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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월든 중에서...
독서에 관하여. 책의 언어에 관하여. 그리고 고전에 관하여.

오늘날 염가의 대량 출판이 자리를 잡고 그에 따라 많은 번역물이나왔지만 영웅을 그린 옛 작가들에게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근시켜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나 다름없이 외로워 보이며, 그들의 책들이 인쇄된 글자는 여전히 진귀하고 신기하게 보인다. 당신이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을 바쳐 몇 마디나마 고전 어휘들을 공부하는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어휘들은 거리의 천박함을 넘어서서 당신에게 영원한 암시와 자극을 줄 것이다. 농부가 자신이 주워들은 라틴어 몇 마디를 기억하고 되뇌어보는 것은 결코 쓸데없는 짓이아닌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더 현대적이고 더 실용적인 학문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탐구적인 학생은 그것이 어떤 언어로 쓰였고 얼마나 오래되었고 간에 항상 고전을 연구할 것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유일한 신탁이며, 그 안에는 가장 현대적이질문에 대하여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의 신탁이나 도도나에 있는 제우스 신의 신탁도 밝히지 못한 해답들이 들어있다. 고전 연구를 그만두는 것은 자연이 낡았다고 해서 자연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독서를 잘하는 것,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 이며, 오늘날의 풍조가 존중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이드는 운동이다. 그것은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과, 거의 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독서를 하려는 마음가짐을 요한다. 책은 처음 쓰였을 때처럼 의도적으로 그리고 신중히 읽혀야 한다.
책이 쓰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말로 한 언어와 글로 쓴 언어, 듣는 언어와 읽는 언어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대개 일시적인 것으로 하나의 소리, 하나의 혀 또는 하나의 방언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동물처럼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어머니로부터 배운다. 후자는 전자가 성숙되고 경험이쌓여서 이루어진 말이다. 전자가 ‘어머니 말’이라면 후자는 ‘아버지 말’이며 신중하고 선택된 표현이다. 이 표현은 단순히 귀로 듣기에는 너무깊은 의미를 가졌으며, 이것을 입으로 말하려면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아직 인류에게 읽힌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것들은 오직 위대한 시인들만이 읽을 수 있으므로. 만약 그 작품들이 읽혔다면 그것은 대중들이 별을 읽듯이, 다시 말해서 천문학적으로가 아니고 점성술적으로 읽혔을 것이다. 사람들은 장부를 기입하고 장사에서 속지 않기 위해서 셈을 배운 것처럼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읽기를 배운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에 대해서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 것이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기능들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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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월든 중에서...

사람들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유일한 협력은 극히 부분적이고 피상적인 것이다. 진정한 협력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적기 때문에 마치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화음처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념이 있는사람이라면 어디서나 똑같은 신념으로 협력을 하려들 것이며, 신념이 없는 사람은 그가 누구와 함께 일하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충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 협조한다는 것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든 가장 낮은 의미에서든 생을 같이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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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월든 중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대한 비판.

비교적 자유로운 이 나라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오해 때문에, 부질없는 근심과 과도한 노동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를 따보지 못하고 있다. 지나친 노동으로 투박해진 그들의 열손가락은 그 열매를 딸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것이다. 사실, 노동하는 사람은 참다운 인간 본연의 자세를 매일매일 유지할 여유가 없다. 그는 정정당당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여유가 없는데, 만약 그렇게 하려 들다가는 그의 노동력은 시장가치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단순한 기계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될 시간이 없다. 인간이 향상하려면 자신의 무식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데, 자기가 아는 바를 수시로 사용해야만 하는 그가 어떻게 항상 자신의 무식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를 평가하기 전에 그에게 가끔 무상으로 먹을 것과 입을것을 주며, 우리의 강장제로 그의 기운을 북돋아주어야 하겠다. 인간성의 가장 훌륭한 면들은 마치 과일 껍질에 붙어있는 과분果粉처럼 아주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부드럽게 다루지는 않는다.

때때로 나는 우리 미국인이 흑인 노예제도라고 하는 야비하고 외래적인 제도에 빠져 있을 만큼 천박한 국민인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지금 남부와 북부에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려고 눈을 번뜩이는 악랄한노예 주인들이 수없이 많다. 남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북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러나 가장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 감독일 때이다.
인간에게는 신성神性이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밤낮으로 장터를 돌아다니는 저 짐마차꾼을 보라! 그의 몸 안에서 조금이라도 신성 이 작동하고 있는가? 그의 가장 큰 의무는 자기 말에게 먹이와 물을 주는 것이다. 그가 챙겨야 할 짐마차의 운송 대금에 비교할 때 그의 운명은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의 상전은 바로 ‘시끌벅 적 사업가‘ 씨가 아닌가? 그의 신성과 불멸성은 어느 정도인가? 그가 하루 종일 움츠리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막연한 불안에 휩싸여 있는 모습을 보라. 불멸이나 신성은커녕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 즉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서 얻어진 평판의 노예가 되어있는 것이다.
여론, 즉 대중의 평가는 우리 자신에 의한 자체 평가에 비교하면 대단한 폭군이 되지 못한다. 자기가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가 곧 그의 생애를결정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 대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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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정상과학의 성격 장에서...

패러다임이 가지는 중요성과 의미.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패러다임이 폐기 될 때 발전하는 과학혁명의 구조.

그들은 사실과 이론 두 가지를 모두 다루었고, 그들의 연구결과는 단순히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보다 정확한 패러다임을 산출했으며, 그들은 연구의 시작점이었던 원래의 패러다임이 가진 모호함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얻었다. 다수의 과학에서 정상연구 활동은 대부분 이런 성격을 띤다.
나는 이들 세 가지 유형의 문제들, 즉 의미 있는 사실의 결정, 사실의 이론과의 일치, 그리고 이론의 명료화 등은 실험과학과 이론과학 양쪽에서 정상과학 문헌을 모두를 차지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과학의 문헌을 모두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일반적이 아닌 비정상적인 문제들도 들어 있으며, 이런 비정상적인 문제의 풀이는 과학적 활동 전부를 특별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문제들은 요구한다고 해서 가질 수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문제들은 정상연구의 진보에 의해서 마련된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출현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문제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압도적 다수는 보통 앞에서 요약한 세 가지 범주 가운에 하나에 속하게 된다. 패러다임 아래에서의 연구는 여타의 방법으로는 수행될 수 없으며, 그 패러다임을 버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 정의하는 과학의 실행을 중단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곧이어 실제로 그러한 패러다임이 폐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폐기가 바로 과학혁명이 돌아가는 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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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강의, ‘법가를 위한 변명’ 중에서...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법가의 장단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이며, 법가의 특징을 규명하는 것이 법가의 개별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개별적 가치나 배타적 성격에 탐닉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 신조입니다. 다른 것과의 연관 즉 관계론에 대한 혐오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상이 갖는 한계란 실상 완성된 체계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이 역사적으로 제약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자면 절대적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언제나 상대적 진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제약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법가는 물론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읽은 모든 사상 체계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상은 다른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파란만장한 역사적 전개 과정의 일환으로 출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철학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제약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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