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길 1 - 노몬한의 조선인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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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전을 성공시킨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독일 동방대대 소속 조선 병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나중에 블로그에 포스팅도 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진기한 이야기를 소설로 다룬 조정래 선생의 <사람의 탈>도 읽었다. 소설은 선생의 다른 장편에 비해 기대에 미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2011년 다시 PD 출신 작가 이재익 씨의 <아버지의 길>로 노르망디의 코리안을 다시 만나게 됐다.

작가는 어느 병원에서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탈북자의 아버지 김길수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38년 소설의 주인공 월화는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랑하는 남편 길수와 아들 건우를 버리고 황량한 만주 벌판으로 떠난다. 뒤에 남겨진 자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볼 수가 있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중국 동북부를 완전 장악한 제국주의 일본은 북방에서 강력한 맞수 소련과 대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당시 일본 제국군 중에서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관동군은 병력 부족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 징병을 시작한다.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어떤 국회의원의 엉터리 주장이 떠올라 절로 쓴 웃음이 나왔다.

작가는 징병을 통해 일본 관동군 부대에 모이게 된 다양한 인간 군상을 스케치한다. 주인공 김길수와 월화를 비롯해서 14세 소년병 영수, 정미소 일꾼 출신으로 괴력을 자랑하는 정대, 그의 연인인 명선 아씨, 친일부역자로 황군이 되어싶어하는 조선 출신 스기타 대위 등 마치 퀼트 이불의 한 조각씩 모여들어 큰 얼개로 모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 이제 모든 준비는 됐다. <아버지의 길>의 부제로 나온 만몽국경의 노몬한 전투로 이야기는 치닫는다.

조선 출신 관동군이 어떻게 해서 노르망디에까지 가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째 권에서 다뤄지게 되겠지만 1권에 나온 이야기만으로도 파란만장한 인생의 굴곡에 대한 스토리는 충분한 것 같다. 사랑하는 아내는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만주로 떠나고, 8살짜리 아들을 홀로 두고 떠나온 가슴 찢어지는 아버지 길수의 마음은 소년병 영수에게로 향한다. 독립군 출신의 이 무뚝뚝한 사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영수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아마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구성하는 정신대 위안소에는 정대가 사모해마지 않는 명선 아씨가 하루코라는 이름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개연성이 소설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극적 구성은 현실감을 떨어뜨린다는 느낌을 준다. 심지어 악명 높은 독립군 “붉은 여우” 월화마저 스기타 대위의 포로가 되어 병영으로 끌려오지 않는가 말이다.

모름지기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반드시 검증을 해야 할 것이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나누는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이재익 작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묻고 싶다. 단적인 예로 122쪽에 나오는 태평양전쟁 전범으로 전후에 사형된 도조 히데키를 관동군 초대 사령관이라고 이재익 씨는 기술하고 있는데, 도조는 관동군 사령관 출신이 아니라 참모장 출신이다. 한국 위키피디아를 조회해 보면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별거 아닌 사실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간단한 사실 하나도 짚어내지 못하는 역사소설이라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표지에 나온 4년간의 취재와 집필 기간 동안에도 미처 잡아내지 못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 때문에 이재익 씨가 혼신을 다해 역사소설의 빛을 바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거나 속도감 있는 이야기의 전개는 마음에 든다. 이야기의 원형이 재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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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이레네 - 홀로코스트에 맞선 용기와 희생의 기록
이레네 구트 옵다이크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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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는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독서 주제다. 지금 막 다 읽은 이레네 구트 옵다이크의 실제 체험에 기초한 육필원고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꿈 많던 시절인 십대에 조국 폴란드를 폐허로 만든 독일 전격전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 혼자 살아남아야 했던 이레네의 이야기. 독일계를 연상하는 외모로 얼마든지, 폴란드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독일인 행세를 하며 전쟁의 참상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자신의 운명에 당당하게 맞선 이 나이 어린 아가씨의 의기는 정말 칭찬받아 마땅하리라.

이레네의 이야기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 즉결 처형당할 수 있었던 유대인 구조에 그 어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폴란드 간호조무사 출신 포로 처녀에게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독일과 소비에트의 협공으로 조국을 잃은 이레네는 가족과 헤어져 러시아로 몸을 피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닥치는 고난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이레네는 꿋꿋하게 현실에 맞선다. 생과 사를 가르는 극적인 수많은 순간들을 이겨내면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하지만,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고 했던가. 다섯 자매 중에서 바로 아래 동생인 야니아와 함께 독일군의 대 러시아 침공 작전의 전초기지인 테르노폴로 이송되어 탄약공장에 배치된다.

