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브레이크 호텔
서진 지음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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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월, 로큰롤의 제왕이 탄생했다. 그의 이름은 엘비스 프레슬리. 미국 미시시피주 투펄로 출신의 촌뜨기 청년은 마이크와 치지도 않는 기타로 세상을 정복했다. 연인은 떠났고, 외로운 거리를 걷던 노래의 화자는 죽을 지도 모른다는 가사가 실린 2분이 조금 넘는 노래 <하트브레이크 호텔>에 전 미국은 환호했다. 엘비스는 ‘펠비스(pelvis;골반)’이라는 표현처럼 유튜브 동영상 속의 제왕은 엄청난 환호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다. 그렇게 신화는 시작됐다.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첫 번째 밀리언셀러의 영광을 안겨준 곡 <하트브레이크 호텔>과 반세기도 넘는 시간을 거쳐 우리에게 온 서진의 소설 <하트브레이크 호텔>에는 도대체 어떤 접점이 있는 걸까라는 생각으로 책을 펴들었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3개국에 산재한 7개의 도시를 무대로 작가는 ‘시간의 속도’를 장착한다. 무한대로 확장된 시공 속에 아주 특별한 공간이 존재한다. 그 이름은 바로 <하트브레이크 호텔>. 유한한 존재라는 숙명의 인간은 고래로부터 시간여행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현재를 사는 인간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유한한 생명만큼이나 필연적인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간이 꿈꾸는 시간여행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바꾸고 싶은 심리적 귀결이 아닐까.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드림 머신’은 묘하게 삶에서 지치고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의 단초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애절함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남녀 사제가 아닌 여여사제 간의 야릇한 로드 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는 황령산 드라이브 사이에 낀 이야기들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사별한 옛 아내를 잊지 못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행복했던 곳(다시 하트브레이크 호텔이다)에서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온 노인, 돈이라면 무슨 못하는 일이 없을 것 같은 마이애미의 건달,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영화 <터미네이터>가 연상되는 시간여행자 등등은 끝나지 않고 순환되는 뫼비우스의 띠를 완성한다.

 

책을 읽다가 문득 작가가 공간적 배경이 되는 도시들의 아우라를 제대로 잡아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라스 폰 트리에가 미국 삼부작을 찍기 위해 미국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 것이나, 영화 <카사블랑카>가 모로코에서 현지 로케이션이 되었던가? 이미지의 시대에 라스베가스가 주는 환락과 허무의 상징성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작가가 4년 만에 발표한 작품답게 구성에 있어 조금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정성을 들였다는 방증이리라. 의도했건 그러지 않았건 간에 일견 무미건조해 보이는 면들은 오히려 ‘상심’한 이들의 심리를 극대화하는데 아주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인생이 행복하고 즐거운 이들이 왜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찾겠는가. 결핍에 시달리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예의 공간은 존재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런데 그거 아나? 상심과 비통에 치료약은 오직 시간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고 자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만 그 시간의 속도가 중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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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1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전 시간에 담긴 양이 중요한줄 알았어요..^^;;
 
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54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부희령 옮김 / 비룡소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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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 만난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 반세기를 훌쩍 뛰어 넘는 필력을 가진 저자이지만,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되는 이 작품에서도 그녀의 화려한 문학적 아우라를 엿볼 수가 있었다.

 

