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페이션트 에디션 D(desire) 14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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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이십 년만에 마이클 온다치 작가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읽었다. 사실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주인공 알마시 백작 역의 랄프 피니스가 화상을 입고 붕대 감은 모습만이 기억났다. 좀 더 기억을 되살려 보니 북 아프리카 사막에서 죽어가는 연인 캐서린을 안고 동굴로 가던 장면도 떠올랐다. 물론 원작 소설을 읽어 보니, 영화하고는 많이 달랐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친 김에 영화도 다시 보고 있는 중이다. 워낙 긴 영화라 3일에 걸쳐 보고 있다. 그전에 먼저 소설을 다 읽었다.

 

스리랑카 출신 캐나다 시인 마이클 온다치가 1992년에 발표한 세 번째 소설로 맨부커상에 빛나는 작품이다. 영화는 4년 뒤에 고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연출로 영화화되었고, 아카데미상을 무려 9개나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소설은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로 지독한 화상을 입고 거의 빈사의 상태에서 베두인 족에게 발견된 ‘영국인 환자’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한다. 마이클 온다치는 실제했던 헝가리 탐험가 알마시라는 인물에게서 주인공 캐릭터의 모티프를 따왔다고 한다.

 

확실히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면서 보니 영화보다 소설이 담아낸 이야기들이 더 풍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영화는 소설에서 다룰 수 없는 비주얼적인 측면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헝가리 출신이지만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삶의 나침반으로 삼아 사막을 누비는 자유인 라디슬라우 드 알마시, 사랑하는 이들을 전쟁에서 잃은 트라우마를 가진 간호병 해나, 도둑이자 스파이로 엄지손가락을 잃고 모르핀 중독에 빠진 도둑 데이비드 카라바지오 그리고 킵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공병 출신 폭탄 처리전문가 시크 교도 키르팔 싱이 북쪽으로 퇴각하는 독일군과의 전투가 한창인 이탈리아의 파괴된 빌라 산 지롤라모 수도원에 모이면서 시공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에서는 보다 극적으로 해나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전장의 동료 잔 그리고 연인을 전쟁에서 잃은 것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상실한 스무살 내기 해나는 역시 과거의 기억과 이름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영국인 환자의 치료에 모든 것을 건다. 어쩌면 빌라 산 지롤라모 수도원은 상실의 시대를 직면한 이들을 위한 치유의 공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국인 환자 알마시의 지혜의 숲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거의 모든 문학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 영화에서는 음악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가 있다는 것을 카라바지오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베니 굿맨이 연주한 <왱 왱 블루스>를 맞추는 것을 보고 카라바지오는 감탄한다.

 

두 손가락을 잃은 카라바지오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보다 영화에서 더 극적으로 등장한다. “무스”라는 암호명으로 암약하던 영국 스파이였던 카라바지오는 치열한 격전 끝에 영국군의 북 아프리카 중요기지였던 토브룩을 함락한 롬멜 아프리카 군단의 포로가 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두 엄지 손가락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카라바지오 역할의 윌렘 데포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소설과 달리 알마시가 연인 캐서린을 살리기 위해 독일군에게 넘긴 지도에 대한 정보 때문에 자신이 엄지를 잃게 되었다는 설정이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서 책의 독자와는 다른 타겟 오디언스를 상대로 한 각색에 공감할 수가 있었다.

 

다른 주인공들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킵에 대해서 영화에서는 아쉽게도 잘 다루어주지 않은 느낌이다. 소설에서 터번을 두른 시크 교도 출신 싱은 펀잡 출신으로 독일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전쟁에 왜 그는 목숨을 걸게 된 걸까. 게다가 그에게 아버지 같았던 스승 서퍽 경도 폭발물 처리 과정에서 동료들과 함께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일손이 부족한 전쟁 와중에 식민 모국 영국인들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만, 그들과의 동화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킵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들은 영국과의 공중전 당시와는 다르게 안좋은 방향으로 너무 잘 진화해서 퇴각하는 가운데 창의력 넘치는 부비트랩과 각종 지뢰로 북진하는 연합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늦추는데 성공했다. 사실 처칠이 구상한 유럽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공략해서 서진하는 스탈린의 공산주의 위성국가 건설을 최대한 막아 보겠다는 전략은 독일의 이탈리아 전선 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이 삼중 방어선으로 막아낸, 특히 고딕라인 앞의 지연전술로 무산되어 버렸다.

 

자, 이제 알마시와 캐서린의 본격적인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해 볼 차례인가. 영화에서는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 보이지 않는데 자그마치 15살 차이나 되는 남녀가 그야말로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런 장면 역시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영화에 높은 평가점을 주고 싶다. 소설에서는 보다 플라토닉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앤소니 밍겔라 감독은 처음의 냉랭한 사이에서 열정으로 옮아가는 알마시의 캐서린에 대한 관계를 훌륭하게 연출해냈다.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였던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사막의 캐러밴에서 탐험가들이 시구 대결을 하고,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연애 이야기를 낭송하면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연애의 감정 표현은 정말 대단했다. 소설과 영화의 장면들을 대조해 보는 재미는 정말 대단했다. 캐서린의 남편 제프리 클리버튼 역을 30대의 콜린 퍼스가 맡았었다는 점도 미처 몰랐었다. 중년 넘어서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배우의 청년 시절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알마시, 해나, 카라바지오와 킵이 휘말린 전쟁 역시 그들의 삶을 앗아가 버렸다. 폐허가 되어 버린 성과 속의 교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원에서 그들은 치유의 시간을 맞는다. 킵이 해나의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아 준비한 45개의 달팽이 집에서 타오르는 불빛에 대한 묘사는 정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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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06 1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붉은색 표지의 구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땐 책이 절판된 상태였어요. 구판과 개정판이 같은 역자인데 번역이 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귀찮은 일이지만, 개정판을 읽게 되면 구판과 비교해봐야겠어요. ^^

레삭매냐 2018-03-06 13:58   좋아요 1 | URL
저도 신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구간이
있었네요. 역자도 같은 것으로 볼 적에 아마
구간과 신간이 거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새로 나온 <싱글맨>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번역하신 분이 군에 관한 지식이 없으
신지 영국 제8군을 제8군대로 번역을 하셨더라구요.

[그장소] 2018-03-06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말고 책이 있다는 걸 저도 안지 얼마 안됐어요 . 한번 봐야지하고 장바구니에 담아놨는데 레삭매냐 님은 읽으셨군요 ? 이 영화 제 인생영화인데.. 넘 좋아하고요 . 랄프 파인즈도 , 줄리엣트 비노쉬도 넘 넘 좋아하고요 . 글로 만나니 더 반갑네요!^^

레삭매냐 2018-03-06 13:59   좋아요 1 | URL
아마 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책은 책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좋았습니다.

영화는 정말 오랜 만에 다시 보았는데,
새롭고 멋졌습니다 -

달팽이 집 촛불과 이탈리아 성당에서 해나
와 킵이 조명탄을 켜고 벽화를 보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그장소] 2018-03-06 14:58   좋아요 1 | URL
빈병을 굴려가며 진실게임을 하던 장면, 동굴에서 혼자 그림과 일기를 쓰던 그녀도 멋지고 애잔했죠.
전쟁이 그 모든 것들의 배경이란게 슬프지만 그마저도 좋았어요 . 아름다운 것들이 파괴되는 동안 남는게 뭔지 사라지는게 뭔지 넘 잘 보여주고요 .