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참 다행이다. 최제훈 작가가 단 두 개의 작품을 낸 것이. 왜냐하면, 한 번 어느 작가에 꽂히게 되면 바로 그 작가가 발표한 책을 다 구해서 읽어야 속이 시원하니까 말이다. 이번 주에 최제훈 작가의 데뷔 소설집인 <퀴르발 남작의 성>을 아주 만족스럽게 읽었고, 내친 김에 네 개의 중편으로 구성된 장편 <일곱 개의 고양이 눈>도 읽었다.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고 나서, 인터넷으로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봤다. 제가 그 인터뷰에서 언급한(진짜 그렇게 언급한 적이 있었나?) ‘나선형’이라는 단어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읽는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작에서 살짝 맛을 보여줬던 이제 어쩌면 작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소설 속의 소설 “메타픽션” 기법은 그 광휘를 더한다. 구성은 더 탄탄해졌고, 나선형으로 꼬이며 솎아내는 이야깃거리의 행렬에 그만 황홀해졌다.

전형적인 밀실 트릭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을 떠올리는 <여섯번째 꿈>은 어느 고립된 산장에 모인 6명의 연쇄살인범을 주제로 다루는 인터넷 동호회 “실버 해머” 동호회원이 차례로 보이지 않는 “악마”에 의해 죽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교통과 통신이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는 당연히 두절되었고, 기아와 불면의 공포 속에서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게임의 법칙’을 알아내려는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진다. 이야기를 더 쫄깃하게 만드는 건, 이 중편소설에 등장한 주인공들이 뒤에 나올 소설에 직간접적으로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형 그대로가 아닌 원주율 π처럼 무한반복이라는 과정을 거쳐 변용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가치는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복수의 공식>에서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복수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오죽했으면 슈베르트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 그리고 에드바르트 뭉크가 그린 동명의 그림까지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을까. 이 음악과 그림은 ‘복수의 공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니 가능하면 듣고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보니 QR마크가 인도하는 사이트로 들어가 좀 해괴한 내레이션도 들었다.

개연성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킨 복수의 화살은 엉뚱한 사람에게 날아가 꽂힌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아등바등하지 말라고 계언(戒言)인가. 슬쩍슬쩍 자신이 맡은 번역에서 장난질을 치는 번역가처럼 작가의 블랙유머가 반짝반짝 빛난다. 소용이 다한 캐릭터를 사골 국물 우려먹듯 다른 공간으로 확장, 전이시키는 아이디어가 멋지다. 이국적 난초 향기가 어우러진 화원을 배경으로 한 치정극과 개인의 도서관을 통해 소장자의 결핍과 욕망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노라는 서술도 일품이다.

최제훈 작가는 음악의 소나타 형식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반복과 변주(변용)를 소설이라는 문학형식에도 뻔뻔하게 도입한다. 이 두 가지가 얼마나 효과적이냐 하면, 각각의 중편에서 독자는 어느새 이런 반복과 변주에 포로가 되어 밤마다 셰에라자드의 귀가 솔깃하게 하는 마력 같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딱 절반까지는 그야말로 몰입해서 읽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띄엄띄엄 읽다 보니 후반부에서는 왠지 동력이 급속하게 떨어진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첫 두 이야기는 유기적 연결이 되어 있지만 나머지 두 편은 좀 느슨해서였을까? 한 번 읽고 말 책이 아니니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π>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는 어쩌면 완벽한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창작하겠다는 작가 욕망의 발현이라는 느낌이 스친다. 현실과 섬망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로 보기에도 전혀 손색이 없다. 어떻게 보느냐는 전적으로 독자의 의지에 달린 거니까. 굳이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자신이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 읽고 있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현실인가 아닌가를 반복해서 묻게 된다. 이런 유의미하지 않는 관계의 설정을 통해 작가는 독자를 자신이 창조해낸 “메타픽션”의 질곡 속에 빠트린다. 질척질척한 질곡이 아닌 아주 유쾌한 질곡에 말이다. 그러니 이런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독자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직무유기가 아닐까.