소설은 첫 페이지에서 ‘경계’를 넘는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언제나 그렇듯,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십대소녀 프랭키(프란체스카) 피어슨은 이 매력적인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서 ‘초록 눈 프리키’를 만나게 되었는지 담담한 어조로 독자에게 설명한다. 전직 미식축구 선수이자 저명한 스포츠 해설가인 셀러브리티 아버지를 둔 프랭키의 가정은 완벽해 보인다. 잘나가는 가장에, 예술 활동을 취미로 삼은 아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식축구 선수인 오빠 토드 그리고 두 명의 귀여운 딸내미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된다. 작가는 미국 교외에 사는 중산층 가정의 구성원인 어느 십대 소녀의 눈에 비친 결혼생활에 방점을 찍는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그네들의 삶의 본질을 파고든다. 한 꺼풀 들추고 보면, 아버지 리드는 전형적인 마초로 완벽한 가정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의 가정을 위협하는 요인은 아예 싹부터 잘라 버려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나이다. 자신의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삶의 균열은 아내로 자신을 곁에서 보좌해야 할 임무를 가진 크리스타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아내를 잃고 두 번째로 맞은 아내 크리스타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리드의 입장이 애처롭게 하나씩 차례로 소개된다. 대학생이 되어 가정 밖에 머무르는 오빠 토드야 그렇다치고, 한참 예민한 사춘기 소녀 프랭키는 궤도에서 탈선한 채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부모의 불화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독립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액세서리처럼 생각하는 리드를 견딜 수 없었던 크리스타는 결국 별거를 감행한다. 더 이상 스테이플러로 박아 넣은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속물적인 시애틀 교외의 삶에 천착하던 프랭키는 필사적으로 부모의 별거를 감추려고 노력한다. 리드의 폭언과 폭력을 참지 못하고 스카짓 하버로 거처로 옮긴 크리스타는 새로운 곳에서 제2의 인생을 맞이한다. 그런 그녀와는 달리, 주인공 프랭키는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만을 생각하고 아버지 리드, 자신과 그리고 어린 동생 사만다를 버린 엄마 크리스타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에 비하면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또 사우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이런 비틀린 애정이 <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의 비극의 씨앗으로 작동한다.

 

가정의 행복에 대한 격언처럼 알려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인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가정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지점이 요원하기만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완벽한 가정의 해부를 통해 미국 사회의 실체를 살짝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원하는 행복이라는 가치가 가족의 구성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소통이 중요하지만, 그 소통을 위해서 변화와 실천을 할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주입시키려는 리드의 과욕이 모든 사달의 발단이 아니었던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정교하게 기술한 부모 간의 역학관계도 눈여겨볼 관전 포인트다. 왜 크리스타는 진작 리드의 폭력에 전문가나 지인의 도움을 오청하지 않았을까. 사후약방문식의 처방이 아니라, 뼈아프지만 문제의 근본을 드러내고 해결에 나섰다면 그런 비극의 주인공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미국 가정 내 만연한 폭력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아 오싹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크리스타의 리드에 대한 애증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비극이 그녀의 애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아주 작은 단서조차 흘릴 수 없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미국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가족에 대한 심리 스릴러 <초록 눈의 프리키는 알고 있다>는 의외의 수확이었다. 민음사의 청소년문학 임프린트인 비룡소 “블루 픽션” 시리즈로 출간돼서 여느 청소년 소설이겠지 하는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십대 소녀의 이메일, 법정 진술 그리고 크리스타의 비밀 일기 등은 <초록 눈의 프리키는 알고 있다>의 구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다양한 요소들이다. 다양한 매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가의 솜씨는 역시 기대이상이었다. 지난봄에 읽은 <블론드>가 대작이었다면, 이번에 읽은 <초록 눈의 프리키는 알고 있다>는 소품으로 조이스 캐럴 오츠의 문학세계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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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양억관 옮김 / 이상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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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이라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제로의 초점>을 읽었다. 이 추리소설의 레퍼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26세의 이타네 데이코는 전후 일본의 여느 청춘들처럼 선을 보고, 열 살 연상의 우하라 겐이치와 결혼했다. 그리고 채 신혼의 단꿈이 가시기도 전에 남편인 겐이치가 실종된다. 저자 마쓰모토 세이초는 새색시 데이코의 실종된 남편을 찾는 긴 여정을 통해 전후 일본 사회의 명암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광고대리업에 종사하는 데이코의 남편 겐이치는 도쿄와 가나자와를 오가는 생활을 한다. 도쿄 본사로 발령이 결정난 겐이치가 가나자와로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떠났다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전에 겐이치와 떠났던 신혼여행에서 데이코는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다고 직감한다. 여자 특유의 직감이 발동하는 순간, 자신과의 결혼이 어쩌면 남편의 미스터리한 실종사건의 단초가 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생전 처음 가보는 북국의 타지에서 데이코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남편의 발자취를 추적한다. 전화도 변변히 없었던 1950년대 패전국 일본에서 실종된 사람을 찾기란 난망하기만 하다. 변변하게 교제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을 한 데이코는 그 과정에서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남편이 어떤 일을 했는지 하나씩 알게 된다. 중일전쟁 때는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투입이 되었고, 전후에는 잠시 동안 경찰 업무를 수행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가 사회파 미스터리를 장기로 삼는다고 해서 잠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었다는 겐이치의 전력에서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난징대학살 같은 사건으로 발생한 트라우마 때문에 이제 막 결혼한 새신랑이 일상에서 탈출한 것이 아닌 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내 추측은 틀렸고, 바로 다음 경력이 소설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데이코의 남편 겐이치의 실종은 시작에 불과하다. 데이코처럼 겐이치를 찾아 나선 우하라 소타로(겐이치의 친형)와 가나자와에서 광고회사 동료로 데이코를 돕던 혼다가 연달아 살해당하면서 단순해 보이던 실종사건은 확대일로로 치닫는다. 도대체 겐이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는 모두 저자가 어떤 식으로든 독자에게 납득할 만한 결과를 제시해 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같은 게으른 독자는 작가가 소설의 곳곳에 예리하게 준비해 놓은 단서를 추적하기보다 작가가 마련해 놓은 설명을 더 기대한다. <제로의 초점> 역시 마찬가지다. 특이한 점은 정말 평범한 가정주부가 사라진 남편을 찾는다는 설정과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전제를 마쓰모토 세이초가 잘 조합했다는 것이다.

