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라파엘 몬테스 지음, 최필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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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짝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이 있었다. 이제 짝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의 일방통행은 스토킹이 되었다. 브라질 작가 라파엘 몬테스의 <퍼펙트 데이즈>를 마치 한 편의 로맨틱 스릴러를 보는 것 같은 감정으로 읽었다. 뭐야 이거 기대 이상으로 재밌는데.

 

소설의 제목은 소설의 남주인공 테우(잠깐 태우가 아닌지 착각했다)가 짝사랑에 빠진 미모의 여성 클라리시가 쓰는 시나리오에서 따왔다. 비리 판사로 자살한 아버지 때문에 동승한 어머니 파트리시아는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독실한 신자인 파트리시아를 따라갔다 만난 클라리시에게 냉철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는 의학도 테우는 빠져 들기 시작한다.

 

연애의 경험이 전무한 이 남자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여성 클라리시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스토킹은 모름지기 그렇게 시작되는 법이지. 그런데 군데군데 무언가 엉성해 보이고 빈틈이 술술 뚫린 것 같은데 소설은 재밌게 읽힌다. 꼭 꼬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2% 정도 부족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클라리시를 따라 갔다가 욱하는 감정에 그녀를 납치하기에 이른다. 뭐야 이거 점점 더 오싹해지잖아. 폭력이 가미되기 시작하는 사랑,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랑이 아니라 집착 혹은 광기처럼 보인다. 히우에서 출발한 두 사람의 다음 목적지는 테레조폴리스의 드워프레이크팜 호텔이다. 수갑과 막대를 이용해서 클라리시의 자유를 뺐는데 성공한 테우에게 도전은 계속된다.

 

아무리 봐도 정교하게 짜이지 않은 플롯의 전개가 썩 내키지 않지만, 각각 22세 그리고 24세인 테우와 클라리시의 나이를 고려해 볼 때 뭐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은 클라리시가 쓰고 있는 <퍼펙트 데이즈> 시나리오처럼 일종의 로드 무비 형식을 취한다. 결국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자신의 의학도 실력을 발휘해서(뭐야 왜 갑자기 친절한 킬러 덱스터가 연상되는 거지?) 범죄를 은폐하고 도주에 나선다. 왜 테우는 결정적 범죄의 증거가 될 그것을 마치 전리품인 양 자신의 왕진가방에 가지고 다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누구에게도 통제 받지 않을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인 클라리시가 자신의 일방적인 사랑에 길들여지리라고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결국 자신이 그녀의 포로가 되어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건 모두 자업자득이다. 다만 아쉬운 건 그런 상태가 오래 가지 않았다는 점.

 

결국 이런 상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클라리시가 죽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까. 물론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일은 반대로 진행되어 클라리시 가족들에게 딸의 목숨을 살린 영웅이 되기도 한다. 환장하겠구만 그래. 어쨌든 이 미친 사랑의 노래를 지속해서 부르는 남자는 도대체 포기할 줄을 모른다. 자신의 범죄를 집요하게 실종자를 찾는 형사에게 고백하는 상상에 빠지기도 하지 아마. 그나마 가지고 있던 일말의 양심 때문이었을까.

 

다시 찾아온 한밤중의 무더위에 시달리면서 졸린 눈을 부비며 <퍼펙트 데이즈>를 꾸역꾸역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재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식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아쉬운 대로 만족한다.

 

[뱀다리] 라파엘 몬테스 작가가 최근에 소개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팬인지 여주의 이름도 그리고 테우가 그녀에게 선물한 단편집도 리스펙토르 작가의 책이었다. 정말 대단한 작가인가. 그리고 그 중에 실린 단편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달걀과 닭>은 좀 어렵지 싶어서 사기만 하고 아직 읽지도 못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퍼펙트 데이즈> 때문에라도 다시 도전해야지 싶다. 이런 식으로 나의 독서는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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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8-09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범죄자가 그런 건 아닌데, 자존감이 높은 범죄자는 자신의 범죄 행위를 주변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과시하는 성향이 있다고 해요. 그런 행동이 스스로 무덤 파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데도 말이죠. 범죄의 증거를 전리품처럼 가지고 있는 인물의 심리도 어쩌면 일종의 자기 과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레삭매냐 2019-08-09 13:28   좋아요 0 | URL
빼어난 프로파일러이십니다 정녕.

