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문학동네 플레이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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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작성일 : 200992514년 전에 구판 읽고 나서 쓴 리뷰다.

 

책을 접하는 경로는 참으로 다양하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서점, 혹은 헌책방을 통해 책을 직접 구매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보거나 지인들에게 빌려 보는 방법이 있다. 정한아 작가의 <달의 바다>는 그런 전통적인 독서 방법에서 벗어난, 책을 읽는 이들과의 모임에서 교환과 나눔의 형식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좋았노라고 말하고 싶다.

 

12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책 표지에 쓰여 있었지만, 사실 내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히려 우주복을 입은 채, 눈물인지 이상야릇한 화장을 한 어느 여성-아니 여성이 아닐지도 모르겠다-의 일러스트가 강렬하게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과연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걸까.

 

우선 주인공이자 27살 난 무직자로 이대갈비집의 딸인 은미가 등장을 한다.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하는 이 자유로운 영혼은 남들처럼 세상에 속하기 위해, 신문사 기자에 계속 지원해 보지만 자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 거부된다. 이번에도 낙방의 수모를 당한 은미는 수면제로 이 세상과의 단절을 꿈꾼다. 그리고 그녀의 절친으로 등장하는 여자 같은 남자 민이. 그는 트랜스젠더를 꿈꾸는 열혈청년이다.

 

집으로 귀환한 그녀를 기다리는 할머니는, 엉겁결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점점 자신의 꿈과는 동떨어진 삶을 되었노라고 작가는 친절하게도 설명해준다. 책읽기의 첫 번째 원칙 중의 하나가 절대,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작가를 동일시하지 말라는 건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정한아 작가와 은미의 일체화는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어쨌든 15년 전에, 자신의 혈육인 은미의 사촌 동생 찬이를 남겨 두고 미국으로 떠나 버린 고모 순이를 찾아가 보라는 할머니의 권유/명령으로 은미는 팔자에 없는 미국행을 감행하게 된다. 아 이런 설정도 가능하구나.

 

개인적으로 이런 뜬금없는 설정과 은미가 순이 고모를 찾게 되는 과정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빌린 <달의 바다>에서 어느새 낯선 공간에서 자신도 모르게 유영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다른 곳도 아니고 미국우주항공국(NASA)에서 일하고 있다는 순이 고모의 일상에 뛰어들게 된, 은미의 이야기가 달의 심연처럼 조금씩 다가온다. 무중력 상태에서의 점프 같은 비약이라고나 할까.

 

글 중에 작가는 은미가 어려서부터 탁월한 거짓말쟁이였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그 거짓말에 따르는 책임감을 일깨워준 고모와 일종의 연대감을 형성되는 과정이 담단하게 소개된다. 그 고모 역시, 주인공에 버금가는 라이어로 모두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보니 모두가 좋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곤 하시던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생각이 났다. 작가는 어떤 면에 있어 이런 선의의 하얀 거짓말이라는 수단을 통해 가족 간의 화해를 도모한다. 과연 그게 현실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소설의 제목에도 나오는 달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과연? 주인공 은미의 할머니, 순이 고모 그리고 은미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연대를 상징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굳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달과 여자다움의 동질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그들이 꿈꾸는 이상향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그런 달에 갈 수만 있다면, 하루에 이백 개씩이나 만드는 샌드위치 노동조차 즐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세상에 속하지 못하고 소외자로 마치 지구를 도는 달처럼 서로 융화되지 못하는 작가의 페르소나 은미 캐릭터에, 그의 오랜 이성 친구 민이 역시 조각 같은 외모에도 자신의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고통 받는 현실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친구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해 주기 바라지만, 친구들 역시 자신들이 세상을 보는 시선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물론 감정의 폭발하는 어느 순간에, 작가는 놓치지 않고 그들의 진정한 소통을 짚어낸다.

 

소설에 나오는 갈등 상황들에 대해, 작가는 뚜렷한 무언가를 제시하는 대신 열린 결말로 글을 매조지 한다. 뭐 꼭 독자들이 소설에 정답을 요구하는 건 아닐 테니까. 이번 가을에는 재밌고 잘 읽히는 책이 읽고 싶었는데, 그런 기준에 아주 딱 들어맞는 책이었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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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7-14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작가도 거짓말을 잘했다고 하던데요ㅋㅋ
소설가에게 어쩌면 필수적인 재능인 듯 합니다.^^

레삭매냐 2023-07-14 17:54   좋아요 1 | URL
구라는... 작가에게 반다시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
습니다.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과학자들 1 -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과학자들 1
김재훈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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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하는데 폭우가 쏟아져서 옷이 다 젖고 말았다. 그리고 곧 비가 그쳤다. 장마 시즌인가 보다. 그런데 또 내일은 비가 그치고 폭염이 예상된다고 한다. 도대체 기상청은 뭘 하고 있는 거지? 많은 비용을 들여 첨단장비를 들여도, 일기예보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니. 문득 수천년 전에 별의 운행을 관찰하며 기상예측을 하던 고대 과학자들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에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림체가 낯이 익어 보니 김재훈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인가 보다. 그리고 보니 예전에 이 작가의 그림을 좋아라하던 시절이 있었지 싶다. 뭐 그런 시절도 한 때 뿐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

