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평안은 없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8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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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달궁 독서모임책으로 치누아 아체베 작가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가 선정됐다. 기록을 찾아 보니 그 책은 4년 전에 읽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속편격인 <더 이상 평안은 없다>부터 읽기로 했다. 마침 회사 근처 중고서점에 있어서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도서관에서 빌려다 다시 읽고 나서야 속편을 다 읽었다. 그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이지리아 출신 치누아 아체베 작가가 다루는 주제는 탈식민주의, 편견 그리고 인종차별주의 정도가 될 것 같다. 지금은 <신의 화살>까지 내쳐 도전 중인데,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을 가차 없이 침탈하던 시기에 대한 서사가 인상적이다. 종교와 교육을 앞세운 제국주의 세력들은 기존의 전통을 고수하던 이들을 미개인으로 몰아붙이며, 자신들이 세운 가치를 현지인들에게 이식하고 강요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전편에서 우무오피아 마을의 대표 씨름꾼으로 자수성가한 오콩코가 어떻게 몰락해 가는가를 그렸다면, <더 이상 평안은 없다>에서는 그의 손자인 오비 오콩코를 주인공으로 삼아 3대에 걸친 오콩코 가문 몰락의 연대기를 완성한다. 용맹한 전사이자 농부였던 할아버지 오콩코가 오로지 자신의 두 팔로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면, 손자는 다른 방식으로 마을과 가문의 부흥을 꾀한다. 그것은 바로 영국식 교육이었다.

 

어려서부터 수재였던 오비 오콩코를 우무오피아 마을에서는 거금 800파운드를 들여 영국 유학길에 오르게 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들의 바람대로 영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교육직 고위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지원은 앞길이 창창한 청년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족쇄로 작동하게 되는 역설적인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식민 모국 영국에서 근대화된 서구식 교육과 합리주의를 경험한 오비 오콩코는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좌절한다. 정말 식민주의자들의 말 그대로, 이보족 더 나아가 조국 나이지리아에는 답이 없단 말인가? 그렇게 뇌물이라면 질색하던 청년이 결국 부패의 연쇄고리에 가담할 수 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의 구렁텅이로 말려 들어가는 과정을 치누아 아체베 작가는 정말 냉정한 시선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우무오피아 부족 사람들의 열렬한 응원과 후원은 오비 오콩코에게 든든한 지원인 동시에 부담이었다. 그들이 애써 모아준 돈 800파운드는 공짜가 아닌 언젠가는 갚아야 하는 돈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을 돕는 것 역시 유망한 엘리트 청년의 몫이었다. 동생 존의 학비도 마련해야 했다. 수도 라고스에서 화려한 생활을 위해 장만한 자가용 유지비도 무시할 수 없는 지출의 수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오비 오콩코를 가장 괴롭히는 건, 그 중에서 그가 사랑하는 여인 클라라와의 관계였다. 그녀 역시 영국에서 수학하고 귀국해서 수간호사로 일하는 엘리트 계급의 일원이었지만, 조국 나이지리아에서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오수(부랑아 천민 계급)였다. 전도유망한 청년 오비 오콩코가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장벽이 너무나 많았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도 예전에 유행한 신파극과도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우선 라고스에 있는 우무오피아 진보연맹에서 이 사실을 알고, 오비가 갚아야 할 유학자금의 지불유예를 허용하지 않는다. 계속 커지는 지출 규모를 줄이기 위해 청년 오비는 순간 욱하는 성질을 죽이고 어쨌든 자신을 후원해줄 우무오피아 진보연맹과의 관계 유지에 보다 힘을 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조금씩 파멸행 고속열차를 선택했다. 여자친구 클라라는 애인의 안쓰러운 상황을 듣고 50파운드를 빌려 주지만, 그 돈조차 자동차 털이범들에게 털리고 만다.

 

오비는 가족들을 설득하는 일에도 실패한다. 이른바 복음의 빛을 수용한 아버지조차 오수 출신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한다. 내가 봤을 때, 무신론자에 가까운 오비는 신의 평등한 사랑까지 들먹이면서 아버지의 주장을 설파했지만 실패했다. 그나마 온화한 어머니는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오비의 판단 역시 오산이었다. 어머니는 한발 더 나아가, 클라라와의 결혼을 강행하면 죽어 버리겠다는 폭탄선언을 날린다. 그러니까 오비에게는 선택지가 하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클라라가 불법 임신중절까지 하게 되면서 오비 오콩코는 이도저도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코너로 몰리게 된다.

