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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키스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임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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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바로 감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프랑스 출신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신간 <시작은 키스>는 바야흐로 연애의 계절에 무시로 우리의 곁을 찾아온 달달구리한 연애소설이다. 리뷰의 제목을 “한 편의 컬트영화처럼”이라고 뽑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그 영화가 컬트영화인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극히 프랑스적인 감각의 영상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책의 표지에 나오는 키스를 암시하는 발돋움 사진도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시작은 키스>를 다 읽고 나서 바로 표지를 보면 무릎을 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소설표지 한 번 잘 뽑았다.

 

책을 읽는 동안 삶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으로 삶에서 지고의 행복을 찾지만,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타나토스의 순간 역시 피할 수가 없는 숙명이다. 다만 그것이 언제 우리를 찾아 오는가하는 시간의 문제일 뿐. 주인공 나탈리(작가의 이름에 대한 설명이 매우 흥미롭다)는 운명이 맺어준 짝인 프랑수와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몇 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아, 그들을 커플로 맺어준 운명의 매개체가 다름 아닌 살구 주스였다는 점 역시 특이하다. 모름지기 사랑이란 그런 거였구나.

 

그냥 그렇게 소설이 흘러갔다면 얼마나 싱거웠겠는가. 어느 휴일, 조깅을 하러 나선 프랑수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홀로 남겨진 젊은 아내 나탈리의 충격과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직 그런 어마어마한 상실의 경험을 해보지 않아서일까. 나탈 리가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순간, 소설의 전개상 긴장감의 고조를 위해 투입된 그녀의 보스이자 사장 샤를의 존재감이 치솟아 오른다. 나탈리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샤를의 아내를 지적하기 전까지, 몰랐던 이 뻔뻔한 남자의 스테이터스를 알아채고 분노하기에 이른다. 사랑을 가장한 육욕에 지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도 모를 일이다.

 

자, 이쯤에서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다. 그것도 우리의 주인공 나탈리의 기습적인 키스를 받으면서 말이다. 세계 모든 나라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는 사회복지의 천국 스웨덴 출신 마르퀴스가 바로 주인공이다. 우연을 가장한 숙명에 대해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도둑 키스로 <시작은 키스>의 전반전은 화려한 피날레를 내린다.

 

소설의 원제목인 “델리카테스”에 대해 이야기했던가. 프랑스어로 섬세한, 세련된, 허약한, 예민한 그리고 다루기 힘든 등등의 다양한 뜻을 가진 형용사 ‘델리카’의 여성명사형이라는 “델리카테스”야말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여성 나탈리와 왠지 모르게 영화 <파니 핑크>의 원제목을 연상시키는 남자 마르퀴스의 만남에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도 없을 것 같다. <시작의 키스> 곳곳에 등장하는 ‘델리카’한 상황에 독자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다시 나탈리와 마르퀴스의 만남으로 돌아가, 선수 같지 않고 오히려 어설퍼 보이는 마르퀴스의 매력이야말로 일 외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상실의 슬픔을 안은 채 하루하루를 살던 매력적인 커리어 우먼 나탈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어쩔 때는 독자의 예상대로 혹은 그렇지 않게 진행되면서 사랑의 왈츠를 완성한다. 남자 작가가 “미소의 왈츠” 같은 찰나의 미학이 듬뿍 담긴 어휘를 구사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는 친절한 “원주”도 소설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소설의 진행에서 특정한 사건의 빌미가 되는 순간을 포착해서 글로 형상화해낸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기법 역시 멋지다. ‘그렇지 연애소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자신의 경험을 기술하듯이 사랑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남자 마르퀴스의 심리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다. 첫 데이트 후에 기교 넘치는 말 대신, 솔직하게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상대방을 사로잡다니. 연애에서 때로는 현란한 언어의 기교 대신 정공이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점을 다비드 포앙키노스는 깨닫게 해준다. 두 번째 데이트를 앞두고 사랑의 환영에 빠져 전혀 준비를 하지 못해 허둥대는 마르퀴스의 모습에 절로 공감이 갔다. 역시 멋진 데이트는 어렵구나 하고.