그녀가 어려서 배운 유창한 독일어 실력은 향후 생존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독일군에 협력을 거부한 폴란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레네는 부역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우선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해야 하는 어린 아가씨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비난이 아닐까. 어려서부터 다친 동물과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배워온 그녀는 한때 자신의 다정한 이웃이었던 유대인을 격리수용하고 마치 짐승처럼 취급하는 나치 친위대의 만행에 분노한다.

유대인을 돕는 자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즉결 처분한다는 독일 당국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이레네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한다. 이런 의로운 자각이 실천으로 옮겨지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처음에는 게토에 격리된 유대인들에게 남은 음식물을 몰래 넣어 주는 것으로 시작한 그녀의 순수한 선행은 나치의 유대인 절면계획에 정면으로 맞서 그들을 숲으로 보내고, 심지어 독일 장교의 집에 숨기는 데까지 나간다. 독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던 전황은 무적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를 하면서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아슬아슬하게 자그마치 12명의 유대인들을 몰래 숨기고 돕던 이레네는 마지막 순간에 후견인 에두아르트 뤼게머 소령에게 발각이 되고, 치욕적인 대가를 치른다. 수치심에 못 이겨 성당에 찾아가 신부에게 열한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독일군의 정부(情婦)가 되었다고 고백하자, 신부는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범한 그녀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에 충격을 받는 이레네, 다시 한 번 획일적인 교리라는 패러다임에 갇힌 종교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온갖 역경 끝에 친구 유대인을 구해낸 이레네에게 닥친 운명을 가혹하기만 하다. 소비에트 러시아군에게 해방된 조국 폴란드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이레네는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치른다. 자신이 구한 친구들과 만난 기쁨도 잠시 뿐, 사랑하는 가족과 애인마저 전쟁으로 잃은 작은 영웅에게 돌아온 보답이 고작 이런 것인가하는 회의에 젖는다. 한때 신생국가 이스라엘로 유대인 친구들과 함께 건너갈 생각도 했던 이레네는 새로운 조국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게 된다.

그야말로 한편의 영화를 방불케 하는 파란만장한 이레네의 이야기는 역시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이레네는 전쟁 중에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구한 공로로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열방의 의인’이라는 칭호와 함께 국가최고훈장을 수여받는 영예도 얻었다. 미국 청소년을 위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을 정도로 용기와 희생을 유려하게 표현해낸 점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인류의 양심에 큰 상처를 남긴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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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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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의 열렬한 애청자다. 처음에 듣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중독이 될 줄 미처 몰랐다. 지난주까지 모두 22회 그리고 호외까지 방송된 모든 방송을 들었다. 그리고 김어준 총수의 책이 곧 나온다는 말을 듣고 바로 주문장을 날렸다. 책을 구입한 지는 제법 됐는데, 이 책 저 책 바람피우다가 오늘 새벽에서야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김 총수의 <닥치고 정치>에는 자신이 나꼼수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의 원형질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소재거리를 제공해 주시는 가카에 대한 무한애정으로 시작된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은 오프라인의 세계까지 넘보면서 콘서트와 책으로 우리 곁을 찾아왔다. 나꼼수 애청자라면 <닥치고 정치>는 그동안 김 총수가 방송에서 들려준 이야기의 집대성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채리라.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책의 집필시점이 이번 가을이 아니라 지난 봄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특히나 안풍으로 대변되는 안철수 바람을 정확하게 예언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개인적으로 가카가 아닌 여집합의 총합으로 우리시대 소통의 상징이자 시대의 결핍을 메워줄 새로운 플랫폼이 안철수가 아닐까 싶다. 물론 김 총수는 조국 교수에서 출발해서 문재인 이사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지만. 그건 김 총수의 생각이고. 조국과 문재인 그리고 안철수 트로이카를 보유한 것만으로도 든든하지 않을까?

김 총수는 대한민국 우(右)를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지 못하는 ‘겁먹은 동물’이라고 폄하한다. 어쩌면 유전자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는지는 모른다고 진보와 대척점에 둔다. 사실 우리나라 보수가 어디 제대로 된 보수인가 하는 문제에서는 또 도리질을 하게 만든다. 모름지기 진(眞)보수라고 한다면, 원칙과 가치에 어긋나는 것에 자존심 때문에라도 목을 걸고 투쟁하는 짠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사로운 이익에 눈먼 우리 보수에게 그런 결기와 폼 그리고 비장미를 볼 수 없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총수는 주장한다.

그렇게 우와 가카가 계속된 헛발질을 하고 있는데도 진보 진영은 무얼 하고 있는가에 대한 총수의 판단은 냉혹하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그대로 현실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대비해서 연대의 정신에 입각한 합종의 길은 멀기만 하다. 그들의 단일화 논의는 재미도 없고, 듣기만 해도 짜증만 난다. 감동의 정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부질없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그들의 모습은 김 총수가 책의 초반에서 비판한 유인원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런 저런 정파 간의 이해를 대승적 차원에서 봉합하고 통 크게 합치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김 총수가 그렇게 목 놓아 외치는 안철수 룰의 작동 원리를 모르는 기성정치권의 몰락을 목도하면서도 말이다.