아, 북글을 마무리하면서 든 생각인데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도 참 재밌지 않을까 뭐 그런 상상을 해봤다. 복잡한 스토리텔링을 관객이 정신줄을 놓지 않고 쉴 새 없이 좇아가기가 쉽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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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레터
틸만 람슈테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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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틸만 람슈테트?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그전에 먼저, 독일작가와 나는 아무래도 궁합이 맞질 않는 모양이다. 일전에도 카챠 랑게-뮐러라는 독일 작가의 <차마 그 사랑을>, 얼마 전에 읽었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 그리고 잔뜩 기대를 했던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 이르기까지 기대했던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소설을 읽을 적에 무언가 감칠맛이 나는 그런 쏠쏠한 재미를 원하는데, 아무래도 독일 작가의 글은 나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2008년 잉게보르크 바흐만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책 띠지의 소개와 책 표지의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한 마술사(?)의 유쾌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레터>는 시종일관 어떤 죽음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키스 슈타페르페니히는 항상 중국 타령을 하던 할아버지가 오스트리아도 아닌 독일에서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에게 보내는 중국발 가짜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키스가 들려주는 할아버지는 참 특이한 캐릭터다. 수도 없이 할머니를 바꾸는 바람둥이에다, 손자들을 운전사로 부려 먹기 위해 브레이크에 발이 닿을 만한 나이가 되면서부터 운전교습을 시킨 엽기적인 노인네다. 하긴,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인 키스 역시 할아버지의 젊은 ‘할머니’ 프란치스카와 눈이 맞아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하고 결혼까지 결심한다. 자신을 스스로 인생의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키스는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소원인 중국 여행을 위해 모아준 돈을 프란치스카와 함께 카지노에서 한방에 날려 버리는 대담함도 보여준다. 왜 갑자기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이 떠오르는 걸까? 가족의 해체는 우리나라나 독일이나 비슷하게 진행되는 모양이다. 다만 한 가지 차이라면 독일판 콩가루 패밀리는 좀 더 파격적이라는 점 정도?
 
<베이징 레터>는 실제 독일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키스가 할아버지와 중국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쓴 가짜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전자도 그렇지만 후자는 더욱 더 철저하게 허구다. 아무리 허구라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 책인 <론니 플래닛>을 잘 연구하고 써서 그런지 마치 현재 중국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마 그런 게 작가의 역량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현실세계에서는 돈을 다 날려 버린 키스가 중국행을 닦달하는 할아버지를 무마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이 아주 리얼하게 그려진다. 한편, 베이징과 시안을 거치는 여행을 하는 편지 부분은 서구인의 눈에 비친 이국적인 풍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중국을 그린다. 만리장성 투어를 마치고는, 돌팔이 한의사에게 약을 한 첩 짓기도 하고, 국수를 주문한 식당에서는 어디선가 나타난 할아범의 젓가락질로 사이좋게 국수 한 그릇을 싹 비우기도 한다.
 
다음 목적지인 시안에서는 드디어 할아버지는 자신이 그렇게 중국에 오고 싶어 한 이유를 살짝 드러내 보인다. 아주 오래 전, 만났던 ‘월드 센세이션’ 리안의 이야기가 중심으로 떠오른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간직하고 싶은 청춘의 아련한 사랑 이야기. 현실에서는 할아버지 카를의 죽음으로 비롯된 신원 확인 절차가 진행 중인 가운데, 키스는 베르터발트에서 확인한 할아버지의 시신을 보고서도 부인한다. 어느 순간, 현실과 허구가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에라, 모르겠다 어디 한 번 끝까지 읽어 보자!
 