 

연애하기 정말 좋은 계절이 왔다. 그리고 모두에게 아름다움을 향한 비자가 발부되었다. 선택은 모두의 몫이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시작은 키스>가 우리를 위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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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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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어떤 책과 만나게 되는 특별한 경로가 있을까? 전작주의를 하는 작가가 아닌 이상, 미지의 작가와 만나는 그런 기대와 즐거움 그리고 유명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오늘 읽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한 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미처 읽지 못했던 영국 출신의 저명한 작가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자, 영미문화권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는 최신 맨부커상 수상작이니 말이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크게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소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평범한 청년 토니 웹스터의 성장소설로 시작된다. 다양한 이야기 중에서 왜 하필 작가는 역사소설 시간을 이 경장편 소설의 시작으로 삼았을까? 주인공과 그 친구들의 짧은 소개가 끝나자마자 소설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파고든다. 우리 기억 속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빚어내는 확신이라고 했던가. 얼핏 보기에 성장소설의 외피를 두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어느 순간 미스터리로 변형을 하는 순간, 초반의 이 문장은 결말에 대한 강렬한 예고편으로 다가온다.

 

청년의 이야기에 러브라인이 빠질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화자 토니는 평범하게 살다가 대학에 진학하고, 베로니카를 만난다. 그리고 예의 만남이 그의 삶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다. 별 의미 없었던 풋사랑이 추억이 40년 뒤에 자신의 삶에 다시 개입하게 되는 순간이 참 인상적이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보통의 삶을 산 자신과는 달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을 등진 유수의 대학 출신 에이드리언은 그래서 더 대조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절친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전 애인 베로니카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분명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플래시백 구성으로 시작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두 번째 장에서 비로소 본 궤도에 오른다. 20년간의 결혼생활을 한 마거릿과 토니는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다. 그들의 관계도 지극히 서구적 관계의 한 양태가 아닐까? 은퇴 후의 삶을 영위하던 토니에게 어느 날 전 여자 친구였던 베로니카의 어머니 포드 부인이 남긴 유언장이 날아들면서 우리의 화자는 혼란에 빠진다. 잊을 수 없는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 때문이었을까, 자신보다 언제나 한 수 위였던 베로니카를 어렵게 수배해서 만나면서 소설의 결말에 대한 호기심은 증폭된다. 40년에 걸친 러브 스토리가 어떻게 끝날까 궁금해진다. 클리셰를 훌쩍 뛰어넘어, 추리소설 뺨치는 설정과 반전은 보너스다.

 

평소와는 달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이 책 저 책 읽다 보니 집중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주인공 웹스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서, 쉽게 읽으리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쩌면 아직 도달해 보지 못한 삶의 어느 지점 혹은 경험해 보지 못한 관계에 대한 생래적 거부감 때문이었을까. 내러티브에 대한 이해는 수긍할 만하지만, 소설에 대한 개인적 체화의 부족으로 인한 만족도는 현저하게 떨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줄리언 반스라는 작가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이었을까.

 

첫 만남에 대한 기대가 아무래도 컸던 모양이다. 달랑 이 작품으로 줄리언 반스의 문학세계를 판단하는 건 아무래도 섣부른 판단일 것 같다. 그전에 사둔 다른 책에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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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서권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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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을 즐겨 읽는 편이다. 팩션 장르에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역사와 픽션이라는 두 가지 소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서권 작가의 팩션 <시골무사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국운이 쇠해가던 1380년 실제로 있었던 황산대첩을 배경으로 한다. 일본 남북조 시대 걸출한 무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1만 명에 달하는 정규 무장을 갖춘 왜군의 침략 앞에 고려 조정은 가별치라 불리는 이성계 사병집단을 주축으로 한 토벌군을 파견한다. 왜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황산대첩의 서막이 그렇게 오른다.

 

소설은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우는 상승장군으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노장 이성계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춘다. 소설을 읽다 보니 자연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다. 체찰사로 고려 정규군을 이끄는 친원주의자이자 정적으로 등장하는 변안열, 그를 따르는 고려 최고의 문인이자 굴지의 외교관으로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던 포은 정몽주 그리고 훗날 고려를 대신해서 들어선 조선의 실제적인 설계자였던 삼봉 정도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한 문제적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이성계를 위시한 이 정도가 주인공이라면, 이성계를 언니라 부르며 항상 전선의 최전방을 맡았던 퉁두란(이지란)과 처명, 황산대첩 초기 왜구의 진공을 막는데 역시 빼어난 공을 세웠던 배극렴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조연이다. 다만, 이성계와 정도전의 실제 만남을 조금 앞당긴 작가의 조정이 마음에 걸렸다. 가능하면 역사적 사실은 유지했으면 좋았겠으련만.