 

3부작으로 구성된 <과학자들> 시리즈의 첫 번째 권에는 모두 13명의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역시 대표선수는 서양 철학과 과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다. 지금으로 치면 아마 종합대학 정도 된다고 했던가. 결국 궁극의 진리를 구가하던 학문이라는 점에서 철학과 과학은 쌍둥이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정말 오랫동안 중세 기독교적 질서의 핵심이었다. 그러니까 온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돈다는 비과학적 우주관에 대한 도전은 신의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을까. 당연히 교황을 필두로 한 기득권층은 그런 도전을 묵과할 수가 없었고, 이단 심판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체의 진실 탐구를 억압했다.

 

나중에 등장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교황청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그런 이유로 해서 탄압했다.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가 말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함께 중세 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핵폭탄급 위력을 지닌 경구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과 다른 천동설을 강요하는 기독교 교조주의에 반발해서, 자신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다는 지식인의 반발이야말로 서구 근대화의 신호탄이 아니었나 싶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지지하기 위해 고안된 주전원 이론 등은 지구가 타원형을 그리며 자전한다는 지금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을 대신하기 위해 고안된 가짜 논리였다. 어쩌면 <과학자들>에 등장하는 과학자이며 철학자들은 진실 투쟁에 나선 투사였는지도 모르겠다. 제 아무리 권력이 진실을 가리기 위해 찍어 누른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가릴 수는 없었다. 유구한 서구 과학사를 살펴보면, 결국 시간의 싸움에서 과학적 진실을 밝혀질 수밖에 없었다.

 

서구 과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뛰어넘어야하는 산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오랜 관찰과 논리 그리고 사유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이나 기존에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사실들을 하나씩 바로잡아가면서 과학자들은 어떤 희열을 느끼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깼다는 명예심에서 또 누군가는 자신이 세계 최초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자부심에서 과학이라는 분야에 투신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 중에는 로버트 훅처럼, 과학적 발견에 대한 자부심이나 명예보다는 먹고사니즘을 위한 월급쟁이 과학자를 자처한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네덜란드 상인 출신으로 과학자보다 더 진짜 과학자 같은 면모를 보여준 안톤 판 레이우엔훅 같은 이도 있었다. 르네상스 이래 과학자들이 어떤 카르텔이나 기존 권력에 대한 도전정신을 무기로 삼았지만, 근대 들어 스스로 왕립과학회 같은 카르텔을 만들어 타인의 연구나 관찰 등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 때 이단취급을 받던 이들이 포용 대신 배제를 택하는 순간, 탄압받는 위치에서 탄압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과학자들> 첫 번째 이야기에서 가장 관심을 갖게 된 인물은 바로 르네 데카르트였다. 우선 이 책을 통해 철학자로만 데카르트에 대한 시선을 교정하게 됐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서 출발한 세계관의 충돌은 결론적으로 심한 회의주의를 불러오게 됐다. 무엇보다 사물의 작동 원리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기존에 신이 부여한 질서라는 말은 더 이상 유효한 판단의 준거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주의적 접근일 수도 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주체가 나 자신이라는 선언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고전역학을 집대성한 <프린키피아>의 주인공 아이작 뉴턴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마 서양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가 뉴턴이나 당연히 빼놓을 수는 없었겠지. 물리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없어서, 운동에너지 등등에 대한 설명은 와 닿지가 않더라. 나는 단지 독서인일 뿐, 책에 소개된 과학에 대해 이해를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라는 핑계로 슬쩍 넘어가 본다.

 

서구 과학자들 일색이라 아랍권 이븐 알하이삼이라는 인물을 배치한 점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처럼(?) 강한 자의식의 주인공이었던 알하이삼은 카이로의 술탄에게 이집트의 고질병인 나일강 범람을 막기 위해 댐을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거대한 나일강의 실체를 보고나서는 당대 기술로 댐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미친척을 했다지. 이런 에피소드들은 대환영이다. 멀쩡한 사람이 광인 행세를 해서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 참 그렇다.

 

과학에 대해 문외한이 순전히 과학자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은 <과학자들>은 생각처럼 만만한 책이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시작했으니 다 읽어 보겠다는 얄팍한 계산으로 2권과 3권도 빌렸다. 사사키 아타루의 책을 읽다 말고 이책 저책 읽고는 있는데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다. 폭염와 폭우 핑계대고 책읽기에 게으름을 피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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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7-11 2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세 지성사를 논하면 유럽 출신 학자들이 제일 많이 거론되지만, 저는 그들에게 영향을 준 아랍 학자들이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

레삭매냐 2023-07-12 13:48   좋아요 1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다만, 서구에 소개된 저작들에
대한 소개가 미비한 탓이 아닐
까 추론해 봅니다.