 

, 그렇다면 독자는 치누아 아체베 작가가 나이지리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인 1950년대 후반 라고스와 이보족 마을 우무오피아를 배경으로 서술한 <더 이상 평안은 없다>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저자가 오비 오콩코라는 지식인 엘리트를 통해, 앞으로 나이지리아 국가가 겪게 될 다양한 혼란상을 예고했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아프리카 대륙의 독립은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 서구 열강 제국주의 지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철지난 이데올로기였다.

 

그렇다면, 나이지리아 같은 신생국들은 자력으로 독립해서 국가를 경영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특히나 나이지리아 같은 다민족 국가에서 국가통합은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였다. 그 결과, 비아프라 내전 같은 참혹한 내부 갈등과 장기간의 군사독재로 석유와 인구 자원이 풍부함에도 지금까지 여전한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닌가.

 

오비 오콩코를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갈등의 분출과 스펙트럼은 과거와의 단절이 얼마나 쉽지 않은 미션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과거의 전통과 유산을 잘 유지하면서, 백인 지배자들이 구축한 새로운 질서를 수용한다는 이상은 훌륭했지만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은 갈등을 푸는 방식으로 대화보다는 물리적 방식을 선호했다.

 

전편에서 할아버지 오콩코의 비참한 죽음으로 서구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전통주의자들의 패배를 극명하게 드러냈다면, 속편에서는 새롭고 혁신적인 교육을 받고 귀국한 엘리트 청년 관료가 자신이 비판하던 구태 관료화되어 가는 과정을 병렬배치하면서 시대 변화해도 또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할 수 없다는 숙명론적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비 오콩코의 타락은 윌리엄 그린 같은 구 식민주의자들에게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피지배 계급에 대한 편견과 비판의 당위성을 옹호해주는 핵심 인자로 작동한다. 그가 백인들과 기득권층이 교묘하게 설치한 덫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배와 조종에 능한 그들이 상대방의 어디가 가장 취약한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치누아 아체베 작가의 작품들을 잇달아 읽으면서 서구인들이 설계한 탈식민주의의 한계, 이제는 시간이 너무 지나 공고화된 구제불능의 편견 그리고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의 연대기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제 일주일 남은 달궁 모임에서 우리는 또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벌써 해바라기가 피었다.


원래 6월에 해바라기가 피었던가?

우리집 해바라기는 비실비실한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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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8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18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3-06-18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삼부작 다 있는데 첫 번째 책만 읽어봤네요. 삼부작 다 읽으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나... 싶어요.
독서모임 다시 시작하셨나보네요~~레삭매냐님 계신 독서모임은 참 재밌을 거 같습니당~^^

레삭매냐 2023-06-18 23:08   좋아요 1 | URL
저도 4년 전에 1권만 읽고
<사바나>는 사두기만 하다가
지금 다시 읽고 있는데...

너무나 재미지네요.

1권과 2권 바로 끝나고
지금 3권인 <신의 화살>
달리는 중이랍니다.
<사바나>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주말에 가서 털 생각을 하니
짜릿하네요 고저.

Falstaff 2023-06-19 05: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부작 보다 <사바나의 개미 언덕>을 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왠만하면 이 책까지 달리시는 것이 어떨지 싶습니다.

레삭매냐 2023-06-19 11:29   좋아요 1 | URL
지금 <신의 화살> 1/4을 읽었습니다.

토요일까지 <사바나의 개미 언덕>도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어제 사둔 책을 찾지 못해서 결국
도서관에서 빌렸답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3-06-23 20:20   좋아요 1 | URL
아체베 3부작은 다 읽었는데, 사바나의 개미언덕은 못읽었네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그레이스 2023-06-23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부작 다 좋았으나 제게는 이 책이!

레삭매냐 2023-06-24 08:56   좋아요 1 | URL
제가 지금 <신의 화살> 읽고 있는데,
전의 두 편만 못하다는 느낌이 -

저도 이 책이 왠지 더 마음에 드는
느낌적 느낌이 들었습니다.

달궁 모임 준비하느라, 논문을 다 읽
었네요 ㅋㅋㅋ 기대만빵입니다.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3 - 태평양 전쟁 후반부터 한국 전쟁까지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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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초기, 잘 나가던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에서 절치부심한 미군에게 어퍼컷을 먹으면서 전세는 역전되기에 이르렀다. 전쟁 초반,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일본군의 고질적 문제들이 패색이 짙어지면서 허깨비 같은 군대의 실체가 있는 그대로 노출됐다.

