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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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유성룡/서해문집]임진왜란을 돌아보고 후생환란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지니…….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 일을 기록한 것이다. 난이 발생하기 전의 일 또한 조금씩 기록했으니 이는 난의 처음부터 근본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오호라 임진년의 화는 참담했으니, 수십 일 만에 한양·개성·평양의 세 도읍을 잃었고 온 국토는 무너져 내릴 정도였으니 임금께서 도읍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나라를 얻었으니 이야말로 하늘의 뜻이요, 조종의 어짊이 깊은 덕분이었다. 백성들의 굳은 결의 또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았고, 임금께서 사대하는 충성심이 천자를 감동시켜 여러 차례 출사했기 때문에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생환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야말로 《징비록》을 저술하는 까닭이다. (16쪽)

 

《징비록》의 저자인 유성룡은 중종 37년에 경상도 의성 지방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향시에 급제한 그는 21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고, 25세(1566년)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했고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도 총괄했다. 선조가 난을 피해 개성으로 갔을 때 영의정이 되었고, 평양에서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훈련도감의 제조를 맡아, 군비 강화와 인재 양성을 도모했다.

 

특히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군의 동태를 수상히 여겨 정읍 현감인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했고 형조정량으로 일하던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그가 나이 50이 넘은 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전격적으로 좌수사로 천거할 수 있었던 이유엔 그의 안목과 나라에 대한 걱정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어릴 적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일찌감치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을 늘 높이 샀기 때문이리라.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의 참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1562년(선조25)에서 1598년까지의 그 당시의 상황이 세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제132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징비록》은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끈질기게 사절단을 요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이니 이러고서 어찌 나라가 온전키를 바라겠느냐.” (25쪽)

 

일본 사신으로 온 야스히로가 조선 통역에게 한 말이다. 그는 조선에서도 관직을 얻은 자였지만 조선 관리들의 문란과 기강해이를 보며 얼마나 한심했을까.

당시 조정은 수로가 험악해서 사절단을 보낼 수 없다며 도요토미의 요구를 거절했고, 이를 전하던 야스히로는 도요토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계속되는 사절단 요청에 결국 황윤길과 김성일을 사신으로 보내지만 도요토미의 거만함을 확인하고 왔을 뿐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황윤길은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조정에 보고를 올리지만 김성일은 그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고 보고한다. 만약 두 사람의 보고가 일치했다면, 일본의 침략야욕을 알아채고 같은 보고를 올렸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에 대비를 했을 텐데,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이순신의 더딘 승진에 대한 답답함, 신립의 무사 안일한 태도에 대한 속상함, 명나라까지 넘보는 일본에 비해 보고를 올려도 무사태평한 조정, 왜적이 쳐들어오자 도망치는 관리들과 장수들, 적의 공격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보고하는 병사를 민심을 어지럽게 한다는 죄목으로 죽이는 관리들……. 읽고 있노라면 속이 터질 지경이다.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명나라까지 넘보는 분위기인데, 조선의 조정과 관리들은 그런 정보를 모두 무시하며 자신들의 권력욕만 채우고 있는 모습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더욱 황폐해져 170만결이던 농토가 54만 결로 줄었고, 군량미 조달을 위해 백성들은 더욱 굶주려야 했다. 사람이 인육을 먹는 일도 빈번했고, 백성들의 난도 잇달았다고 한다고 한다.

 

 

만약에,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기 전 이율곡의 십만양병설(1583년)이 받아졌더라면 조선의 위기는 없었을 텐데…….

이미 일본은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많은 무사들이 생겨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통일로 무인들의 힘과 전술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일본은 수많은 무인들의 막강한 실력을 바탕으로 조선과 중국 대륙 침략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보일 정도다. 하지만 조선과 명은 그런 준비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1592년에 동래성을 침입한 이후 왜군은 파죽지세로 나아갈 밖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조선을 보며 더욱 기세등등했으리라.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음을 이미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일본 사신들도 양반들이 당파싸움에 집중하느라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아웅다웅 하는 모습에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서애 유성룡의 눈물과 통한의 기록인 《징비록》을 당시의 관료들이 얼마나 읽었을까? 지금의 관료들이 얼마나 읽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참고로, 유성룡의 옳은 표기는 류성룡이겠죠. 후손들이 주장하는 대로 해야 맞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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