다시 한 번 사료 기록의 중요성
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페넬로페 2023-07-12 0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데카르트가 수학에도 나오더라고요.
천재였던 것 같아요 ㅎㅎ
영화 천문이 생각납니다.
조선은 과학도 중국의 간섭을 받더군요.
서양의 과학도 종교의 그늘에 있었던거겠죠~~

레삭매냐 2023-07-12 13:51   좋아요 1 | URL
조선의 사대부가 그랬던 것
처럼, 서양 지식인들도 다방
면에 뛰어나지 않았나 싶네요.

서구 과학의 발달사는, 중세
까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
하던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
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그
반동의 역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천문> 급 호기심이 생기
네요.

얄라알라 2023-07-20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겸손하시게 ‘게으름 피우신다‘하시지만, 간만에 들어온 북플, 여전히 매냐님 서재는 뜨거운 걸요^^ 항상 쉼 없으신....

김재훈 작가님 그림체를 바로 파악하시는 걸 보면, 역시나 매냐님!
저도 읽고 싶다는 생각 잠시 스쳤지만, 끝을 보려면 3권까지 완주해야한다니 망설여지네요^^

레삭매냐 2023-07-20 10:39   좋아요 0 | URL
어느 털보 아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이름이 아마 겸손
은 힘들어...라고 알고 있습
니다 ㅋㅋㅋ

제가 예전에 이 냥반 일러
스트를 좋아해서 그림을
모으고 그랬던 시절이 -

요즘 도통 책을 읽지 못하
고 있네요. 그러면서도 책
은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
네요.

그레이스 2023-07-24 0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린키피아 갖고 있어서 봤는데 1권이 온통 기하학으로 채워져있어서,,, 영재수학 느낌 ?
아직은 이걸 볼 필요를 못 느껴서 덮었습니다.ㅎㅎ

레삭매냐 2023-07-25 14:21   좋아요 1 | URL
오래 전, 고딩 시절에 뉴턴의
프린키피아 이야기를 들은 기
억이 납니다.

그리고 과학과 담을 쌓고 살았
네요.

나중에라도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 때 도전하는 것으로.
 
사무라이 윌리엄 가일스 밀턴 시리즈 3
가일스 밀턴 지음, 조성숙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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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에 요네자와 호노부의 <흑뢰성>을 읽고 나서 문득 사무라이물이 읽고 싶어졌다. 무언가 읽고 싶을 적에는 읽어야지. 가장 가까운 램프의 요정을 문질렀더니, 가일스 밀턴이라는 작가가 쓴 <사무라이 윌리엄>이란 책이 나왔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달려가서 사들였다. 그리고 딱 이틀 만에 다 읽었다. 나에게는 그만큼 재밌었다는 말이다.

 

몇 년 전에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고 나서 잊고 있던 인물이 바로 미우라 안진이었는데, 알고 보니 <사무라이 윌리엄>이 바로 그 미우라 안진이었다. 영국 출신으로 너구리 영감의 자문이자 하타모토의 지위를 얻고 사무라이가 된 윌리엄 애덤스가 바로 주인공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이 인물을 알고 있었단 말이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시리즈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항료전쟁>을 읽고 있는데, 컬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불붙은 향료를 찾기 위한 무역전쟁에서 후발 주자는 영국이었다. 이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신세계를 양분했고 동방으로 가는 좀 더 빠른 항로를 찾기 위해 무려 북극해를 가로지르는 발상을 실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모두 얼어 죽는 일도 발생하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처럼 수에즈 운하나 파나마 운하가 없던 시절, 동방으로 가는 길은 너무 험난했던 모양이다. 보급 문제부터 시작해서, 열대 지방을 지나면서 발생하는 질병과 뱃사람들에게 치명적인 괴혈병에 대한 준비 없이 무조건 돈을 벌겠다는 일념 아래 동방항해에 나선 모험가들의 배짱을 엿볼 수가 있었다. 하긴 지금도 그런 배짱이 없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수익을 내는 사업들이 시작될 수조차 없었겠지. 그런 점에서 현대 사업가들을 대항해시대 선배들의 후배인 셈인가.

 

어쨌든 윌리엄 애덤스 일행은 포르투갈이 개척한 동방항로 대신, 대서양과 태평양을 지나는 무모한 도전에 나섰고 결국 지팡구의 나라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그 때가 1600년으로 일본에서는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천하쟁패가 벌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윌리엄 애덤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눈에 들어 그의 휘하에서 항해사로서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었다.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배도 만들었다고 했던가. 역시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최고 권력자에게 무역 특허를 받는 게 중요했다.

 