 

고려군의 진용이 이렇다면, 상대방은 어떨까? 스러져 가는 남조를 살리기 위해 고려를 기반으로 새로운 전역을 만들기 위해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동안의 가미쇼(神將) 아지발도와 그의 탁월한 군사 슈겐부츠가 악역을 자처하고 나선다. 여말 약탈과 방화, 살상을 그야말로 밥 먹듯이 저지른 왜구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동시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백성을 지켜내지 못한 무능한 고려 조정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국가의 영이 바로 서고, 외적에 대한 방비가 철통같았다면 어찌 외적들이 고려를 침략할 생각을 했겠는가 말이다.

 

무신 집권기를 거쳐, 친원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왕권의 추락은 불가피했고 권문세족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은 토지겸병과 백서에 대한 수탈을 통해 사적 이익의 추구에만 관심이 있었다. 소설에서는 궁성이 있는 개경 방어에만 신경을 쓰고, 국가의 남부를 침입한 왜적 소탕에 국가 정예군을 동원하지 않는 중앙정부를 이성계의 입을 빌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고, 결국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국가를 세운 이성계를 두둔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새로운 시대의 어쩔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었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과연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회의적이다. 어쩌면 포은의 체제 내의 개혁에 더 호감이 가는 건 인지상정일지도 모르겠다.

 

이성계와 아지발도 간의 물리적 사투를 중심으로 슈겐부츠와 삼봉 두 군사(軍師)들의 대결로 대변되는 정보전도 육탄전 못지않게 관심을 끈다. 세작을 통해 쉴 새 없이 적의 동태를 살피고, 역공작으로 적을 교란시키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삼국지>급 포스를 자랑한다. 중앙귀족을 대변하는 체찰사 변안열과 가별치 부대장으로 변방의 시골무사에서 거병해서 국가 최고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는 이성계의 갈등 구조 역시 소설의 재미를 더한다. 소설 초반에서 엄청난 양의 풍등을 만드는 삼봉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모원려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못내 궁금했었는데 최후의 결전을 위한 것이었다는 설정도 자못 흥미로웠다. 예의 장관은 어쩔 수 없이 영화 <삼국지>에서 비슷한 장면을 떠올렸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는 단역으로 잠깐 등장하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는 바로 편조 신돈이었다. 그는 공민왕 시절 전격적으로 왕에게 발탁되어, 말 그대로 개혁의 최전선에서 백성을 위해 토지제도와 노비제도를 혁파하려다가 자신들의 기득권 박탈에 위기를 느낀 권문세족의 총반격으로 결국 주살되고 만 비운의 혁명가였다. 역사에 가정은 소용없다지만, 백성에게는 성인 그리고 귀족들에게는 요승으로 불리던 신돈의 혁명적 개혁이 성공했다면 이성계와 신흥사대부의 왕조교체 역성혁명은 그 당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시골무사 이성계>에서는 그리는 황산대첩은 북쪽 변방 출신의 일개 무장 이성계가 압도적인 왜적을 쳐부수고, 바야흐로 거물로 성장하게 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그 다음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성계 그룹으로 대표되는 무인집단과 신흥사대부로 상징되는 문인집단이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은퇴한 상왕 삼총사가 노병은 죽지 않는다라는 방식의 에필로그로 끝을 맺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누구나 개혁과 혁신을 외쳐 대지만, 현실의 변화는 여전히 요원하다는 상념에 책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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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코미디
윌리엄 사로얀 지음, 정회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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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윌리엄 사로얀, 솔직히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그의 글보다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건, 미국 출신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퓰리처상을 거부했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그럴 수도 있나? 남들은 받지 못해서 안달하는 그런 상을 거부하다니, 도대체 무슨 배짱일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어쩔 수 없이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희극>이 연상되는 윌리엄 사로얀의 <휴먼 코미디>가 나에게 준 첫인상이었다.

 

모두 39개의 챕터로 구성된 <휴먼 코미디>는 담백하고 술술 읽힌다. 제목에 코미디가 들어가 있다고 절대 이 책을 유머 책으로 오해하시지 마라. 물론, 입가를 스치우는 그런 유머도 없지 않지만 이 책은 대공황에서 충격에서 벗어나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40년대 캘리포니아의 어느 작은 마을 이타카를 배경으로 한 잔잔한 인간 드라마다.