 

남양군도 전선에서 잇단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버마 전선에서 연합군의 원장 루트를 차단하고, 인도 동부를 공략하겠다는 단순한 발상으로 시작된 임팔 작전은 일본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기록된다. 무엇보다 공세에 앞서, 보급문제를 좌시한 점이 비판받아 마땅하다. 작전은 입안한 무타구치 렌야는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라는 기괴한 발상으로 전투에 필요한 충분한 보급 계획 없이 전장에 병사들을 몰아 넣었다. 초반에는 성공적이었지만, 전투가 장기화되고 우기가 닥치면서 최전선의 일본군 병사들은 보급을 전혀 받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결국 전략적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 채, 기아와 말라리아에 시달리던 병사들이 숱하게 희생됐다.

 

한편, 라바울의 최전선에 배치된 초년병 미즈키 시게루는 운 좋게도 분초가 적의 기습으로 전멸당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그의 튼튼한 위장은 전쟁의 와중에도 항상 먹을 것을 구가했다. 작가는 운 만큼이나 먹성도 좋았던 모양이다. 두 번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서 귀환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의 이런 식탐이 있지 않았을 싶을 정도다.

 

중국 전선에서는 비교적 약체인 중국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대륙 타통작전을 실행했지만, 미군을 상대로 해전에는 연전연패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이 설정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절대국방선은 사실상 지도 위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허황된 계획일 뿐이었다.

 

마리아나의 칠면조 쏘기로 알려진 대로, 일본 항공기들은 봄날에 흩어지는 벚꽃마냥 그렇게 무수히 미군에게 격추되어 추락했다. 전쟁 말기, 일본 항공기 에이스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미숙련 조종사들이 탑승한 제로기는 더 이상 미군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군인은 물론이고 숱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사이판 결전 역시 미군의 승리로 끝났고, 미육군 원수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도주하면서 공언한 대로 레이테에 상륙하면서 자신의 귀환을 알렸다.

 

개인적으로 맥아더 자신의 욕심으로 전개된 필리핀 전역은 사실상 의미가 없는 전투였다. 해군 니미츠 제독의 주장대로, 뉴기니-필리핀 라인이 아니라 일본 본토와 남방을 잇는 보급선을 제압할 수 있는 대만을 먼저 공략했다면 마닐라 시가전을 포함해 필리핀 각지에서 전개된 지옥 같은 전투들을 생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초년병 미즈키가 속해 있던 중대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구사일생으로 살았지만, 라바울의 사령부에는 부대가 모두 옥쇄했다고 알려지는 바람에 어이 없게도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모두 죽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즈키 시게루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구 일본 군대가 얼마나 인명을 경시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전쟁을 지도하던 대본영의 군부 지도자들에게 전선에 파견된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전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중에도 총리대신이자 육군대신으로 전후 A급전범으로 사형된 도조 히데키는 허세를 부렸다. 히로히토 국왕은 물론이고 시민들에게도 시시각각 본토로 다가오던 미군의 진격상황을 속였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한 사이판 실함 후, 결국 내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주지하다시피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패배하고 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본토 결전 운운하다가 원폭을 두 방이나 맞고 북방의 소련이 개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무조건 항복을 결의한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고 종전을 맞이한다.

 

그동안 서방에서는 미국의 원폭투하가 종전을 앞당겼다는 설이 우세했지만, 정작 일본 전쟁 기계의 전쟁의지를 꺾은 것은 바로 소련군의 참전이었다고 한다. 종전 후에 미군 사령부가 패전국 일본의 국체를 유지하게 허용하고 비교적 관대하게 대한 것과 달리 만주의 관동군을 일소한 소련군은 일본군 패잔병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심지어 스탈린은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까지 소련의 영역으로 분할하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다. 일본군과 중국 대륙에서 싸운 장제스의 강력한 반대로 일본 분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장제스는 일본의 은인인 셈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일본이 패망으로 치닫는 동안, 라바울에 있던 초년병 미즈키 시게루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다. 도무지 군대에 적응할 것 같지 않았던 시게루는 비록 한쪽 팔을 잃었지만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한다. 팔을 다친 뒤에도,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사람에게 어떤 운명이 있다면, 아마 미즈키 선생은 미증유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귀국해서 만화가가 될 팔자였던가.

 

비록 군대에서는 골칫덩어리였지만, 숲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귀환하지 않고 현지에서 소집해제해서 그들과 함께 살 생각을 다했을까. 작가 양반이 토페토로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구원을 얻었다면 너무 멀리나간 해석일까나. 우연히 제8방면군 사령관이었던 이마무라 히도시 중장과 조우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다. 토페토로 사람들에게 7년 뒤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미즈키 시게루는 일본행 배에 오른다.

