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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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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 인생에 돈키호테와 접점이 세 번 있었을 거다. 첫번째는 초등학교 때 소년소녀 세계 문학 전집이던가. 그때 어떤 책에는 '돈키호테', 어떤 책에는 '동키호테' 그랬었는데 내 책이 '돈'이었는지 '동'이었는지는 기억 안 난다. 어렴풋이 그저 말라깽이 로시난테랑 산초 데리고 다니면서 풍차를 거인이라고 돌진하고 뭐 그런 괴상한 노인네 정도로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두번째 조우는 2차 창작물로 몇 해 전 조승우 주연의 '맨 오브 라만차'였는데, 조승우의 연기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뭔가 미국 뮤지컬 공식스러운 플롯과 주제의식이 지배하는 느낌이었다. 돈키호테의 자유로운 영혼을 강조하는.

그러다 이번에 완역판을 읽게 된 것인데, 처음 십 몇 챕터까지는 사실 중간중간 지루하기도 해서 내가 이걸 왜 읽으려고 했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광기가 도는지 자지도 먹지도 않고 모험같지도 않은 모험을 하는 자칭 편력기사 돈키호테... 별로 진도도 안 나가고 - 아마 한 20챕터 즈음이었던 거 같은데, 이때가 장벽이 가장 심했다. 이래 저래 생활에 치이고 내용이 재미도 없는데 읽을 맛이 안 나 한 2주 뭉개다 보니 남들보다 진도가 확 차이났다. 다들 2권을 읽기 시작했는데 난 1권 초반. 이번이 아니면 영원히 안 읽을 거 같은 예감이 쫙 들고, 내가 중단한 지점만 넘어서면 재밌어 진다는 사람들의 말에 따라 쭉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정말 뒤에는 재미난 부분이 펼쳐졌다.

황당하고 흥미진진한 모험(?)이 다이나믹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요상한 물건을 무구(武具)로 장착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구르고 불쌍하기까지 한 돈키호테. 그리고 주인으로 섬기며 찰싹 붙어 다니는 순박하면서도 밉지 않은 욕심을 내비치는 산초. 마치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돌아다니는 게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돈키호테가 멀쩡할 때는 꽤 통찰력 있는 이야기를 하고 산초는 걸어다니는 속담사전이고 때에 따라 정말 영리하게 주변 상황을 캐치한다. 중간중간 계몽스러운 인본주의적 내용도 대화를 통해 나온다. 그 중 하나는 농부의 딸 둘시네아는 읽고 쓰지 못하는데 그 시대상에서는 그런 게 전혀 흠이 안 되고 돈키호테도 신분보다 품성이라며 그녀를 추켜세운다.

모험이 몇 년은 될 줄 알았는데 1권 속 편력은 20여일밖에 안 되고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고 마을을 벗어나 어느 산맥 정도에 다녀온 만큼의 며칠내 거리다. 아마 당시에 싸움의 판도가 바뀌어 기사 끼리의 패도가 아니라 총으로 전투하는 시대로 진입한 거 같은데 (화승총이 나온다), 아직도 옛 영광을 못 잊고 기사도에 천착하니 돈키호테가 안됐기도 하지만 이것도 세르반테의 풍자일 수 있다. 아무튼 개인으로 펜싱해서는 작은 땅도 얻을 수 없을 텐데 혼자만의 무용(武勇)으로 황제에 오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심각하지만, 기존 기사문학을 비판한 거였던가.

책을 통해 당시 스페인내의 기독교 문화와 유대인 개종자의 사회적 지위, 무어인, 터키인들의 구성 등 사회상과 세계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기사의 숭배의 대상이 되는 귀부인이 마치 성모 마리아의 인간화인 것처럼 가호를 빌고 믿고 의지하는 모습도 새로 알게 되었다. 액자구조로 소설 속에 작은 이야기들과 소네트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었다. 주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인데, 돈키호테가 많이 읽었을 기사문학의 주인공처럼 모두 선남선녀에 고귀한 신분이거나 부유하다.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다른 사람들 일에 어찌나 관심이 많은지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호기심이 끌리면 사연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며 애달픈 사연에는 도움을 주려고 한다. 우리네 옛 시골인심보다 더한 인심들이다.

책 속엔 삽화도 풍부하다. 두꺼운 책 속에서 선물처럼 삽화가 왕창 나올 때 책장을 휘휙 넘기는 기쁨이 있다.

초반의 무미건조한 부분을 넘어가면 읽는 즐거움을 크게 선사하며, 2권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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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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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총 25편의 단편집으로 구성돼 있다. 일부는 커트 보니것이 살았던 50~60년대의 풍취가 있는 단편 소설이고, 일부는 SF 소설이다. 읽다보니 O.Henry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O.Henry의 단편 소설들에서 유머와 반전이 자주 나오는데, 보니것은 여기에 풍자를 더한 느낌이었다. 문체 중에 절묘하게 느껴지는 표현이나 묘사들도 종종 구사하고 있다.



