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예술은 추하다. 왜 그래야 할까? 생각해보라. 과거의 예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렸다. 그렇게 탄생한 ‘아름다운 가상’ 속에서 예술과 사회, 이상과 현실은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화해가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것이다. 왜? 사회가 추할 대로 추해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를 정직하게 증언하려면 현대 예술은 추해져야 한다.
현대 예술은 추상적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인간들의 관계 자체가 추상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물의 질적 측면들을 사상하고, 거기서 교환가치의 양을 추상해낸다. 인간들 사이의 협력도 화폐라는 추상적 관계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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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언어적 본질이 부정당하자 자연은 애도의 침묵을 지켰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관리되는 사회의 비인간성에 항의하기 위해 예술은 이 침묵을 미메시스한다. 현대 예술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한다. 왜? 소통은 ‘코드‘를 전제하고, 코드는 획일성을 의미하기 때문 이다.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 안에 통용되는 코드를 거부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예술은 평균적인 대중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는 현대 예술이 관리되는 사회의 비인간성에 항의하는 방식이다.
고전 예술은 대중과 ‘코드‘를 공유했다. 현대 예술은 일부러 그 공통의 ‘코드‘를 깨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오직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낸다. 현대 예술이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왜 현대 예술은 사회에 널리 공유되는 코드를 거부하고 굳이 이해되지 않으려 하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예술은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문화산업은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아무리 난해한 작품도 대중이 이해하는 코드로 번역해 상품으로 판매한다. 한때 충격을 주었던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칸딘스키의 작품도 오늘날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때문에 예술은끝없이 자신을 혁신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상투적 코드 안에 가두려는 문화산업의 추적을 피해 끝없이 탈주하며,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이성의 타자로 남으려 한다. 자연을 전혀 닮지 않으면서도 현대예술은 이렇게 자연을 미메시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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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이전의 언어는 우리 것과 달라, 그 낱말만 들으면 사물의본질이 저절로 떠올랐다. 애초에 이름을 아무렇게나 붙이지 않고 음성에 사물의 본질을 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벨탑을 쌓은 죄로인간은 아담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언어는 더 이상이름 하지 못하고, 자의적인 기호가 되어버린다. 자의적‘이라는 말은 ‘제멋대로‘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바벨의 언어는 제멋대로 붙인 딱지이기에, 그 음성을 들어도 그 안에 사물의 본질이떠오르지 않는다.
제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때 아무렇게나 지어주는가? 애써 그 이름 안에 아이가 커서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모습을 담으려애쓰지 않는가. 옛날에 인간들은 사물에 이름을 붙일 때 마치 제 자

식에게 이름을 주듯이 그렇게 붙였다. 하지만 바벨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이름은 한갓 자의적 기호가 된다. 심지어 인간의 이름마저도.
기억하는가? 학창 시절 우리는 가끔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렸다.
37번, 나와!" 아직도 이 사회는 내 정체성을 주민등록번호로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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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이 창조한 것

예술계가 자격을 부여하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게 예술 작품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뒤샹이라는 예술가가 창조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예술 작품은 아닐 거다.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샘을 만든 것은 변기 공장의 노동자들일 테니까.
그럼 그는 과연 무엇을 창조한 걸까? 그것은 바로 ‘코드(code)‘, 즉 하나의 변기를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관습이다. 그가 샘을 전시회에 보냈을 때, 사회에는 아직 변기에 예술 작품의 자격을 부여하는 관습(코드)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엔 커튼이 드리워져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예술계는 분명히 이 작품에 예술의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현대 미술에 관한 책을 들춰보라. 이 작품은 틀림없이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거다. 이 차이를 낳은 것은 무엇일까? 물론 변기를 전시회에 보낸 뒤샹의 장난이다. 이 장난을 통해 결국 그는 새로운 코드를 창조했다. 변기까지도 예술 작품으로 변신시킬 수 있는 그런 코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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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자화상>으로 설명하는 하르트만의 미학

여기에서 또 다른 층위가 나타난다. 이 층위에선 모든 사람에게 관계 있는 어떤 것이 나타난다. 즉 그림을 보면 두구나 자기 것이라고 느끼게 되는 어떤 인간 보편적인 것 말이다. 이 인간 보편적인 것은, 사람마다 다른 개인적 이념과는 구별된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추구하며 살다간 한 화가의 삶이 전 인류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듣는다. 하나의 그림을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 계층이다. 이 계층 때문에 한 개인의 기록일 뿐인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감동을 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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