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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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퇴근길 버스에서 트위터를 훑다가 창비 출판사에서 정세랑 작가의 신간 사전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글을 봤다. 
여름에 읽었던 <보건교사 안은영>과 가을에서 초겨울에 걸쳐 읽은 <피프티 피플>로 나는 정세랑 작가의 열혈 팬이 되었기에.
 마침 내려야 할 정류장이 다가와 내렸고, 뭐가 그리 급했는지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서둘러 신청서를 채웠다.



이름은 익숙했지만 몇 달 전 김하나의 책읽아웃 정세랑 편을 듣기 전까지 작가님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책은 물론 짧은 글조차 읽어본 적 없었고. 읽어봐야지 생각만 계속 하면서 미뤄왔던 작가 중 한 명이었을 뿐.
 저 팟캐스트를 듣고 정세랑 작가를 알게 된 일에 아주 감사했는데 이유인즉슨 많은 면에서 건강하고, 바르고, 정의롭고, 밝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작가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어떤 목소리를 내야할지 잘 알고 있는 사람.


이번에 창비에서 출간된 <옥상에서 만나요>는 정세랑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총 아홉 편의 작품이 실려있다고 한다.
 사전서평단에게는 그 중 표제작인 <옥상에서 만나요>와 <이혼 세일> 두 편 중 하나가 임의로 발송되었고 나는 <이혼 세일>에 당첨됐다.



이혼을 결정한 이재는 친구 다섯을 집으로 초대해 이혼 기념으로 집에 있는 물건들을 팔기로 한다.

가까이 살아 자주 왕래하며, 이재가 만든 장아찌에 반해 밤낮 레시피를 연구하는 경윤,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지만 이재가 결혼 후 약간 멀게 느껴지는 게 속상한 아영, 

딱히 취향없음을 인정하며 이재의 물건을 사들이려 적금까지 깨려는 민희,

예민한 아들 둘을 키우며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을 느끼지만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이재에게 내심 고마운 지원,

잘나가는 수입회사 사장으로 이혼 후 이재의 커리어를 신경써주는 성린까지.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며 '남들 다 신는 생고무 밑창 스니커즈도 달라 보'이게 하는 이재의 집을 가득 채운 물건들은 
각자 캐릭터와 필요에 맞게 착착 새 주인을 찾아 간다.



짧은 단편이지만 인물간의 에피소드를 통해 이재라는 인물,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있는 다섯 명의 친구들 또한 잘 보여준다.
참으로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지만 나에겐 없는 면을 남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손 쓸 수 없는 불운에 조금이나마 힘을 주기 위한 격려의 말을 연습하기도 한다. 
이제껏 내가 만난 정세랑의 이야기에서 항상 그랬듯이, 인물들은 혼자 있지 않고 함께 헤쳐 나간다.



이 단편은 상당히 짧아서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좋았던 부분을 조금 옮겨본다.


편하게 생각해서 선을 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지원은 허둥댔다. 사과하기도 뭣했고 하지 않기도 뭣했다. 변명 반 한탄 반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오히려 이재가 지원을 안심시켜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영이가 다큐멘터리 보고 말해줬는데, 인간의 뇌는 스물다섯에서 서른 무렵에 완성된대. 그러니까 애들 성격은 계속 변할 거야. 이대로 고정되지 않을 거야. 너는 게다가 보기 드물게 일관적인 양육자니까."
들을 때는 별 도움 안되는 소리를 한다 싶었지만, 그후 지원은 이상하게 이재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고정되지 않았어, 고정되지 않았어, 하고 주문처럼 되풀이했던 것이다. '보기 드물게 일관적인 양육자'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날에는 '보기 드물게' 쪽에 방점을 두어 스스로를 칭찬하고, 어떤 날에는 '일관적인 양육자' 쪽에 방점을 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랬기에 지원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맡기고 이재의 이혼 세일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서 무언가 근사한 말을 돌려줘야 했다. 주문 같은 말을.


다른 단편들도 어서 읽고 싶다. 
지난 두 계절에 한 권씩 정세랑을 만났으니 겨울에는 <옥상에서 만나요>와 함께.
 이런 나라에서 이런 작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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