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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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슬럼프에 빠졌다. 지난달에 숱한 SF소설들을 읽은 후유증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 저 책 읽기 시작했지만 미처 끝내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재밌고, 속도감나는 그런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주에 주워온 책장에 스택한 책 중에 커트 보네거트의 <마더 나이트>가 눈에 띄었다. 그렇지 바로 이 책이야. 개인적으로 나는 커트 보네거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제5도살장>보다도 이 책을 더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오, 이럴 수가! 내가 커트 보네거트 작품 중에 단연 최고로 꼽는 <마더 나이트>가 이미 20년도 전(1996년 제작)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바로 유투브로 트레일러를 검색해 보았다. 닉 놀티가 주인공 하워드 W. 캠벨 주니어 역할을 맡아 열연을 보여 주었다. 반드시 구해서 봐야겠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 미국 출신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의 라디오 선전원으로 직속상관인 선전상 파울 괴벨스 박사가 경탄할 정도로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베를린 경찰총수의 딸 헬가 노트와 결혼해서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과 유태인 증오가(Jew Hater)로서 나치 프로파간다의 첨병이었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놀라운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미국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이다. 이거 그야말로 놀랄 노자군! 문제는 프랭크 위르타넨과 로젠펠트 대통령 말고는 그가 미국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전쟁 중에 사랑하는 아내 헬가를 크림반도 전투에서 잃고, 가증스러운 전범 신세가 되어 쫓기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푸른 요정 대모를 자처하는 자신의 상관 프랭크 위르타넨의 도움으로 뉴욕에 잠입해서 커다란 불편함 없이 살아왔다. 돌아가신 부모가 남겨 주신 유산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풍족하게 살면서. 한때 그의 동료들이었던 나치 전범들이 주로 남미 각국에서 신생국 이스라엘 모사드의 추적을 받으며 언제 납치되어 이스라엘로 송환될 걱정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커트 보네거트가 구사하는 블랙유머는 그렇게 단순하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아내 헬가가 십수년 전의 외모 그대로 나타나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를 놀라게 만든다. 자신이 나치 선전원 시절에 발표한 소중한 원고들이 가득들은 트렁크까지 선물로 가지고 말이다. 자신이 정말 진실한 친구라고 믿는 체스 파트너이자 화가 조지 크래프트의 정체는 소련 첩보원 이오나 포타포프 대령이란다.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의 주변에는 전쟁 중에 그가 한 행동이야말로 정말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부추기는 파시스트 전우들이 득시글거린다. 유색인종과 유태인이 득세해서 점점 아리안 민족의 도덕성이 타락한다며 걱정하는 파시스트 일당은 미국의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철위대를 만들어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에게 연설까지 맡길 정도다. 블랙유머로 다루어지긴 했지만, 소설 <마더 나이트>가 발표된 1961년에도 대략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있었다는 작가의 이야기에 헛웃음이 펑펑 터져나왔다. 하긴 2018년에도 여전히 기승을 벌이고 있는 가짜뉴스 덕분에 오늘 하루도 쓴웃음이 가시지 않으니.

 

소설이 쓰인 시점에서 16년 밖에 지나지 않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생각에서도 작가는 양가적인 입장을 모두 보여준다. 하워드 W. 캠벨 주니어가 은둔한 나치 전범이라는 사실을 알려진 뒤, 그가 살던 아파트는 엉망진창이 된다. 물리적인 테러를 당한 그를 보살펴 주는 사람이 바로 어린 시절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닥터 엡스타인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인간이 처할 수밖에 없는 삶의 역설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닥터 엡스타인은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를 생각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우슈비츠에서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다. 자신을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은 나치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증오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그 점이야말로 정말 커트 보네거트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한편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자신이 전쟁 중에 한 행동 때문인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이들에게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거의 도인이 된 모양이다.

 

죽음에서 부활해서 당당하게 나타난 아내 헬가(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녀는 처제 레지 노트였다)가 죽고, 크래프트 역시 연방교도소로 가면서 그의 선택지는 선배 아돌프 아이히만이 잡혀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으로 좁혀진다. 물론 그 와중에 냉전의 와중에, 소련 첩보원의 공작으로 전쟁 중에 그렇게 파렴치한 행동을 한 나치 전범을 미국이 숨겨 두고 있다라는 프로파간다에 이용될 뻔한 위기도 맞게 된다. 물론 푸른 요정 대모의 신속한 개입으로 모스크바로 납치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때 이 정도면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겉으로 드러난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의 모습은 전형적인 신념에 찬 나치 전범의 그것과 다를 게 전혀 없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수많은 나치 전범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채로 사형당했다. 우스꽝스러운 설정이긴 하지만,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전쟁 기간 동안 베를린에서 나치 선전의 나팔수로 활약한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진짜 조국 미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에 지나지 않았노라고 강변하면서,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구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나치 친위대(SS:Schutzstaffel)에 복무한 수많은 독일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후자가 총칼로 나치가 점령한 지역에서 숱한 학살과 만행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수행했다면,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쌍번개(SS)를 가볍게 타이핑할 수 있게 고안된 타이프라이터로 어느 누구도 그가 나치 전범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 선전전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전쟁에 직접 참가해서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 폭격을 체험하면서, 선지자 커트 보네거트는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극단적 폭력의 와중에 악과 증오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명의 전쟁포로 출신 청년은 훗날 소설가로 변신해서, 블랙유머로 무장한 시니컬한 반전 메시지를 창조해냈다. <마더 나이트>는 정말 재밌으면서도, 유쾌하고 동시에 진지한 사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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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13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외출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어요. 읽어야 할 책들은 너무 많은데, 책이 눈에 안 들어오네요.. ^^

레삭매냐 2018-03-13 14:25   좋아요 0 | URL
날이 너무 좋더라구요 -
읽을 책들은 정말 많은데 생각처럼 진도가 쫙쫙
나가지 않아서 예전에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네요.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