 

신처럼 떠받들어지던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 후, 전쟁책임자는 평화의 사도로 극적인 변신에 나선다. 미군 주도 아래, 신헌법이 제정되고 군국주의의 잔재를 해체하고 평화주의와 민주주의가 이식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광들이 설치던 병영국가가 하루아침에 평화를 간구하는 민주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미영귀축이라는 말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경시하던 일본 시민들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자신들을 무릎 꿇린 미국의 만든 새로운 질서를 군말 없이 받아 들였다.

 

전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상만큼이나 다양하면서도 기이한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저자는 냉정하게 지적한다. 뾰족한 기술이나 재주가 없었던 미즈키 시게루는 생선장사도 해보고 학교에도 다녀 보고 또 종이연극 작가도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았는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훗날 만화가로 일가를 이루게 된 그의 길은 다른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작가의 형이었돈 소헤이는 뉴기니 전선에서 미군 병사 처형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B급전범으로 분류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웃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패퇴시키고 대륙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의 압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결국 본토를 지키는데 실패한 장제스는 대만으로 철수했다. 서방 진영은 철의 장막을 치고 공산주의 세력을 전파시키려는 소련의 스탈린과 냉전에 돌입했다. 열전에 못지않을 냉전의 시발점으로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태평양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내던져진 개인이었던 미즈키 시게루의 라바울 생존귀환기가 주는 울림은 기대 이상이었다. 역사의 순간마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개인의 육성기록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태평양전쟁을 다룰 적에는 역사적 사건에 중점을 두었다면, 숲 사람들과 만남 그리고 귀환 후의 이야기에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그런 감정들을 독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4권 리뷰를 하고 나서, 3권 리뷰를 썼는데 역시 대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3일 동안,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에 투자한 시간들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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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6-15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보고 나니 저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시리즈를 도전해 볼까 싶네요.
시리즈를 선호하지 않는 건 낱개로 읽으면 다양한 책을 볼 수 있는데 하는 생각 때문이에요.
그 러 나 고런 생각을 하면 안 되겠죠. 많은 공부가 되었으리라 봅니다. 아깝지 않은 투자였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레삭매냐 2023-06-16 10:56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
대단하십니다. 응원하는 바입니다.

저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네요 ㅠㅠ

말씀해 주신 대로 시간 투자가 아
깝지 않았답니다 ^^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4 - 강화에서 고도성장 이후까지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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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 시게루의 <쇼와사>(이 책의 원제)3권까지는 간토 대지진에서 출발해서 한국전쟁 시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권에서는 패전의 충격을 딛고 고도 성장기를 거쳐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나간 시절 이야기를 미즈키 시게루 작가는 그린다.

 

어느 일본 정치인이 말했듯, 이웃 한국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은 일본의 부흥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미군 점령하의 일본의 궁핍과 가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시게루 같은 복원병들을 위한 일자리를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누구에게나 그 시절은 어려웠다. 시게루 선생이 잠시 종사했던 그림자연극으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모든 물자가 부족한 마당에, 만화 따위를 사서 볼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까.

 

1950년대의 한국전쟁 그리고 1970년대 베트남전쟁 특수로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비약적인 도약을 하게 됐다. 그 와중에 도쿄 올림픽도 개최하게 되고 신칸센과 나리타공항 등 신일본은 상징하는 일단의 사건들을 저자는 그대로 중계해준다. 물질적 풍요가 시작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행복해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1권에서 3권까지 쇼와 전쟁사를 중점적으로 다뤘다면 마지막 권에서는 미즈키 시게루라는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남양군도 전쟁에 투입되어,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결국 한쪽 팔까지 잃은 장애용사는 만화가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꾸역꾸역 만화를 그렸다. 신은 고생하는 인간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40세도 훨씬 넘어서 비로소 미즈키 선생은 만화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허접한 출판사도 외면하던 작가가 이제는 어시를 무려 7명이나 거느린 대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궁핍하던 시절에도 생존을 위해 중노동 같은 작업을 했지만 성공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 다음에도 선생의 노동은 멈출 수가 없었다.

 

전쟁 말기, 남쪽 나라 토페토로 마을 사람들을 그리워한 미즈키 선생은 옛 전우들과 함께 30년 만에 옛 전장을 다시 찾았다. 아마 나라면 전우가 죽어 나가고, 일상화된 구타 그리고 말라리아로 생사를 오가던 시절에 대한 끔찍한 기억 때문에 아마 가지 않았을 곳을 저자는 자신만의 아르카디아로 규정하고 그리워한다. 자신의 염원대로 그곳을 방문한 저자의 실천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도 십여 차례나 그곳을 찾았다고 한다.