이미 일본에는 무역의 귀신들이라고 할 수 있는 포르투갈, 스페인 상인들이 들어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회 수사들이 일본 서민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했다. 센고쿠 시대, 포르투갈 사람들이 전파한 철포는 일본의 전쟁양상을 바꾸어 놓았다. 서양에서 도래한 철포로 무장한 아시가루가 기마전을 구사하는 사무라이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철포가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다면, 가톨릭이라는 새로운 종교는 어쩌면 일본의 사회 시스템을 흔들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윌리엄 애덤스는 일본에 완전히 적응했지만, 영국에 두고온 처자 때문에 귀향을 꿈꾼다. 쇼군의 자리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이국의 다양한 정보를 전해주는 가신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계속된 윌리엄의 부탁에 귀국을 허용한다. 문제는 막상 일본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애덤스가 실제로 영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자산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쇼군 도쿠가와에게 하사받은 영지와 그 영지에서 나는 자산을 현금화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일본에 남는 게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귀국을 포기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남만인(포르투갈/스페인, 구교도)과 홍모인(영국/네덜란드, 신교도)로 나뉘어 갈등을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윌리엄 애덤스에 이어 일본에 도착한 영국인들은 히라도에 상관을 차리고 황금의 나라에서 무언가 돈이 될만한 사업을 구상하지만, 일본 바쿠후의 견제로 수도격인 에도에 상관 설치를 허락받지 못하고 히라도에서 제한적인 무역을 허락받을 뿐이었다. 남만인들이 남방의 향료제도에서 마주한 야만인들과 달리 일본 국가는 고도로 발달된 관료제와 예절,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 동전 따위에 넋을 잃은 몰루카 제도의 원주민들과 달리 일본인들은 남만인들이나 홍모인들이 제공하는 상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양국 간의 교역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구교도 남만인들과 신교도 홍모인들의 종교적 갈등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걸림돌이었다. 국가별 경쟁도 심했다. <향료전쟁>에서 나오는 것처럼, 영국의 무역선은 교역선들은 무역선이라기 보다 약탈을 일삼는 사략선에 가까웠다. 같은 신교도들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종교적으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무역에서는 또 경쟁자들이었다. 영국에 비해 동방에서 우세였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히라도의 영국 상관을 습격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도쿠가와 바쿠후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 잔당세력들을 일소하기로 한 오사카 성 전투에서, 광신적인 남만인들이 쇼군을 돌리면서 미카와의 너구리 영감은 기독교에 유화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탄압에 나섰다. 예수회 사제들은 신교도인 윌리엄 애덤스의 농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무라이 윌리엄은 쇼군의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수년 내에 예수회 사제들이 일본에서 내쫓기게 될 거라는 점을 예언했다.

 

오다 노부나가를 필두로 한 정치 세력들은 기독교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포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하지만, 오사카 성 전투에서 보듯이 쇼군에게 저항하고 기존의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적에는 가차 없이 탄압했다. 2대 쇼군 히데타다와 3대 쇼군 이에미스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가톨릭 신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 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를 받아들이면서, 막대한 희생에도 오히려 교세가 확산되자 무지막지한 고문과 처형 대신 후미에로 대변되는 배교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됐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윌리엄 애덤스라는 영국 출신 사무라이의 개인적인 삶보다 그가 살던 시기에 일본 역사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두 차례에 걸친 오사카 성 전투 그리고 기독교 탄압이라는 일대 사건들에 관심이 더 갔다. 저자는 애덤스 이후 일본 히라도에 도착해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일하게 되는 일단의 영국인들의 삶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다루었다. 현지 여성들과 살림을 차리고, 기존의 오리엔탈리즘에 젖어 쾌락주의적 방탕한 삶을 살았던 육성 기록도 빠뜨리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서구인들의 사고와 태도는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으로 가일스 밀턴의 작가의 저술을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역시나 아쉽게도 이 저자의 책 5권이 모두 절판되었다. 왠지 예전에 만난 타리크 알리의 책과 같은 운명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이제는 중고로 밖에 구할 수 없는 책들을 하나씩 구해서 독파해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 <향료전쟁>을 열심히 읽고 있다. 밀턴 작가의 책들을 잇달아 읽으면서 무언가 서로 연결된 관련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좀 더 읽으면 명확해지지 않을까라고 기대해 본다. 매력적인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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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7-03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 다 절판이네요. 전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흥미로울 것 같은데 약간의 호불호가 있는가 봅니다.

레삭매냐 2023-07-03 21:51   좋아요 2 | URL
저도 모르고 있다가 지난 주에
알게 되었답니다 ^^

타리크 알리 선생의 책처럼
참 좋은데, 절판되어 버리는
그런 운명이 되어 버렸나 봅
니다.

책에 대한 호불호는 책의 숙
명이지 싶습니다.

가필드 2023-07-05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향료전쟁도 재미있어 보이는데요 이것도 절판이군요 ㅠㅠ

레삭매냐 2023-07-15 22:08   좋아요 1 | URL
가일스 밀턴의 책들 5권 모두
절판되었습니다.

부지런히 사냥에 나서서 3권
사냥에 성공했답니다.

어제 산 백인 노예들에 대한
이야기인 <화이트 골드>를
읽고 있는데 이거 물건이네요.

coolcat329 2023-07-15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흑뢰성 읽고 있어요. 레삭매냐님 리뷰 보고 읽기로 결정했죠. ㅎㅎ 근데 저도 읽으면서 사무라이 주인공인 소설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리뷰 반갑네요.

레삭매냐 2023-07-15 22:09   좋아요 1 | URL
도쿠가와 이에야스-흑뢰성-
그리고 미우라 안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축이
뭐랄까...

하여튼 무지 재밌었습니다.
 