 

<휴먼 코미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은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세상에 맞서는 매콜리 가문의 아이들이다. 장남 마커스는 당시 여느 젊은이들처럼 군에 입대해서 전쟁터에 투입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 매슈 매콜리의 부재 가운데, 올해 14살 먹은 호머는 소년 가장으로 최근에 취직한 전신국에서 전보 배달원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일을 시작한 소년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참 가혹하다. 어쩌면 윌리엄 사로얀은 처음부터 전혀 해피엔딩스럽지 않은 결말 부분에 대한 세팅을 먼저 구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네 살배기 꼬마 율리시스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너무 많다.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이 꼬마는 그 덕분에 짐승 잡는 덫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리기도 하고, 살구 서리를 하러 헨더슨 씨네를 습격한 패거리에 가담했다가 신문팔이 소년 오거스트와 줄행랑을 놓기도 한다. 집안이 가난해서 신문팔이 혹은 전보 배달원이라는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일을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에 불타는 소년들의 모습에서 지금의 미국에서는 이제 찾아볼 수 없는 덕목이 된 청교도적 직업윤리(work ethic)이 살아 숨 쉬던 순수의 시대를 읽는 것 같은 느낌에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윌리엄 사로얀은 이 담백한 소설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던 소년의 시선에서 서술한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를 억지로 밸리 챔피언으로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소위 인종의 도가니라는 미국에서 학생에게 더러운 이탈리아 녀석라는 폭언을 내뱉는 육상 코치의 모습은 어째 낯설지가 않다. 언젠가 어린이를 돕는 꿈을 이루겠다는 순수소년 호머가 가진 이상과 충돌하는 현실세계의 비정한 이면이 증폭된다.

 

<휴먼 코미디>에 녹아 있는 다양한 신화의 흔적을 쫓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쏠쏠한 재미중의 하나다. 오디세우스(율리시스)의 험난한 귀향길의 종착점은 바로 고향 이타카다.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으로 탈바꿈한 캘리포니아판 이타카드림은 마커스의 전우 토비 조지에 의해 완성된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품위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던 권총강도 청년은 전신국에서 만난 톰 스팽글러 때문에 구원에 이른다. 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가 아니던가.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고민하던 마커스가 전쟁의 본질에 대해 들려준 놀라운 성찰은 그 어떤 반전 메시지보다도 강렬하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윌리엄 사로얀의 페르소나로 등장하는 식품점 주인장 아라 씨의 성공에 대한 강박과 미국에서의 풍요로운 삶이 부딪히는 긴장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평범해 보이는 성장소설이라는 외피를 두른 윌리엄 사로얀의 소설이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담보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쩌면 이제 막 세상에 도착한 호머 매콜리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란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갈등을 내려놓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윌리엄 사로얀의 <휴먼 코미디>는 그래서 나에게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왔나 보다. 참 아름다운 소설이다.

 

저는 어른이 되면 절대로 울 일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인간은 어른이 되었을 때 비로소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때 비로소 세상에 눈을 뜨게 되니까요.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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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4-23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인용하신 구절 참.. 좋네요. 꼭 <자기 앞의 생>의 소년이 말하는 것 같아요. 리뷰 오랜만에 올리시네요. 그래도 꾸준히 올리시는 걸 보면서 또 새삼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전 아직 하나도 안 쓰고 있거든요 ㅠ ㅠ

레삭매냐 2012-04-23 12:48   좋아요 1 | URL
책은 계속해서 읽고 있는데 미처 리뷰가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름 슬럼프라고나 할까요?

지난 주에 책을 네 권이나 읽었는데 쓴 리뷰는 하나도 없네요 ㅠ

비로그인 2012-04-23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헤르메스님, 리뷰 쓰실 때 그냥 단번에 쓰세요? 저는 요새 리뷰를 어떻게 써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자꾸 써야될 말을 짜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솔직히 쓰기'를 제일 위에 놓고 쓰려고 하고 있는데 음, 잘 모르겠네요. 글을 쓰게 만드는 어떤 느낌을 자주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걸 감성이라고 하나요? 아무튼 박민규 말처럼 다감(多感)하고 싶네요!

레삭매냐 2012-04-30 08:54   좋아요 0 | URL
저는 일단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마무리가 엉성하더라도 한 번에
다 쓰고자 하는 편입니다.
마치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쓰다가 마무리짓지 못하고 나중에 다
시 쓰려고 하면 어째 주저하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보통 책 읽으면서 리뷰에 담고 싶은 말들은 메모를 한답
니다. 자주 잊어 버리니까요.
 