 

고도경제 성장기에 일본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미즈키 선생은 그림으로 독자에게 소개한다. 한 때, 기세를 올리던 일본 학생운동의 종말을 고한 아사마 산장사건과 프랑스 유학생의 식인사건, 괌과 필리핀 정글에서 전쟁이 끝난 뒤에서 수십 년간 저항을 계속하던 귀환병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일본 검찰의 위력을 만방에 떨친 록히드 사건 등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전권까지 세계사적 흐름의 차원에서 쇼와사를 다뤘자면 마지막 권에서는 보다 개인사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시리즈를 생산해낸 요괴들에 대한 애착, 죽음에 대한 공상들(사실 잘 이해가 되진 않았다) 등이 줄지어 등장한다.

 

미즈키 시게루가 저술한 <일본 현대사>의 한계는 명백하다. 대동아 성전을 부르짖으며, 아시아 각국을 침략했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최고의 책임자였던 히로히토 국왕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전쟁의 시작도 마지막도 모두 히로히토가 하지 않았던가. 무수한 인명이 희생된 대전쟁의 책임은 마땅히 최고 책임자인 히로히토가 졌어야 했다. 하지만, 연합국 GHQ는 일본이 포츠담선언의 요구사항인 무조건 항복을 수용하는 대신, 국체유지라는 허울 아래 히로히토 국왕의 단죄를 면하게 해달라는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맥아더 사령부는 군국주의 일본을 뿌리째 개조하기 시작했다. 일단 재벌을 모두 해체해 버렸고, 전범들을 공직에서 모두 추방시켰다. 후자는 나중에 완화되기는 했지만 가미카제 특공이니 일억옥쇄 타령을 해대며 일본 시민들의 목숨을 공공연하게 요구하던 전쟁지도자들의 추락은 당시 획기적인 조치가 아니었을까. 미군정은 또한 신헌법을 제정해서, 이른바 강요된 민주주의를 이식하기 시작했다. 중국 대륙과 남양군도에서 미쳐 날뛰던 군국주의 일본이 갑자기 평화주의의 화신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과히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왔다.

 

미즈키 시게루는 전쟁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평화 그리고 우리 모두가 원하는 행복에 대한 질문은 던진다. 전쟁에서 한쪽 팔과 영혼이 털린 이가 평화를 원하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히로히토 국왕의 죽음으로 쇼와 시대가 끝나고, 헤이세이 시대가 열렸다. 마침내 자신의 삶에 계속된 불안 요소였던 전쟁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이었다. 왠지 홀가분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미즈키 선생은 자신의 작품들이 잇달아 성공을 거두면서 마침내 원하던 물질적 풍요를 이루게 되었다. 이 괴짜 작가는 육신은 일본에 있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던 남쪽 나라 숲 사람들과의 인연을 잊지 못한다. 전쟁 중에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남쪽 나라로 날아가 그들에게 자동차를 선물해 주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70년에 걸친 쇼와 시절을 관통하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확실히 흥미로웠다. 방대한 이야기들을 다루다 보니, 깊이는 좀 부족했을지 몰라도 요괴전문가가 그린 거시사적 접근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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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6-14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국전쟁은 일본을, 베트남전쟁은 우리나라를 먹여 살렸죠.
남의 나라 전쟁으로 누군가가 성장하는 아이러니가 참 그러네요.

일본인이 쓴 글은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 같습니다 ㅠㅠ

레삭매냐 2023-06-14 20:31   좋아요 1 | URL
전쟁국가 일본도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세계대전
으로 열강의 자리에 올랐죠.

미국도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
축했구요.

말씀해 주신 대로 비판적
시선의 견지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23-06-15 18: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태평양전쟁 최고의 책임자였던 히로히토 국왕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한다는 점을˝
- 김남일 작가 님의 ‘서울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글이 나옵니다.
시대에 따라 올바른 생각을 갖는 것과 올바른 말을 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가 봅니다.^^

레삭매냐 2023-06-16 10:58   좋아요 1 | URL
나쓰메 소세키 작가도 결국 제국
주의가 넘실거리던 시절의 일본
사람이다 보니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식인으로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기란 어렵지 싶습니다.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2 - 중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 전반까지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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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 전, 야마오카 소하치라는 일본 작가의 <태평양전쟁>이라는 책을 읽었다. 아마 지금도 집 어딘가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일본 국민작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통해 그가 얼마나 극우성향의 작가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침략군으로 동원된 일본군을 황군으로 부르며 찬양하는 모습에 기가 질려 버렸다.

 

적어도 미즈키 시게루는 그런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아 다행이다. <일본 현대사> 두 번째 권에서는 대미 개전 과정과 개전 초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전황에 대한 소개가 중심을 이룬다.