가카와 그의 수하이자 부패한 폴리널리스트들의 암약으로 메시지 전달 루트는 모두 장악되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들과 소통을 하려면, 플랫폼의 확보가 필수적인데 방송과 신문 모두 보수에게 장악된 마당에 무슨 수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나온 것이 바로 <나는 꼼수다> 인터넷 팟캐스트였다고 김 총수는 말한다. 무상급식이라는 비밀병기를 선점했지만,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진보의 프레임을 짜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이 절실하다는 것이 김 총수의 분석이었다. 그래서 SNS와 스마트폰을 활용한 팟캐스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기술에 가카 덕분에 한층 재밌었진 정치라는 양념을 곁들이자 방송은 폭발해 버렸다. 이제 가카와 수하들조차 나꼼수는 무시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되어 버렸다. 지난주 나꼼수 주진우 기자가 예언한 대로 가카의 사저 문제에 대해 청와대가 한 치의 오차 없이 반응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미 그전에 김 총수의 절친 보수의 고깔콘 시장은 그의 예언대로 행동했다가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은 정치의 세계, 여하튼 너무 재밌다.

단, 너무 진중하면서 과학적인 분석을 원하는 독자라면 <닥치고 정치>는 삼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 총수가 내내 말하는 대로 이 책의 근간은 ‘무학의 통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감성적 접근, 추정과 소설적 추론이 난무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 그 자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사문난적스러운 주장이 진실처럼 들리니 큰 일이다.

언뜻 보기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이겠지만, 쫄지 마라. 잘못됐으면 고치면 된다, 선거로. 이제 얼마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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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0-1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나꼼수를 듣지는 않지만 김어준의 책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쫄지 마라... 명쾌한 정치 철학이에요 ㅎㅎ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레삭매냐 2011-10-12 17:22   좋아요 0 | URL
방송을 다시 듣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다 읽고 나니 마치 무슨 숙제라도 마친 것
같은 그런 상쾌한 느낌이랍니다 :>
 
세상 끝의 골목들 쇳물처럼 새벽 출정 봄비 내리는 날 매향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6
방현석.김한수 외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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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정화진 작가의 <쇳물처럼>이라는 작품에 대해 듣게 됐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거대한 함성이 온 사회를 넘실거리던 바로 그 해에 나온 작품이다. 국가주도 산업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도전하고, 시민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주인이라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퇴근하자마자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전자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여전히 우리나라 공공시스템의 안정성은 정말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인천의 어느 주물공장이다. 작가는 타자화된 시점으로 노동자들의 신산한 삶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때는 김장철, 모두가 김장 보너스를 기대하지만 그들이 생업터전인 <태양주물>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10%를 넘는 불량률을 이유로 들면서, 늬들이 그러고서도 보너스를 달라고 할 수 있냐고 회사의 대변인으로 등장하는 전 상무는 칠성이에게 퉁바리로 모욕한다.

언제나 그렇듯 시작은 미약했다.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의 유부남들보다 좀 더 자유로운 총각들이 뭉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무슨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등장이 아니라 왜 우리가 이런 처우를 받으면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절절한 자각이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선배 노동자들의 시선은 오늘날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냉혹한 노노대결의 그것이 아닌 서로를 품는 따뜻함이 배어 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하나가 된 태양주물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힘의 위력을 모르고 있다. 하지만, 도가니에서 녹은 쇳물처럼 하나가 된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성공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투영된 주인공일지도 모르는 천 씨는 현장에서 그들이 그렇게 바라던 리더십을 발휘한다. 사측이 양보를 하게 된 배경에는 어쩌면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입게 될 어마어마한 물적 손해가 그들의 이탈한 이성을 바로 잡아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임금 노동자들을 자극해서 과연 그들이 얻는 게 무엇이겠는가? 당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노사협상의 원형질을 단편 <쇳물처럼>은 보여준다.

탄광에서 잔뼈가 굵은 천 씨는 규폐나 막장사고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아 탈출하지만, 탄가루와의 연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주물공장에 터전을 잡았고 정당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나 하는 그런 복잡한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천 씨는 연전에 칠성이의 보너스 요구사건 이래 그네들이 어떤 움직임을 하고 있는 알았을까? 11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거대한 바위의 밑동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자신의 ‘권리’라는 쇳덩어리를 녹이기 위해 그들은 준비를 마친 것이다.

작가는 어찌 보면 지극하게 평범한 밥벌이를 매개로 일상의 위대함을 역설한다. 처자식을 벌어 먹이겠다는 인간 본능 때문에 억눌러왔던 이성이 폭발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어쩌면 극한으로 치닫을 수 있는 순간, 천 씨의 한 마디로 그들은 연대의 중요성에 도달한다.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힘이 아닌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 말이다.