맨 마지막에 실린 소설은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인데, 이전에 읽었던 <포드 패밀리>의 변주로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비전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가족의 성이 포드에서 슈와츠로, 연도가 바뀌고 있고 디테일에서 다르지만 큰 줄거리는 같다. <포드 패밀리>를 재밌게 읽어 커트 보니것에 대한 흥미가 생겼었기에 이 변형 소설도 아주 재밌게 봤다.


커트 보니것이 일관성 있게 그리는 미래의 노화방지약과 인구 문제에 대한 부정적인 예감은 책 전체의 제목이기도 한 SF 단편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도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 전개방식이 충격적이라 책속에서 4번째에 해당하는 이 작품이후로 독서를 할만한 동력이 상당히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래 시대에 산아 제한을 위해 먹은 '윤리적 피임약'의 효과로 남녀불문하고 성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는데, 노화방지약으로 인해 젊은 아가씨로 보이는 63세의 낸시(처녀)가 자살도우미로 등장한다. 시인 빌리는 레지스탕스로 여자들을 성적으로 각성시키고자 하는데 그 방법은 피임약의 일시적 중단 상태에서 강제로 순결을 빼았는 것이다. 시인 빌리의 아지트에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레지스탕스에 합류한 먼저 온 또 다른 여성들이 있었다. 피임약으로 인해 인간성이 말살된 사회를 각성시키기 위한 숭고한 목적이지만 빌리조차도 비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경악했다. 빌리는 마치 북미의 모르몬 교에서 갈라져 나온 일부다처 사이비 교주 같은 느낌이다. 차라리 낸시로 하여금 피임약을 상당기간 중단하게 한 뒤 주변의 남성들과의 자연스런 상호작용으로부터 남녀간의 화합을 이룰 가능성을 남겨놓았더라면 이야기가 좀더 개연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노화방지약, 윤리적 피임약 소재 자체가 개연성하고는 거리가 먼 SF긴 하지만). 또한 이 소설에서는 강간한 빌리가 낸시에게 결국은 당신도 이것을 좋아하게 될 거야 하는, 남성 중심의 성에 대한 왜곡된 판타지가 반영돼 있었다. 이 책이 처음 발표된 곳을 보니 <플레이보이> (1968)였다. 독자의 기호에 맞춘 소설이 아닐까 싶은데 상당히 비판받을 소지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 단편 소설집의 표제로 올린 것을 보니, 강간 부분을 빼면 SF 작가로서 가장 보니것적인 작품이라서 그랬으리라 추측한다. 원저 <Welcome to the Monkey House>에서부터 그렇게 해 온 표제이다.


이 단편으로 보니것에 대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보니것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또 다른 소설 <아담>에서 다산한 부인에 대해 의사가 말한 대사에서도 느껴진다; "부인은 완전히 빵이 다 구워지면 톡 튀어나오게 되어 있는 자동식 토스터 같아요. 통나무를 굴리는 것처럼 정말 쉽게 아기를 낳아요. 그냥 쑥쑥."



이 소설집은 각 작품마다 재미나 스토리 구성 면에서 편차가 큰데 그래도 내가 재밌게 읽었던 편은 <이번에는 나는 누구죠?>와 <옆집>이었다. <이번에는 나는 누구죠?>는 연극 안에서 두 남녀가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상큼한 스토리였다. <옆집>에서는 반전이 신선했다.


그밖에 몇몇 소설들에서 드러나는 반전사상,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간의 우주 개발 전쟁으로 인한 부작용(인명 사고)에 관해 그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니것이 인생 전반에 걸쳐 가족사적으로도 다사다난했고, 나치의 드레스덴 폭격도 겪고 굴곡도 많아서 작가로서 당대에는 반전사상을, 미래에는 디스토피아적인 시각을 투영하게 되지 않았나 한다.



표제가 된 SF 외에는 전체적으로 무난하거나 재밌거나 이색적인 소재와 내용들이 고루 들어간 단편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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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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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의견은 책 초입 '여는 글'에 나온 게 다다. 본문은 그냥 일관되게 '여는 글'을 풀이한 것이다.

책의 제목인 <하찬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는 한국판 번안 제목으로 근래에 호모 어쩌고 하는 제목이 비소설 부문에서 나름 잘 나가므로 갖다 붙인 거 같다. 본문에 나오기는 한다, 호모 라피엔스; '약탈하는 사람'이란다, 지구에 기생하는 동물의 한 종이면서 만물의 영장인양 다른 동식물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원제는 <Straw Dogs: Thoughts on Humans and Other Animals>이다. Straw Dogs는 노자 <도덕경>에서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에서 따온 말이다. 나는 영어 원제가 더 맘에 든다. 요즘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책은 전체적으로 김빠지게 하는 허무주의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막연히 문명의 발달로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 가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발달에 기대를 하고 있고,-지금은 좀 희미해지긴 했지만 - 결국은 인간에게 구원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을 여지없이 깨수부려고 하는 책이다.