맞습니다, 주인공 테오도루란 녀석은
자존감이 무척 강한 싸이코패스로
보아도 무방하지 싶습니다.

다른 물증들은 모두 인멸했는데 특정
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석틀에 딱 들어 맞네요.

겨울호랑이 2019-08-09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것이 짝사랑이라고 한다면, 이를 소극적으로 자기만족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 중 하나가 스토킹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본의 아니게(?) 잘못된 행동으로 가지 못하게 자기절제가 짝사랑에 작용하는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 짝사랑은 애잔하게 여겨집니다^^:) 물론 스토킹은 범죄지요 ㅋ

레삭매냐 2019-08-09 21:36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게 관건인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
인데 슈퍼스피드 시대에 난망
하기만 미션인 것 같습니다.
 
그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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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국의 여름은 이웃 일본의 반도체 소재 부품 규제로 뜨거웠다. 갈등의 시작은 식민지 시절 강제 징용에 대한 법원의 확정 판결이었다. 정치를 경제 영역까지 확대시킨 일본 정부의 막무가내식 대응에 그저 할 말이 없을 따름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쌍둥이 나치 독일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다양한 역사 소설들을 꾸준하게 발표해온 프랑스 작가 에리크 뷔야르는 인류사의 대재앙으로 기록된 2차 세계대전에 앞서 총통 히틀러에 부역한 독일 기업인들의 면모를 드러낸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자면 1938년 안슐루스(오스트리아 합병)의 비화를 <그날의 비밀>에서 말하고 있다.

 

2년 전에 소개된 자크 파월의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를 통해 나치 제3제국과 결탁해서 전쟁 사업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린 다수의 기업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접한 적이 있다. 뷔야르는 작가는 히틀러가 독일의 신임 총리가 되고 20여일이 지난 뒤, 24명의 재계 지도자들과 만난 1933220일 회동의 진실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날의 비밀>의 표지를 장식하는 인물은 바로 구스타프 크루프다. 제철 기업을 모태로 하는 크루프 사는 독일 전쟁 기계의 표준이었다. 내가 아침마다 타고 다니는 엘리베이터도 티센 크루프 사의 제품이다. 히틀러와 나치는 이미 74년 전에 종말을 고했지만, 그들의 부상을 금전적으로 지원하고 훗날 전쟁을 통해 획득한 노예 수준에 가까운 강제 노동력을 이용해서 수익을 창출한 바스프, 바이엘, 아그파, 오펠, IG 파르벤, 지멘스, 알리안츠 그리고 텔레풍켄 같은 독일 기업들은 아직까지도 세계 시장에서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어떤 기업들은 신생 국가들의 역사보다도 오랜 기업사를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국회 의장 궁전에 모인 크루프와 오펠 그리고 지멘스 같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의 기업가들은 국회 의장 헤르만 괴링의 공산주의의 위협을 격파하고, 노조를 박멸하여 국가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자는 선동에 압도당한다. 그들에게 정치자금이라는 이름의 뇌물은 이골이 난 이슈였을 따름이었다. 앞으로 10년 아니 100년 동안 선거가 없게 만들자는 괴링의 주장에 그들은 자발적으로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나치스를 위해 정치자금을 내놓는다.

 

그렇게 해서 선거에 승리한 나치당은 1934년 장검의 밤, 1935년 인종차별법 같은 나치 시대를 상징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고 전쟁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다.

 

다음 순서는 중부 유럽에서 새로운 강자로 부흥하는 나치 제3제국을 달래기 위한 서방 국가들의 유화정책이 메뉴에 오른다. 영국의 외무상 핼리팩스 경이 총통을 시종으로 착각했다는 건 하나의 웃지 못 할 에피소드다.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끝까지 레벤스라움(생활권)을 주장하는 히틀러 주장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폴란드 침공이라는 방식으로 2차 세계대전에 뛰어 들게 된다.

