 모든 위대한 업적은 이 세 가지 질문의 답 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룩됐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세 가지 질문은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것이다.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과 사물, 기계와 인간은 서로 소통하고 그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새로운 진화가 일어나고 있다. 결국 인류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는 만물과 어떻게 연결되어 어떤 관계를 맺느냐로 규정된다. 실제로 인류 문명도 그런 관계 맺음의 확장을통해 진화해온 과정이다. 앞으로 이 연결을 통해 진화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느냐에 따라 인간이란 무엇이고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이처럼 우리 시대 역사의 정답은 없으며, 답은 우리 스스로가 연결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역사가가 되려는 꿈을 가진 딸이 탐구해야하는 ‘역사란 무엇인가‘ 이고, 역사,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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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대 ‘문명의 충돌‘을 극복하기 위한 전제는 인식적 지향과 인과적 지향 둘 다를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일반적으로 문화라 불리는 의미 체계에 대한 성찰이다. 그린은 모든 부족의 인간은 세계와 타자를 보는 나름의 카메라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뇌를 자동 모드와 수동 모드를 함께 지닌 카메라에 비유했다.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뇌는 자동 모드로 설정된 카메라 로 세상을 인식한다. 이 자동 모드는 실제로는 자기 부족의 문화에 내재된 의미 체계에 맞춰 설정된 것이다. 인과관계 구성과 가치판단도 이 자동 모드로 이뤄진다. 문제는 서로 다른 자동 모드를 가진 사람들이 만났을 때다. 이때 필요한 것이 수동 모드다. 각 각의 자동 모드에 입력된 선택 체계를 수동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이해와 협력이 가능하다.
역사란 자동 모드 설정을 해제하고 수동 모드로 전환할 때 필요한 지식과 정보다. 역사에는 수많은 과거의 사례와 인물이 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카메라 렌즈의 시야를 넓히는 모드로 조절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역사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는 역 사에서 정답을 찾는 인과적 구성이 아니라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 기로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카는 역사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믿고 역사적 인과관계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근대주의자다. 하지만 탈근대라 불리는 우리 시대에는 그 정답을 해체하고 내가 가진 인식 지평과 의미 체계의 한계를 확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과거와 대화를 해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필연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각기 다른 수많은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가실현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 역사가 전개된다고 할때, 현재와 과거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자연과학처럼 인과법칙에 의거하기보다는 과거에 있었던 열린 가능성들을 재인식할 수있는 이야기들을 찾아내는 것이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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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던 것처럼 역사에서 인간은 행동의 자유를 가진다고 랑케는 믿었다. 그런 인간의 자유가실현되는 장면들을 묘사하는 것이 역사학의 가장 큰 매력이라 했다. 따라서 역사학이 그 매력을 충족시키기 위해 역사가가 가장애써서 파악해내야 할 사항은 각 시대에서 인간 행동의 자유의 한계를 설정했던 역사적 조건들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주도 이념‘이다.
랑케가 했던 가장 유명한 말이 실증사학자들이 마법의 주문처럼 말하는 "본래 그것이 어떠했는가 wie es eigentlich gewesen"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본래‘다. 실증사학자는 ‘본래가 과거의 사실을 지칭한다고 보지만, 랑케가 염두에 둔 것은 ‘주도 이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역사를 시간 속에서 과거 - 현재 - 미래로 이어지는 운동으로 파악한 것은 헤겔, 마르크스, 랑케 그리고 카 모두 일치한다. 단지 차이점은 그 운동이 일정한 목표를 향해 나가는 진보인가, 아니면 그때그때마다 시대의 필연성으로 나타나는 내적 연관성의 전개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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