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과 잿빛의 세계 7
이리에 아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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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이 슬픔을 극복하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 완결권.
이야기를 더 끌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그림도, 이야기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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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 소설 쓰는 판사의 법정 이야기
정재민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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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간 판사로 재직하다가 2017년경 그만둔 글쓴이가

재판(특히 형사재판)을 했을 당시를 회고하며 쓴 이야기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실제 사건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고,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시선이 따뜻하다. 왠지 좋은 판사였을 것 같다.

 

반면 재판을 할수록 점점 확신이 드는 것은, 너무나 뻔한 소리지만, 인간은 모순이 한 몸에 공존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 위대함과 초라함이, 평안과 불안이, 생명과 죽음이, 용기와 두려움이, 집단성과 개인성이 양립할 수 있다. 여러 모순된 측면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복잡한 존재이므로 한 측면이 있다고 해서 반대의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을 겪으면서 무엇보다도 내가 판사로서 하는 일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오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런 지옥으로 몰아넣었을까. 그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그 사건 이후 재판을 대하는 자세와 관점이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마치 운전하다 가족을 잃어본 사람이 다시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법복 안쪽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세줄의 표어가 새겨졌다.
˝음식 장사는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 되고,
의사는 병으로 장난치면 안 되며,
법조인은 정의로 장난치면 안 된다.˝

나는 판사가 위법과 적법을 판단하는 사람이지 도덕성을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도덕적 판단은 각자의 마음속 판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도 작은 법정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대개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내 삶을 두고 악이라고 몰아세우는 검사와 선이라고 변호하는 변호사가 격론을 벌인다. 내 마음속 판사는 날마다 내게 묻는다. ˝공소사실을 인정합니까˝ 라고. 그때마다 나는 피고인석에 앉아서 대답을 찾느라 힘겨워한다. 법정의 햄릿이 된다. ˝자백이냐 부인이나, 그것이 문제로다˝라면서. 몸과 정신이 연약하고 늘 변한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도덕적 일관성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비도덕적인 것 아닌가 투덜거리면서,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피고인석을 걷어차고 마음속 법정에서 판사의 자리를 꿰차는 날을 꿈꾼다. 나 스스로 나의 모든 행위의 준칙을 자신 있게 설정하고, 나 스스로 나의 행위의 가치와 당부를 판단하는 마음속의 판사가 되기를 꿈꾼다. 아니, 법정이라는 판단의 공간 자체를 걷어치우고 궁극의 자유로움을 얻기를 꿈꾼다.

국민 눈에는 재판이란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결과 채무다. 의사가 아무리 친절하고, 인품이 좋고, 설명도 잘해주고, 성실하게 치료해도 오진을 내린다면 누가 좋은 의사라 하겠는가. 그저 돌팔이일 뿐이다. 차라리 불친절하고 성의 없어 보여도 정확히 진단해서 확실히 치료해준 의사가 진짜 의사다. 아무리 인품이 좋고, 친절하고, 연륜이 높아도 판결이 엉터리라면, 인품이 나쁘고, 불친절해도 정확한 판결을 하는 판사보다 못하다. 아니, 훨씬 나쁘다.
많은 사람들이 판사의 인품이 훌륭하지 않은지, 자신과 소통을 기피하려 하는지가 아니라 사실과 다른 판결, 억울한 판결을 받을까봐 불안해한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형량이 약해지는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인간의 고결함과 위대함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그렇게 고결하다거나 선하다거나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간혹 그런 인간이 출현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여건이 맞아서 그런 업적이 성취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은 그저 그렇다. 나쁘다기보다는 유약하다. 지식과 지혜를 배우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젊음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다. 몸도 정신도 약하다. 그래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지면 악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불행한 일이 닥칠 수 있다.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선의로 한 일에 누군가가 피해를 입었을 때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이 사건과 같이 누군가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의도치 않게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 큰 피해를 낳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에 누가 누구를 얼마나 원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서로의 가슴이 가장 적게 아플 수 있을까.

사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문제를 비판하고, 입바른 소리를 하고, 상처를 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문제의 대안을 제시해서 해결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을 참아주고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어쩌다보니 그 쉬운 일을,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직업으로 매일 하게 되었다. 매일 이 일을 할 때마다 ‘그러면 너는 제대로 살아왔느냐, 너는 네가 말하는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느냐‘는 양심의 질문이 쿡, 쿡, 쿡 아프게 나를 찔러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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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공화국 - 욕망이 들끓는 한국 사회의 민낯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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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문제제기에 공감한다.