 

패전국 일본의 전후 사정에 대해 좀 더 접근할 수 있었다면 나의 <제로의 초점> 독서는 좀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미스터리 해결의 중요한 단서로 준비한 두 장의 사진은 평범해 보였지만 기대대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미스터리의 가장 기본인 등장인물 중에 범인이 있다는 기본 진리는 사회파 미스터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이 출간된 시점으로 보면 거의 고전에 반열에 오를 정도라고 추정되는 <제로의 초점>은 역시 미스터리 기본에 충실하다. 너무 기교적이지 않고, 단순한 구도면서도 기본을 충실하게 재현해낸 일본 추리문학의 전설은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아, 처음에 나오는 가나자와가 위치한 노도 반도의 지도는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익숙하지 않고 낯선 북국의 지명 때문에 몇 번씩이나 앞으로 돌아가 데이코의 여정을 되짚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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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18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잘 봤습니다. 일단 바구니에 넣고요 ^^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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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선생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마저 읽기 전에 오늘 도서관에 가서 정병설 선생이 역사비평에 기고한 논문을 읽었다. 내가 이덕일 선생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게 된 건 순전히 수백 년 전, 누가 봐도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의 비극을 사이에 둔 두 선생의 논전(論戰) 때문이었다. 지아비 사도세자의 죽음을 외면한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과 정병설 선생의 비판을 담은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읽어야 하지만, 심정적으로 나는 이덕일 선생의 주장에 마음이 간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에서 이덕일 선생은 자신의 원자이자 대를 이어갈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정한 아버지 영조의 콤플렉스의 뿌리를 찾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연잉군이던 왕세제 시절, 집권 여당인 노론에게 택군’(擇君)되어 독살되었다는 풍문에 휩싸인 경종을 대신해서 조선조 최장수 집권 기록마저 갈아치운 군주에 등극한다. 이것이 눈물이 많고,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였던 영조의 첫 번째 콤플렉스였다면 두 번째 콤플렉스는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가 천인 출신이라는 핸디캡이었다(드라마 <동이>의 여주인공 한효주를 생각하면 되겠다).