<베이징 레터>는 아쉽게도 다 읽고 나서도, 헛헛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카를 할아버지의 좌충우돌 중국 여행기는 재밌었지만 현실 세계에서 허물어진 가족관계의 복원은 요원하게만 다가왔다. 그런 게 바로 새로운 밀레니엄 통일시대 독일의 현재 모습일까? 차라리 현재의 이야기를 쏙 빼 버리고 중국여행만으로 책을 구성했으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힌 서구인들의 사고와 왜곡이 얼핏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요즘 마르틴 발저의 책들이 땡기는데, 과연 독일 작가의 책은 지루하다는 개인적 편견을 깰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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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 주말 성석제 선생님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작가님으로부터 이번에 출간된 <칼과 황홀>에 대한 그리고 책에 들어 있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보통 작가와의 만남이라고 하면, 책을 먼저 읽고 나서 만나게 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작가를 먼저 만나고 그 후에 책을 읽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어쩌면 책만 읽어서는 모를 그런 부분까지도 작가와의 만남 시간이 커버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올해 읽은 선생님의 또 다른 작품 <농담하는 카메라>로 음식 이야기에 대한 맛보기를 해서 그런지 이번 작품도 전혀 낯설지 않고 친근하다. 에세이 모음집의 제목에 등장하는 칼은 식재료로부터 맛을 끌어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음식을 조리하는 숙수의 기본 장착 아이템이라는 뜻이다. 숙수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맛은 우리를 황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있다. 선생님의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정말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 음식은 으리으리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값비싼 고급 요리가 아니라 처음 간 중국의 호텔에서 천신만고 끝에 얻은 뜨거운 물로 우린 티백에 담긴 한 잔의 차(茶)고, 독일의 외딴 호텔에서 만난 축복과도 같았던 부드러운 아침 식사, 입국심사대에서 실랑이로 잡친 기분을 달래주는 정말 맛있는 에일 맥주라는 것이다. 정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글들의 줄줄이 사탕이다.

선생님만큼의 주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지론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까지 가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버드와이저 맥주를 마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인터넷과 블로그의 발달로 직접 가지 않고서도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오미(五味)의 직접적인 체험은 불가능하니까. 미처 몰랐는데 선생님은 20대가 되기 전까지 아예 육식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게 가능한가? 한창 자랄 나이에 고기를 마다하다니, 놀랍군. 그런 연유에서인지 선생님은 국수를 특히 좋아 하시는 것 같았다. 라오스에 가셨을 적에는 아침에 닭볶음밥, 점심 저녁으로 연달아 닭국수를 드실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소나 돼지 같은 육식을 즐기지 않는 분들도 닭고기에 대한 거부감은 좀 덜하지 않나 뭐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도 내가 한 질문이었지만, 예상대로 천하를 주유하는 선생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는 바로 글감이었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글 솜씨만큼이나 부러운 점이 바로 그런 에피소드의 행진이다. 인위적이지 않고, 물 흘러가듯 그렇게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선생님의 삶 가운데서 마치 대어를 낚아채는 고수의 풍모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어신이 내리는 순간, 우리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비로소 이런 ‘황홀’경에 도달한다.

선생님은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서 가장 한국적인 입맛 때문에 어지간한 비위가 좋은 사람도 마다하는 세계 각국의 음식에 대한 면역이 생기셨다고 한다. 그 만남의 기원은 바로 선생님의 고향 상주에서의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이리라. 맛의 비결인 글루탐산의 원천인 콩으로 빚은 된장이 익어가던 아랫목의 추억, 논일을 도와주던 일꾼에게 공급하기 위해 할머니가 직접 빚으신 막걸리 주전자를 심부름 길에 통째로 마신 일, 사지를 쭉 뻗은 개구리 튀김과 배추전 이야기, 사회초년병 시절 법성포소주를 마셔가며 벌인 대작사건 등 읽기만 해도 빙그레 웃음이 번지는 에피소드가 책에 가득하다. 선생님이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 말씀하신 “결핍에 의한 탐닉”이라는 말이 귓가를 때린다. 이제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해졌지만, 우리네 술자리와 밥상머리에는 나중에도 두고두고 나눌 그런 이야기가 결핍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아쉬움 말이다.

이번 가을에는 선생님의 궤적을 좇아 사람 냄새와 사연이 담긴 음식 아니 술자리라도 한 번 가져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기회가 예상보다 더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말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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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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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와우 북페스티벌에서 말로만 듣던 최제훈 작가의 첫 번째 <퀴르발 남작의 성>을 마침내 입수했다. 그리고 마치 숨이 넘어갈 정도로 그렇게 재밌게 다 읽었다. 지인들에게 내가 지금껏 읽은 우리나라 최고의 데뷔작은 천명관 작가의 <고래>라고 말해왔는데, 아무래도 한 권 더 추가해야할 것 같다. 이렇게 재미진 소설을 출간된 지 일 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되다니, 아쉽다 아쉬워. 모쪼록 널리 알려야겠다는 투지마저 들 정도다.