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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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달궁 모임에 다녀왔다. 언제나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뒤풀이 2차에서 우리는 또 책 이야기를 했더랬다. 다음 달에 읽을 책 이야기도 하다가, 나의 귀를 사로 잡는 책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어제 다 읽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흑뢰성>이란 소설이었다. 일본 센고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에 미스터리까지 섞은 책이란다. 바로 검색을 해보았다. 그랬더니만, 바로 옆인 종로 중고서점에 떡하니 있다는 게 아닌가. 모임이 끝난 다음에, 바로 달려 가서 샀고 집에 오는 길에 백쪽을 뚝딱 읽었다.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인데 그래.

 

그렇지 않아도 모임에서 내가 이래뵈도 극우작가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구카와 이에야스> 전권을 읽은 사람이란 말이지하고 한껏 자랑질을 해대지 않았던가. 사실 그건 빈 말이고, 어쨌든 그 책을 읽고 나서 센고쿠 시대에 대한 관심이 마구 생긴 건 부인할 수가 없다. 그전에도 사무라이물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호기심이 더 깊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보니 우연히 알게 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블랙 사무라이 야스케에 대한 이야기도 최근에 알게 됐다. 세상에 알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때는 1578, 이른바 아즈치모모야마 시절로 알려진 오다 노부나가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냉혹한 전략가였던 노부나가는 교토에 상경해서 우다이진을 지내고, 혼란한 전국을 거의 통일한 판세였다. 노부나가는 자신을 포위하기 위해 결성된 반 노부나가 동맹을 쳐부수고, 이제 오사카 혼간지와 서부의 모리 가문 그리고 동방의 호조 가문 정도가 남아 있었다. 모리 가문 격멸을 앞에 두고 느닷없이 가신단의 일원이었던 이케다의 아라키 셋쓰노카미 무라시게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설은 자신의 거성인 아리오카성을 근거로 농성에 돌입한 아라키 무라시게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성주 아라키는 어떤 면에서 본다면, 배신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섬기던 이케다 가문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 다음에는 미요시 또 이번에는 오다 노부나가에게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정도면 마쓰나가 단조에 버금가는 그런 배신의 아이콘이 아닌가 싶다.

 

소설에서는 자신을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쓰히데 만큼 중용해서 셋쓰를 맡긴 오다 노부나가를 아라키가 배신한 이유로 결국 자신도 의심을 사서 주군에게 내쳐질 거라는 두려움 그리고 노부나가의 잔혹한 성정을 이유로 들었던가. 그런데 또 일설에는 오다 가문에 버금가는 용맹을 천하에 떨치기 위해 모리 가문과 오사카 혼간지 세력과 도모해서 일전을 준비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아라키 무라시게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고, 1년에 걸친 농성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미스터리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서사에 힘을 실어준다.

 

오다 노부나가는 고데라 가문 출신의 구로다 간베에(조스이)를 특사로 파견해서 아라키를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오다의 의중을 찌른 아라키는 간베에를 죽이지도 그렇다고 돌려 보내지도 않고 아리오카 성 감옥에 가두는 묘수를 짜낸다. 그렇다, 사무라이로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배신의 아이콘은 철저하게 오다라면 하지 않을 그런 방향으로 서사를 전개시킨다. 전쟁이 철저하게 전략적이라면, 농성의 최종 책임자인 아라키 역시 모든 걸 전략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훗날 히데요시의 출중한 군사 참모로 활약하게 되는 간베에는,아리오카 성의 지하감옥에서 성주 아라키가 들려주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인질이 동시에 아라키에게는 소중한 자문역이 아닐 수 없다. 지도자는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가신단을 비롯한 수천 명의 목숨이 달린 농성전에는 더더욱 성주의 결정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가신단과의 군사 작전회의는 매일 같이 열리지만, 인질 살해사건이나 수훈 문제들은 공개적으로 의논할 상대가 없었다. 이럴 때, 아라키는 지하감옥을 찾았다. 물론 간베에에게 넘어간 간수에게 습격을 받기도 했지만.

 

모리 가문과 오다 가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던 우키다가 오다 가문에 투항하고, 모리의 응원군 도착이 지연되면서 아리오카 성에서 농성하던 부대는 사기는 점점 떨어지기 시작한다. 농성 초기에 아라키의 측근인 나카가와 기요히데와 다카야마 우콘(기리스탄 다이묘)마저 오다에게 투항하면서 부대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모든 것을 독단으로 결정해야 하는 동시에, 이케다 가문 가신 중에 하나였던 자신을 지지하던 이케다 호족들을 통합해야 하는 미션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전진하면 극락, 후퇴하면 지옥이라는 구호 아래 똘똘 뭉친 혼간지에서 파견된 사이카 외인부대와 다카야마 다료(우콘의 아버지)가 이끄는 남만종 부대의 불화도 주목할 만했다. 잇달아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죽음이 명벌이라는 소문이 성안에 삽시간에 퍼지면서, 군민의 사기가 떨어지고 낙성의 위기가 다가오기도 했다. 요네자와 호노부 작가는 당대 유행했던 군담소설 등의 고증을 거쳐 당시의 분위기를 되살리는데 출중한 실력을 보여준다.