 

서방에서는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두 번째 세계대전의 막이 오른다. 그전에 일독이 삼국동맹으로 파시즘 국가들이 세계를 집어 삼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계 정세가 그렇게 급박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주인공 미즈키 시게루의 일상은 안일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보면 사회 부적응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으며, 학업이나 일 모두 적응하지 못한다. 신문배달 일을 하지만 그것도 실패다. 왠지 나중에 군에 끌려가게 되었을 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걱정이 될 정도다.

 

거대한 중국을 집어 삼키겠다고 나선 중일전쟁도 무모했지만, 태평양의 패권을 두고 미국과 맞장을 뜨겠다고 나선 주전론자들의 현실인식은 큰 문제였다. 그리고 결국 나라를 패망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19406월 히틀러의 기갑부대가 프랑스를 석권하고 파리마저 점령하면서 동아시아에는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일본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령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하는데 성공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동아시아 확장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미국은 미국내 일본 자산 동결조치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일석유 금수조치를 취하면서 일본 군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립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미국의 잠재적 공업생산력을 일본은 과소평가했던 게 아닐까. 말만 중립이었지 미국은 스스로 민주주의의 병기창을 자처하며, 유럽 대륙에서 히틀러를 가까스로 상대하고 있던 영국에 무기 원조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복잡한 대일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던 개전 전야,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반년이나 1년 정도는 미국과 용감하게 싸울 수 있지만 그 다음은 장담할 수가 없다고 했던 예언이 그대로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당시 일본 내각에서는 원만한 대일교섭으로 개전을 원하지 않았지만,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의 대미 강경노선으로 결국 그를 외무대신에서 사퇴시키기 위해 내각총사퇴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쟁보다 평화를 우선해야 하는 외무대신이 오히려 전쟁 충돌을 조장하는 장면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19411126일 미국 국무부장관 헐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지에서 조건 없이 철군하고 삼국동맹을 사문화하라는 이른바 헐 노트를 보내고 이에 격분한 일본 군부는 개전을 결정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나구모 주이치가 이끄는 연합함대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분쇄하기 위해 진주만 기습에 나서고, 그렇게 전쟁이 시작됐다.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전쟁을 환영한 이가 있었으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였다. 선제공격을 당한 마당에 미국내 전쟁반대론은 설 자리가 없었다.

 

개전 초기 진주만 기습 성공으로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싱가포르)를 필두로 해서, 바타비아와 필리핀, 홍콩 등을 석권한다. 물론 일본군의 대비와 전략 전술도 개전 초기 승승장구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유럽에서 히틀러와 싸우는데 전력을 다하는 바람에 동아시아 식민지 군대는 2선급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필리핀 전선에서 미군을 격퇴한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종전 후 바탄 죽음의 행진 사건 때문에 전범으로 교수형 당한 것에 대해 저자는 사령관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포로 수용 문제에 있어 일선 부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현지 사령관이지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일본의 남방 진출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오랜 식민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대동아 성전>이라는 선전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일부 독립 세력들을 일본이 지원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철저한 프로파간다였을 뿐이다. 서구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낸 일본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일본이 남방에서 새로 확보한 영토들은 오로지 자원 수탈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피지배 계급의 반발은 명약관화했다.

 

남양군도 각지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주인공 미즈키 시게루 역시 이미 해군 장교로 선발된 형 소헤이에 이어 소집영장이 떨어졌다. 소헤이는 뉴기니 전선에서 고사포 부대원이었는데, 포로로 잡힌 미군 병사 처우 문제로 훗날 전범으로 처벌받았다고 한다. 군에 들어가면서부터 후임병 시게루의 고난이 시작됐다. 구 일본 제국 군대의 문제점 중의 하나인 일상적 구타가 시게루에게 이루어졌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게루의 대답이 예에~”처럼 늘어진다고 마구 두들겨 패대는 게 일과였다.

 

미즈키 시게루 작가는 팔라우부터 시작해서 웨이크섬, 알류션 제도 등 잘 알려지지 않은 태평양 전쟁의 거의 모든 전역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잘 나가던 일본이 해전에서는 미드웨이 그리고 육전에서는 과소평가했던 미군에게 과달카날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면서 역사의 변곡점에 도달했다. 많은 인구가 살고 있던 중국 대륙의 전투에서는 현지조달(이라고 쓰고 약탈이라고 부른다)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솔로몬 제도 같이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 전투는 중국 전선과 같은 현지조달이 전혀 불가능했다. 도쿄의 대본영에서는 이런 현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과달카날 비행장 점령에 투입된 미군의 실력에 대해서도 개전 초기 무기력하게 무너진 식민지 부대 전투력 정도로 과소평가한 게 문제였다. 이런 악조건을 이기고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승리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니었을까.