 

소제목으로 나온 <전격전>(블리츠크리크)을 보고 폴란드 침공을 기대한 나의 예상은 정확하게 빗나가 버렸다. 여기서 저자가 다루는 블리츠크리크는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안슐루스(오스트리아 합병)였다. 1934년 오스트리아 나치 당원에게 암살당한 엥겔베르트 돌푸스에 이어 총리의 자리에 오른 또 다른 독재자 쿠르트 슈슈니크는 이웃의 큰 형님의 별장으로 소환된다. 두 나라 정상의 회동은 약간 코미디 같은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베토벤 에피소드는 정말 황홀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총통의 협박을 이기지 못한 슈슈니크는 히틀러가 원하는 대로 싸인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독일 베어마흐트를 동원해서 오스트리아 점령에 나서려던 계획은 블리츠크리크라는 이름과는 달리 전차 부대의 잦은 고장으로 꽃길을 달리지 못하고 정체가 되고 만다. 어쩌면 베허마흐트들은 오스트리아에서 벌어진 이런 사전 연습을 통해, 1년 뒤 폴란드 침공에서 제 실력을 발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국 대사 폰 리벤트로프가 영국 지인들과의 파티에서 보여준 지연 전술은 대단했지만, 뉘른베르크에서 교수대에 오르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슈슈니크에 이어 나치 부역자로 맹활약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뷔야르 저자가 기술한 대로, 재앙은 어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발화되지 않는다.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살금살금 우리의 일상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뭐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렇게 일상을 위협받은 이들은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으로 싸운 유대인들도 최종해결책 앞에서는 예외는 아니다.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강제 징용을 당한 이들이 무대에 오른다. 그렇다면 전쟁 기간 동안 가혹하게 그들을 다룬 독일 기업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았던가. 그렇지 않았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곧바로 열전 같은 냉전”(Cold War)이 시작되면서 공산주의의 서진을 막기 위해 서독의 재무장과 전범기업들의 사면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나마 독일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엔딩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진행형이라는 점이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기해왜란이라는 이름의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웃과는 다르게. 86년 전 서방 세계에서 벌어진 어느 사건에서 오늘을 읽는다.

 

에리크 뷔야르의 <그날의 비밀>은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낸 아이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이폰이 특별한 기술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미 기존에 존재하는 테크놀로지를 집대성하고 몇 가지 신박한 아이디어들을 덧입혀서 만들어진 것이다. 뷔야르의 <그날의 비밀> 역시 마찬가지다. 무언가 참신하고 새로운 연구 결과가 도출되었던가? 아니다. 24명의 독일 기업가들의 비밀 회동 그리고 안슐루스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들이다. 다만 기억을 위한 재해석이라는 점을 공쿠르상 심사위원들은 높이 평가한 게 아닐까. 에리크 뷔야르의 다른 작품인 <콩키스타도르><콩고>의 국내 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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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
카를로 레비 지음, 박희원 옮김 / 북인더갭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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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돈 카를로 레비의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를 읽으면서 꼽은 세 개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빈곤, 말라리아 그리고 이교도. 마지막은 주술로 등치해도 무방하리라. 지난 5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사서 읽기 시작했다. 한 백 쪽 남짓 읽고 나서 잠시 접어 뒀다. 그리고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20198, 그러니까 돈 카를로가 84년 전에 이탈리아 루카니아 지방의 갈리아노로 유배당한 계절에 책을 다 읽었다. 참고로 오늘 폭염 주의보가 발령됐다.

 

토리노 의대 출신의 지식인이자 마지막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를 만한 경력의 소유자 돈 카를로는 당시 이탈리아 국가를 지배하던 파시즘에 저항했다. 그것은 나중에 그가 저술하듯이 갈리아노 지방의 산적들(농부들의 변신)의 그것처럼 일견 무모한 항거가 아니었을까. 돈 카를로를 찾은 그의 누이 루이자가 마테라에서 보고 느낀 것처럼 갈리아노를 비롯한 남부의 시골은 그야말로 천형의 땅이었다.