그는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며, 과학과 기술이 인류에게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제시하지만 일단 탄생한 과학기술은 인류가 통제할 수 없고 결국은 종교의 대체물로서 기능을 한다고 주구장창 역설하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의 한 구절을 책 제목에 옮긴 저자답게 현학적 문장으로 박학다식을 뽐내며 여러 사상, 사조, 주의, 이데올로기, 과학, 기술, 문명 등등을 다 논박하고 있다. 이런 저런 사조 등 새로 존재를 알게 된 것도 많았다. 이 책을 읽으려면 불친절하게 설명없이 쓰여진 휴머니즘과 진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휴머니즘은 인본주의로, 우리가 생각하는 박애같은 게 아니라 인간이 만물의 영장 뭐 그런 사조다. 진보는 보수와 반대되는 정치적 진보가 아니라 인류가 역사적으로 쭉 발전해 간다는 의미다. 책에서 온갖 대상에 대해 각개격파를 시도하고 있는 와중에, 그나마 쇼펜하워를 가장 쳐주고 니체는 약간 인정하고, 구석기 시대 인류가 신석기 시대보다 더 풍족한 생활을 했다 평가하며,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그리스 철학과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희미하게나마 우호적으로 보인다. 우연과 운명에 던져진 인간의 실제 모습에 더 통찰을 느끼는 모양새라.

저자인 John Gray는 예전에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저자와 동명이인의 영국인으로, 현실정치에도 참여했던 학자관료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상주의와 합리주의, 계몽적인 그런 모든 것과는 다르게 지독히 현실적인 자세와 냉소적인 세계관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저자가 아무래도 서구권에 있다보니 서양의 종교나 사조는 꿰뚫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동양에 대해서는 저자와 성향이 비슷해 보이는 도교는 좀 아는 것으로 보이지만, 불교는 이해의 폭이 깊지 않아 보였다. 마치 어디서 불교 요약본을 읽은 것을 가지고 논하듯이 핀트 안 맞게 비판해 놨다.

이 책에서 좋았던 부분은 제목이 유래한 <도덕경>의 구절, 제3장 '도덕의 악덕'편에 인용구 "인간이 가장 고결한 생명체라는 주장은 다른 생명체들이 그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온 말인가 보다." (리히텐베르크)

책의 9할은 기존의 사유에 신랄하게 반박하고 있는 반면, 마지막에 간단히 저자가 내세운 해결책은 허무할 지경이다. 과학기술, 평화, 자유를 맘껏 활용하고 추구하되 그것이 진보와 희망을 준다는 환상을 버리라는 것. 좋은 삶이란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나가는 것, 즉 추개의 삶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행동하면서 살되 우연히 던져진 이 인생에서 뭔가 판타지적인 구원이나 진보가 있을 것이라고 헛되이 기대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며 살라는 것. 허나 좀더 저자의 주장이 면밀히 뒷바침 되었다면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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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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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소설은 처음 읽는다.

책 표지에 A man called Ove라고 되어 있고, 소설가이기도 한 역자의 전공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번역한 책이 주로 영어권인 것을 볼 때 스웨덴 원서가 아닌 영어판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책은 재미있게 읽었다. 표지 그림처럼 완고하고 완벽주의자인 노인네의 블랙코미디같고 훈훈하기도 한 얘기이다. 오베는 59세로 또래보다는 다부진 체격으로 설정돼 있어 실제 그렇게 노인네는 아니지만 하는 행동이 깐깐하고 까탈스러워 완고한 영감 이지미로 느껴지기는 한다. 어느 정도는 우리네의 고집스런 노인들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우리의 유교적이고 샌님같은 꼰대 이미지와는 달리, 오베는 자동차에 대해 풍부한 상식과 확고한 신념이 있고 동네의 맥가이버같이 기능 작업에 능하다는 점이 다르다.