 

원래부터 솔로몬 제도 공략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던 해군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장관의 주장대로 2개 사단을 투입해서 비행장 점령에 나섰다면 전황은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치키 지대, 가와구치 병단에 이어 2사단과 38사단을 축차적으로 투입하는 소모전으로는 도저히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펼치는 미군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보급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빈약한 보급과 말라리아 때문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시게루는 드디어 팔라우를 거쳐 뉴브리튼의 라바울로 전속된다.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패전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허위 승전 사실로 호도한다. 심지어 과달카날의 패전도 후방으로의 전진이라는 말로 시민들을 속였다. 이런 상태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공업 생산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미국은 모든 분야에서 일본의 생산력을 압도했다. 미해군의 활약으로 남방에서 자원 입수가 어려워진 일본이 남양군도에서 입은 손실들을 점점 만회할 수 없게 된 반면, 미국은 전함과 항공모함 그리고 전쟁 물자들을 생산해냈다. 태평양전쟁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전쟁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뉴브리튼에서 저자의 종군 일기는 예전에 다른 작품에서 만난 적이 있어서 낯설지가 않았다. 뉴기니를 거쳐 필리핀 해방을 목표로 삼은 맥아더는 원래 라바울 공략을 원했지만, 요새화된 라바울 공략이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치열한 전장에서 빗겨 나가게 됐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가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뉴기니 전선이나 필리핀 전선에 투입되었다면 아마 현지에서 옥쇄라는 이름으로 전사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전선에서 패배를 거듭하면서, 일본군은 발악적인 옥쇄전으로 미군을 상대했다. 항공모함 전력과 유능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잇달아 전사하면서 사실상 연합함대 소속 기동부대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일본의 전쟁지도부가 조기에 패전을 모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면, 무의미한 희생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폭주를 거듭하던 전쟁기계를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학업이나 일에서 근성을 보여주지 못한 미즈키 시게루 작가가 전후에 이런 방대한 작품을 완성했다는 점이 참 인상적이었다. 선대에서 유래한 바보 같은 짓이 집안의 전통이라던 작가가 남긴 대단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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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6-13 15: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만화로 볼 수 있는 일본 현대 전쟁사네요! 재밌을 거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3-06-13 17:40   좋아요 3 | URL
전쟁 이야기는 3권에서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저자 자신의 빈곤과
가난과의 전쟁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레이스 2023-06-13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데... 섣불리 덤벼들고 싶지 않은 그런 책이네요. 그래도 저장!

레삭매냐 2023-06-13 23:58   좋아요 1 | URL
전 3일 만에 주파했네요 -

속이 다 시원합니다. 고고씽!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1 - 간토 대지진부터 중일 전쟁 돌입까지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미즈키 시게루 작가의 <일본 현대사> 시리즈의 존재를 알게 됐다. 나름 밀덕인 동시에 그래픽 노블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니 내가 이 책을 또 거두어 주지 않으면 누가 거두어 준단 말인가라는 생각으로 도전에 나섰다. 오늘 도서관에 방문해서 당당하게 이 책이 비치된 서가로 달려갔다. 총 네 권을 드는 순간, 손모가지가 나가는 줄 알았다. 그만큼 분량이 방대하다는 말이다. 일단 대여하기 위해 지난 주에 빌린 책들을 모두 반납하고, 부지런히 읽었다. 그래서 일단 1권은 도서관에서 모두 읽고 나머지 3권을 빌려왔다. 여유감 때문인지 1권 만큼 스피드가 나지 않는다고나 할까.

 

미즈키 시게루가 그리고 쓴 <일본 현대사>의 원제는 <쇼와사>라고 한다. 다이쇼 연간에 일본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시에서 태어난 만화가이지 평화주의자 미즈키 시게루는 1922년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해에 태어났다. 간토대지진은 1차세계대전 후, 흥청이던 일본 경제에 도래한 공황의 전주곡이었다. 아무리 미즈키 시게루 작가가 양심적인 지식인이라도 하더라도, 간토대지진 당시 희생된 한국 사람들에 대해 언급할 정도의 양식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좀 아쉬웠다.

 

저자는 숨 가쁘게 돌아가던 일본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과 동시에 일본 군부 세력들이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불리던 사회 분위기를 군국주의 파시즘으로 몰아가던 당시 상황을 마치 라디오로 생중계하듯 그렇게 독자에게 전달해준다. 한 가지 특징을 말한다면, ‘생쥐인간을 투입해서 설명을 곁들이는 센스를 발휘한다. 그리고 작가의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준 요괴 입문을 도운 인물로 농농할멈을 배치하기도 한다. 아직 미즈키 시게루의 요괴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일단 패스.