 

사회적 소외를 상징하는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고, 돈 카를로가 지적한 대로 순박한 농부들의 가장 큰 적으로 규정한 중간 계급의 착취는 중세 이래 농부들을 빈곤의 사슬에 얽어매온 것이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조금도 관심이 없는 중앙의 로마정부는 오로지 그들의 세금을 뜯어낼 궁리만 할 따름이다. 염소에도 세금을 매기지만, 무너진 다리 보수에는 지원할 자금이 없다. 아니 농촌을 개선시키려는 의지에 불탄 유배된 의사가 말라리아 근절을 위해 아이디어를 내면 돈 루이지 시장을 필두로 한 권력자들은 그런 게 왜 필요하냐고 되묻는다.

 

농부들이 귀족으로 치부하는 의사 선생 돈 카를로는 이교도 농부들의 주술의 매력에 흠뻑 빠진다. 파시스트들의 유일한 관심은 돈 카를로가 얌전하게 3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길 기다릴 따름이다.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돈 카를로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본 적이 없는 갈리아노와 인근 농부들을 치료하는 진료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10개월간의 갈리아노 유배생활은 이탈리아 문학에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라는 축복을 안겨준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을 찬양할 생각은 정말 1도 없다.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는 종교 서적이 아니다. 제목만 보고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내가 보기에 무신론자인 돈 카를로의 유배 기록이다. 갈리아노 마을에서 다양한 체험을 한 돈 카를로는 말미에서 고향 토리노를 방문해 지인들에게 남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방안들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갖가지 봉건적 질서로 농부들을 억압하는 중간 계급으로부터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민자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아니 다른 곳도 아니고 지방 분권과 자치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어쩌면 토스카나 같은 북부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다. 남부 사람들을 부르봉 잔재에 물들었다고 보는 아직까지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북부인들의 입장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다.

 

1930년대 갈리아노를 비롯한 수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아메리카는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이었던 것 같다. 수많은 가정에서 주로 남자들이 신대륙으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신대륙에서 돈을 벌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주류 계급에 편입된 사람들을 적었다. 그리고 1929년 대공황으로 다시 돌아온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기존의 농부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주 계급이 토지를 바탕으로 한 실질적 권력을 행사했다면 그들과 더불어 이탈리아 남부의 정신세계를 거머쥔 가톨릭 사제들의 횡포도 만만치 않았다. 크리스마스 미사에서 대취해서 횡설수설한 채로 미사를 집전한 돈 트라옐라 사제를 대신해서 부임한 돈 피에트로 리구아리가 보여준 고행이라는 미명의 탐욕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로마의 관리들은 남부 사람들의 생활 개선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토리노 출신 돈 카를로의 일거수일투족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인 모양이다. 마을에서 신망을 잃은 기존의 두 명 의사를 대신해서 유배객이 진료를 한다는 소식에 당장 금지령을 내린 것을 보면 말이다. 보신의 달인 돈 루이지 시장은 도통 인명을 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장 자리 지키기에만 몰두한다. 맹장이 파열되어 죽어가는 마을 사람을 보며 돈 카를로가 느낀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전율할 정도였다. 침묵과 체념으로 자신들의 숙명을 받아들인 일단의 농부들이 어느 순간 각성해서 그 옛날 전설처럼 전승되어져온 민중 봉기라도 할 기세로 일어서는 모습에서는 한 줄기 희망을 엿볼 수도 있었다.

 

1935103, 파시스트 무솔리니 정부가 시작한 아비시니아 전쟁은 또 어떤가. 자기네 나라 시민들의 고통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고대 로마 제국의 부흥이라는 기치 아래, 아프리카 대륙의 유이한 독립국가 에티오피아를 이탈리아는 침공했다. 농부들의 엉터리 조국은 이번에도 전쟁을 위해 젊은 농부들의 피와 전비 마련을 위해 시골 아낙네들의 금반지를 털라고 강요한다. 도대체 그런 전쟁이 그들의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데 무슨 기여를 한다고 그들에게 지속적인 희생을 요구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갈리아노의 농부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들의 소박한 바람은 그저 돈 카를로가 그들이 지닌 육신의 병과 영혼을 치유해 주는 것이었다.