최제훈 작가의 매력만점 소설집은 표제작 <퀴르발 남작의 성>으로 시작된다. 성(城)을 성(性)으로 잘못 예상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가 문체 같은 스타일보다는 구성에 중점을 준다는 점을 기억해 두었다. 후속작에도 사용된 메타픽션 기법은 표제작에서 그 빛을 발한다.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영화/소설을 이용해서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도전한다. 그리고 독자는 여지없이 낚인다. 나도 그런 영화가 있나 해서 부지런히 검색을 해봤다.

현대 서울의 어느 대학 강의에서, 블로그에서,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만들었다는 B급 호러영화와의 교묘한 변주를 통해 허구는 현실의 경계를 슬금슬금 넘나든다. 젊은 처녀들을 아내로 맞아 죽인 샤를 페로의 잔혹동화 <푸른 수염>의 모티프를 삼아, 수백 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 퀴르발 남작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1950년대 할리우드에 광풍처럼 몰아닥친 매카시즘에 대한 은근한 비판도 눈여겨볼 만하다.

19세기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셜록 홈즈와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여담을 분석한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과 <괴물을 위한 변명>은 서로 공명한다. 자신의 창조자인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의문사를 추적하는 런던 출신의 명탐정 셜록 홈즈가 자신의 추리를 자신 있게 제시했다가 허방다리를 짚는 장면에서는 정말 빵 터져 버렸다. 아니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소재로 삼은 <괴물을 위한 변명>은 좀 더 심오하다. 메리 셸리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의 심각한 왜곡은 할리우드 영화의 괴물 캐릭터의 재생산과 그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 작가의 분석이다. 퀼트이불 짜깁기처럼 탄생한 자신의 창조물과 사투를 벌이는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비극을 추적하면서, 원작가가 미처 다루지 못한 소외된 캐릭터에까지 세심한 애정을 보내는 구닥다리 호러 팬의 오마쥬라고나 할까. 캐릭터의 왜곡이라는 주제는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에서 다시 한 번 전면에 등장한다.

중세 말에 등장한 마녀사냥에 대한 고찰은 심지어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의 행위가 아닌 집단 폭력 때문에 얼마나 인간성이 말살될 수 있는지 최제훈 작가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마녀인지 아닌지 심판하는 방법 자체부터 비이성적이었노라고 그는 예리하게 논증한다. 문제는 그렇게 시작된 마녀사냥은 언제라도 홀로코스트나 매카시즘 같은 집단 히스테리를 동반한 몰이성적 변형으로 체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항상 아리까리했던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해석도 명쾌했다.

이상이 문학 작품과 역사에 대한 변주였다면, 다른 이야기는 좀 더 현실세계에 가깝다.  “해리성 정체감장애”라는 다중인격에 대한 전문용어까지 동원해서 평범한 삶을 살던 기러기 아빠가 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추적해 가는 과정을 그린 <그림자 박제>도 일품이다. 톰과 제리라는 다중인격을 지닌 주인공의 과거를 파헤치는 장면에서는 에드워드 노튼의 번쩍이는 연기가 돋보였던 <프라이멀 피어>가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성친구를 사랑한 주인공의 고백을 다룬 <그녀의 매듭>, 대학시절 동아리 후배와 만난 어느 이혼남의 이야기를 그린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까지 주옥같은 단편작품의 행진에 마냥 즐거웠다. 마지막의 작가 후기처럼 보이는 마무리에는 소설집에 나온 모든 캐릭터들이 등장해서 한판 난장을 벌인다. 이 모두가 유쾌하고 재밌다.