 

요네자와 호노부 작가는 최대한 역사적 사실을 배척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상상력을 투입해서 <흑뢰성>이라는 멋진 소설을 완성했다. 농성전이 장기전으로 바뀌면서, 결국 성주 아라키 무라시게는 모리 군의 지원을 자신이 직접 요청하겠다며 도주했다. 수족처럼 아끼던 차항아리 도라사루를 믿을 만한 가신의 고리짝에 담아서 말이다. 성주가 출성하자,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오다 군에 내응한 가신이 성문을 열었고 아리오카 성은 함락됐다. 제 때 항복하지 않은 아리오카 수비대에 대한 오다 노부나가의 처벌은 가혹했다. 아라키의 처자식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학살당했다. 자그마치 2만 여명이 학살당한 이세 나가시마의 재현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자신을 믿고 농성에 나선 군민들을 배신한 성주 아라키 무라시게의 후일담이 궁금했지만, 소설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아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다. 사무라이에서 다인이자 승려로 변신한 아라키 무라시게는 법명을 도훈/도쿤으로 하여 자신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도 생존했다고 한다.

 

한 때, 나니와의 행복한 꿈을 꾸던 사무라이는 구로다 간베에의 간계에 빠져 성과 군민을 버리고 도주한 영주라는 천년의 악명을 갖게 되었다. 간베에는 아라키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자신의 주군인 오다를 배신하지 않는 선에서 아라키가 골머리를 앓는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아마 아라키 무라시게가 명민하지 않은 성주였다면, 간베에가 던져주는 한 조각 힌트를 픽업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센고쿠라는 격랑의 시대를 헤쳐온 역전의 사무라이답게 잇달아 발생하는 난제들을 척척 해결해낸다.

 

그리고 아라키 무라시게는 지하감옥의 간베에게 지적한 대로 자신의 한계를 뚜렷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길 수 없는 무의미한 농성전을 포기하고 성을 떠난 게 아니었을까. 아라키 집안이 조상 대대로 이타미 지역에 웅거한 호족도 아니고, 혼간지 세력처럼 전진하면 극락, 후퇴하면 지옥이라는 절대적 신념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농성을 접고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된 건 아니었을까. 극적으로 모리 가문의 지원을 받아 폭풍처럼 쇄도하는 오다 노부나가의 대군과 일전을 벌여 일패도지하게 된다 하더라도, 천하에 자신의 방명을 떨칠 수 있다는 사무라이 판타지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도 끝까지 버리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이세 나가시마에서 살아남아 극락왕생을 꿈꾸던 아라키 무라시게의 부인 치요호에 대해서는 한 자락 적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세력에 대해 일체의 자비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광신적인 일향종 세력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태도로 일관했다. 엔랴쿠지 방화와 이세 나가시마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저항하는 잇코슈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절실하게 보여준 장면이었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잇코슈 생존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더 이상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옥보다 더한 고통이 아니었을까. 전진하면 극락, 후퇴하면 지옥이라는 도그마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준 치요호 캐릭터와 역할이 인상적이었다.

 

<흑뢰성>은 정말 딱 내 스타일의 소설이었다. 왜 이 소설의 존재를 이제 알게 되었단 말인가. <흑뢰성>은 사무라이들이 오로지 전쟁광만이 아니라 책임감을 지닌 지도자, 예술품을 알아보는 식견을 지닌 다인 그리고 셜록 홈즈 뺨치는 탐정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수작이다. 무엇보다 내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센고쿠 혹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득점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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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6-27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매냐님께서 이 책을 이미 읽으셨을거라 생각했을까요^^; 어쨌든 저는 이 책 왠지 매냐님 스타일일 것 같았어요!ㅎㅎㅎ 즐겁게 읽으신 것 같아 저도 덩달아 설렙니다. 리뷰도 근사하구요^^

레삭매냐 2023-06-27 13:34   좋아요 1 | URL
사무라이 역사물, 제가 아주
환장하는 장르인데 말이죠 ^^

무려 작년 가을에 나왔더라는.
지금이라도 만나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cyrus 2023-06-28 0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엄청 빨리 읽으셨군요! 독서 모임 선정 도서 아니었으면 저는 읽다가 덮었을 거예요 ㅋㅋㅋㅋㅋ 완독하는 데 성공했는데 서평을 어떻게 쓸지 모르겠더라고요.. ^^;;

레삭매냐 2023-06-28 10:42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
제가 좋아하는 장르의 책이라
후딱 읽었네요.

그동안 만난 <도쿠가와 이에
야스>와 <오다 노부나가>
등 다양한 센고쿠-아즈치모모
야마 시대 책들을 만난 게 도
움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싸이러스 브로에
게 쌩유 !

새파랑 2023-06-28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이 극찬하신 책이라니~! 무조건 읽어봐야겠군요~!!

레삭매냐 2023-06-28 13:13   좋아요 1 | URL
제가 좋아하는 역사물 장르라
그런지 파바박~ 그렇게 읽었
답니다.

재밌으니, 일독을 추천합니다.
감사합니다.

