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체>

“우리가 신을 죽였어. 너희와 내가. 우리는 모두 신의 살해자야.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지? 우리가 어떻게 저 바다를 모두 마셔버릴 수 있었지? 누가 우리에게 모든 수평선을 지워버릴 스펀지를 주었지?” 60p

<단상>

극단이란 없다. 극단은 없기에 양끝 지점의 중간인 중도도 없다. 단지 저마다 ‘극단이라 생각하는 극단’이 있고, 그에 따라 ‘중간이라 생각하는 중간’이 있을 따름이다. 완전한 기준은 태초에 없는데 불완전하고도 인위적인 기준이 훗날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걸 따르고 있음에 불과하다. 그러하기에, 세계는 순환한다. 기점의 쟁탈을 반복한다. 쉼없이. 세상 그 무엇도 극점에 고착될 수 없는 운명의 짐을 지고 태어난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는 자를 증오한다. 선택이 곧 나와 우리의 먹고사는 짓, 즉 생사여부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나‘와 ‘우리‘의 범주가 상대적이며 다른 말로 유동한다는 사실이다. 무의미로 태어나 각종 의미가 부여된 이름들. 세계시민, 국민, 시민, 여성, 남성, 심지어 딸, 아들. 인위적인 틀에 해당하는 울타리로 나를 끌어당긴 세상은, 내게 무위를 누릴 권리를 손에 쥐여주지 않는다. 멈춘다는 것은 곧 죽음에 이름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가? 왜 싸워야만 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가? 우습지만 스스로를 평화주의자라 자평했던 유년시절의 나는 이러한 세계의 동력이자 원리를 도무지 이해하질 못했다. 헌데 지금은 알 것만도 같다. 흔한 말로 갈등은 필연이란 사실을. 싸우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내가 포함된 울타리에 속한 사람들이 나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 역시도 내가 속한 울타리 안의 생명들이 해를 입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세상은 선택하지 않는 자를 혐오한다. 나는 줄곧 선택하기를 강요당해왔고 강요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강요당할 예정이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내가 그들과 다르고 싶은 바램 중 하나는, 선택은 명령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방식으로 자발성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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