 

돈 카를로 레비의 유배 생활은 저자의 낙천적인 성품 탓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았다. 아마 도시인으로서는 평생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추체험을 훌륭한 기록으로 남겼다. 암퇘지 거세 전문가로 나선 베르킨게토릭스를 닮은 붉은 수염의 돼지 의사 에피소드는 돈 카를로의 기록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한편 미혼의 돈 카를로에게는 시중과 음식을 만들어준 가사 도우미가 필요했는데, 그렇게 선발된 줄리아는 마녀였노라고 저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알려준다.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의사라는 과학의 선봉장이 마녀 타령을 하고 아브라다카브라같은 주술의 힘을 공공연하게 떠드는 게 말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갈리아노 같은 마을에서 모든 상징은 실재가 되었고, 돈 카를로는 기적을 일으키는 주술사 취급을 받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과연 우리가 신봉하는 과학과 천시하는 주술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갈리아노의 농부들에게 그 둘은 별 차이가 없었다.

 

다산선생이 유배지 강진에서 수많은 저작들을 남겼듯이, 우리의 돈 카를로 선생도 유배지 갈리아노에서의 생활을 통해 진짜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라는 걸작을 남기게 되었다. 그런 걸 보면 고난이 지식인들에게 창작을 위한 하나의 자극제 아니 원동력으로 작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돈 카를로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약속을 했지만, 결국 하나도 지키지 못했고 사후에 비로소 갈리아노로 돌아왔다지 아마.

 

지난 세기의 마지막 르네상스인은 유배지 갈리아노에서 그곳 사람들의 삶에 진중하게 천착해서 놀라운 문학적 성과를 빚어냈다. 그리고 그 성과가 우리에게 도착하는데 자그마치 74년이나 걸렸다. 아니 누구 말대로 이제라도 도착해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기해년 나의 책읽기를 기념할 책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마지막은 돈 트라옐라 신부의 설교 말씀으로 대신하고 싶다.

 

팍스 인 테라 / Pax in terra / 땅 위에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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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브러더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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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읽을 때가 따로 존재하는 모양이다. 수년 전에 나온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빅 브러더>를 아마 신간으로 샀던 것 같은데 이제야 읽었다. 지난달에 집어 들어서 28쪽을 읽고 나서 묵혀 두었다가 이틀 전부터 읽기 시작해서 하루 만에 다 읽었으니 나의 집중력도 대단했고, 슈라이버 작가의 필력은 그 이상이었다. 냉정하면서도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저자의 서사에 그만 반해 버렸다. 아마도 슈라이버 작가의 팬이 될 것 같다. 그전에 읽다만 그녀의 책들부터 찾는 게 먼저 아닐까 싶지만.

 

소설의 주인공 판도라 할프다나르손(스웨덴 조상이다)은 원래 출장 뷔페 사업을 하다가 말하는 인형제조업으로 대박난 사업가다. 그녀는 원래 사람들의 주목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사업의 성공은 그녀를 다수의 인터뷰로 이끌었던 모양이다. 남편 플레처는 가구 자영업자인데, 판도라와 달리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다. , 이제 판도라의 오빠 플레처가 등장할 차례인데 뉴욕의 재즈씬에서는 한 자락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인 모양이다. 소설의 주된 갈등 구조는 바로 플레처와 판도라의 오빠 에디슨 담당이다.

 

뉴욕에서 당분간 지낼 거처가 없다는 하소연에 혈육을 외면할 수 없었던 판도라는 당분간이라는 단서로 플레처를 설득해서 에디슨 오빠의 아이오와 뉴홀랜드 행을 유도한다. 그리고 시더래피즈 공항에서 4년 만에 에디슨 오빠를 만나는 순간 판도라는 경악에 빠진다. 내가 꼽은 소설의 결정적 순간 중의 하나다. 물론 그전에 슈라이버 씨는 공항 승객들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 아니 그 해당되는 사람은 판도라였던가. 75kg의 날씬한 체중으로 어려서 엄마가 돌아가신(아마 자살로 추정) 이후 십대 소녀 판도라의 우상이었던 오빠 에디슨이 무려 175kg의 초고도 비만이 되어 등장한 것이다 짜잔! 자 이제 독자들은 소설의 제목이 왜 <빅 브러더>인지 바로 알게 된다. 조지 오웰은 잊어버리시라.