특히 서울 초집중화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과 예산, 지자체 문제에 대해.
그러나 당장 개개인의 욕망과 무관심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도적으로는 서울 초집중화 및 불균형발전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지만, 그러한 제도설계자/실행자들도 대체로 서울을 기반으로 삼고있어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런 문제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 문제.

바벨탑 공화국의 시민은 다른 면에선 선량할망정 자신의 서열과 그에 따른 이익을 지키려는 데는 악착같고 집요하다는 걸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오직 남과의 서열 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자신의 서열 확인 차원에서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상대로 ˝내가 누군지 알아?˝ 를 외치는 게 아닌가?

법과 제도는 스스로 진화하진 않는 법이다. 그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의 끈질긴 저항과 투쟁에 의해서만 변화가 가능하다. 집단적 차원에서 학습된 무기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갑질‘은 결코사라질 수 없다. 그러나 이 바벨탑 공화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학습된 무력감을 가져야만 무난하게 살 수 있다는 신념을 요구한다.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조차 체념의 지혜를 갖고 살더라도, 투표만큼은 그 지혜를 잠시 유예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나만 알 수 있는 건데, 투표를 하는 순간만큼은 서울 초집중화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잠시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이마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우리 모두의 비극이 있다.

예산 분배 과정이 중앙 권력자들의 출신 지역과 관계없이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지역주의 투표를 해야 할 이유는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이런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나는 ‘공적 분노, 사적 평온’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 사적 평온이나 행복을 유지하고 가꾸면서 공적 분노에 작은, 아주 작은 에너지나마 투자하면 좋겠다. 남도 아닌 나의 가족의 미래를 위한 소박한 이기심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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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작품을 내려다보듯 시간을 두고 멀리서 조망하면 그 삶이 어떠한지 그때의 선택이 옳았는지 알 수 있겠지만, 당장의 선택을 눈앞에 둔 나는 그때그때 판단하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내 삶의 방향을 만들어낸다.
토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역사의 격동기에 저마다 판단과 선택을 하고 살아간다.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인물도 있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거침없이 자유롭게 사는 인물,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하며 사는 인물, 사랑으로 변화하는 인물, 부끄러움의 힘으로 삶을 견디어내는 인물도 있다. 더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고 닮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듯, 이들의 삶은 저마다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나와는 다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한다. 그것이 확장되면 타인의 삶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지. 토지라는 소설의 힘이기도 하고, 그것을 읽어낸 이 책 저자의 힘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생각건대 남들이 뭐래든 그때의 사정이 어떻든 내 잘못을 그 자체로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평생 간직한다는 것은 특별히대단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어쩌면 두만네 내외는 자기 부끄러움을 삶의 가늠자로 삼았기에 한평생 ˝푼수를 알고 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듯싶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그저 소소한 삶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했지만, 그 소소함 속에는 인간다움을 지키는 대단한 힘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대단함이 바로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부끄러움이었던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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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간 존재는 애초부터 그 자체가 이 세계와 세상의 모는 타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인간은 늘 외부의 공기를 호흡합니다. 외부의 것들을 받아들입니다. 밥 먹습니다. 나 혼자서 에너지를 자가발전시켜 생존할 방법은 없습니다. 외부의 것을 끌어들여 내 생명을 이어갑니다. 토지』에서 길상이는 누군가가 희생해야만 ‘생명‘이 유지된다는 비장한 말도 했지만, 약간 긍정적인 측면에서 길상이의 생각을 되짚어보면, 존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외부와 얽혀 있는, 곧 서사적 연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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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시골빵집에서 빵을 구워내면서, 썩지 않는 돈에 대항하여 “부패하는” 경제를 만들려고 한다. 글쓴이가 말하는 부패하는 경제를 만드는 요소는 발효(천연누룩균과 이를 키워내는 자연재배쌀, 대그릇, 물; 자연스러운 부패와 순환이 일어나는 것), 순환(지역순환; 그 고장에서 난 재료를 쓰는 것), 이윤 남기지 않기(개개인이 각자 생산수단을 갖는 소경영 지향, 소상인 연합, 영업이익의 분배-노동자조합의 형태 유사, 믿을 수 있는 제품을 정당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는 것), 빵과 사람 키우기(사람이 자랄 수 있는 터를 만드는 것) 이 네 가지이다.

돈을 쓰는 방식이야말로 사회를 만든다.
자리가 잡히고 균이 자라면 먹거리는 발효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상인과 장인이 크면 경제도 발효할 것이다. 사람과 균과 작물의 생명이 넉넉하게 자라고 잠재능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경제. 그것이 시골빵집이 새롭게 구워낸 자본론이다. 빵을 굽는 우리는 시골 변방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혁명의 태동을 오늘도 느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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