 

효종 이래 삼종의 혈맥을 잇고, 왕위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후계자 원자의 생산이 영조에게는 꼭 필요했다. 말로는 노론과 소론의 탕평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을 군주로 선택한 노론의 편이었던 영조는 사십대에 기대하던 원자를 얻는다. 어려서 성군의 재질을 보여주었던 사도세자는 15세부터 대리청정에 나서 영조와 함께 국가경영에 나선다. 하지만, 세자가 소론에 기울었다는 사실을 안 군주의 권위는 도대체 인정하지 않는 채 기득권 유지에만 여념이 없던 노론은 사도세자를 정적으로 규정하고 사사건건 맞서기에 이른다.

 

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경과 사건으로 조정 내의 소론 세력이 일소되면서, 혜경궁 홍씨의 친가인 풍양 홍씨 집안을 대표하는 홍봉한이 주도하는 노론 주도 하의 정국이 전개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임인옥사 시절 역적의 수괴로 지목된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는 영조는 이 결정적인 두 개의 사건을 계기로 세자와 반목하게 된다. 권력은 부자 사이에도 나눌 수가 없다고 했던가. 세자의 관서행, 항간에 떠돌던 광태과 난행 같은 속설 그리고 태조-효종의 무인 기질을 이어 받은 사도세자의 친위 쿠데타를 두려워한 영조는 마침내 사도세자를 뒤주 안에 가두어 죽이기에 이른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다. 절대군주에게 언론의 통로가 되어야할 삼사가 모두 노론에게 장악되고,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마저 자신의 당론의 이해 때문에 곡필을 주저하지 않았던가. 군주의 교체라는 방법으로만 정권 교체가 가능했던 시절에, 집권당파와 색깔이 다른 군주의 등장은 멸문지화의 단초였다. 사도세자가 마지막 순간에 S.O.S.를 친 사람은 노론 실력가이자 장인이었던 홍봉한이 아니라, 형수 집안사람인 조재호였다. 홍봉한을 사도세자 죽음의 주범으로 설정한 이덕일 선생은 영조가 죽고 나서, 정조가 등장했을 때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풍산 홍씨들의 적극적인 역모 모의에 초점을 맞춘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광증 때문에 죽였다고 <한중록>을 통해 역설하지만, 이덕일 선생이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에서 전개하는 논리에 따르면 살아생전에 사도세자가 보여준 모습은 도저히 광인의 그것으로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지아비나 국가보다 자기 집안의 안위를 걱정한 노회한 노론 정객의 면모만이 보일 뿐이다. 아들인 세손까지 나서서, 아비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영조에게 읍소하는 마당에 혜경궁 홍씨와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왜 목숨을 걸고 혹은 단식을 해가면서 영조에게 탄원하지 않았던가. 사건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이들의 행동도 역시 이해가 되지 않긴 마찬가지다.

 

임오화변에서 자신의 행동과 홍씨 집안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이덕일 선생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는 그래서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 249년 전에 벌어진 왕실가족의 비극에 대해, 지금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하나의 기록에서 이렇게 상이한 해석을 유추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과 지난 여름에 읽은 <윤휴와 침묵의 제국>을 통해 알게 된 확실한 사실은 인조반정 이래 신하가 왕조국가의 군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게 되면서 신권이 군권을 능가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 강성한 신권의 중심은 바로 노론이었다는 것이다. 노론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국왕의 나이가 후손을 생산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왕세제를 세울 것을 강요하는 기존의 종법제도에 반하는 당시로서는 대역죄를 범했으며, 무수한 고변과 옥사를 통해 반대파를 살육하고 숙청했다. 택군은 물론이고 살군(殺君) 기도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국왕에게 도달하는 민의의 언로를 틀어막고 왜곡했다. 군주나 백성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아무 의미도 없다지만, 조선조 마지막 개혁군주였던 정조의 치세가 그의 할아버지만큼만 되었더라면 하는 바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책을 읽게 된 네 가지 이유 중에서 두 개가 풀렸다. 이주한 선생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한중록>을 읽어야겠다. 물론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좀 더 욕심을 낸다면 각 자료와 국역 영조실록과 사실관계를 대차대조해보는 수고도 마다하고 싶지 않지만, 그럴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 사실은 저 너머에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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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영웅들 김영사 모던&클래식
윌 듀런트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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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가 저술한 <역사 속의 영웅들>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간단한 명제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역사가 영웅을 만드는가? 아니면 영웅이 역사를 만드는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윌 듀런트는 후자에 방점을 찍은 것 같다.