 

갈등은 에디슨이 먹어 치우는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뿐만이 아니다. 꽤 오래 먹을 수 있는 판도라가 커피에 타먹는 하프 앤 하프 우유를 한 끼에 처치했다고 했던가. 사사건건 에디슨과 펠트치(플레처의 새로운 별명)는 부딪히고 싸운다. 모든 생활의 방식과 습관이 맞지 않는 것이다. 뭐 이 정도 갈등이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 문제가 없다. 진짜 문제는 아빠 트래비스 씨가 한 때 끗발 날리던 시절 찍은 유사가족 <공동 친권>에 나오는 드라마가 아니라, 누군가의 목숨이 달린 문제라는 점이다. 에디슨 오빠가 과연 이런 초고도 비만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까? 수면 무호흡증을 필두로 해서 당뇨 및 심장병 외에도 다수의 합병증이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신이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플레처가 데리고 온 두 자녀 태너와 코디에 대해서도 판도라는 어머니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야 한다.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설 준비를 하는 태너는 세상을 우습게 여기면서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꾼다. 그나마 코디는 좀 나은 편으로 에디슨 새삼촌에게 피아노 레슨도 받으면서 집안 분위기를 그나마 누그러뜨리는데 진심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어디 세상 일이 그런 노력들만으로 해결 가능했던가? 절대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판도라는 자신의 결혼이라는 큰 판돈을 걸고 뚱보 오빠 살리기 프로젝트에 나선다. 여기가 바로 소설의 터닝 포인트다. 자신은 여전히 남편 펠트치와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가혹한 외동아들 출신 남편은 자신이냐 아니면 오빠냐며 다그친다. 그리고 별거를 선언하지. 354일 동안 자그마치 78만 칼로리를 태워야 하는 지상 최대의 다이어트 작전을 시작한다. 일단 번영을 구가하는 판도라의 말하는 인형사업 덕분에 재정 상태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의 사업에 자신이 없었던 판도라는 이 사업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다.

 

나는 여기서 펠트치의 속마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포이어바흐 집안에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에디슨 애팔루사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하는 사업이(사실 취미생활에 가깝다) 아내 판도라의 그것에 비해 형편없다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아이오와 사람들에게 그의 수제 가구보다는 정형화되고 착한 가격의 천편일률적인 가구들이 좀 더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는 것을 그가 진짜 몰랐을까. 그래서 가구 제조와 자전거 타기는 그에게 하나의 탈출구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에일리언이었던 에디슨의 존재는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 가정을 파괴하는 이질적인 존재였을 테고.

 