치열한 대립은 대폿집으로 향하는 천 씨 부자의 훈훈한 광경으로 마무리된다. 아들에게 직접 대폿집 문을 열라는 천 씨의 말은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될 미래의 후손에 대한 희망으로 읽힌다. 한 세대 전의 그런 빛나는 희망이 지금 어떻게 왜곡이 되었는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도 글을 쓰게 된다면 이런 시대정신이 담긴 글을 쓰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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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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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다행이다. 최제훈 작가가 단 두 개의 작품을 낸 것이. 왜냐하면, 한 번 어느 작가에 꽂히게 되면 바로 그 작가가 발표한 책을 다 구해서 읽어야 속이 시원하니까 말이다. 이번 주에 최제훈 작가의 데뷔 소설집인 <퀴르발 남작의 성>을 아주 만족스럽게 읽었고, 내친 김에 네 개의 중편으로 구성된 장편 <일곱 개의 고양이 눈>도 읽었다.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고 나서, 인터넷으로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봤다. 제가 그 인터뷰에서 언급한(진짜 그렇게 언급한 적이 있었나?) ‘나선형’이라는 단어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읽는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작에서 살짝 맛을 보여줬던 이제 어쩌면 작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소설 속의 소설 “메타픽션” 기법은 그 광휘를 더한다. 구성은 더 탄탄해졌고, 나선형으로 꼬이며 솎아내는 이야깃거리의 행렬에 그만 황홀해졌다.

전형적인 밀실 트릭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을 떠올리는 <여섯번째 꿈>은 어느 고립된 산장에 모인 6명의 연쇄살인범을 주제로 다루는 인터넷 동호회 “실버 해머” 동호회원이 차례로 보이지 않는 “악마”에 의해 죽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교통과 통신이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는 당연히 두절되었고, 기아와 불면의 공포 속에서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게임의 법칙’을 알아내려는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진다. 이야기를 더 쫄깃하게 만드는 건, 이 중편소설에 등장한 주인공들이 뒤에 나올 소설에 직간접적으로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형 그대로가 아닌 원주율 π처럼 무한반복이라는 과정을 거쳐 변용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가치는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복수의 공식>에서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복수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오죽했으면 슈베르트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 그리고 에드바르트 뭉크가 그린 동명의 그림까지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을까. 이 음악과 그림은 ‘복수의 공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니 가능하면 듣고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보니 QR마크가 인도하는 사이트로 들어가 좀 해괴한 내레이션도 들었다.

개연성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킨 복수의 화살은 엉뚱한 사람에게 날아가 꽂힌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아등바등하지 말라고 계언(戒言)인가. 슬쩍슬쩍 자신이 맡은 번역에서 장난질을 치는 번역가처럼 작가의 블랙유머가 반짝반짝 빛난다. 소용이 다한 캐릭터를 사골 국물 우려먹듯 다른 공간으로 확장, 전이시키는 아이디어가 멋지다. 이국적 난초 향기가 어우러진 화원을 배경으로 한 치정극과 개인의 도서관을 통해 소장자의 결핍과 욕망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노라는 서술도 일품이다.

최제훈 작가는 음악의 소나타 형식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반복과 변주(변용)를 소설이라는 문학형식에도 뻔뻔하게 도입한다. 이 두 가지가 얼마나 효과적이냐 하면, 각각의 중편에서 독자는 어느새 이런 반복과 변주에 포로가 되어 밤마다 셰에라자드의 귀가 솔깃하게 하는 마력 같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딱 절반까지는 그야말로 몰입해서 읽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띄엄띄엄 읽다 보니 후반부에서는 왠지 동력이 급속하게 떨어진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첫 두 이야기는 유기적 연결이 되어 있지만 나머지 두 편은 좀 느슨해서였을까? 한 번 읽고 말 책이 아니니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π>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는 어쩌면 완벽한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창작하겠다는 작가 욕망의 발현이라는 느낌이 스친다. 현실과 섬망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로 보기에도 전혀 손색이 없다. 어떻게 보느냐는 전적으로 독자의 의지에 달린 거니까. 굳이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자신이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 읽고 있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현실인가 아닌가를 반복해서 묻게 된다. 이런 유의미하지 않는 관계의 설정을 통해 작가는 독자를 자신이 창조해낸 “메타픽션”의 질곡 속에 빠트린다. 질척질척한 질곡이 아닌 아주 유쾌한 질곡에 말이다. 그러니 이런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독자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직무유기가 아닐까.

아, 북글을 마무리하면서 든 생각인데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도 참 재밌지 않을까 뭐 그런 상상을 해봤다. 복잡한 스토리텔링을 관객이 정신줄을 놓지 않고 쉴 새 없이 좇아가기가 쉽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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