Forgettable. 2023-06-28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장바구니까지 갔다가 막판에 별로라는 리뷰 보고 도서관에서 빌려야겠다 해놓고는 까먹었는데.. 다시 관심이 가네요. 일단 스포 방지로 글은 중간까지 읽었고 책 읽고 다시 읽으러 올게요 ㅎㅎ

레삭매냐 2023-06-28 14:13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

전 지난 주말 독서모임에서
이 책에 대해 듣고는 아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구나
싶어서 바로 달려가서 사서
읽었답니다 ㅋㅋ

미스터리다 보니 최대한으로
스포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리뷰를 써보았답니다.

coolcat329 2023-06-30 16: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이 책 좋군요. 은근 좋다고 소문이 나있더라구요.

레삭매냐 2023-06-30 21:08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저는 미처 존재도
모르고 있다가 지난 주에 알게
되고 바로 사서 후딱 읽었네요.

오늘 다 읽은 <사무라이 윌리엄>
도 대단하네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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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정갈하게 하고서, 4년 전에 읽은 치누아 아체베 작가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다시 읽었다. 역시 좋은 작품은 다시 읽어도 좋았다.

 

이 소설이 작가의 모국어인 이보어로 쓰였는지 아니면 영어로 쓰였는지 모르겠지만, 영어로 만나게 되더라도 다른 작가의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을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소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주인공은 속편에 등장하는 우무오피아에서 발탁되어 영국 유학까지 마친 오비 오콩코의 할아버지 오콩코 어르신이다. 그 둘 사이에는 부족의 변절자로 취급받는 기독교 교리교사 은워예, 영국식 이름으로는 이삭 오콩코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작가는 변절자 이삭/은워예에 대한 소설도 구상했다고 하는데, 세상의 빛을 보지는 못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오콩코의 장남 은워예의 변절 스토리도 상당히 궁금했다.

 

항상 그렇듯, 서론이 길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오콩코는 18세의 나이에 우무오피아 최고의 씨름꾼으로 등극하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가를 일군 자수성가의 표상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용맹한 전사이자, 농부였다. 한량 같은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얌 종자나 밭뙈기라도 조금 남겨 주었다면, 어쩌면 오콩코의 시련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지 않았을까.

 

나이지이라 이보족의 전통을 상징하는 전사 오콩코는 이웃 부족과의 분쟁으로 소년 인질을 하나 받아 들이게 된다. 그의 이름은 이케메푸나. 가족과 떨어져 불안해 하던 이케메푸나는 오콩코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진 것 같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케메푸나의 비극은 어쩌면 엔딩에서 오콩코가 맞이하게 되는 비극의 전주곡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가 가지지 못했던 남자의 칭호와 상당한 양의 얌이 비축된 저장고(얌은 남자의 작물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3명의 아내 그리고 8명에 달하는 자녀들을 거느린 오콩코는 우무오피아의 지도가 되는 꿈을 꾼다. 하지만, 부족 장례식에서 오콩코가 고인의 자식을 총으로 쏴 죽이는 사고가 발생하고 전사의 모든 꿈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7년간의 유배 뒤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오콩코의 계획은 한낱 꿈이 되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탈식민주의가 본격화되는 시점에 출간된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혁명과 노동 착취로 자본을 축적하는데 성공하는데 성공한 서구 식민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상품을 팔기 위한 시장과 원료를 거의 무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식민지는 계속된 번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엇이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던 아프리카 대륙의 부족국가들은 좋은 멋잇감이었다. 우선 탐험대를 조직해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면서, 그곳의 정황을 파악했다. 그 다음에는 미개한 족속들을 개화시키고 복음의 빛을 전한다는 미명 아래 종교인들이 선발대로 현지에 파견했다. 기독교 신앙이 현지인들에게 너무나 낯선 무엇이었던 것처럼, 황제 비단뱀을 신으로 추앙하는 현지인들을 백인 선교사들이 어떻게 보았을까. 게다가 뱀은 기독교 규정하는 사탄의 대리인이자 인류에게 원죄를 제공한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었던가. 지금 한창 읽고 있는 <신의 화살>에서도 비슷한 결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아주 흥미롭다.

 

종교 다음 주자는 바로 교육이었다. 종교와 교육으로 도저히 개종시킬 수 없는 전통주의자들 대신 다음 세대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종교와 교육이 보다 부드러운 스타일의 정복 방식이었다면, 군대를 동원한 조직적 폭력은 자신들이 규정한 새로운 질서를 이식하기 위한 최종 무기였다. 백인 식민주의자들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현지인들을 복속시켰다. 백인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갈등을 빚다가(필연적 귀결이었다), 분노한 현지인들의 폭력에 희생당하기라도 한다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파견해서 부족 전체를 몰살시켜 버렸다. 아바메 부족 전멸 소식은 가공할만한 뉴스였다. 선진화된 백인들이 보유한 무기의 위력을 알게된 현지인들은 조용히 칼과 창을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은워예/이삭처럼 자신의 를 버리고 백인의 신에게 투항했다고 해서 바로 벼락을 맞아 죽거나 하는 일도 없지 않았나 말이다. 아니 오히려 백인과 협력하는 게, 삶의 도움에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이 자발적으로 개종자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오죽했으면 주술사가 자신의 여러 아들 중의 하나를 백인 교회에 집어넣었을까.