하나의 가족 서사 가운데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 줄 알았나 싶다. 그래서 슈라이버 작가를 사람들이 높게 평가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일단 새로운 형태의 미국 중서부 지방의 가족을 토대로 이런 저런 갈등 구조를 배치한다. 부부간의 경제적 불균형 상태도 좋은 선택이었다. 돈벌이에 무능력한 남편에 상대적으로 돈 잘 버는 사업가 아내. 세상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십대 아들 태너는 결국 학교도 때려치우고 새삼촌의 뒤를 이어 캘리포니아로 튄다. 아내는 오빠를 돌보겠다고 결혼을 판돈으로 걸고, 새살림을 차린다. 그리고 오빠를 돕는다는 핑계로 자신감 회복을 위해 자신도 다이어트에 나선 동생은 동포 뚱보들에 대해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어쩌면 이 비만이라는 문제가 단순하게 순간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한 개인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그런 멋진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미국 사회를 뒤덮은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무한 리필로 제공하는 탄산음료들이 모두 옥수수당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이제 비밀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무한의 소비를 위한 생산이 아메리칸 동포 뚱보들을 양산해 내는 사회적 이유가 아닌지에 대해서도 한 자리 거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상하게도 판도라 가족의 위기가 산으로 갈수록 에디슨 오빠 구하기 프로젝트는 성공 가도를 달린다. 일 년 만에 102kg을 감량하리라고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아마 가장 부정적인 인간은 바로 펠트치였으리라. 결국 성체중식이라 불린 요란한 파티에서 에디슨 애팔루사는 다이어트 성공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멋진 성공이 아니었냐고. 또 다른 추락은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빅 브러더>는 나의 기대 이상의 작품이었다. 한동안 즐겨본 미드 <모던 패밀리>의 그것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 미국식 가정의 한 단면을 쪼개서 그 안을 다양한 재료의 소스와 패티로 채운 성찬이라고나 할까.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막상 책 읽을 때의 감정과 그 감정을 리뷰로 옮길 때의 그것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그런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유는 아마도 나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탓으로 돌려야지 싶다. 슈라이버 작가의 <빅 브러더>는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 아디치에의 <보라색 히비스커스> 다음으로 손에 꼽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좋았던 책은 이제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는 카를로 레비의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가 될 것이다.


[뱀다리] , 표지는 정말 기가 막히게 뽑았다.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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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8-08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모던 패밀리> 같은 그런 책이군요?! <보라색 히비스커스> 다음으로 손에 꼽는다니, 메모해두겠습니다. 그나저나 표지는 정말 장난 아닌데요? ㅋㅋㅋ 표지때문에 책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레삭매냐 2019-08-08 13:23   좋아요 0 | URL
<모던 패밀리> 같은 책은 아니고,
예의 미드에서 보여 주는 가족의 진화
를 엿볼 수 있는 그런 소설이라고나
할까요.

슈라이버 작가가 구사하는 냉소적
유머는 진짜 일품이었습니다.

원서 표지보다도 더 주제에 부합하는
그런 느낌이지요...

물감 2019-08-08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와 좀처럼 연이 없다하시더니 드디어 읽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ㅎㅎ

레삭매냐 2019-08-08 13:24   좋아요 1 | URL
<내 아내에 대하여> 그리고 <맨디블 가족>
모두 읽다 말았거든요.

<빅 브러더>로 기운내서 다른 책들도 마저
읽어 보려고 합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설해목 2019-08-08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보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저뿐인 걸까요. ㅎㅎㅎㅎ
그나저나 가족사는 끈끈한 동양이나 널널한 서양이나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어느 집안이나 문제 없는 집안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

레삭매냐 2019-08-08 17:43   좋아요 1 | URL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대학 친구에게 가족이 원쑤라는 말을
듣고는 조금 충격을 먹었던 기억이 -

완벽한 가족에 대한 신화를 해체해야
하는 시간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표지는 근 10년 간 나온 책 중에 최고
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
제스민 워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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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망주 작가 중의 하나라는 말은 들었지만 제스민 워드의 실력은 이번에 출간된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로 알게 됐다. 정말 대단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해결될 수 없는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를 정면에 내세운 책이다. 그렇다면 결국 세그리게이션이야말로 해결책이라는 것일까. 물론 그건 아니겠지. 제스민 워드는 현실 세계의 문제를 환상으로 격상시킨다. 그래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처럼.

 

소설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는 세 명의 화자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13세 소년 조조와 그의 어머니 레오니 그리고 조조와 비슷한 나이의 유령소년 리치. 조조와 그의 여동생 케일라(미카엘라)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각각 아빠와 엄마라고 부른다. 암에 걸려 병상에서 죽어가는 엄마는 레오니의 모성 없음을 손자에게 경고한다.