 

세계사에 대한 서양 편향적 사고는 <역사 속의 영웅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비유럽 대륙에 걸쳐 있건만, 우리가 아는 세계사는 언제부터인가 서구 중심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아마도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의 대결 이후, 서방(옥시덴트)이 동방(오리엔트)에 승리하면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 이후에도 몽고와 오스만튀르크가 서방을 위협한 적이 있지만 서방을 아우르는 항구적인 제국 건설에는 실패했다.

 

동서양 문명의 교류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인물로는 역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후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그리스 제국을 완성했던 약관의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던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부왕 필리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도시국가로 나뉘어 패권다툼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리스를 제압하고 동방의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 정복에 나선다. 정복군주로서 전장에서 동물적인 감각을 자랑하던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다. 물론 그의 제국은 명민한 군주의 요절과 함께 찰나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서양문명의 원류를 이루는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 중의 하나를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기독교에서 찾고 있다. 제국의 근간을 이루던 관용(클레멘티아)이 로마가 유일신을 신봉하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실종되었다는 지적이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설명이다. 유대 민중에게 나사렛 출신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핍박에서 그들을 해방시킬 메시야로, 유대의 제사장과 기득권층 그리고 로마 총독에게는 사회혁명가로 인식됐다고 윌 듀런트는 분석한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로마 전역에 전파한 두 명의 전도사 사도 바울과 베드로에게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오늘날과 같은 세계 종교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유대의 민족종교로 남았을 것이다.

 

이후 기독교는 중세 시대에 세속의 권력을 뛰어넘는 정치권력 그 자체가 되었다. 교황권의 최전성기에 치러진 십자군 전쟁이 결국 실패로 귀결되면서, 프랑스 남부를 중심으로 한 순결파(카타리파)의 등장은 훗날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공고한 교권 추락의 시발점이었다.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새로운 사상의 등장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국가와 교회는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철퇴를 가했다. 중세 말엽에 유럽 남부에서는 르네상스 운동이 그리고 유럽 북부에서는 마르틴 루터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치솟게 되었다.

 

인류 구원이라는 종교 원래의 목적보다 철저하게 세속화된 가톨릭교회의 부정부패는 당대 지식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어쩌면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개혁은 상호 작용을 통해 인간 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 않았나 싶다. 마치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에서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의 연관성을 다뤘던 것처럼 말이다. 초기 종교개혁 지도자들이었던 위클리프, 얀 후스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타락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민중과 제후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던 독일의 시대상에 대한 윌 듀런트의 냉철한 분석은 확실히 <역사 속의 영웅들>에서 가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듀런트는 종교개혁을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하면서, 루터의 반박문 발표 이후 독일에서 벌어진 농민 전쟁의 전개 과정을 소개한다.

 

윌 듀런트의 현대판 영웅전은 기대와 달리 어느 특정한 인물을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마르틴 루터는 종교 지도자라기보다 일종의 사회혁명가로 묘사된다. 참을성 없었던 알렉산드로스의 세계 정복 야욕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후대의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와 비교를 통해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다.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미시사의 디테일은 부족하지만, 전반적인 서양 역사 개론서로는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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