이제 비록 최제훈 작가와 첫 만남을 했을 뿐인데 벌써 그의 팬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가 참 뻔뻔하다’라는 생각에 웃음이 빵빵 터졌다. 어쩌면 이렇게 있을 법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꾸며낼 수가 있을까. 이런 상상력의 원천은 어디일까 하는 궁금증이 마구 일었다. 허구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느슨한 부분이야말로 작가가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타깃 포인트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작가는 탄탄한 구성과 그럴싸한 이야기를 전략적 도구로 삼는다. 문학적 허구와 자신의 주관을 양념으로 곁들인 현실비판은 너무 매력적이다. 첫 번째 소설집에서 이 정도 내공을 선보였으니 어찌 차기작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얼마 전 인터넷신문인 <프레시안>에서 최제훈 작가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적극 추천하는 글을 보고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어느 대담에서, 소설은 밥은 아니지만 밥과 함께 먹으면 맛있는 반찬이라고 했던가. 최제훈 작가의 소설이 우리네 퍽퍽한 삶에 곁들여지면 정말 맛깔스러울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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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0-04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제목이 참 마음에 드네요 :)
처음 만나자마자 당장 팬이 되어버린 느낌이라니... 저도 어여 이 작가를 만나야겠어요!

레삭매냐 2011-10-07 11:05   좋아요 0 | URL
적극 추천합니다.
이주에 최제훈 작가 두 권의 책을 모두 다 읽었네요.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조현 지음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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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으로부터 책으로 엮여 나오기까지 또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라는 다소 긴 제목의 소설집의 주인공 조현 작가의 이야기다. 그는 우리 문학계에서 성골로 지칭되는 소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다. 어떤 작가는 그런 게 뭐냐고 폄하하는 이도 없지 않지만, 어쨌든 문단으로 가는 비상구 정도로 생각하면 될까.

조현 작가는 2008년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에 두 번째로 실린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라는 학술 논문 제목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소설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팩션 장르는 현실과 가상 세계의 중간 어느 쯤에 비스듬하게 걸쳐 있는 그런 느낌이다. 솔직히 타이틀 소설의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됐을 정도로 독특한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얼마 전에 읽은 소설 평론에서 소설은 독자에게 영향을 주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성적 반성을 통한 성찰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점에서 조현 작가의 작품은 독자에게 다양한 성찰을 강요한다. 그래서 첫 번째 소설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인 마이클 햄버거를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아니 이럴 수가! 첫 페이지에서부터 오류가 있는 게 아닌가. 실제 마이클 햄버거는 1924년생인데, 작가는 당당하게 그가 1925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시작에서부터 비틀린 작가의 팩션이 등장하는 건가? 당황스럽다.

시인이자 번역가였던 마이클 햄버거의 시가 단지 “햄버거”라는 이름 때문에 세계적인 햄버거 브랜드 맥도날드의 마케팅 전략의 일부분으로 연착륙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주한미국 커닝스 주니어의 손을 거쳐 한국 맥도날드 지사가 개발한 햄버거를 사면 시를 끼워 준다는 “착한 소비”의 첨병이 되는 마이클 햄버거의 시 이야기는 참 기발했다. 정크 푸드의 대명사로 지탄을 받는 식품 햄버거가 문학과 만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작가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자유로운 상상력을 대변한다.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은 한술 더 뜬다. 학술 논문의 제목을 뺨칠 만한 제목의 뻔뻔한 차용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하는 종이 냅킨에 대한 작가의 일고찰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문제는 그 종이 냅킨을 소비하던 주체인 인류가 멸망한 다음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게 이런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목성의 위성이라는 가니메데에서 왔다는 ‘외계소녀’를 사랑한 청년의 이야기에서는 <크라잉 게임>만큼이나 생목오르는 극적인 반전이 독자를 기다린다. 정상과 다른 이들은 우리에게 어쩌면 그렇게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초능력을 배우는 과정에서 남이 게워낸 토사물을 먹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은 허구와 실재의 조합만큼이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로르샤흐 테스트 이야기도 어렵기만 하다. 다 읽고 나서 ‘내가 뭘 읽었나?’하게 만드는 그런 케이오스 뿐이다.

역시 첫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의 책답게 아직 이렇다 저렇다 할 평가를 내리기에는 이르지 않나 싶다. 하지만, 팩션이라는 장르를 통해 독자의 성찰을 촉구하는 조현 작가의 스타일 하나만큼은 만족스럽다. 순문학뿐만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장르가 넘실거릴 수 있는 문학생태계가 더욱 활성화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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