 

조조와 케일라의 아버지 마이클은 백인이고, 지금은 악명 높은 파치먼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마이클의 아버지이자 조조와 케일라의 할아버지 빅 조지프는 흑인 손자 손녀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미시시피라는 동네에 사는 백인들의 특징일까. 5년형을 받고 수감 중인 마이클이 38개월의 형을 살고 조기 석방된다는 소식에 아이들과 직장 동료 미스티와 함께 로드트립에 나선다. 조금 클리셰이가 아니냐고?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사실을 빅 조지프에게 알리러 갔다가 라이플을 들고 있는 모습에 레오니는 질겁하고 도주한다. 레오니는 그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필로폰 상습복용자에 이번에도 남편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마약배달을 마다하지 않는다. 한편 레오니 집안에는 죽은 사람을 보는 환시 능력이 유전되는 모양이다. 그녀는 억울하게 죽은 오빠 기븐을 그리고 조조는 아빠 리버와 함께 지내던 리치를 각각 보게 된다. 현실과 환시를 넘나드는 제스민 워드의 서술 속에서 뿌리 깊은 미국 남부의 인종주의의 면모들을 넘실거린다. 그리고 환상을 가미한 저자의 문장들은 매혹을 뛰어넘어 강렬한 아우라를 발한다. 군데군데 메모를 하고 포스트잇을 붙였지만 막상 인용하려니 귀찮다.

 

오래 전 리버와 리치가 수감되었던 그리고 백인 아빠 마이클에게는 현재진행형인 파치먼은 인종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다. 죄를 지었으면 교정시설에 들어가 죄의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다. 다만, 리버와 리치가 무슨 죄로 그런 가혹한 형을 살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이클의 죄는 상대적으로 뚜렷하다.

내가 소설에서 꼽은 두 가지 결정적인 장면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파치먼에서 나온 마이클이 운전을 하다가 도로에서 경찰에게 수색을 당하게 되는 장면이다. 운전면허도 없는 마이클이 운전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다량의 필로폰을 가지고 있는 게 더 문제다. 지금 막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이 마약소지죄로 경찰에게 잡힌다면 어떻게 될까. 두 명의 백인, 한 명의 흑인여성 그리고 아이들이라는 기묘한 조합에 경찰이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걸까. 다급한 마음에 필로폰을 삼킨 레오니의 위기는 아직 아이지만 어른 같은 모습의 조조는 경찰에게 당하게 되는 수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빠가 준 부적을 주머니에서 꺼내려다가 경찰에게 오해를 사는 바람에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 <겟 아웃>에서 흑인 남자 주인공이 백인 경찰의 심문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장면이 순간 떠올랐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현실이라고 제스민 워드는 소설로 증명한다. 뭐 그렇다고 해서 마이클과 레오니를 두둔할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다음 컷은 빅 조지프를 찾아간 마이클 가족의 수난이다. 레오니는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마이클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들이 환대를 받았을까? 천만에 말씀. 그나마 마이클의 어머니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밥이라도 먹이자는 의견이지만 빅 조지프는 마이클과 난투극을 벌인다. 자신이 가진 인종주의에 대한 의식을 전혀 바꿀 생각이 없는 이들의 갈등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제스민 워드는 그렇게 미국 사회에 내재된 갈등이 이런 식으로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는 점을 바로 이 에피소드를 통해 독자에게 확실하게 전달한다. 언제든 도화선에 불만 당기면 그 다음은 잘 알 것이다.

 

후반에 저자가 치밀하게 준비한 리치의 죽음에 대한 놀라운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두 개의 결정적 장면에 비하면 좀 약하지 않나 싶다. 너무 센 주사를 연달아 맞으니 서사의 힘이 좀 빠졌다고나 할까. 이어지는 서사 부분이 좀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러티브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하늘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도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를 다 읽고 나서, 어쩌면 미국 인종주의 소설은 흑인 작가들의 전유물이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인 작가가 쓴다면, 흑인 작가의 그것만 한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아니 오히려 논쟁의 씨앗이 될 지도 모르겠다. 흑인 작가는 “N” 단어도 마음껏 쓸 수 있지만 백인 작가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을 우리 브렌던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지 아마. 어쨌든 제스민 워드 작가는 미국 사회가 품고 있는 인종주의 문제의 기저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루면서도 동시에 환시라는 특이한 방식으로 해석해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모두가 만족하는 중립적인 글을 짓기란 역시 쉽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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