 

조선을 1910년 병탄한 일본은 대륙진출의 발판으로 삼아 만주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황고둔 사건으로 만주 군벌 장쭤린을 폭사시킨 일본군은 정예 관동군을 파견해서 중원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일본 정부 지침을 따르지 않는 일본군의 하극상은 아마 이 시기부터 일상이 되지 않았나 싶다. 군축회의로 태평양과 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던 일본을 견제하던 서구 열강을 의식해서, 일본 내각은 확전을 극히 경계했지만 이른바 군부 내의 일부 모험주의자들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경제 공황의 여파로 일본 각지에서 빈곤과 가난 그리고 굶주림이 만연했다. 다이쇼 연간에 활발하게 전개되던 노동쟁의는 치안유지법 같은 악법의 시행으로 일소되고,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고 전향하면서 일본 국가의 군국주의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미즈키 시게루는 이런 쇼와 시대의 일상에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투영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축해나간다.

 

일본 현대사를 살아낸 민초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미즈키 시게루는 집안의 차남이었다. 와세다 대학 출신 아버지는 은행 업무를 하다가 자기 멋대로 숙직 시간을 조정했다가 잘려 버렸다. 그 다음에는 영화관을 운영하다가 영사기를 도난당하는 바람에 사업을 들어 먹었다. 그 다음에는 시게루의 조부가 계신 오사카로 가서 보험업을 했다고. 이재에 밝았던 조부는 공황의 전조가 보이자 재빨리 재산을 정리해서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사업을 일으켜 한몫 챙기는 사업수완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일본 국내 특히 그 중에서도 도호쿠 지방의 가난과 궁핍에 절망한 일단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수시로 쿠데타 시도와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 오죽했으면 작가가 전쟁을 치르면서 평생 다시는 과자를 먹을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을까. 너무 가난해서 초등학생 아들을 강제로 배에 태워야 했고, 딸들은 유곽에 팔아야할 지경이었다. 이런 와중에, 조금이라도 우익 세력에 밉보였다가는 내각의 수장인 총리부터 시작해서 여러 대신들이 그들에게 테러당하는 일들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전권을 쥐게 된 군부는 내각과 일본 국가의 대외정책마저 멋대로 좌지우지했다.

 

서방의 군국주의 세력이었던 독일-이탈리아와 군국주의 파시즘 체제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긴밀해지기 시작한 일본은 본격적인 중국 침략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국제연맹에서 탈퇴해 버렸다. 만주의 풍운아로 알려진 이시하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지로 등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만주사변으로 폭사한 장쭤린의 후계자 장쉐량을 내쫓고, 러일전쟁 이래 염원이던 만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후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지만, 종전 때까지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런 일본의 군사적 모험에 아이들은 열광했다. 군부는 멀쩡한 청년들을 희생시킨 육탄3용사조작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기나라 시민들의 민생에는 소홀하고 무능했던 정부가 국가 세입을 절반을 군비에 투입하며, 오로지 시민들의 희생만을 강조하는 모습을 저자는 냉철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훗날 중일전쟁과 대미전쟁 그리고 패망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군사적 모험의 근원을 추적하는 미즈키 시게루 작가의 노고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이 <일본 현대사>. 우선 2,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놀라고, 몸으로 쇼와 시대를 살아낸 작가의 육성 증언에 감탄했다. 바로 2권 읽기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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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6-12 04: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2권밖에 못 읽었는데 참 인상적인 일본 현대사를 다룬 그래픽 노블이었습니다. 이어질 레삭매냐님의 좋은 리뷰 기다리고 있습니다. ^^:)

레삭매냐 2023-06-12 08:32   좋아요 2 | URL
70여년에 이르는 쇼와사를 제대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일본 출신 작가다
보니 한계도 뚜렷한 것 같습니다.

간토대지진이나 태평양전쟁 초기
필리핀 전선을 맡았던 혼마 마사
하루 중장에 대한 변호 등이 그
러하네요.

저도 2권까지 읽고 이제 3권 들어
갔습니다. 기대, 감사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6-13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도 없고 1권은 품절이네요ㅠㅠ 4권 세트를 구입해야할까 고민입니다ㅠ

재밌을 거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3-06-13 17:37   좋아요 1 | URL
전 4권 독파 중인데 아마
오늘 중으로 다 읽지 싶습니다.

저도 궁금한 거이 왜 1권은
품절이냣!였답니다.

신종 마케팅일까요 -.-
재미는 확실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6-13 17:57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시다니 부럽습니다ㅜ 좋은 도서관이네요ㅜ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