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 통계와 역사에 문학과 과학이 버무려진 생의 마지막 풍경
하이더 와라이치 지음, 홍지수 옮김 / 부키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부키출판사/하이더 와라이치/인문학


‘레지던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퇴근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중략- 아무리 말로 당부를 하고 이메일을 수없이 주고받는다고 해도 내 책임인 환자를 남에게 맡겼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았다.‘

저자의 말이다. 그러나 그는 레지던트 생활 이후 3년이 지난 뒤부터는 심리적 안정 속에 환자를 마주대하는 스킬을 익혔다. 의사라는 직업은 다양한 질병을 지닌 환자와 이를 간호하는 보호자를 만난다. 의사로서 저자로서 환자들을 대면하며 느낀 생과 사의 순간과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내용들과 함께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의학적 지식이 담겨있어 죽음에 대한 보다 객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닥품이다.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겸허히 맞이할 수 있을, 생과 사의 과정으로 여기며 이 작품과 만나길 바란다.

과학과 문학이 어우러진 장르이자 전문가인 저자의 이야기 안에서 다소 딱딱할 수 있는 분야를 평이하고 쉬운 문체로 접근해, 일반인들도 흥미롭게 관찰과 탐구를 병행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 작품이다. 의학계에서 연구되어 온 생명 연장의 과제와 이를 다루는 전문의 및 과학자들의 열정이 이 책을 쓴 작가의 현장 경험과 자료를 바탕으로 전개되다보니 입체적 책 읽기 또한 가능해보인다. 쉽게 말해 이론과 실제가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섯번의 심장 마비에도 살아난 딕 체니‘

미국 부통령 딕 체니를 아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강건한 이미지와는 달리 가족력으로 인한 심장질환을 달고 살았던 그. 하지만 발달 된 의술 덕택에 네 번 이상의 삶을 추가로 얻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책에서는 100년 전만 해도 심장질환은 사망신고서에 사망 원인으로 이름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바로 시대가 변할 수록 과거엔 흔치 않던 질환의 병들이 만성질환으로 변함을 말한다. 이는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더 큰 어려움 혹은 질병과의 사투를 벌이게끔 하는 상태에 이르게함을 알 수 있다. 즉, 죽음은 바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동안 질질 끌며 서서히 소진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00년대부터 여러 나라의 기대수명을 분석한 연구를 보면, 19세기에는 한 사람의 수명이 집에 숨겨 놓은 금송아지가 몇 마리인지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소득과 기대수명의 격차는 20세기에 와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그 안에서도 도시별로 달라지는 기대수명과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대부분 하얀 페인트칠이 된 병실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세포의 종말. 얼마 전까지만해도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면 지금은 병실이란 곳, 혹은 요양시설이란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현생의 인류에 대한 씁쓸함에 찹찹함까지 더해진다.
가족들 품에서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죽음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사회의 현실을 그저 흐름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임종 장소를 결정하는 데 연령이 끼치는 영향은 분명하지 않지만 가장 엄밀한 연구를 보면 85세 이상인 환자들은 대부분 집이나 병원보다 요양원에서 임종하는 경향이 있다.‘

동종 업계에 근무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퍼센트 공감하는 상황이다. 바쁜 현대인의 일상에서 이러한 고령의 어른들을 모시는 것은 한계가 있다. 비용적인 측면을 떠나 24시간을 간병할 만 한 장소는 요양 시설외에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령의 어른들을 부모로 모시는
보호자들이 선호하는 요양 시설의 활용을 비판할 수 도 없다. 정해진 시스템에 맞는 아름다운 임종의 순간을 집 아닌 제 2의 장소에서 맞이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본다.
정작 임종을 앞둔 당사자의 의사가 발휘 되 집에서 임종을 원한다면 뜻을 따라주는 것도 예의일 것이며, 여의치 않을 경우 임종의 순간이라도 가독들 모두 어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이 혈연집단으로서 예의를 지키는 자세가 아닐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 예전에 의사들은 대부분 의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는 실수로 한자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오히려 환자를 계속 살려두는 게 의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가 된 것은 아닐까?'

연명 치료란 것이 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거에는 의학 기술의 부재로 이러한 경우 대부분 죽음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의학 기술이 발달하자 이를 치료하는 방법도 다양화되어지고 숨은 붙어있으나 몸이 불편하거나 거동조차 힘겨운 환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비교해보면 과거 사례로 본다면 당연히 죽음이 목전에 온 상황이지만, 현재는 의학의 힘으로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죽음 이전, 생명 연장을 유지해가는 상황이라는 아이러니함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위의 상황 또한 그런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런지. 죽음이라는 의미의 변화, 이를 받아들이고 아니고의 차이가 쉽게 판가름 날 수 없는 시대적인 현실이다. 책에서 예로 든 ‘캐론 퀀런의 판결‘을 통해서만 보아도 죽음을 결정 짓는 것이 단순히 전문가의 의견으로만 확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돌보는 보호자들과의 상호 의견 교환 등이 토대가 되어 마무리 될 수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삶의 시작도 그렇고 마무리 또한 스스로가 원해서 되는 일이 없음에 약간의 씁쓸함도 느껴지는 것이 우리가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 중 하나인 것 같다.

우리는 확실한 죽음을 규정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의사와 보호자가 판단하고 결론내려야 할 단계 및 논쟁의 여지가 끊임없이 발견되고도 있다. 뇌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심전도계나 뇌전도계등에 의해 인간이 살고 죽음을 판단하고 결론지어야 할지, 아니면 의사의 소견 혹은 가족의 결정으로 한 사람의 생사를 마감지어야 할지 계속되는 인간의 고민은 끝을 모르고 표류하고 있다. 뇌는 말을 듣지 않지만 몸이 반응하는 경우, 끝까지 생명의 끈을 잃지 않으려는 가족이 있을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의사들은 직업 윤리 의식으로 인해 뇌사의 경우 죽음이라는 단정대신 의학적 소견으로 그 상황을 해석하고 진단할 수밖에 없다. 또한 뇌사의 상태에서 깨어나는 경우도 종종 발견되었다니, 이 상황 판단은 도무지 무엇 하나로 결정날 수 없는 끝없이 반복되는 의학계의 숙제로 남을 수 밖에 없으리라 여겨진다.

죽음, 나이가 들수록 그 의미와 숭고한 마무리가 궁금해지는 요즘. 그리고 시대에 맞는 죽음의 유형과 이를 맞이하는 자세에 대한 올바른 이해, 자의건 타의건 죽음은 그 상황에 따라 의미가 있어야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이 그 원인과 과정을 객관화 된 자료와 경험으로 설명해주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궁금증과 이를 올바르고 용기있게 받아들일 많은 이들에게 이 작품을 권하며, 특히 세대불문하여 죽음의 정의를 공감하고싶은 독자들에게 추전해본다.
‘죽는게 두렵지 않다면...... 그 생명의 신비조차도 경이롭게 여길수도 없으므로 필히 그 과정의 사실적 근거와 사례를 이 작품과 함께 경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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