작가는 아직 젊은 스웨덴 작가인데 여러 가지 풍부한 상황 비유가 재밌다. 작품 속에서 오베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자기의 암울했던 인생에 마치 햇살처럼 들어왔던 아내와 함께 지내던 때가 아니었을까.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한 순애보 오베. 사회성 없는 오베에게 아내를 통해 이루어진 인간관계가 사교생활의 거의 전부였고, 사별로 인해 삶의 의욕도 없어진 오베. 매일 자살 계획을 세우지만 갑자기 생활에 끼어든 이웃들로 인해 방해 받고 내일로 끝없이 결행을 유예한다. 겉으로는 퉁명스러우면서도 츤데레처럼 사람들을 보살피고 결국엔 부탁하는대로 다 들어준다. 순전히 선량했던 아내를 떠올리며 사후세계에서 아내와 떳떳이 만나기 위해. 아마 마음속으로는 자살을 진정 원하지 않아 핑계를 대고 미룬 것은 아닐지. 완고하고 가족이 없던 오베도 점점 변하게 되고(우리는 자기를 필요로 하고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순전히 스스로의 몫이다. 아무리 외부 조건이 주어진들 본인이 변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59년동안 굳어진 패턴이 며칠 사이에 바뀌진 않는다) 이웃들과 화해하고 마음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혹 이것은 먼저 간 아내의 오베를 위한 어떤 안배가 아닐런지. 왠지 그의 삶에 훅 들어온 고양이도 아내의 환생같다.

이 작품에서 아쉬웠던 것은 복지국의 화이트 칼라가 강압적으로 오베의 이웃을 요양시설로 보내려고 한 설정이다. 나는 스웨덴의 복지는 어떤지 잘 알지 못하지만 저렇게 가족의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복지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점유할까 싶었다. 작품 속에서는 결국 요양시설과 결탁한 그 화이트 셔츠의 개인적인 일탈 혹은 복지국의 한 부서의 비리인 것으로 해놨지만, 개연성 면에서 아쉬웠다. 아무튼 이런 비리가 가능한 것도 시스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에 대한 응징-그것도 확실한 응징도 아니고 위협 수준-으로 끝나는 부분도 억지스러웠다. 그 응징 장면도 헐리우드 영화처럼 오베 주변사람들이 다 튀어나와 악한 존재인 화이트 셔츠에게 항거하는 것이고.

나머지 아쉬웠던 부분은 오베와 아내 소냐가 작품 속에서 소년소녀시절부터 만난 또래인데 소냐는 오베에게 존대말로 하는 반면 오베는 반말로 일관한다. 이것은 일본 소설이나 우리 소설에서 관용적으로 남녀간/부부간에 쓰이던 대화체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생각된다. 영어권에서는 존대말/반말이 없기 때문에 대등하게 쓰였을 것이고 실제로 친구처럼 대화하는 것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작품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작가의 또 다른 소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과 스웨덴 소설 <창문 넘어 도망간 100세 노인>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일본의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도 읽어봐야 겠다.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스웨덴이나 원래 수명이 높았던 일본에서 나온 노인 소설들인데, 무겁게만 느껴지던 노령층의 이야기를 반전으로 코믹하게 풀어내는 것으로 기대된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노인을 재조명하는 이런 소설들은 계속 더 늘어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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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의 겨울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이상해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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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의 겨울>은 혼혈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여주인공의 이야기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인 작가의 삶이 투영된 소설이다.

작품은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성장한작가와 달리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속초는 어머니의 삶의 터전이자 아버지가 떠난 곳. 노르망디와 비슷한 풍경이지만 전쟁이 끝난 노르망디와 달리 아직 휴전 중인 남북 대치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속초 해변. 양립할 수 없는 혼혈의 혈통과 아버지와 어머니의 분리, 마지막 냉전시대의 잔재로서의 공간.

여주는 한국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섞여 살기에는 힘든 외모를 매번 사람들의 반응으로 자각하면서 살아간다. 전도유망한 한국인 남친도 있지만 결별을 결심하는 것으로 봐서 어영부영 섞여 살기 보다는 혼란을 겪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여정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여주가 직면하고자 하는 대상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중년의 프랑스 만화가. 여주는 어머니에게 배운 음식 솜씨로 아버지를 떠올리는 프랑스 만화가에게 먹임으로써 연결을 갖고자 갈망하지만 그는 매번 먹기를 거부한다(음식, 특히 해산물과 복어에 대한 작가의 지식이 감탄스럽다). 그와 육체적으로 에로틱한 관계가 될듯말듯하다 결국 연결과 합일은 그가 떠나면서 남긴 흔적인 화첩에서 이루어진다. 속초를 떠나기 전 만화가는 두문불출하고 오로지 그림에 전념하는데 글쓰기를 통해 치열하게 정체성 찾기를 하는 작가의 모습이 아닐지.

극적인 사건 전개가 없이 조곤조곤한, 나지막한 어조로 담담하게 장면과 상황 묘사가 이루어지는 소설. 심심할 수는 있지만 마지막 화첩 속의 합일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여주와 만화가로 형상화된 프랑스의 부계 혈통, 한국의 모계 혈통이 하나로 만나 온전한 정체성으로서 완성되는 모습.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준다.

작가의 최신작 <파친코 구슬>도 읽어봐야 겠다. 나는 순혈 한국인인데도 나름대로 정체성을 찾고 싶은 게 있어 의미가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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