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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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책을 말로만 듣다가 처음 읽었다. 현대 이스라엘 출신 작가의 글은 처음이지 싶다. 아모스 오즈의 이 책을 술에 비유하면 보드카 정도에 해당하지 않을까. 무색무취의 무미건조하지만, 일단 한 번 들이키고 나면 목울대를 울리게 되는 그런 찡한 맛이라고나 할까.

 

사실 책은 오래 전에 읽었는데 리뷰가 늦어졌다. 보통 책을 읽자마자 리뷰를 쓰곤 하는 편인데 웬일인지 이 책에는 해당이 되지 않았나 보다. 그럴 경우에 보통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뇌리에 인상적으로 남은 이야기들은 거의 각인의 수준이 되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은 몽땅 다 휘발되어 버린다는.

 

사실 멀리 떨어진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에 대해 관심을 갖기란 쉽지 않다. 건국 이래 팔레스타인과 주변 아랍국가들과의 끊이지 않는 분쟁으로 폭력이 일상화된 경찰국가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텔일란이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했다고 하지만 너무 현실적이지 않는 공간 배치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 아랍청년, 이제는 다 커서 유년의 흔적이 없어진 조카를 기다리는 노처녀 의사 선생님,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고 노래모임을 갖는 가운데 비극의 현장을 직접 화자 등 다양한 삶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아모스 오즈가 꿈꾸는 이상향에 대한 작가적 상상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 군의 불도저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터전을 깔아뭉개는 지극히 초현실적인 작금의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자꾸만 이스라엘 국가 폭력에 대한 분노가 아모스 오즈의 작품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다.

 

<땅 파기>는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이 얼마나 그들의 땅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로마시대 디아스포라 이래, 처음으로 자신들의 조국을 가지게 된 유대민족의 땅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파 정치인 출신 아버지는 유대인 대 반유대주의자의 대결이라는 구도로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편이 아니면 죄다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아직까지도 팔레스타인에 평화정착을 가로 막는 제일의 장애물이 아닐까. 전쟁과 폭력으로 어렵게 얻은 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그네들의 정신적 압박이 한밤중의 환청으로 혹은 환상으로 그렇게 다가오는 건 아닌지. 잠재된 두려움의 발현이 얼마나 인간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지 살짝 엿볼 수가 있었다.

 

<길을 잃다>에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에서는 현재진행형인 홀로코스트와 아슬아슬한 로맨스의 찰나를 짚어낸다. 신자유주의 열풍에서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인 효율과 경제성이라는 미명은 옛것을 보존하고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는 보수적 가치조차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 버린다. 부동산업자는 저명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저자가 유산으로 남긴 집을 매입해서 허물고 새로운 집을 짓고 싶어한다. 이제 반세기 전의 과거는 뒤로 하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비유일까. 이런 유물론적 접근은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이스라엘 민족이 당면한 문제의 근원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폐허에서 만난 매력적인 고인의 딸에게 화자가 느끼는 욕망과 남매간의 우애가 뒤섞인 감정에 대한 표현은 현대 이스라엘 정치적 갈등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에 비하면 <낯선 사람들>은 청소년기에 연상의 여인에게 느꼈던 소년의 감정을 절절하게 표현해냈다. 열일곱 살 난 소년이 어떻게 해서 삼십대 여자에게 빠진 걸까. 소년이 느끼는 동정심과 사랑 사이의 감정을 달과 웅덩이에 비친 달그림자 만큼이나 거리가 있다고 아모스 오즈는 명징하게 풀어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꼬마 코비 에즈라는 포기할 줄 모르고, 성숙한 여인에게 당혹스러운 질문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아모스 오즈가 그리는 <시골 생활 풍경>에는 보통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클라이맥스와 긴장을 수반한 흥분이 없다. 단지 한 폭의 단조로운 수채화를 그리는 듯한 노대가의 익숙한 붓놀림이 있을 뿐이다. 고희를 훌쩍 넘긴 작가가 시전하는 삶의 스펙트럼은 그 깊이를 알 수 정도로 넉넉하다. 어떤 순간에는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가도 나중에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면 그게 그래서였던가 하는 깨달음에 도달하기도 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냉소나 빈정거림 대신 호의를 품은 작가에게 그만 무장해제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게 바로 내 독서 스타일과 대척점에 서 있는 작가의 글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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