 

어쨌든 이렇게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예전 영광의 부활을 노리던 오콩코의 비극적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백인 치안판사들이 세운 질서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오콩코 개인은 물론이고 우무오피아 전체 부족의 생존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피 끓는 전사의 패기로 오콩코는 백인들이 지은 교회를 부수었다는 죄로 동료들과 감옥에 끌려가 머리가 밀리고 심지어 매질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오콩코의 선택은 백인들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그의 결정은 파국으로 귀결된다.

 

오콩코의 몰락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도래 때문에 발생한 개인사인 동시에, 엔딩에 등장하는 전언처럼 니제르강 하류 유역 원시 종족이 어떻게 평정되었가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서구 식민주의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선배 식민주의자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체득한 종합 기술을 우무오피아에도 비슷하게 도입했다. 부족간의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미개하다고 비난했지만, 그들 역시 전쟁을 통해 첨예한 대립을 해소하지 않았던가. 식민주의자들이 타인의 문명을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폭력적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4년 전에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만을 읽을 적에는 몰랐던 부분들이 이번에 다시 한 번 읽고 또 속편과 <신의 화살>까지 읽으면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 느낌이다. 읽을수록 상호 연관성 덕분에 더 재밌어진다고 해야 할까. 치누아 아체베가 구상하다만 한 세대에 걸친 변절자 이야기까지 추가되었다면 금상첨화였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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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6-19 1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품을 작가가 영어로 썼다고 알고 있어요.
작가의 이력이 아프리카와 영국 문화 두 군데에 다 속해있어 이것이 작가의 소설에 많이 투영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넘 좋게 치누아 아체베의 소설을 읽었어요^^

레삭매냐 2023-06-20 08:47   좋아요 1 | URL
아 그랬군요 :> 저도 문장이 간략해서
영어로 쓰인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나이지리아 작가가 쓴 영어책으로
영미문학이 계속해서 확장되는 느낌
이랄까요.

아체베 작가의 책을 잇달아 읽다 보
니 무언가 연결점이 보이게 되더라는.

새파랑 2023-06-19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나서 후속편들을 다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중고시장 염탐(?) 중인데 아직 물건이 안보이더라구요 ㅋ

얄라알라 2023-06-19 15:47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께서는 빌려보시기보다, 사서 보시는^^
염탐하시다가 기분 좋게 낚으시기를!

레삭매냐 2023-06-20 08:48   좋아요 1 | URL
저는 예전에 1권 읽고 있다가
2권은 램프의 요정에서 신속하
게 데려왔답니다. 기회가 있을
때 사자 !!!

인기가 있는지 잘 찾을 수가
없더라구요.

염탐 앤 겟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얄라알라 2023-06-19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몸을 정갈히 하고 읽으실 정도로 애정과 찬탄을 보내시는 작품!!!

Yam이 남성의 작물이라고 하는 점이 궁금하네요.
검색하니 좌르르....얌 비축된 저장고는 결국 남성성? 권위의 상징인가봅니다.

Evo어인지, ivo어인지를 잘 몰라도,이렇게 한국어판이 친절하게 나와 있다는 자체가 행복입니다^^

레삭매냐 2023-06-20 08:50   좋아요 0 | URL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극복과
동시에 이보족 특유의 가부장제
라는 시스템의 붕괴를 소설에서
다루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얌이야말로 신이 주신
최고의 작물이라는 걸 말하는
걸 보면, 아마 한국의 쌀과 비슷
하지 싶습니다.

어제 과한 노가다(?)의 후유증
으로 <신의 화살> 달리지 못했
는데, 독서 모임 이전까지 다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자목련 2023-06-20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책 제목,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제목이네요.

레삭매냐 2023-06-20 13:26   좋아요 0 | URL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예이츠
의 시에서 그리고 <더 이상 평안은 없다>
는 T.S. 엘리엇의 시에서 인용했다고 합
니다.

뭐랄까, 제목을 정하고 서사를 펼쳐
나가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물감 2023-06-21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비장하다는 인상이..
아프리카문학도 쉽지 않아보입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3-06-22 11:22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미지의 영역이다 보니
또 읽을 게 많더라는.

아체베가 구세대라면 아디치에
같은 작가는 신세대 갬성이라고
나 할까요.

읽을 책들이 너무 많아 걱정이
네요.

서니데이 2023-06-22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 문학은 잘 모르기도 하지만, 이름부터 많이 낯선 느낌이 들어요.
그래도 자주 소개되고 많이 번역되면 그만큼 알려지는 작가도 많아지겠지요.
잘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더운 하루 시원하게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07-09 22:09   좋아요 1 | URL
아이구 댓글이 늦었습니다 -
더위에 제가 그만 맛탱이가...

오늘은 비가 오락가락하더
라구요. 낼부터는 진짜 장마
가 시작되는 건가요.

감사합니다.

삽하나 2023-07-09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라니... 축하 파티할까요? +ㅅ +

레삭매냐 2023-07-10 13:31   좋아요 0 | URL
운이 좋았습니다 :>

이달에도 다시 한 번 영광
을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